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6화
주말.
도진은 숙소를 나서 포부문을 방문하였다.
일전과 같은 이유, 프로니모스 사립 학교에 봉사 활동을 하러 가기 위해서였다.
"음. 오늘도 역시나 강해 보이네, 태웅아."
"…감사합니다."
사장님 태가 나는 깔끔하고 멋진 정장 차림의,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혀 가려지지 않는 압도적인 근육으로 꽉 찬 거구의 벽태웅이 도진의 말에 조금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그리고 그 옆에서 즉시 도진을 비난하는 소리가 날아든다.
"와, 저놈 기만 봐. 태웅이가 동생이라고 아주 그냥."
"그에 비해 너는 아직도 애 같구나. 처남."
"처남이라고 하지 마!"
버럭 소리를 지르는 건 트레이닝복 차림의 오대용이다.
그 곁에는 역시 활동하기 편한 복장에 머리를 질끈 묶은 오대용의 아내, 주정아가 차분하게 웃고 있었으니 두 사람도 오늘 봉사를 함께 하는 일행이었다.
도진은 오대용의 항의를 무흔잠영의 지극한 이치로 흘려 보내고서는 주정아에게 물었다.
"많이 바쁠 텐데, 괜찮아?"
"괜찮아. 여유가 났거든."
사실 도진이 참여하고 있는 이 봉사 활동은 주기적으로 프로니모스 사립 학교에 방문하는 봉사 단체의 활동이었다.
김서우의 유호 건설, 벽태웅의 포부문, 여기에 오대용이 대표로 있는 오성 건설 쉬르네폴리아 지사 세 곳이 중심이 되어 활동하는.
돈만 기부하는 게 아니라 이렇게 직접 그들 사이에서 함께 활동하는 모습으로 제법 여러 곳에 기사도 났었다.
김서우와 벽태웅, 오대용까지도 매번은 아니지만 꾸준히 참여하곤 했었는데 이번에는 그중 벽태웅과 오대용까지 두 명의 대표가 모였다.
시기를 생각하면 조금 더 그것이 특별해지는데.
[움직이기 시작한 쉬르네폴리아. 서부 무림의 끝을 고하나?]
[포부문의 패권(覇拳) 벽태웅. "움직일 때가 왔다."]
[오대용 대표. "도시의 위협에 맞서 싸울 것."]
그런 기사들이 나올 만큼 도시가 가열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서부 무림 대책위원회가 정식으로 출범하였고 활동을 시작하였으니 그 첫걸음으로 예산 편성과 함께 서부 무림 토벌에 참여할 문파들의 지원을 받았다.
쉬르네폴리아와 함께 살아가는 유호 건설과 포부문, 오성 건설의 지사가 여기에 빠질 수 없었으니 기부는 물론이요 무력 또한 보태기 위하여 여러가지 업무를 소화해야만 했다.
그런 이유로 상당히 바빴을 그들 중 둘이나 되는 대표가 오늘 봉사에 모였으니 특별한 일이 되는 것이다.
"뭐, 바쁜 거야 항상 바쁜 거니까. 이렇게 바깥 바람도 좀 쐐야지 않겠어."
중얼거리듯 말하는 오대용의 얼굴을 도진이 두 눈에 담는다.
말 그대로 중얼거리듯, 흘리듯 하는 말이지만 그 안에는 제법 감정이 담겨 있으니 오대용 또한.
'어른'이 되면서 가지게 되는 여러가지 고민을 품고 있는 것이었다.
가지 많은 나무는 바람에 더욱 요란하게 흔들릴 수밖에 없다. 특히나 가지에 맺힌 것이 많으면 많을수록 더.
오대용은 금화가 사라지며 재계 서열 1위에 오른 오성의 직계이면서 또, 너무나 존재감이 커져 버렸기에 자그마한 바람에도 요란하게 흔들려야만 했다.
오성의 중심에서 살아가기로 결심하였고 그를 위해 노력하였지만 굳이 할아버지, 사자군(獅子君)의 후계자가 될 생각까지는 없었던 오대용이었다.
하지만 쉬르네폴리아 지사가 상상을 아득히 넘어설 정도로 커지고 또 사자군의 관심이 향하면서 이야기가 달라진 것이다.
-너희들도 좀 분발해야겠구나.
단순한 한 마디였으나 그것이 사자군의 말이었기에 오성의 후계 구도를 뒤흔들었다.
적수가 아니라 생각했기에 내버려 두었던 오대용이 후계 구도에 들어오면서 '외부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고 여기에 제법,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것이 보였다.
스윽-
하지만 도진은 곧 오대용에게서 시선을 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오대용이 말했듯 이 자리는 바깥 바람을 쐬기 위한 자리.
굳이 그 이야기를 꺼낼 필요가 없었으니까.
"그럼, 저녁에 보자."
"그래."
프로니모스 사립 학교에 도착하여 도진은 일행과 떨어졌다.
이곳에서 도진은 그저 외부에서 봉사를 신청하여 참여한 '흔한 무림인'이었으니까.
벽태웅이나 오대용과 함께하는 건 어색한 것이다.
그리하여 외부에서 온 봉사인들 사이에서 일을 배정받았고 짝이 된 것이.
"이야, 인연이네."
"그러게요."
최태호였다.
* * * *
오늘의 봉사는 그러니까…… '진지 구축' 같은 느낌이었다.
담벼락, 화단, 체육 시설, 기숙사 등을 둘러보고 하자가 있는 곳이 없는지 체크하고 만약 있다면 어느 정도인지 확인 후 보수할 수 있는 정도라면 하는 것이다.
오기 전 듣기로 일반인이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시설의 유지보수를 하는 걸 돕는 활동이라 했는데 이게 생각보다 더 본격적이었다.
사실상 업계의 기술자 수준으로 일을 척척하는데 이곳이 쉬르네폴리아임을 떠올리면 또 의외는 아니었다.
쉬르네폴리아의 국민들은 모두 스스로가 살 집을 지은 '경험자'들이었으니까.
다만 쉬르네폴리아의 국민이 아닌 최태호가 심지어 어린 나이임에도 일에 능숙한 건 특별한 부분이었다.
"어릴 적부터 손재주 있다는 이야기는 많이 들었거든요."
"그랬어?"
"네. 우리집 짓는 것도 도왔고 말이죠."
"효자네."
"제가 좀 효자죠."
이곳의 기숙사에 살지 않는 최태호가 김장이라는 특별한 이벤트도 없는 오늘 이곳에 있는 건 최태호에게 있어서 이 일이 일당이 나오는 일거리였기 때문이었다.
최태호만이 아니라 오늘 참여한 봉사자를 제외한 모든 이들에게는 일당이 지급되었다. 아이들까지도.
의도는 그거다.
세상 모든 일이 저절로 되는 건 없고 누군가의 노력과 노동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걸 알게 하고 또 그 노력과 노동에 대가가 지급되는 사회를 체험시켜주는 것.
도진은 그 의도에 공감하여 고개를 끄덕였고 최태호와 함께 노동 후의 저녁 식사를 함께 하였다.
일이 끝나고 개운하게 샤워 후 즐기는 푸짐한 저녁은 그야말로 진수성찬이었다.
"끄응."
"오늘은 그래도 기운이 좀 남으셨네요?"
"무림인이잖아."
"김장은 이기지 못했지만요."
"그건 레이드 이벤트라 별개야."
툭툭. 가벼운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그리고 자연스레, 조금 무거운 이야기가 나왔다.
"네. 정말 잘 된 일이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당장은 조금 힘들어지겠네요."
최태호가 먼저 서부 무림의 정세에 관해 이야기를 꺼내 놓았고 여기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솔직하게 말한 것이다.
혹시라도 오해할 것을 우려하였는지 최태호는 즉시 말을 덧붙였다.
"무조건 해야 할 일이에요. 세상이 더 나아지긴 위한 일이죠. 하지만 변화에 따라가야 할 사람도 있으니까요. 자업자득, 이지만."
"…그렇지."
억지로 몸을 욱여 넣어 적응했는데 그 틀의 모양이 바뀌어 버린다면.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틀을 버리거나. 혹은 다시 고통을 감내하며 바뀐 틀에 적응해야만 한다.
서부 무림의 범죄자가 아닌, 그들에게 수탈당하는 이들이 그런 입장이었다.
그들은 변화에 수동적으로 휩쓸려야만 했고 저항하기엔 너무 미력했다.
지금까지는 '미묘한 선'이 있었고 그것만큼은 범죄자들 또한 지켜왔다.
그 선마저 넘어 버리면 외부의 힘이 개입할 명분을 주게 되니까.
적나라하게 예를 들자면, 그들이 대학살을 저질러 버리면 결코 좌시할 수 없게 되고 외부에서라도 토벌대가 동원될 수 있는 명분을 주는 것이다.
그러니까 선을 지킨다.
수탈을 하되 선을 넘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게 유지되던 균형이 깨어질 시기가 확정적으로 다가오게 됐다.
천마에 의해, '서부 무림 토벌'이 준비되고 있었다.
토벌이 있기 전에 범죄자들은 떠나거나 몸을 숨겨야 했고 그런 입장이 되었으니 그들은.
선을 지킬 필요가 없어져 버리는 것이다.
아직은. 아직까지는 술렁이는 단계다.
지금 분위기야 당장이라도 서부 무림을 토벌하러 진군할 기세지만 실제로 이런 커다란 일은 '절차'라는 게 복잡하고 길어서 단계를 밟아야만 했으니까.
여기서 단계를 밟는 데에 비협조적인 움직임이 있다면 토벌은 늦어질 수밖에 없고 규모만큼이나 늦어지는 시간 또한 길어질 수밖에 없다.
서부 무림의 주요 토벌 대상인, 힘있고 거대한 범죄 단체들은 그렇게 토벌 시기가 어떻게 될지 관망하고 있는 단계였다.
그리고 그 아래의 범죄 단체들은 그들의 결정에 따라 움직일 수 있도록 긴장하고 있었고.
하지만 한 가지. 어느 쪽이든 서부 무림에 사는 '일반인'들은 비극을 맞이해야만 하는 입장이었다.
범죄 단체들이 떠나기 전 분명히 선을 넘을 것이고 그 대상은 일반인이 될 것이었으니까.
그저 빠르든가 늦든가, 그 하나의 차이만이 있을 뿐이었다.
실제로 그에 관한 걱정을 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다만 반응은 둘로 나뉘었으니 한쪽은 그에 관한 대책이 없다면 토벌을 진행해서는 안 된다는 반대파. 다른 한쪽은.
-그 새끼들 '개인의 선택'까지 우리가 신경써 줘야 됨?
-그러게. 시발 지금이라도 나오면 그만 아니야. 거기 처박힌 새끼들 커버까지 우리가 손해보면서 해 줘야 할 이유가 뭐임?
오히려 그들을 비난하며 전혀 신경써 줄 필요가 없다는 찬성파였다.
어느 정도는.
도진은 찬성파의 의견에 공감하는 입장이었다.
냉정하게 말해 틀리지 않았으니까.
어떤 이유든. 남에게 피해를 주어서는 안 될 일이다.
약자(弱者)라고 해서 무조건 선(善)인 건 아니다.
서부 무림에 사는 이들은 무단으로 공백 지대를 점유하였고 범죄자들을 살찌우게 만들었다.
모든 걸 다 떠나서 그것만큼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고 그곳에서 사는 이외의 선택지 또한 분명히 있었다.
그러니까 그들은 무조건적인 피해자가 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도진은 결코 범죄자들이 그들을 수탈하도록 두지 않을 생각이었다.
나쁜 놈들이 이득을 보는 세계를.
도진은 결코 바라지 않으니까.
결코 인정할 생각이 없으니까.
도진이 원하는 건 악자(惡者)가 철저하게 벌을 받고 이득을 취할 수 없는 세계다.
그것은 지금도 결코 변하지 않은 도진의 바람이니.
"걱정하지 마."
도진이 최태호를 마주하여 웃으며 말했다.
"분명히, 잘 될 거야."
최태호는 네, 고개를 끄덕였다.
* * * *
늦은 밤.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도진이 거실에 앉아 서류를 처리하고 있는 오성아의 곁에 앉았다.
수많은 서류가 여기저기, 그러나 놀라우리만치 정확하고도 명확하게 분류되어 놓인 가운데 방해되지 않도록 머리를 올려 묶은 오성아가 태블릿을 조작하고 있다.
그녀가 처리하고 있는 건 다름 아닌 서부 무림 대책위원회와 관련된 서류다.
만약 이와 관련하여 서류를 파악하고 분석할 수 있는 안목을 가진 이가 보았다면 두 눈을 크게 뜨고 경악하였을 것이다.
지금 오성아가 처리하고 있는 서류에는 그만큼, 충격적인 내용이 가득하였다.
"눈나."
"응."
"노르드와 벨라 쪽은 어때요?"
도진의 물음에 오성아의 입꼬리가 조금, 날카롭게 올라갔다.
"예상대로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