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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해서 지존까지-685화 (685/741)
  • 685화

    경계없이 웃는 그녀의 얼굴은 이 정원에 녹아든 노을빛을 닮아 있었다.

    아름답지만 짙게 음영이 져 있었고 그 음영은, 그녀의 안에 켜켜이 쌓인 고심(苦心)으로 인한 그늘이다.

    도진은 천천히 테이블로 다가가 그녀. 위서린의 앞에 서서 물었다.

    "합석해도 될까요, 서린 씨?"

    위서린이 도진의 말에 상체를 느릿하게 들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네. 물론이죠. 도진 씨라면 얼마든지, 요."

    조금 느릿하게 늘어지지만 발음은 분명한 목소리다.

    그녀 또한 경지에 오른 무림인이었기에.

    비록 취기를 억누르지 않음으로써 몽롱해질 수는 있으나 이성이 완전히 풀어질 수는 없었다.

    위서린의 허락에 도진이 테이블의 맞은편에 앉았다.

    테이블 위에는 독하기로 유명한 양주가 몇 병, 그리고 조촐한 안주가 놓여 있다.

    이미 비워진 병이 두 병이나 되었는데 평범한 사람이라면 반병도 마시지 못할 만큼 독한 술이었으니 고수인 그녀가 취할 수 있었다.

    도진이 테이블에서 위서린의 눈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웃으며 말했다.

    "같이, 마실까요?"

    위서린의 풀린 눈이 조금 커졌다.

    "도진 씨는 술, 안 마시잖아요?"

    "안 마시는 거지 못 마시는 건 아니니까요. 밥도 그렇지만 술도 혼자 먹는 거 별로잖아요? 여기엔 콜라도 없으니…… 같이 마셔 드릴게요."

    그러면서 처억, 양주를 들어선 비어 있던 위서린의 술잔을 채워 주었다.

    "저도 채워 주세요."

    위서린은 도진이 내민 양주병을 찰나 머뭇거린 뒤 받아들고서 도진이 내민 잔을 채웠다.

    "짠, 할까요?"

    "…네."

    쨍. 가볍게 부딪친 술잔의 소리와 함께 술을 넘긴다.

    도진은 크으, 얼굴을 찌푸리고선 마른 안주를 집어먹었다.

    "쓰네요. 서린 씨는 어때요. 술 좋아하는 사람은 이런 거 달다고 하던데."

    도진의 물음에 위서린의 머리카락이 찰랑였다.

    "잘, 모르겠어요. 그냥. 몸 속에 술보다 더 쓴 게 있는데. 그걸 좀 희석시켜 주는. 그런 느낌으로 먹는 게 아닐까 싶어요."

    "그렇군요. 시적이네요."

    주억이며 도진은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다시 한 잔을 주고 또 받고선 건배.

    아까와 마찬가지로 한 번에 다 마시고 이번엔 별말없이 한 번 더 건배.

    몇 번이나 크게 의미없는 이야기와 술이 돌았고 그 사이 위서린은 조금 더 느슨해졌다.

    이성을 잃는 일은 없지만 취기를 억누르지 않기에 조금씩 조금씩 빗장이 느슨해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느슨해진 빗장을, 도진이 조심스레 두드렸다.

    "무엇이 그렇게, 서린 씨를 힘들게 하나요?"

    "……."

    담담한 물음이었다.

    평소라면 꼭꼭 숨겨두고 결코 내보이지 않았을 텐데.

    어느새 해가 지고 은은한 빛만이 어린 정원 속.

    여기에 단 한 사람만이 앞에 있으니 느슨해진 빗장을 뚫고 속내가 흘러 나오고 말았다.

    "…스스로의, 부족함이요."

    "부족함."

    "나는 진나라의 여황인데. 잘 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고 있는 스스로가 아파서요."

    그것은 책임감이었다.

    수많은 사람을 이끄는, 가장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으로서 이상적인 군주가 되지 못했다.

    스스로의 기준을 충족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자책감이 그녀의 속에 그리도 켜켜이, 검게 쌓여 있는 것이었다.

    "나를 믿고 이곳에 정착하고 낯선 세계에서 열심히 살고 있는 사람들인데. 그 사람들에게 나는 가장 좋은 것을 주지 못했어요. 아니, 당연히 줘야 할 것도 주지 못했어요."

    쉬르네폴리아는 이상향이 아니었다.

    현실적으로 '이상향'이 될 수도 없었다.

    그러나. 하지만.

    최소한 서부 무림의 위협 등 있어선 안 될 것에 대한 대처만큼은 확실히 했어야 했는데.

    진나라의 여황이면서도 위서린은 그것을 하지 못했고 그런 자책감이 스스로를 찌르는 비수가 되어 있었다.

    "제가 해야 되는 일이었는데. 도진 씨가 하게 만들었어요."

    결국 도진이 나서야 했다.

    그녀가 했어야 할 일을, 도진이 하게 만들었다.

    가소천을 몰아낸 것도 도진이었는데.

    백성들을 이 세계로 이끄는 위험한 일을 도맡았던 것도 도진이었는데.

    쉬르네폴리아, 진나라의 우환마저 도진이 해소하게 만들었다.

    위서린은 그렇게 만든 스스로를 책망했다.

    차라리 처음에 좀 더 힘들더라도, 여황 같은 건 없는 진나라를 만들어야 했다고.

    그렇게 생각할 만큼.

    "음……. 그러시면 저도 그렇겠지만 사람들도 슬퍼할 거예요."

    위서린이 풀어놓은 속내에 도진은 그렇게 말했다.

    위서린과 눈을 맞추고서 도진이 말을 이었다.

    "밖에서 일을 하는 아버지와 아이를 돌보는 어머니가 있다고 해 보죠."

    "아버지는 돈을 벌고 어머니는 아이를 보살펴요. 아이는 어머니를 더 좋아하고 아버지가 조금 낯설게 될 거예요."

    "아이는 점점 커 가는데 아버지는 자책을 해요. 내가 좀 더, 더 많이, 아이에게 더 좋은 걸 많이 해 줬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고. 그래서 어깨를 늘어뜨리고. 고개를 숙이고. 술을 마셔요."

    "……."

    "그런데 말이죠, 제법 큰 아이는 알고 있는 거예요. 어릴 적엔 밤에나 겨우 얼굴을 마주했던. 그래서 낯설기까지 했던 아버지가 사실은, 나의 세상을 지탱해 주었다는 걸."

    세상을 지탱해 주었다.

    위서린의 입술이 그 말을 읊조렸다.

    "내가 다 한 게 아니에요. 서린 씨가 다 해야 하는 일도 아니구요."

    함께.

    "다 함께 한 일인 거예요."

    도진의 목소리가 위서린에게 스며든다.

    "서린 씨가 아니었다면 제가 누굴 믿고 쉬르네폴리아를 맡길 수 있었을까요. 진나라의 사람들은 또 누굴 믿고 이곳에 와 다시 시작할 용기를 가질 수 있었을까요."

    "나도, 슈미트라도, 성아 누나도. 그리고 서린 씨와 진나라의 사람들까지도. 모두 각자가 해야 할 일을 최선을 다해 해 온 거예요."

    "할 수 있는 한에서 최선을 다했잖아요. 그런데 그보다 나은, 절대적으로 이상적인 것만 생각하면…… 상처입을 수밖에 없어요."

    이상을 지향하는 건 좋다.

    하지만 그것을 무조건적으로 실현하려 하면, 집착하면.

    사람은 결국 무너지고 상처입어 망가질 수밖에 없다.

    도진이 위서린과 눈을 맞추었다.

    "서린 씨는, 잘 했어요."

    "그리고 앞으로도 잘 할 거예요."

    그렇게 잘 해 나가다 보면 조금씩 닿는 것이 이상인 것이다.

    "자책하지 마세요. 서린 씨가 잘 했다는 건, 제가 누구에게든. 몇 번이 되었든 보증해 줄 수 있으니까요."

    황제라 하여도 기댈 곳이 필요한 법이다.

    도진은 황제인 위서린이 그곳에 닿는 여정 중에 기댈 수 있는 버팀목이 되어 주고자 했다.

    그러고 싶지만 그리 해 줄 수 없는 스승을 대신하여서.

    "서린 씨."

    "……네."

    "재워드릴게요."

    "……네?"

    "잠들 때까지. 제가 계속 잘했어요, 하고. 칭찬해 드릴게요."

    터무니없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술기운에 풀어진 그녀의 이성이, 더 터무니없는 판단을 내리고 말았다.

    "…부탁드릴게요."

    * * * *

    [서부 무림 대책위원회 발족!]

    남방 영토 회의가 끝나고 채 일주일도 되지 않아 남쪽 나라의 서부 무림을 토벌하기 위한 대책위원회가 발족하였다.

    전례를 찾기 어려운, 앞서 실망만 가득하였던 남방 영토 회의의 결과라고는 믿기 힘들 만큼 빠른 행보였고 사람들이 열광하였다.

    -ㄷㄷㄷ 개 빨라. 진짜 누가 칼들고 협박함?

    -천마가 칼들고 협박함ㅋㅋㅋ

    -아 ㅋㅋㅋ

    -아 ㅋㅋㅋ

    -천마가 칼 빼들었는데 어케 빨리 안함ㅋㅋㅋ

    남쪽 나라 전체가 들썩였다.

    대책위원회 설립과 함께 서부 무림 토벌을 위한 예산 편성부터 시작하여 군대가 아닌 무림인들이 동원된다는 소식에 남쪽의 무림이 근육을 과시하듯 활발하게 활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평범한 나라였다면 조금 달랐을 풍경이었다.

    따로 '군사 기업'이라 분류될 정도로 전쟁이란, 실제로 피부에 와 닿는 무게와 온도가 전혀 달랐으니까.

    하지만 남쪽 나라는 투쟁이 지극히 가까운 나라였고 자신들의 땅을 범죄자들에게 되찾기 위하여 무기를 드는 것을 꺼리는 이가 드물었기에 분위기가 고조된 것이다.

    당연히.

    "씨이발."

    서부 무림의 무법자들, 그리고 무법자들과 관련된 자들은 반대로 분위기가 싸하게 식어 있었다.

    당장 느껴지는 맞닿은 나라의 공기부터가 달라진 걸 피부로 느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거는 진짜로 좆된 거 같은데."

    서부 무림에 사는 이들을 수탈하여 마련한 호피로 장식한 의자에 앉은, 흉악한 인상의 거한이 한껏 얼굴을 찡그리며 중얼거렸고 그 아래 부하들이 눈치를 보았다.

    거한이 그렇게 눈치를 보던 이들 중 하나를 집어 물었다.

    "야."

    "예. 예!"

    '씨발…….'

    황급히 고개를 숙인 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2인자라는 건 평소에는 좋지만 이렇게 분위기가 좋지 않을 땐 또 독박을 써야 하는 리스크를 안고 있다.

    그 독박이란 게 그저 욕 먹고 뺨 한 대 맞는 정도가 아니라 팔다리 하나 썰리는 걸 각오해야 하는 '서부 무림'이기에 이렇게나 몸을 떠는 것이다.

    거한이 겁을 잔뜩 집어먹은 수하의 모습에 내심 흡족해하며 물었다.

    "노르드 쪽에서 뭐라고 하든?"

    "하, 항상 그랬듯이 최대한 비협조적으로 해 보겠답니다."

    "그게 끝이야?"

    "예. 별다른 말은 없었습니다. 그걸로 보면 천마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액션을 하긴 하지만 본격적으로 뭔가가 있을 거 같진 않을 거 같습니다."

    "액션. 새끼 문자 쓰네."

    그리 중얼거리며 거한은 잘 돌아가지 않는 머리를 드르륵 드르륵, 굴려 보았다.

    '어차피 떠날 거긴 하니까 상관없긴 한가.'

    굳이 이번 일이 아니더라도 알음알음, 거대 세력들이 영역을 옮길 거라는 믿을 만한 이야기가 솔솔 서부 무림 내에 돌고 있었다.

    믿는 놈이 절반, 안 믿는 놈이 절반이었는데 거한은 자신을 몇 번이고 살려준 감에 따라 떠날 채비를 하는 쪽이었다.

    이번 일은 여기에 등을 떠밀어 준 격이다.

    딴에는 입바른 소리를 해 보겠다고 별일 없을 거라 똘마니는 말하고 있지만 그의 감은 아니라고 소리치고 있었기에 더더욱.

    찔러주는 돈만큼 평소 정보를 주고 협조하던 노르드라지만 그 말을 무조건 철썩같이 믿는 건 이 바닥에서 병신이나 할 짓이다.

    서부 무림의 다수는 거한과 비슷하게 판단하여 떠나려는 기류가 흐르고 있었다.

    금방이야 별일이 없겠지 안일하게 생각하기엔 천마라는 이름이 너무나 컸다.

    특히 저쪽 세계에서 넘어온 거한 같은 이들이 그런 경향이 강했으니 인신(人神)이라고까지 불리던 가소천을 패배시킨, 심지어 살려서 붙잡은 게 당대의 천마였으니까.

    그렇게 여러가지 요인이 겹쳐 짧은 시간만에 크게 영역을 넓혔던 남쪽의 서부 무림은 또 그만큼이나 빨리 무너질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다른 나라의 일로 지켜보는 사람들.

    직접적으로 연관될지 모르는 무림의 사람들.

    그리고 자신의 나라의 일인 남쪽 나라의 사람들까지도.

    이번 일에 대해 긍정적으로 보았다.

    허나 또 한 명.

    남쪽 나라의 사람들보다, 쉬르네폴리아의 사람들보다 더욱 이번 일에 밀접한 아이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네. 정말 잘 된 일이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당장은 조금 힘들어지겠네요."

    쉬르네폴리아에서 배우는 아이.

    그러나 가족이 함께 사는 곳은 서부 무림인.

    최태호는 도진과 마주한 자리에서 그렇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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