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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해서 지존까지-695화 (695/741)

695화

최태호와의 이야기를 끝내고 도진은 평범하게 세상에 녹아들어 그 일부로 프로니모스 사립 학교를 걸었다.

감추는 것이 아닌 드러내어 일부가 됨으로써 인지의 바깥을 걷는 도진을 누구도 인식하지 못했다.

오전의 학교에는 어수선한 분위기가 깔려 있었다.

프로니모스 사립 학교의 학생들 중에는 서부 무림에서 통학하는 아이들도 적지 않았으니 그랬다.

'쉬운 문제' 하나를 해결했을 뿐 앞으로 많은 것이 변할 것이고 그 과정에서 풀어야 할 어려운 문제들이 있지만, 도진은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주서린 여황. "문제 해결을 위하여 언제든지, 얼마든지 대화하겠다."]

최태호와 같은 미래가 더 기대되는 아이가 있었고 범죄자들을 상대로도 신념과 약속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이도 있었다.

그런 이들과 대화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는 위서린과 같은 통치자도 있었으니까.

여황으로서의 책임감에 짓눌려 있던 위서린은 시야가 흐려져 있었다.

이를테면 억지로, 정신적으로도 짓눌린 채 운동을 하던 이와 같은 상황이었다.

한계가 오지 않았으나 육체는 무겁고 호흡은 가쁘며 정신부터가 지쳐 포기한 상태.

허나 도진에 의해 심기일전하고 의욕을 되찾았으니 그 행보에는 힘이 담겨 거침이 없고 긍정적이다.

도진은 그저 믿고 맡긴 채 지켜보면 되었다.

그러니까, 지금은 다른 해야 할 일을 하러 가는 길이다.

"도진아!"

"소담아."

도시 중앙의 호수 광장.

도진은 은은하지만 눈을 뗄 수 없는 아름다움을 두른 소담을 마주하였다.

기다란 머리카락을 공들여 펌한 헤어스타일이 단아함에 특별함을 더하여 특히나 시선을 끌었다.

하얀 셔츠에 청바지, 그 위에 옥색의 기다란 케이프를 둘러 사막의 뜨거운 태양을 막으면서 포인트를 주었다.

얼굴을 전혀 가리지 않아 주변의 시선을 모조리 모으고 있었는데 그 옆에 또 한 사람이 있었으니.

"오래 기다렸어?"

"아뇨. 저희도 방금 왔어요."

소담이 팔짱을 낀 채 찰싹 붙어 있는 서늘한 공기의 상미였다.

'서늘한 공기'는 표현이 아니라 실제였는데 한천검공의 한기를 띠는 내기(內氣)가 외부에까지 영향을 주고 있는 것이다.

완벽히 갈무리하지 않고 일부러 조금 흘림으로써 주변의 과한 열기를 몰아내고 있었다.

그 서늘함에 어울리는 새파란 케이프를 두른 모습이 소담의 곁에 있음에도 전혀 그 존재감이 흐려지지 않는 특별함을 만들어낸다.

"자. 음료수."

"감사합니다, 오빠."

"잘 마실게."

팔짱을 푼 소담과 상미가 자연스럽게 도진의 양옆에 서서 건네는 음료수를 받아들었다.

사이좋게 손에 하나씩 음료를 들고 호수 공원을 나와 세 사람이 방문한 건 다름 아닌 백화점이었다.

자주는 아니지만 도진은 소담과 상미와 이렇게 백화점에 방문하여 옷이나 신발 같은 걸 사곤 했다.

하지만 오늘의 방문은 그들의 물건을 사기 위한 게 아니었으니.

"유아용품은 6층이랑 7층이네."

바로 오대용과 주정아를 축하하기 위한 선물을 사러 온 것이었다.

"……."

"나, 이런 곳은 처음 와봤어."

말없이 감탄하는 상미와 여기저기 시선을 주는 소담이다.

도진이 피식 웃으며 나도, 하고 답했다.

"인터넷에서 보긴 했는데 정말로 크네요."

"그러게."

쉬르네폴리아에서는 유아용품 업계가 성업하고 있었다.

확장하는 도시의 생명력 못지 않게 도시에 정착하여 살아가는 이들 사이에서 새 생명이 탄생하는 일 또한 많았기 때문이다.

아예 방문 선물로 유아용품을 선물하는 문화가 있을 정도였으니 그만큼 유아용품 관련 매장도 많아진 거다.

베이지색을 바탕으로 하여 파스텔톤의 상품이 많이 보였다.

"와, 진짜 귀엽다. 이거 봐."

"엄청 작네."

"응. 이런 거 신고 걷는단 말이지?"

새하얀 볼을 옅게 물들인 채 소담이 아기 신발에 손가락을 넣어 본다.

그 옆에서 상미는 아기 옷에 자기 손을 대면서 크기에 눈동자를 빛내고 있다.

도진이 스윽 웃으며 말했다.

"아기도 귀엽지만 지금은 너희가 더 귀여운 거 같은데."

"헤헤."

소담이 그 말에 웃고선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린다.

"음, 옷이나 신발 같은 건…… 아직 남자 아이인지 여자 아이인지 모르지?"

"응. 아직은 모른대."

일단 선물을 사러 왔으니 뭘 살지 골라야 하는데 옷이나 신발 같은 건 아직 태어날 아기의 성별을 몰라 애매했다.

"젖병 같은 거 어때요? 이런 거."

상미가 병 하나를 가져와 말했다.

정확히는 '빨대컵'이라고 돼 있었는데 확실히 이거라면 성별과 관련없이 쓸 수 있는 물건이었다.

"괜찮네."

그 외에도 흔히 쪽쪽이라 부르는 것부터 해서 과즙망, 치발기 등등 이름부터가 낯선 것들까지 그야말로 백화점이라 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많은 용품들을 보았고 직원의 추천으로 그중 몇 개를 구매하여 예쁘게 선물 포장했다.

사족이지만. 주정아의 임신이 이미 크게 알려졌기에 도진과 소담, 상미의 방문에 관한 오해와 해프닝은 없었다.

"좋은 구경한 거 같아."

"그래?"

"응."

백화점을 나서는 소담과 상미는 은은하게 웃는 얼굴이었다.

단순히 쇼핑을 한 게 아니라 그 이상을 생각하는 듯 보였고 도진은 그 얼굴이 특별하여 몇 번이나 시선을 주었다.

쇼핑을 끝낸 세 사람은 조금 빨리 움직여 오성 건설 쉬르네폴리아 지사로 향했다.

함께 점심을 먹기로 했는데 생각보다 더 구경에 시간을 썼던 탓이다.

다행히 늦지 않게 오대용, 주정아와의 점심 식사를 할 수 있었다.

"자! 선물!"

"뭘 좋아할지 몰라서 일단 많이 샀어."

"고마워."

소담을 필두로 하여 건넨 선물을 주정아가 넉넉하게 웃는 얼굴로 받았다.

"내가 들게! 이리 줘."

"어휴. 괜찮다니까."

기껏해야 선물 박스 몇 개인데 호들갑을 떠는 오대용의 모습에 주정아가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흐뭇하게 웃었다.

"보기 좋네."

"그러게 말야. 우리 소중이 아빠, 이제 진짜 철드나 봐."

"소중이요?"

"응. 태명."

"아."

질문했던 상미가 고개를 끄덕였다.

누구 아빠, 태명.

익숙지 않은 단어인데 신기하면서 무어라 해야 할지 모를, 그러나 싫지 않은 어떤 느낌이 든다.

식사는 화기애애한 가운데 끝이 났다.

"진짜, 진짜 괜찮은데."

"괜찮은 건 나구요! 소중이 아빠, 걱정 안 해도 된다니까?"

시간이 남는 가운데 가볍게 서류를 보는 주정아의 옆에서 안절부절못하는 오대용의 모습에 피식 웃음이 나오는 도진이었다.

그렇게 좋은 때에.

따르르릉-

울리지 않는 게 좋은 전화가 울리고 만 것이다.

-대용이한테 문제가 생길 것 같아.

심상치 않은 내용에 깊어진 눈동자로 도진이 물었다.

"어떤 문제가?"

-오성 건설 내에서 횡령 사건이 발생했어. 쉬르네폴리아 지사와 관련해서.

"……."

-그쪽으로도 연락이 갈 거야. 그리고…… 기사가 뜰 거야.

세계 최고의 정보 단체를 논할 때 결코 빠지지 않는 천마신교 세이전의 전주 나지윤이 천마에게 전한 정보였다.

틀릴 리가 없는 정보였고.

"……대표 이사님."

바로 사실이 되었다.

* * * *

창백한 안색의 직원이 전한 내용은 나지윤이 말했던 횡령 사건이었다. 그것도 아주 커다란.

오성 건설 내에서 무려 50억을 횡령한 직원이 나왔고 그것이 오늘 밝혀졌을 때 직원은 이미 도주한 뒤였다.

[김 씨의 원룸은 생활의 흔적이 그대로 남은 채였습니다. 하지만 오래 전부터 준비한 듯 치밀하게 움직여 추적이 용이하지 않은 것으로…….]

그리고 뉴스에서 긴급 속보가 나왔다.

다른 곳도 아니고 오성의 계열사 중에서도 손에 꼽히는 오성 건설의 일개 직원에 의한 50억 횡령 사건이 터졌으니 대한민국이 들썩였고 세계에서도 다루는 뉴스가 되었다.

문제는.

[…이와 관련하여 오대용 대표의 관리 소홀을 문제 삼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습니다.]

이 문제의 책임 소재를 오대용에게로 돌리는 목소리가 있다는 것이었다.

횡령을 저지르고 도주한 직원이 다름 아닌 쉬르네폴리아 지사 소속이라는 게 꼬투리가 되었다.

그래.

도주한 직원은 쉬르네폴리아 지사 소속이었다.

하지만 오대용으로선 억울한 부분이 있었으니 그는 어디까지나 소속만 쉬르네폴리아 지사였을 뿐 한국에서 근무하는 직원이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근무하며 한국에서의 사내 전산망을 이용하여 돈을 빼돌리고 도주하였는데 그걸 가지고 쉬르네폴리아 지사 소속이니 오대용의 책임이라 하는 건 억지가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걸 떠나, 오대용은 다시없을 정도로 분노할 수밖에 없었으니.

[오대용 대표, 그리고 주정아 이사에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이야기가 오성 건설 내에서 나오고 있는데요.]

이번 사건에 오대용의 가장 소중한 사람인 아내, 주정아의 이름이 언급된 것이다.

새 생명을 품고 있는 아내의 이름이.

"하. 선 넘네. 진짜."

꽉 쥔 오대용의 주먹이 과도한 힘에 떨리고 있었다.

태어나 손에 꼽을 정도로 좋은 날이 이어졌다.

가장 소중한 사람이 사랑의 결실을 품었고 친구들의 축하를 받았다.

제2의 고향이 된 쉬르네폴리아의 우환도 덜었고 앞으로도 좋은 날이 이어질 것만 같았는데.

그 모든 것에 먹칠을 하는 사건이 터진 거다.

그리고 그 사건의 배후를, 오대용은 짐작하고 있었다.

"…그 사람이야?"

도진이 물었고 오대용은 어, 건조하게 답했다.

오무기. 오성 건설 본사의 전무 이사.

오대용의 나이 터울이 짧은 삼촌이었다.

그리고 존재감이 커져 버린 오대용을 질투하여 요즘 툭툭, 나쁜 형태로 건드리며 자극하던 사람이기도 했다.

도진이 알기로 성격에 하자가 있는 인간이었다.

늦둥이이자 외동으로 태어났는데 가정 교육이 좋지 않아 제멋대로에 원하는 걸 가지지 못하면 눈이 뒤집어지는 성격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능력은 있어 제법 좋은 자리를 꿰찼으니 오성 내에서도 핵심인 오성 건설에서 전무 이사를 달 수 있었던 데에서 그 정도를 짐작할 수 있다.

오대용은…… 그를 무서워했었다.

나이차가 적다 보니 친구처럼 어울릴 때도 있었는데 그때부터 오대용을 무시하고 폭력으로 대하며 부렸다.

그렇게 어릴 적부터 '서열'을 자신의 아래라 생각하며 지냈는데 그 오대용이 이제 자신보다 훨씬 위에 있는 것처럼 보이니 참지 못한 것이다.

그러니까 이렇게, 더러운 수작을 부리는 거다.

횡령 사건이 터지자마자 오대용을 들먹이고 오대용의 지지 기반인 성운의 후계자 주정아까지 언급하여 책임을 말한다.

오대용만을 언급했다면.

이렇게까지 분노하지 않았을 거다.

오성 내에서의 경쟁은 당연한 것이었으니까. 빌미가 있다면 물어뜯길 수밖에 없다.

하지만 주정아를, 이미 임신했다는 게 다 알려진 주정아까지 언급한 건 결코 참을 수 없는 도를 넘어선 짓거리였다.

우우웅-

참을 수 없는 분노에 주먹을 꽉 쥔 오대용은 진동하는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발신자는.

[오무기]

그의 분노의 대상인 오무기였다.

"……."

오대용은 말없이 통화 버튼을 눌렀다.

[큰일이 났네, 대용아.]

비꼬는 음성이다.

오대용은 대꾸하지 않았고 오무기는 아랑곳않고 지껄였다.

[임원 소집 회의다. 이틀 뒤 오후 한 시. 늦지 마라. 질부도 같이 오는 건 말 안 해도 알겠지?]

그리고 뚝. 전화가 끊겼다.

오대용은 조용히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고선 후우,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감정을 다스린 오대용이 아내를 마주하여 옅게 웃고선 말했다.

"정아야."

"응."

"오랜만에 한국, 가야 할 거 같아."

"좋은 데 데려가 줄 거지?"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게 해 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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