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1화
남쪽 나라의 광대한 사막에 기생하는 서부 무림 범죄자들의 가장 위에는 네 개의 조직이 있었다.
흔히 늑대, 뱀, 전갈, 귀신으로 불리니 금랑회(金狼會), 대사문(大蛇門), 부갈방(斧蝎幇), 전귀맹(錢鬼盟)이다.
한정된 '시장'에 네 곳의 경쟁자가 있으니 당연히 사이는 좋지 않았고 유혈 충돌도 몇 번이나 있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부의 위협에는 한몸이 되어 대응하였으니 서로를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 여기면서도 필요할 땐 얼마든지 손을 잡을 줄 알았다.
그렇게 적을 가까이 두는 관계였던 만큼 당연히 서로에 대해 눈과 귀를 활짝 열어 두었고 뒤통수를 칠 틈이 없는지, 혹은 뒤통수를 치려 하진 않는지 항상 경계하였으니.
"이런 씨발……."
금랑회를 방문한 '천재지변'을 그들은 대번에 알아채고 뒤집어졌다.
대사(大蛇), 다른 곳에서는 뱀새끼라 부르는 대사문의 문주 사모변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심복들과 냅다 튀었다.
금랑회와 달리 대사문은 무형독과 전혀 관련없는 곳이었고 평범한 범죄자들이었으니 천마가 왔다는 걸 안 순간 즉시 도주를 택한 것이다.
남겨둔 재화가 적지 않았으나 이미 싸두었던 짐 중 가장 가치가 나가는 것 일부만 챙기는 데서 만족했다.
'살고 봐야지.'
금랑회의 회주 태금천은 스스로를 머리가 돌아간다 평가하였으나 절반만 정답이었다.
놈은 광신도인지라 특정 부분에서는 이성보다 맹신이 앞서 버리니까.
대사 사모변은 그것을 잘 알았고 감사했다.
뭘 했는지 모르겠지만 분명히 터무니없는 미친짓을 했을 거다.
천마를 두려워 한다면 결코 할 수 없었을 짓을.
그러니까 천마가 왔겠지.
중요한 건 덕분에 천마가 금랑회를 가장 먼저 방문하였고 이렇게 도주할 시간이 생겼다는 거다.
사업장이 엿같은 환경의 사막이란 것만 제외하면 꽤나 좋은 돈벌이가 되었으나 어차피 오래 가지 못할 거라 생각하고 대비를 해 두었으니 아쉬울 건 없다.
이 세상에 그들이 기생할 그늘은 영원히 사라질 수 없으니 다른 곳에 가서 새 사업을 하면 그만…….
"……."
그를 태우고 달리던 차가 멈추었다.
그리고 사모변의 생각 또한 멈추었으니 그렇게 만든 이가, 사막 가운데 서 있었다.
헐렁한 무복으로도 가려지지 않는 압도적인 피지컬의 소유자였다.
커다란 키에 무시무시한 근육이 가득 들어차 있는.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완벽한 밸런스가 날렵하다는 인상마저 주고 있다.
이곳 서부 무림에도 인상과 덩치로 먹고 사는 자들이 적지 않은데, 그런 자들마저 저 앞에 대면 볼품없어지고 말 것이다.
대사 사모변은 이런 피지컬의 소유자를 잘,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어찌 모르겠는가.
"패권, 벽태웅."
쉬르네폴리아의 정점에 있는 포부문의 문주 벽태웅을.
중얼거리면서 사모변이 주변으로 눈깔을 또르륵 굴린다.
이 길은 본래 길이 아니며 사모변이 오직 비상 사태에만 사용하려고 은밀히 닦아둔 탈출로이니 이유없이 벽태웅이 있을 수가 없었다.
하물며 포부문의 문주, 세계 무림에서도 VVIP로 꼽힐 자가 이런 자리에 혼자 올 리가 없으니 따라왔을 자들을 찾는 것이다.
그러나 경지에 오른 그의 시야와 감각에도 벽태웅을 제외한 어떤 이도 잡히지 않았으니 의아해졌다.
"혼자야?"
"그래. 혼자다."
그럴 리가.
슬쩍 눈살이 찌푸려졌으나 이런 걸로 입씨름해 봐야 시간 낭비다.
그러니까 다른 정보를 얻고자 했다.
"포부문의 문주가 사사롭게 이런 곳에 있어도 되는 건가?"
이곳은 아직까지는 '공백 지대'다.
정치권이든 무림이든 영향력 있는 자가 쉽사리 발을 들여선 안 되는 곳이란 말이다.
사모변은 그런 의도로 말했고 벽태웅 또한 알아들었다.
벽태웅이 답했다.
"사사로운 이유로 온 게 아니다."
"…아니라고?"
"그래. 의뢰를 받아서 왔지."
개인적인 이유가 아닌 무림인으로서 의뢰를 받아 왔다는 이야기에 사모변의 얼굴이 더욱 찌푸려졌다.
"지금, 포부문이 의뢰를 받아서 여길 왔다고 한 건가?"
더욱 말이 안 되는 소리였다.
애초에 그런 식으로 '대문파가 의뢰를 받아 서부 무림에 개입'하는 게 가능했다면 서부 무림 자체가 성립하지 않았을 거다.
그에 관한 부분이 분명히 금지되어 있기에 서부 무림이 공백 지대인 것을.
벽태웅은 그런 생각이 고스란히 얼굴에 드러나는 사모변에게 고개를 저어 보였다.
"아니. 포부문이 아니다."
"아니라고?"
"그래. 이 의뢰는, 어디까지나 나 개인이 받은 거다."
"자꾸 궤변을."
"궤변이 아니다. 네가 아직 전해듣지 못했을 뿐이지."
벽태웅이 길게 늘어놓으려는 사모변의 말을 끊었다.
서부 무림을 공백 지대로 유지하기 위해 음지에서 있었던 여러 공작과 그 결과를 굳이 들어줄 필요가 없었다.
그건 모두.
"방금 전에, 다 무효가 됐으니까."
"……!!"
이런 미친.
사모변이 속으로 외쳤다.
바로 이해한 것이다. 상황을.
노르드와 벨라의 그 어리숙하고 멍청한 놈들이 배신한 것이다.
어리숙하고 멍청한 거야 잘 알고 있었지만 이런 식으로 대책없이 배신할 만큼 멍청할 거라고까지는 예상치 못한 게 패착이었다.
그들 사이 거래 내역이 적힌 장부를 나눠 가졌는데 이런 식으로 뒤통수를 치다니!
구웅-!
흔들리는 사모변을 짓누르는 기세가 퍼져 나간다.
그 내기가 깃들어 실체화되는 기세가 안 그래도 거대했던 벽태웅을 더 거대하게 인식하도록 만들었다.
"의뢰인들은 프로니모스 사립 학교의 학생들이다."
거대한 벽태웅의 목소리가 선명하게 사모변의, 그 뒤를 따르던 범죄자들의 귓가에 천둥처럼 울렸다.
"가족들을 지켜달라고 했지."
이 순간 벽태웅의 머릿속을 스쳐가는 건 지켜봐야만 했던 안타까움이었다.
눈물을 훔친 흔적이 있는 아이.
배를 곯아 힘이 없는 아이.
그럼에도 그것들을 감추고 웃던 아이들을 보아야 했다.
벽태웅은 복잡한 건 그리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저 하나.
그런 것들이 없기를 바랐고 지금 그런 세상을 만들기 위한 일에 자신이 일조할 수 있다는 것이 중요했다.
쿠웅!
거신공(巨神功). 격발(激發).
체내의 내기가 폭발하며 배가된 기운이 벽태웅을 중심으로 하여 퍼져 나가고, 공간을 가득 채운다.
사모변은 우두커니 서서 그것을 보았다.
제아무리 크다 하나 일개 사람일진대.
그저 하나에 불과한 사람이 드넓은 사막에 서 있을 뿐인데.
지금 그들의 앞에 결코 나아갈 수 없는 거대한 벽이 나타나 버렸다.
길이, 사라졌다.
"씨이발."
자포자기하여 욕이 나온다.
그리고 없던 용기, 아니 만용이 버럭 소리를 지르게 만들었다.
"우리야 여기서 막을 수 있겠지만 너 하나가 전부 막을 수 있을 거 같아?! 분명히 미쳐 날뛰는 새끼들이 나올 거다!"
다른 건 모르겠지만 지금 서부 무림에 대규모로 무인들이 쳐들어온 게 아니란 것만큼은 확실했다.
그랬다면 모를 리가 없으니까.
제아무리 천마신교라 해도 자신들의 마당에 사람이 우글거리는 걸 모를 정도로 등신은 아닌 것이다.
그러니까 분명히, 분명히 이런 식으로 소수가 행동을 시작했다는 건데 그렇다면 막지 못하는 부분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발악하듯 그걸 지적한 사모변이었으나 벽태웅은 전혀 흔들리지 않는다.
흔들릴 이유가 없었다.
"서강아, 진짜 괜찮아?"
"네, 누님. 리지 누님이 무리만 안 하면 괜찮다시네요."
"너 지금 무리할 거잖아……."
"어허. 형님, 상남자는 이런 구멍 하나 정돈 신경 안 쓰는 법입니다."
"그게 상남자면 난 그냥 하남자 하고 싶은데……."
"아니, 형님. 엑소시아의 차기 에이스가 하남자라니. 누가 그걸 믿습니까. 그리고."
"여기서 저놈들 한 방 안 먹이고서는, 절대로 편히 못 누워 있거든요. 저."
믿음직한 후배와 동생들이 있었으니까.
이곳의 지리를 훤히 아는 성민혁과 성지인, 조서강을 포함하여 몇 년 동안 '협행'을 하였던 무인들이 개인의 신분으로 사막의 마을들을 빈틈없이 지키고 있다.
그리고 잠시만 있으면 쉬르네폴리아를 포함하여 남쪽의 나라들이 사막을 물샐틈없이 봉쇄할 터.
벽태웅이 할 일은 지금, 대사문이 은밀히 닦아 두었던 이 도주로를 막아서는 것 뿐이다.
그그그그그긍…….
묵직한 기운이 강대한 육체를 중심으로 하여 퍼져 나간다.
그 벽의 앞에 선 사모변은 품 속의 총을 꺼내들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총.
이 세계의 문명을 대표하는 살상 무기요 무인들의 세월을 한 순간에 허망하게 만드는 흉악한 물건이거늘.
저 벽을 상대로 통할 거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가 없었다.
총이 이렇게나 아무것도 아니게 느껴진 적은 평생에 처음이었다.
스으-
벽태웅이 주먹을 들었다.
"형님만큼은 아니겠지만 나도 아이들이랑 놀아주면서 나름 힘조절을 하는 데엔 재주가 있어. 그러니까 덤비고 싶다면 덤벼도 돼."
구웅-!
"웬만하면, 죽이지 않을 테니까."
* * * *
노르드의 수도 외곽에 위치한 화려한 건물 내부.
왕자 아무스가 중년의 무인을 앞에 두고 은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문제 없겠지?"
"예.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하. 저하의 근심을 덜어드리기 위하여 제 수제자들을 파견할 것이니 잘못되지 않을 것입니다."
은밀히 나누는 이야기는 다름 아닌 '서부 무림 소탕 작전'에 관한 것이다.
서부 무림 소탕 작전.
철저하게 비밀을 엄수하여야 하는 기밀로 서부 무림의 범죄자들을 반응할 틈도 주지 않고 단숨에 몰아쳐 박멸하는 것이 골자였다.
이를 위하여 외부에는 지지부진하다는 욕을 먹을 정도로 일을 절차대로 진행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본래 서부 무림에 정보를 흘리던 노르드와 벨라의 두 왕자는 누구보다 이 작전에 열심이었고 진심이었다.
다른 의도가 아니다.
그들과 연관되어 있던 서부 무림의 범죄자들을 '살인멸구(殺人滅口)'할 생각인 것이다.
죽은 자는 말이 없으니 그럼으로써 자신의 죄를 숨기려 하였다.
그를 위하여 자신의 심복인 문파의 문주를 불러 단단히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 자리였다.
'그래. 아무도 모를 거야.'
아무스는 손톱을 질근거리며 그렇게 생각했다.
태도를 바꿔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서부 무림 박멸을 위해 움직이고 있다.
서부 무림에서는 그렇게 바뀐 자신을 의심의 눈으로 보고 있지만 무슨 상관인가.
조금만 버티면 놈들이 사라질 텐데.
그러니까 이대로만 가자.
그렇게 생각하고 있던 아무스의 뒤통수를.
쾅!
"헉?!"
갑자기 거칠게 문을 여는 소리가 때렸다.
"누, 누구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몸을 돌린 아무스의 시야에 흙발로 안에 들어서는 무인들이 보인다.
그들을 본 아무스의 곁에 있던 중년 무인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는데, 다름 아닌 그들과 경쟁 관계에 있던 문파의 무인들이 섞여 있었기 때문이다.
간단한 이야기다.
무능하고 멍청한 왕자를 구워삶아 이득을 좀 보려는데 나라를 위한답시고 위선을 떠는 자들이 중년의 무인은 마음에 들지 않는 거다.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또각, 또각.
버럭 소리치는 중년 무인의 목소리를 매력적인 구둣소리가 꿰뚫었다.
늘어선 무인들이 양옆으로 물러나며 가운데 선 단정하고 또 아름다운 그녀는 다름 아닌 오성아였다.
멍하니 있던 아무스가 그녀의 등장에 반발하듯 말했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오성아 주무관!"
주무관은 대책위원회에서 그녀가 맡은 직책이다.
오성아는 아무스에게 싱긋 웃어주고선 말했다.
"서부 무림의 범죄자들과 내통하던 범죄자들을 체포하러 왔습니다."
"……!!"
아무스의 눈이 커지며 벼락이라도 맞은 듯 몸이 떨렸다.
그리고 충격에 일순 뇌가 정지하여 대처가 되질 않는다.
어떻게 이곳에 왔는지, 무슨 수를 썼는지를 생각할 여유가 없다.
대신 당장이라도 이곳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판단에 대책없이 몸을 날렸다.
본능이 '연약한 여자'인 오성아를 목표로 한다.
오성아를 밀치고 내달려 이곳을 벗어난다는 한심한 판단을 한 것이다.
그래도 꼴에 남쪽 나라의 왕자라 기본적인 피지컬과 무공은 갖추고 있다.
물론.
빡!
"컥?"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오성아의 손에 마빡을 얻어맞은 아무스의 상체가 뒤로 크게 젖혔다.
빡!
"악!"
그리고 구두의 앞굽이 정강이뼈를 때리자 비명과 함께 무릎이 접힌다.
쿠당탕!
균형이 완전히 무너진 아무스는 꼴사납게 바닥을 나뒹굴었고 정강이뼈를 부여잡았다.
그렇게 나뒹구는, 아무것도 모르는 아무스를 내려다보며 천마신교의 오성아가 눈부신 미소를 지었다.
"끌고 가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