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해서 지존까지-687화 (687/741)

687화

서부 무림 대책위원회가 설립되고 어느새 3주.

금방이라도 서부 무림을 향해 진격할 것만 같이 타오르던 분위기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자연스럽게 잦아들었다.

그동안 성과라곤 없었던 남방 영토 회의와 같은 문제가 생긴 건 아니다.

본래 해야 할, 거쳐야만 할 절차가 제법 시간을 필요로 했고 그것이 사람들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할 만큼 길었던 것이 원인이었다.

규모가 큰 일이란 것은 그 규모만큼이나 복잡하고 많은 절차를 거쳐야 했고 그것이 국가 단위의 것이라면 아예 개인으로선 상상도 힘들 정도로 스케일이 커져 버린다.

바할라를 포함한 여섯 나라가 서부 무림 토벌대에 지불할 보수를 마련하기 위한 예산 편성에 들어갔고 남쪽 나라에 자리잡은 무림 문파가 토벌대에 합류하기 위하여 수많은 지원서를 냈다.

예산 편성을 위해서는 각계 각처와 협의를 해야 하고 의결 절차도 거쳐야 한다.

토벌대 편성을 위해서도 지원서를 낸 수많은 무림 문파의 검증 과정부터 시작해 해야 할 일이 많다.

그것들 모두가 결코 일이주로 될 일이 아닌 것이다.

분명히 서부 무림 토벌을 위해 대책위원회는 쉼없이 전진하고 있었지만 하루아침에 도달할 만큼 목적지가 가깝지 않았으니 사실은 이게 지극히 평범한 경우였다.

때문에, 토벌에 대한 열기는 가라앉았지만 그 불씨는 꺼지지 않고 인터넷에서의 논쟁으로 옮겨 붙었다.

-그러니까, 이런 이유로 토벌이 바로 진행이 안 되는 거지 남방 영토 회의랑은 분위기가 다르다고.

-내 생각은 좀 다른데. 천마가 그동안 해 온 거 생각하면 일이 이렇게 느릴 이유가 없음.

-ㅇㅇ 나도 같은 생각임. 이건 그냥 서부 무림 새끼들한테 토벌하기 전에 ㅌㅌ하라고 시간 주는 건데.

-그렇게 1차원적인 일은 아닌 거 같음.

-1차원이 아니면 2차원 3차원적인 일은 뭐냐.

-어렵지 않음. 이대로 서부 무림 토벌하겠다고 갖다 밀어버리면, 그새끼들이 그냥 죽겠냐. 절대로 그냥 안 죽겠지.

-그건 그렇네.

-그러니까 그럴 수도 있음. 괜히 지랄하지 말고 얌전히 떠날 구멍을 만들어 준 거지. 이미 처음부터 지랄하던 새끼들 있었잖아. 이런 식으로 강압적으로 하면 무고한 시민들(아님)한테 큰 피해 갈 거라고.

-(아님)에서 우리편이란 건 알겠다. 일리있네 ㅋㅋㅋ

토벌이 왜 금방금방 진행 안 되냐. 그것도 모르냐. 큰 뜻이 있어서 그런 거다. 있기는 무슨. 결국 요란하기만 하고 결과는 별거 없을 거다.

매일 논쟁이 도돌이표를 그렸고 와중에는 조금, 날카로운 의견도 있었으니 토벌에 의한 희생자를 줄이기 위한 노력이라는 부분이었다.

어둠이 내린 사막의 밤. 최태호를 바래다주기 위하여 함께 하는 흔한 무인과 흔하지 않은 포부문의 3인자, 조서강이 그러했다.

프로니모스 사립 학교를 나와 집으로 향하는 길에 동행하는 무인이 다른 사람도 아니고 포부문의 3인자인 건 특기할 만한 일이다.

그 3인자가 최태호와 함께 서부 무림의 마을에 들어선 것은 설득과 권유를 위해서였다.

힘이 약한 빛이 어둠을 채 다 몰아내지 못하여 어스름한 마을 가운데 작은 광장.

대부분이 모였음에도 백 명에 한참 모자라는 이들의 가운데 선 조서강이 내공을 담아 또렷한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이대로 가면, 분명히 여러분들을 수탈하던 자들이 과격한 수단을 쓸 거라는 건 명확합니다. 그러니 잠시라도 몸을 피하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바할라로, 진나라로 아예 오라는 게 아닙니다. 그저 잠시만. 몰아치는 비바람을 잠시 피하기 위하여 남의 집 처마 밑에 잠시 서는 정도의 선택을 하시라는 겁니다."

"머무시는 동안 임시로 숙소가 제공될 것이고 식사 또한 나올 겁니다. 그리고 일이 다 끝나면, 결코 잡지 않을 겁니다. 그건 저, 포부문의 조서강이 보증할 테니 한 번만 믿고 잠시만. 일이 끝날 때까지만 쉬르네폴리아에 머무시라고 부탁드리러 왔습니다."

조서강은 열띤 목소리로 그들에게 말했다.

사람은 육감이란 게 있는 동물이어서 낯선 이방인의 입장에 있는 조서강이 그러나 진심으로 그들을 위하여 말하고 있음을 알 수 있게 해 주었다.

그래서 일부는 흔들렸다.

조서강의 진심이 담긴 말에 틀린 게 없었기에.

벌써부터 주에 한 번씩 '이자'를 받기 위해 오는 자들의 기색이 심상치가 않았다.

주민 중 한 명은 별 거 아닌 일로 주먹을 얻어맞기까지 했으니 요즘 마을 분위기가 말이 아니었다.

이대로 가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고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른다.

그러니까 이 젊은 무인의 말대로 잠시, 그저 비를 피한다는 생각으로 잠시 도시 안에 머무는 게 현명한 판단이 아닐까.

"즉시 답을 달라고 강요하는 건 아닙니다. 잘 생각해 보시고 언제라도 좋습니다. 주기적으로 사람이 올 테니 말씀해 주시면 즉시 조치해 드리겠습니다."

조서강은 고민하는 주민들에게 이 자리에서의 결정을 강요하지 않고 언제든 들어올 수 있도록 문을 열어 두었다.

그것이 포부문이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싫다는 이까지도 '억지로 구하는' 것은 포부문은 물론이요 천마신교의 방식도 아니었으니까.

선택은 스스로 해야만 하는 법이고 그 선택에 대한 책임 또한, 스스로 져야 하는 법이다.

이야기가 끝나고 주민들이 각자 집으로 흩어졌다.

조서강과 함께 했던 무인 또한 돌아가려 했으나.

"잠시, 이야기를 할 수 있겠소?"

최태호의 아버지 최항선의 말에 두 사람은 걸음을 멈추고 작은 집에 들어서게 됐다.

"내어 드릴 것이 변변찮아 면목이 없소."

"아니, 따듯한 차로 충분합니다."

낡은 잔을 하나씩 받아들고 좁은 방에 앉았다.

최태호는 어머니를 돕겠다고 일감을 보관해 두는 별채 겸 창고로 갔다.

"……."

차를 한 모금 넘기는 동안의 침묵이 있고서 최항선이 먼저 입을 열었다.

"염치없는 이야기지만, 아이만이라도 따로 부탁드릴 수 없겠습니까."

조서강의 얼굴이 미미하게 찌푸려졌다.

"아이만이라면. 태호만 따로 데려가 달라는 말씀입니까."

"예. 필요하다면 어떻게든 금전은 마련할 터이니 기숙사에라도 머물 수 있게 해 주실 수 없을까하여 자리를 청한 것이오."

조서강의 호흡이 조금 거칠어졌다.

"돈은 필요없습니다. 태호만, 데려갈 필요도 없습니다. 그냥 다 같이, 같이 잠시만 머물면 되는 거 아닙니까. 왜 아이만 따로 보내려 하십니까."

최항선은 무거운 숨을 내쉬고 말했다.

"저는, 여기 남아야 할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무엇 때문에요."

"약조를 하였고 지켜야 합니다. 빌린 돈을 갚아야 하니 그 약조를 등지고 떠날 수는 없는 일입니다."

마을을 떠나 그곳에서 머무는 동안은 일을 할 수 없고 그러면 매달 갚아야 하는 이자를 갚을 수 없다.

그것은 결코 해서는 안 될, 약조를 어기는 일이 된다는 것이다.

조서강이 이를 악물었다.

"그 약조를 지키려다가…… 잘못되면요. 태호는 어떡합니까."

최항선이 눈을 감았다.

그리고 무수한 속내의 무게가 담긴 숨을 내뱉고선 말했다.

"태호는 영특한 아이이니, 잘 해낼 것입니다."

"무엇이요!!"

조서강이 참지 못하고 버럭 소리쳤다.

폭발하여 터져 나온 감정이 목소리보다 커다랗게 최항선을 때렸다.

"부모를 잃은 아이가 어떻게, 어떻게 사는지! 무얼 잘 한다는 말입니까!!"

휘몰아치는 감정이 조서강의, '화이트칼라'로서의 이미지를 희석시키고 만다.

억지로 그것을 억누르지만 채 다 누르지 못한 감정이 흘러넘친다.

"부모없이 사는 게, 얼마나 슬프고 힘든지 아십니까? 얼마나 괴롭고 힘든지. 기댈 곳 없이 사는 게 얼마나 힘든지. 그런 삶을 살라고, 하는 겁니까. 당신은."

조서강은 부모를 모른다.

힘들고 또 괴로워 그만큼이나 부모를 원망하고 또 원망했고.

그럼에도 그리워하였다.

조금, 기대를 했다.

이렇게나 성공했으니까 어쩌면.

부모가 찾아올지도 모른다고.

자신을 버린 게 참으로 원망스럽지만 그래도. 그래도 찾아온다면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다고 생각했었다.

…그 기대는 아직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곁에서 조용히 듣고 있던 무인은 침묵하였고 최항선 또한.

더 말을 잇지 못하였다.

* * * *

대화는 더 이어지지 못했고 조서강은 방을 나왔다.

그리고 마당의 어두운 구석에 앉아 있던 최태호를 보았다.

"…뭐하고 있어."

조서강이 다가가 물었다.

최태호는 다가오는 조서강에 고개를 들고 웃으며, 젖은 눈으로 웃으며 말했다.

"그냥요."

조서강은 그 젖은 눈을 지적하지 않고 곁에 털썩 주저앉았다.

자주 보는 사이였고 형 동생 하면서 지냈으나 오늘만큼은 조금, 어색했다.

항상 밝았던 최태호의 눈물이 그렇게 만들었다.

"…아버지가, 밉지 않아?"

조서강이 조심스레 물었다.

갑작스러운 일이었고 섭음술을 쓰지도 못했으니 방에서의 이야기가 다 새어 나갔다.

그 이야기를 다 들었을 최태호는.

"아뇨. 전혀 밉지 않아요."

그러나 단호하게 그리 대답하였다.

"그래?"

"네. 내가 존경하는 아버지는, 그런 아버지니까요."

약조를 하였으니 지켜야만 한다.

그 대상이 비록 서부 무림의 범죄자들이라 하여도.

어리석고 또 융통성이 없는 자라 욕할지도 모른다.

아니, 대부분은 그러지 않을까.

"하지만 그래도. 약속을 결코 어기지 않는 게, 잘못된 건 아니잖아요? 그런 아버지니까 나는 존경하는 거고 그러니까 미울 리가 없죠."

"…그래. 그렇구나."

조서강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었다.

감정적으로는 받아들이기 힘들었지만 그게 틀리지 않았다는 것만은, 머리로 이해할 수 있었다.

그래. 약속은 지키라고 있는 거다.

그 약속을 지키려는 마음가짐은 틀리지 않았다.

오히려 약속을 지키는 것이 옳지 않은 게 되는 세상이 잘못된 거다.

이런 세상이기에 최항선과 같은 이의 정신은 더욱 고귀한 것이다.

그리고 그런 고귀한 정신을 가지고 어떤 상황에서도 변하지 않는 아버지를 존경하니까.

최태호는 아버지를 미워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래도.

조서강은 아이만 따로 보내겠다는 최항선의 선택을 결코, 가슴으로는 정답이라 인정할 수 없었다.

"어렵네, 태호야."

"그러게요. 이래서 사람들이 고구마 고구마 하는 건가봐요."

"넌 지금도 농담이 나오는구나."

"아프고 힘들 때 웃는 사람이 일류래요."

"하. 그놈의 일류. 난 슬슬 절정으로 올라가고 싶다."

억지로 농담을 한다.

그렇게라도 하니까, 답답하던 속이 좀 내려가는 거 같다.

'위로 좀 해줄까 했는데.'

오히려 이 속 깊은 녀석에게 위로를 받고 말았다.

조서강은 자책을 하면서 툭툭,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밤이 많이 깊었다.

이대로 계속 있을 수는 없으니 슬슬 떠나려 했고.

"……."

일어난 그대로 굳은 채 조서강의 얼굴이 사막의 밤보다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탁 트인 사막의 저편. 횃불을 든 이들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깊은 밤 사막 가운데 작은 마을로 다가오는 이들.

선자불래(善者不來) 내자불선(來者不善)이란 문장이 떠올랐고 그 말대로였다.

흉흉한 기운을 뿌리는 자들이, 좋지 않은 의도를 가진 자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