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4화
도진과 오성아가 머무는, 최고급 레스토랑 파트리시아를 보유한 5성급 호텔의 스위트룸은 뷰부터가 차별화되어 있다.
어둠이 내렸으나 그로 인해 오히려 선명한 은은함으로 존재를 드러내는 도시의 정경, 그리고 펼쳐진 사막의 정경까지.
높은 곳에서 통유리 너머 그 정경을 내려다보는 건 그것만으로도 특별한 경험을 선사한다.
그 통유리를 배경으로 하는 넓은 거실의 테이블을 가운데 두고 도진과 소담, 상미, 그리고 오성아가 모여 앉았다.
드레스 코드는 잠옷. 파자마다.
분홍색, 보라색, 파란색.
순서대로 서소담, 오성아, 윤상미의 파자마 색깔로 재질의 질감을 살린 패턴이 있어 더욱 개성이 드러났다.
여기에 도진의 파자마는 진한 붉은색으로…… 곤룡포를 연상케하는 무늬가 금실로 수놓여 있었다.
"너는 잠옷까지 곤룡포구나."
오성아의 말에 도진이 어깨를 으쓱이며 웃었다.
"팬이 선물해 주신 건데요."
"…센스가 탁월하시네."
"그렇죠?"
"응."
오성아는 전면 후퇴로 탈룰라에 성공하고선 배치를 다시 훑는다.
둥근 테이블에 사이좋게 둘러앉았는데 아주 자연스럽게 도진의 양옆을 소담과 상미가 차지했다.
너무 자연스러워서 그 어떤 다른 생각도 들지 않을 만큼.
그리고 소담이 분홍색 콜라캔을 집어들었다.
치익-
"체리 콜라래."
"오, 들어는 봤어."
"나 먼저 먹어봐도 돼?"
"물론이지. 우리 소담이 하고 싶은 거 다 해."
"고마워."
도진의 허락에 소담이 활짝 웃고선 입술에 콜라를 댔다.
가볍게 한 모금, 꼴깍 삼키는 모습이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아름답다고 오성아는 생각했다.
별 거 아니지만 입술에서 목으로 이어지는 동선은 매력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었고 그것이 소담이라면 이미 결전 병기 수준의 파괴력에 도달해 버린다.
"음, 나는 잘 모르겠어."
콜라를 입술에서 떼고 물기가 어린 입술로 웃으며 소담이 고개를 저었다.
"도진이 네가 한 번 마셔 봐."
그리고선 자신이 한 모금 마신 콜라를 도진에게 건네는 것이다.
"그래."
도진은 그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고선 한 모금 마신다.
"음. 그냥 무난한 거 같은데?"
"그래?"
"응."
아무렇지 않게 대화를 나누는 모습에서도 묻어나는 두 사람 사이의 깊은 인연.
그리고 오성아는 여기에 이성(理性)의 화신답게 평가를 내린다.
'꼬리 한 개.'
라고.
다른 게 아니다.
소담의 '요망함'에 대한 평가다.
무얼 꼬아서 말하랴.
소담이 도진을 좋아하는 건 이미 알 사람은 다 아는 이야기다.
하지만 그동안은 그야말로 풋풋해서 보는 사람이 지구 뿌셔 아파트 뿌셔 할 정도로 간질간질함을 느끼게 하더니 이제는 제법 폭신한 꼬리로 도진을 톡톡, 두드리기 시작한 것이다.
이건 또 이거 대로 흐뭇한 광경이지만 오성아의 평가는 박했으니 그것이 일차원적이었기 때문이다.
'간접 키스를 노리는 수법이 전형적이잖아.'
제3자의 입장에서 너무 뻔히 보인다.
사실 시전자가 소담이다 보니 그 뻔한 수법만으로도 필살기 수준의 효과를 볼 수 있겠지만 이게 또 상대가 도진이다 보니 아쉽다.
너무나 자연스럽게 아무 일 없이 넘어가 버렸으니까.
"어, 치킨이랑 치킨 부리또를 같이 먹어?"
"여긴 밥 들었잖아. 같이 먹으면 더 좋아."
"진짜? 나도 한 입 줘."
"그래."
소담이 순살 치킨을 손에 들고 아, 아기새처럼 입을 벌린다.
거기에 도진이 스윽 부리또를 가져다 주니 앙, 한 입 베어문다.
"상미도 먹을래?"
"네."
그리고 상미가 시선을 향하자 도진이 놓치지 않고 상미에게도 한 입.
오성아는 그걸 보며 생각한다.
'…요즘 애들끼리 모여서 무슨무슨 사랑회니 뭐니 이야기를 한다더니.'
이게 그 성과일지도 모르겠다.
'끙.'
문득 이걸 내가 왜 생각하고 있나 자괴감이 들고 괴로워지는 오성아였다.
"그러고 보니 처음이죠?"
"뭐가?"
이마를 짚으려던 오성아가 도진의 말에 시선을 향했다.
누나도 먹을래요, 라고 내미는 부리또에 고개를 저으니 도진이 놓고서 말한다.
"아기요."
"아."
응, 그렇네.
오성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다면 너무나 당연한 말이지만.
그들 사이에서 아기는 처음이었다.
"우리 처남이 첫 타자가 되네요."
'처남'이란 단어에 소담과 상미가 미약하게 반응했지만 오성아는 애써 모른 척하며 다른 생각으로 신경을 돌린다.
예전이야 30대를 아주 어마무시한 것으로 여기는 분위기가 있었지만 요즘은 아니다.
10대가 다르고 20대가 다르고 30대가 다르다고 하지만 그건 '무공(武功)'이란 게 없던 시절의 이야기고 지금은 좀 다르니까.
무공을 아예 익히지 않는 지극히 희소하고 또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서야 일반인이라 하여도 최소한의 무공은 익히는 법이었고 그에 따라 단련된 육체에 내공이 깃들게 된다.
바로 이 내공이 세월에 따른 인간의 노쇠를 뒤로 미뤄 버림으로써 30대와 40대의 인간을 10대와 다름없는, 오히려 깊이가 더해져 전성기를 누리게 해 준 것이다.
그 영향으로 40대가 넘어 결혼하는 게 요즘엔 드물지 않게 되었다.
반대로 10대에 결혼하는 경우도 적지 않은 등 양극화가 되긴 했지만 한 가지 공통되는 부분이 있다면 아이를 낳는 평균 나이가 상당히 높아졌다는 부분이다.
그러니까 오대용과 주정아의 경우는 희소했다.
"눈나. 벌써 고모가 돼 버렸네요."
"…고모라고 하니까 갑자기 슬퍼졌어."
이성의 화신답지 않은 감정적인 답에 모두가 웃었다.
"괜찮아요. 눈나는 고모라고 불려도 여신이니까."
"내 아이를 보는 건 어떤 기분일까?"
소담이 상상하는 얼굴로 말한다.
누구도 소리내어 대답하지 않았지만 같은 걸 상상하는 얼굴이 되었다.
-아이를 가지고 싶어.
도진은 언젠가 그렇게 말했던 한유아가 떠올랐다.
평범하게 사랑하여 결혼하고 평범하게 아이를 낳아 사랑을 주며 기르는 걸 로망으로 여겼던 사람.
전생의 도진에게는 그것이 '평범함'이 아닌 '결코 닿을 수 없는 이상'이었다.
그래서, 완전히 포기하여 인생에서 배제했었다.
하지만, 그래. 지금은 아니지 않은가.
도진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렇네."
"응?"
"결혼해서 아이를 가지는 거. 나도, 그럴 수 있는 거구나."
"어?"
"……."
소담과 상미의 안 그래도 큰 눈이 더 커져 버렸다.
* * * *
남쪽 나라의 언론은 매일 특종을 쏟아내고 있었다.
서부 무림 토벌이 있었던 게 벌써 일주일 전이었지만 그 뒤 줄줄이 쏟아져 나오는 그들과 내통한 자들에 관한 이야기가 끊이지 않았던 탓이다.
[단독) 방산 업체의 정보마저 팔아넘긴 간부 A씨.]
오늘은 무려 방산 업체의 간부였던 자가 서부 무림의 범죄 조직으로 기밀을 팔아넘겼다는 기사가 나왔다.
논란은 제법 크게 타오르고 있었는데, 이게 단순히 서부 무림의 범죄 집단에 넘어간 게 아니라 그들을 통해 무형독으로 흘러갔기 때문이다.
무형독. 소탕하지 못한 천마신교의 이단 세력이자 이 세계의 전복을 획책했던 테러 집단.
이 세계에 숨어 여전히 암약하고 있으며 본거지를 저쪽 세상으로 옮겨서까지 끈질기게 세계에 해악을 끼치고 있는 자들.
입장이 역전되어 '포털 시스템'은 천마신교의 제어 하에 있고 그들이 시스템의 그늘에 숨어 이쪽과 저쪽을 오가고 있다.
시스템의 제어와 관리가 완벽했다면 그들을 소탕할 수 있었을 텐데 그러지 못하고 있었으니 시스템을 완벽히 해석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쪽 세계의 과학으로는 어림도 없었고 주술 쪽으로도 다 해석을 하지 못했다.
'관리자들이 살아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포털 시스템을 관리하던 자들 중 간부는 한 명도 남아있질 않았다.
결전의 그날.
가소천이 펼친 진법에 의해 모두 죽어 버렸다.
일이 다 끝나고 정리를 하는 과정에서 그걸 알았다.
진법의 범위는 교나라의 수도를 집어삼킬 만큼 컸고 그 수도에는 가소천의 명령에 따라 대부분의 간부들이 모여 있었던 거다.
어쩌면.
가소천은 괴물이 되려 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진법으로 그 수많은 자들을 잡아먹고 '초월'하여서.
하지만 실패하여 패한 가소천은 그에 관해서도, 포털 시스템에 관해서도 무엇 하나 입을 열지 않았다.
단전을 폐하였고 인권을 완전히 배제한 온갖 금제 속에서도.
무언가 불길한 어떤 것에 잡아먹힌 듯한 얼굴로 기회를 노리는 눈동자를 하고 있어 지켜보는 이들을 불안에 떨게 만들었다.
도진은 길게 숨을 내쉬었다.
경계는 충분히 하고 있다.
무얼 할지는 전혀 알 수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거기에 매몰될 수는 없는 노릇.
지금 해야 할 일을 하기 위해 움직였다.
"형."
"그래, 태호야."
최태호를 마주하여 도진이 웃어 보였다.
범죄자들의 토벌 후 뒤처리에는 서부 무림의 민초들에 대한 일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
어려운 일이었다.
서부 무림이 안고 있던 커다란 문제들 중 범죄 조직을 해결했을 뿐 그 땅과 땅에 살던 민초들에 관한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이에 관해 최태호가 말했다.
"많은 분들이…… 쉬르네폴리아로 이주를 생각하고 계세요."
"그래?"
"네. 생각이 바뀌신 분들이 많아요."
토벌 작전 결행 전 쉬르네폴리아로 잠시라도 대피하라는 권유를 받아들인 이들이 적지는 않았다.
그리고 토벌 후 임시로 쉬르네폴리아에 머문 이들도 있었고.
거기서 그들이 '세계의 여론'을 접했다고 했다.
"비난하는 사람들이, 적지는 않잖아요?"
"…그렇지."
어떤 이유로든 그들로 인해 세계가 피해를 입은 부분이 있다.
외면하고 있던 그 부분을 두 눈으로 보고 또 몸으로 느낀 많은 이들이 생각을 바꾸었다는 것이다.
그들을 지키기 위해 나섰던 무인들의 모습 또한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고.
"그렇구나."
진나라에서는 협의체 구성을 논하고 있었다.
어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끊임없는 대화가 필요한 법이었고 그를 위한 기구를 구성하여 서부 무림에 살던 그들과 계속 대화를 함으로써 방법을 찾으려는 의도다.
"잘 됐으면 좋겠네."
도진의 말에 최태호도 네, 고개를 끄덕이고선 말했다.
"천마님이 도와주셨으니까요. 잘 될 거예요."
도진은 피식 웃었다.
"나는 니 말대로 거들었을 뿐이니까. 너 같은 훌륭한 꼬마들이 잘 해줘야지."
"꼬마 아니거든요."
"그래, 그래."
머리를 헝클어뜨리니 불쑥불쑥 반작용하는 힘이 있어 손맛이 제법이다.
최태호는 그렇게 도진의 손길에 저항하다 꾸벅, 고개를 숙였다.
"고맙습니다, 천마님."
그리고 진지하게 감사했다.
도진은 웃으며 그 등을 쓸어 주었다.
"계속 나아가도 돼. 너는 옳은 길을 가고 있으니까.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등을 밀어줄게."
* * * *
그날 오후.
따르르릉-
도진은 '보안 전화'를 받게 되었다.
일반 휴대폰이 아닌 특수 제작된 휴대폰으로 기지국이 없던 서부 무림에서도 통화가 가능했던 바로 그 휴대폰이다.
"응, 지윤아."
발신자는 나지윤.
답청문의 문주이자 천마신교의 정보 단체인 세이전(世耳殿)의 전주로 도진의 숭무고 동기이자 친구였다.
그 나지윤이 진지한 목소리로 즉시 본론을 말했다.
-대용이한테 문제가 생길 것 같아.
도진의 눈동자가 깊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