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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해서 지존까지-690화 (690/741)
  • 690화

    금으로 짠 가운을 걸친 노인이 있었다.

    세월에 거칠게 깎인 인상의 그를 서부 무림에서는 대금랑(大金狼)이라 불렀으니 그가 바로 서부 무림의 손꼽히는 세력인 금랑회의 회주, 태금천이었다.

    어둠이 내린 사막을 어떤 방해도 없이 내려다볼 수 있는 회주의 집무실에 놓인 최고급 소파에 비스듬히 기댄 그의 표정이 제법 좋았다.

    아는 사람은 아는 이야기인데, 이 서부 무림이 성립할 수 있었던 데에는 대금랑 태금천의 공이 지대했다.

    이곳에 처음 자리를 잡은 것도 태금천이었고 '사업'의 기틀을 닦은 것도 태금천이었으니까.

    그는 무인도 머리를 잘 써야만 한다 생각하는 사람이었고 그런 생각을 할 만큼의 안목이 있었으니 이곳 공백 지대로 이 세계에 속하기를 꺼리는 자들을 모았고 자금을 빌려줌으로써 서부 무림의 시작을 연 것이다.

    물론.

    그것을 칭송하는 자는 수하들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서부 무림 바깥의 인간들이야 말할 것도 없고 동종 업계 종사자란 놈들은 애초에 그런 걸 따질 만큼의 지성인이 못 되었으니까.

    때문에 태금천은 자신의 공에 대한 인정을 바라지는 않았으나…….

    '건방진 놈들.'

    그렇다고 해서 그게 좋다는 건 아니었으니 위에서 내려온 오늘의 계획이 참 마음에 들었다.

    위. 비밀도 아니다.

    이미 아는 놈들은 다 알고 있으니까.

    서부 무림에 '무형독'이 연관되어 있고 개중 일부는 아예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다는 걸.

    그리고 그 직접적으로 연관된 이들 중 한 명이 바로 태금천이었던 것이다.

    태금천에게 내려온 지령은 이랬다.

    -도발 후 철수.

    쉬르네폴리아를 도발함과 동시에 무사히, 빠르게 철수할 것.

    지령의 의도를 잘 돌아가는 머리로 바로 알 수 있었다.

    서부 무림은 더 이상 유지될 수 없으니 챙길 것만 챙겨서 빠르게 뜰 것.

    다만 빈손으로 떠날 수는 없으니 제대로 한 방 먹여주라는 것이었다.

    서부 무림을 떠야 하는가.

    노르드와 벨라의 왕자들은 걱정할 것 없다고, 항상 그랬듯 소리만 요란하다가 곧 잠잠해질 거라고 말했지만 그의 본능이 경고하고 있었다.

    이번만큼은 심상치가 않다고.

    때문에 여기저기 줄과 정보망을 동원하여 알아보았지만 그래도 긴가민가하였는데.

    위에서 지령이 내려옴으로써 행동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태금천은 바로 지령을 수행하기 위해 움직였다.

    과감하게 버릴 건 버리고 챙길 수 있는 건 모조리 챙겨 짐을 싸면서 이 정보가 외부로 새어 나가지 않도록 철저히 입단속을 하였다.

    그들과 관련이 없는 '총알받이'를 남겨 두어야 여론을 포함하여 여러 방면으로 써먹을 수 있으니까.

    그리고 오늘, 추귀를 수금에 동행시키면서 말했다.

    -마음대로 해도 좋다. 늦지만 마라.

    ……고.

    그보다 경지가 낮음에도 입을 주욱 찢듯 웃는 놈의 면상에 소름이 끼쳤다.

    그렇게 소름이 끼치는 만큼, 아주 볼 만한 광경을 만들어 놓겠지.

    그 광경을 본 가증스런 놈들의 얼굴을 아주 예술로 만들어 놓을 만큼.

    그리고 놈들의 분노는 분명히 서부 무림으로 향할 것이다.

    그가 떠난 뒤의 서부 무림으로 말이다.

    그를 존경할 줄 모르던 무식한 놈들도 처리하고 가증스런 '천마신교' 놈들 또한 비탄에 빠뜨린다.

    그런 생각으로 오늘이 마지막이 될 밤 사막의 풍경을 즐기던 그의 시야에, 이질적인 게 섞여들었다.

    '……뭐야?'

    애새끼와, 젊은 무인 하나였다.

    * * * *

    태금천이 엄명을 내려 다른 때보다 신경써서 경비를 서고 있었기에 경비 무인들은 바로 태금천이 보았던 이질적인 둘을 발견하였다.

    꼬마 하나에 눈에 띄는 게 없는 무인 하나.

    이 시간에, 이곳에 나타나기엔 이질적인 조합이었고 무인들은 그래서 조금 긴장했다.

    "뭐냐."

    긴장했다고 해서 말이 곱게 나갈 만큼 수준 있는 삶을 살지 못한 무인의 물음에 꼬마와 함께 온 무인이 말했다.

    "의뢰를 받아 왔습니다."

    "뭐? 의뢰?"

    "네. 아이에게 들었습니다. 당신들이, 금랑회가 고리대금업으로 사람들을 괴롭혔다는 걸. 그리고 선을 넘었다는 걸."

    "하? 이 새끼가 지금 뭐라는 거야?"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무인이 함께 경비를 서던 이에게 말했고 어깨를 으쓱이며 피식 비웃는 반응이 돌아왔다.

    "야. 너 혹시 병신이야?"

    시간이 시간이고 장소가 장소라 혹시나 해서 경계를 했는데 이건 그냥 병신이 아닐까 생각한 경비 무인이었다.

    가끔 그런 놈이 있다고 원래 있던 세계, 그러니까 무림에 있을 때 들었다.

    실력도 뭣도 쥐뿔도 없는 놈이 딴에는 공명심에 차서 백성들의 읍소를 듣고선 산채에 그냥 쳐들어오는 그런 거.

    설마 그런 일이 있겠나 싶었는데 지금이 바로 그 설마였다.

    그러지 않고서야 이런 어이가 없는 소리가 나올 리 없는 것이다.

    "여기는 서부 무림이에요, 서부 무림. 그런 개소리는 느그들 사는 곳에서나 통하는 소리고 여기서는 그게 아니야 이 새끼야."

    "그런가요?"

    "그래, 이 새끼야. 여기서는 힘센 놈이 법이라고. 법!"

    "그렇군요."

    "하 진짜 이거 골 때리는 새끼네. 그래, 임마. 그러니까 여기서는 우리가 법. 너는 그냥 따르면 되는."

    "아니."

    "?"

    "힘센 놈이 법이면."

    두웅-!

    공간 그 자체가 울리는 듯 낮고도 거대한 소리가 있고서.

    꽈아아아앙!!

    지껄이던 놈이 형편없이 구겨진 채 박살난 담벼락에 처박혔다.

    그리고 아이와 함께 온 무인, 도진이 말을 이었다.

    "내가 법이어야지."

    "이, 이 새끼?!"

    담벼락에 처박힌 놈과 짝을 이루어 경비를 서던 놈이 주춤주춤 뒷걸음질쳤다.

    그리고 뒤를 흘끔거렸으니 그곳엔, 경비 조장이 있었다.

    경비 조장은 문을 지키던 똘마니들보단 조금 나았으나 그래봐야 도토리 키 재기. 별 거 없는 놈이었다.

    그러나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의문의 고수'를 보며 썩은 미소로 여유를 보였으니.

    '넌 날을 잘못 잡았어 이 새끼야.'

    이곳은 무려 서부 무림을 주름잡는 거대 세력 금랑회의 본거지였다.

    웬만한 떨거지라 해도 총 한 자루쯤은 갖고 다니는 서부 무림에서 그 정점에 있는 금랑회의 본거지라 하면 당연히.

    철컥!

    무수한 화기(火器)가 갖추어져 있는 것이다.

    그리고 오늘은 그 화기의 사용에.

    "갈겨 버려!!"

    제한이 없는 날이었다.

    꽈과과과과광!!

    무수한 벼락이 사정없이 쏟아진다.

    재능없이는 도달할 수 없다 말하는 절정에 이른 고수라 하여도 시야가 제대로 확보되지 않는 어둠 속에서, 그것도 무공을 익힌 자가 쏘는 소총 세례를 다 피하는 건 불가능하였다.

    그리고 소총이라는 건 단 한 발만 맞아도 치명상이 되는 법이니 놈은 대번에 벌집이…….

    '버, 벌집이…….'

    지극히 짧은 순간. 그러나 총알이 인간을 무수히 관통하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다.

    하지만 그 어떤 총알도 놈을 관통하지는 못하였으니.

    툭. 투툭.

    총알이, 무수한 총알이 형편없이 구겨지면서.

    놈의 발밑을 나뒹굴고 있었다.

    거짓말처럼 빗나가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허나 개중에 일부는 분명히 놈에게 닿았는데.

    그것이 도저히 현실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광경을 연출한다.

    인간이, 인간이 어떻게 저럴 수 있단 말인가.

    심지어 아이마저도 아무렇지 않게 걷고 있다.

    그렇게 총알 세례를 무력화하며. 태호와 함께 아무렇지 않게 걸으며 도진이 말했다.

    "많이들, 착각을 하더라고."

    꽈과과과광!!

    패닉에 빠져 앞뒤 생각없이 갈겨대고 있는 놈이 몇인데.

    도진의 목소리는 그 굉음보다 더 명확하게 놈들의 머릿속에 파고들었다.

    "법이란 게 약자를 지키기 위해서 있다고. 그런데, 아니야."

    "으아아아아아!!"

    한 놈이 괴성을 내지르며 총을 내다 버리고선 더 커다란 것을 들었다.

    대전차 로켓. 흔히들 바주카라 부르는 물건으로 사람에게 쏠 것이 아니었다.

    "뒤져어어어어!!"

    하지만 놈은 그런 것 따위 아랑곳않고 갈겨 버렸으니.

    투쾅!

    로켓이 도진을 향하여 찰나에 거리를 좁히며 쇄도하였고.

    스으-

    도진이 든 손 앞에서 멈추었다.

    "……!"

    '……뭐?'

    경악이 퍼져 나간다.

    그리고 그 경악은.

    스윽-

    로켓이 방향을 바꾸어 그것을 쏜 놈에게 그대로 돌아가 폭발하는 순간 더 큰 공포로 바뀌었다.

    꽈아아아아아앙-!!

    "으아아아아아!!"

    공포에 절은 놈들이 도망친다.

    도망치는 그 등에, 도진의 말이 이어졌다.

    "법이 오히려 너희 같은 쓰레기들을 지켜주는 최소한의 울타리라는 걸, 정작 너희들이 잘 모르더라고."

    "나는 그러니까 법 밖으로 벗어난 놈들을 아주 좋아해. 법이라는 성가신 걸, 신경쓰지 않아도 되잖아?"

    "히익. 히이이이이익!!"

    도진의 앞에 서게 된 놈이 게거품을 문다.

    도진은 겁을 먹어 눈깔이 돌아가 버릴 것 같은 놈에게 웃어 주었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 나는 사람을 죽이지 않으니까."

    투웅!

    "……!"

    가벼운 손짓에 놈이 멀리 날아가 나뒹굴었다.

    이렇다 할 상처는 전혀 없었다. 그저.

    "끄으아아아아아아악!!"

    천마기가 놈의 몸속을 혈관을 내달리는 가시처럼 난도질할 뿐.

    그리고 도진의 시선은 금랑회의 가장 높은 곳으로 향한다.

    "오늘 이 자리에서도 누구도, 죽지 않을 거야."

    * * * *

    "으아아아아악!!"

    창밖을 내려다보던 태금천이 새하얘진 얼굴로 비명을 지르며 나뒹굴었다.

    금으로 짠 귀한 가운이 더러워졌지만 태금천은 그것을 신경쓸 수가 없었다.

    '처, 처, 처, 천마.'

    지금 방문한 것이 천마라는 걸, 놈이 작심하고 왔다는 걸 눈이 마주친 순간 본능으로 알아 버렸으니까.

    평소 천마 김도진을 천마의 이름을 사칭하는 더러운 이단이라고 생각했던 그는 그러나 눈이 마주친 순간 그랬던 과거의 자신을 완전히 잊을 정도로 공포에 질려 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모든 걸 내던지고 오직 생존만을 위하여 네발로 기듯 움직이기 시작했다.

    두웅-!

    콰아아아앙!!

    끄으아아아아아악!!

    인지를 벗어난 어떤 소리. 폭발음. 비명.

    상상력을 자극하는 뒤에서 들려오는, 그리고 점점 가까워지는 소리에 태금천은 침을 질질 흘릴 정도로 다급하게 내달려 이윽고 목적지에 도착했다.

    "비켜 이 새끼들아!!"

    심상치 않은 소란에 짐을 옮기다 말고 서성이던 부하들을 거칠게 밀치고서 태금천은 통로 안에 들어가 패널을 조작했다.

    삐, 삐빅. 삐삐삐삐!

    "씨, 씨발! 씨바아아알!!!"

    손이 떨려 비밀번호를 틀렸다.

    손을 잘라 버리고 싶다는 충동을 느끼고, 피가 날 정도로 입술을 깨물며 겨우 비밀번호를 치고 지문 인식까지 거쳐 마침내.

    늦지 않게, 공포가 도달하기 전에 비상 통로의 두꺼운 문을 닫을 수 있었다.

    닫힌 문의 두께는 비정상적이었다.

    어마어마한 돈을 들여 설령 화경의 고수라 하여도 쉽게 부술 수 없도록 만든 문이다.

    기술 이전에 그냥 무식하게 단단하도록 재료를 때려박아 압축했고 그 강도는 상상도 못할 영역에 있다.

    그 문을 닫고서야 반쯤 나가 있던 정신이 돌아온 태금천이었고.

    "크흐흐. 늦었구나."

    문에 작게 난 구멍 너머로 보이는 천마를, 순식간에 주변마저도 정리해 버린 천마를 비웃는 짓을 할 여유가 생겼다.

    천마는 우선 말없이 주먹을 쥐고서 문을 때렸다.

    꾸우우우웅-!

    "……!!"

    간접적인 여파만으로도 내부를 진탕시키는 기세에 태금천이 저도 모르게 주춤거리며 물러섰다.

    그리고 멀쩡한 문에 추태를 부린 자신을 탓하고선 그것을 감추듯 크게 말했다.

    "이거 핵 방공호보다 단단한 문이야 이 새끼야!"

    "그래?"

    "늦었다고 했지? 네놈이 이걸 부술 즈음에 난 이미 여기에 없을 거다! 그리고 몇몇 하찮은 놈들의 목숨도 이 세상에 없겠지!"

    제법 머리가 굴러가는 태금천은 어느 정도 상황을 유추하고 있었다.

    잘은 모르겠지만 천마가 움직였고 '야반도주'를 하려 했던 금랑회의 본진을 치러 왔다.

    그러나 늦었다.

    이미 수많은 마을에서 잔혹한 학살극이 끝났을 것이고 범인들은 서부 무림 바깥으로 도주중일 것이다.

    그리고 이제 태금천도 서부 무림을 떠난다.

    "거기서 두 눈깔 뜨고 무력함이나 맛 보거라! 크하하!"

    태금천은 최대한 크게 비웃고서는 뒤돌아 달리기 시작했다.

    짐짓 여유를 부렸으나 속으론 조급했던 것이다.

    도진은 그렇게 달리는 태금천의 등을 보면서.

    스윽-

    주먹을 쥐었다.

    -발경은 이렇게 쓰는 것이다.

    처음, 스승 위지혁이 가르쳐 주었던 발경(發勁)의 가르침을 떠올린다.

    쿠웅-

    강하게 진각을 밟는다.

    그리하여 발생한 힘이 발목을 타고 허리로, 허리에서 어깨로, 어깨에서 주먹으로 이동하는 동안 회전을 통하여 몇 번이고 배가된다.

    당시에는 그저 겉으로 보이는 피상적인 동작만을 따라하는 것만으로도 벅찼지만.

    더 넓고 깊어진 시야가 이제는 그 안에 담긴 이치마저 동작에 담을 수 있게 해 주었다.

    그리고 거기에 깃드는 천마기까지.

    오오오오오오-!!

    포효하는 기운이 도진의 주먹에 어려 앞을 막고 있는 것을 꿰뚫는다.

    꾸우우우우우웅-!!

    "으아아아아악!!"

    저 멀리 도망치던 태금천의 비명이 터져 나온다.

    통로를 꿰뚫고 내달리는, 부서진 문의 파편과 섞인 폭발한 기운이 마치 승천하는 용과 같은 기세로 도주하던 태금천을 휩쓸어 버린 것이다.

    저벅.

    도진은 급하지 않게, 그저 느긋하게 태호와 함께 걸어 넝마 꼴로 나뒹구는 태금천을 내려다 보았다.

    "끄, 끄으억……."

    "오늘 이곳에선 누구도 죽지 않아. 그리고."

    "서부 무림의 범죄자들 중 누구도, 이곳에서 나가지 못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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