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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해서 지존까지-684화 (684/741)
  • 684화

    사신공(死神功)의 기초는 무흔잠영(無痕潛泳)이다.

    행공(行功)이면서 동시에 체술(體術)인 무흔잠영에는 두 개의 요결(要訣)이 있으니 하나가 동화요 또 하나가 시선이다.

    시선(視線).

    눈이 가는 길.

    그러니까 무언가를 보기 위해선 눈과 대상 사이에 길, 선(線)이 있어야 하니 이 선에 대해 궁구함으로써 탄생하는 이치가 무흔잠영의 두 요결 중 하나가 된다.

    선이 이어지지 않으면 볼 수 없으니 선을 이을 수 없도록 그보다 더 근본이 되는 점(點)에 대해 공부하고 이용하는 것이 수련의 첫걸음이다.

    이로써 무흔잠영은 암살자가 사용하는 은신술(隱身術)로 기능하며 나아가 이 공부를 시선만이 아닌 투로(鬪路)에도 적용함으로써 체술까지 그 영역을 확장한 것이 무흔잠영인 것이다.

    허나 단순히 시선을 잇지 못하게 하는 것만으로는 상승의 공부에 이를 수 없다.

    무림(武林)이란 눈에만 의존하지 않는, 오히려 눈보다 더 정확하고 날카로운 감각을 지닌 이들의 세계이기에.

    소리, 체취, 기운. 나아가 심장이 뛰는 등 가장 기초적인 생체 활동마저 감지하는 영역에까지 은밀함을 요구해 버린다.

    이 요구를 충족하기 위해 무흔잠영은 또 하나의 요결인 동화(同化)를 논한다.

    단순히 숨거나 숨기는 데서 그치지 않고 오히려 동화하여 드러냄으로써 보고도 인지하지 못하는 고차원의 공부에 이르는 것이다.

    필사적으로 숨기는 것은 역으로 사람의 감각을 자극한다.

    하지만 숲속에 흔한 풀 하나는 제아무리 드러나 있어도, 보아도 '인지'에 이르지 않는다.

    그렇게 시선과 동화에 대한 깨달음이 경지에 이르면 비로소 진정한 사신의 공부, 사신공(死神功)에 이름이니 그 경지를.

    부지역(不知域)이라 하였다.

    * * * *

    스윽-

    팽팽하게 당겨진 긴장감이 공간 가득한 곳에 누군가가 발을 내딛는다.

    그 소리와 기척의 주인에게로 시선이 향하는 것이 자연스러워야 겠지만.

    스륵.

    감각을 날카롭게 유지하고 있는 몇 명이나 되는 무인들 중 누구도 끝없이 고혹적인 소리와 기척의 주인에게로 시선을 향하지 않는다.

    아니. 애초에 '인지'조차 하지 못하고 있다.

    그것은 무인들의 부족함이 아니니 사신의 손녀.

    사신에게 직접 사사받은 장소유가 부지역을 걷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눈은 결코 장소유와 닿아 선(線)이 되지 못하니 그녀를 볼 수 없다.

    또한 그들의 감각은 주변과 완전히 동화한 장소유를 잡아내지 못하니 그들에게 있어 장소유는 같은 공간에 있음에도 부지(不知), 알지 못하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신비'를 실현하는 데 일조하는 것이 바로 사신공의 독문진기. 침기(沈氣)다.

    의가(醫家)였던 가문에서 불치병을 치료하기 위하여 참오하고 또 궁구한 끝에 탄생하였으나 그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멸문지화의 잿더미 속에서 검게 물든 기운.

    본래 치료를 위해 탄생한 기운은 그렇기에 망가뜨릴 수도 있었고 사신에 의해 진보하며 침기로 정립되었다.

    할아버지에게 배운 침기를 두른 채 장소유는 걷는다.

    기척. 체취. 기운.

    사람으로서의 존재감이 주변에 녹아들어 장소유란 개체가 이 세상과 쉬이 구분되지 않는다.

    그것은 이를테면 난초를 심은 화분에 담긴 조금 굵은 모래와 같다.

    모래치고는 제법 굵지만 그래도 모래이며 화분에 담긴 흙 중 일부이니 제아무리 신경이 팽팽한 사람이라 하여도 굳이 '인지'에 이를 만큼의 존재가 아니다.

    장소유는 그와 같은 모래의 입장에서 도진을 찾고 있었다.

    시야가 달라지면 느끼는 것도 달라진다.

    사람의 입장에서야 화분에 담긴 모래란 거기서 거기겠지만 모래의 입장은 완전히 달라지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모래의 입장이 되었음에도 장소유는 여전히 도진을 눈에 담을 수 없었다.

    이 공간에 있음을 아는데.

    똑같은 부지역에 있음에도 도진을 찾을 수 없다.

    알고 있음에도 보이지 않으니 그 격차는 더욱 크다.

    모르고 인지하지 못하는 것과 알고 있음에도 인지하지 못하는 건 하늘과 땅만큼이나 차이가 있으니 그만큼의 격차다.

    장소유는, 그 격차에 화내거나 절망하지 않았다.

    스윽-

    오히려 웃었다.

    그것이 오히려 좋았으니까.

    제자리에 멈춰섰다.

    포기한 건 아니다.

    반대로 나아가기 위함이었다.

    스으…….

    힘을 푼다.

    쥐고 있던 손을 펼친다.

    하나, 둘. 존재를 이루던 것을 놓는 것이다.

    존재를 구분하던 것을 놓음으로써 세상과 더욱 동화하기 위하여.

    그렇게 동화함으로써 분명히 존재로서 구분될 도진을 찾고자 하는 것이다.

    흐릿하던 장소유의 색채가 더욱 옅어진다.

    옅어지는 걸 넘어, 투명해져 간다.

    그리고 마치 바닥조차 없는 심해 한가운데 있는 듯한 압도적인 세계에 수몰되었다.

    개체로서의 존재를 놓음으로써 세계와 동화되었기에 느낄 수 있는 것이었다.

    마치 지구의 자전과 공전을 느끼는 듯한 압도적인 감각이었고 그렇기에 감당할 수 없어 숨이 막혀 짓눌린 채 가라앉고 있었다.

    싸늘한 수온에 몸이 식어간다.

    감당할 수 있는 영역을 넘어선, 어리석은 행동의 대가였다.

    '아…….'

    하지만.

    그럼으로써 비로소 원하였던 도진의 존재를 느낄 수 있었다.

    그 존재가, 점점 더 가까워짐을 느꼈고 심해에 끝없이 가라앉는 중에도 그녀는 미소지었다.

    스으-

    남은 온 힘을 다하여 손을 뻗었다.

    그 손을.

    꽈악.

    따듯한 온기가 사정없이 짓누르는 심해보다도 강하게 붙잡아 주었다.

    "……!"

    그리고 그녀의 눈이 일순 커졌다.

    그녀와 연결된 손을 따라간 곳에.

    -이 녀석.

    말로는 나무라는, 그러나 그 눈동자에 담긴 온기와 숨기지 못한 정 때문에 결국 야단에 이르지 못하는 사람.

    소중한 사람.

    '할아…… 버지.'

    다시는 볼 수 없을 거라 생각했던 할아버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음 순간.

    '아…….'

    한 번 깜빡이고 다시 뜬 두 눈에는.

    그저 미소 짓고 있는, 그녀에게 있어 세상에서 유일한 사람이 가득 담겼다.

    * * * *

    "……."

    "……."

    화려하지 않지만 깊고 아득한 고급스러움으로 채워진 방 안 쇼파에 도진과 장소유가 앉아 있었다.

    나란히 앉은 두 사람은 손을 꼭 잡은 상태로 제법 오래 침묵을 유지하고 있었으나 그것은 결코 무겁지 않았다.

    오히려 보드랍고 따듯하게 두 사람을 감싸 주는 듯 하였으니 두 사람 사이의 감정 공유에 말은 필요치 않았기 때문이다.

    마주 잡은 손을 통하여 온기와 함께 전해지는 감정을 장소유는 눈을 감고 느낀다.

    위험한 짓을 했다. 혼나야 할.

    동화의 요결은 말 그대로 세상과 동화되어 '나'와 구분이 되지 않게 됨이다.

    경계해야 할 건, 그렇게 동화되는 중에도 분명히 '나'로서의 중심을 지켜야 한다는 거다.

    그러지 않으면 돌아오지 못하게 되니까.

    거대한 세상에 흔적도 없이 녹아 다시는 '나'로서 성립하지 못하게 되고 사라져 버린다.

    장소유는 그걸 잘 알고 있었으면서도 감당할 수 있는 영역을 넘어서까지 동화하고 말았다.

    만약 심해에 다 가라앉기 전 내밀어 준 손이 없었다면.

    장소유는 분명히 사라지고 말았을 것이다.

    바닷물에 섞인 한 방울의 호숫물처럼 흔적도 없이.

    그 영역에 이름으로써 분명히 많은 것을 얻고 또 깨달을 수 있었지만 이 세상에서 사라져 버린다면 크나큰 본말전도가 아니겠는가.

    물론 아무 생각없이 한 건 아니었다.

    분명히 손을 내밀어 줄 거라고.

    도진이 손을 내밀어 줄 거라고 믿고 있었기에 한 일이었고 도진은 그 믿음에 분명하게 응답해 주었다.

    다만 할아버지를 대신하여 혼내지는 않았다.

    그저, 믿어 주었다.

    혼내지 않아도 올곧은 길을 걸어갈 사람이라는 걸.

    잠시 길을 어긋나기는 했으나 그것이 엇나감이 아닌 어리광, 이라는 걸 읽었기에.

    그러니까 혼내는 대신 따듯하게 손을 잡아준 것이다.

    그 마음이 맞잡은 손을 타고 전해져서.

    툭.

    장소유는 손을 잡는 데서 만족하지 못하고 그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말았다.

    도진은 그렇게 기댄 장소유에게 기꺼이 어깨를 내어 주었다.

    무리하여 존재가 흔들리고 만 장소유의 '등대'로서 돌아올 수 있도록 손을 잡아 주고 있는 것이니 맞닿은 면적을 늘리는 건 오히려 좋은 일이었다.

    그렇게 기댄 장소유에게 도진이 입을 열어 말했다.

    "장 스승님을, 보신 거죠?"

    꾸욱-

    "……네."

    맞잡은 장소유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도진이 그 손을 자신도 조금 더 힘을 주어 잡고선 말을 이었다.

    "잘못 본 게 아니에요. 그건, 분명히 장 스승님이었어요."

    도진의 곁이었기에 장소유는 흔들리는 자신의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그녀를 다독이듯 잔잔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완벽한 건 아니에요. 하지만 분명히, 성과가 있었어요."

    그것은 바람이요 헌신이었다.

    장소유의, 다시 한 번 할아버지를 보고 싶다는 바람.

    그 바람을 이루어 주기 위하여 장호는 헌신하였고 드디어, 작지만 분명한 결실을 맺은 것이다.

    냉정하게 말하여 장호는 분명히 죽었다.

    다만 영혼이 남았고 그 영혼이 차원을 넘어 도진의 심상세계에 깃들어 존재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영혼을 보거나 느낄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하지만 장호는 손녀와 약속한 것이다.

    -다시 만날 수 있을 거예요.

    도진을 통하여. 기필코 다시 만날 거라고.

    희대의 술법사이기도 했던 장호는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하여 모든 것을 다하였으니 비로소, 실마리를 잡아내는 데 성공했다.

    "심상세계."

    일전 이단 세력이 퍼뜨린 전염병인 무림 독감의 유행 때 도진은 약리지를 비롯한 다른 이들과 '심상의 합일'을 한 적이 있었다.

    심상의 합일이란 말 그대로 심상을 하나로 합하는 것이니 여기서부터 시작한다면.

    도진의 심상세계에 있는 장호가 장소유를 만나는 것도 가능해질지 모른다는 추론이었고 그것이 드디어, 한순간이나마 성공한 것이었다.

    "아……."

    "사실 이번은 우연한 성공이었어요. 저와 소유 씨가 하나가 되었다기보다는, 불분명해졌던 소유 씨가 일방적으로 나에게 잠시 합쳐진 것이었죠."

    그러니까 우연.

    "하지만, 우연이라도 성공했으니까요. 장 스승님이라면 곧."

    우연을 필연으로 만들 수 있을 거예요.

    도진의 말에 장소유가 옅게 웃었다.

    그리고 한 치의 의심도 담기지 않은, 믿음으로 가득한 목소리로.

    "네."

    답하였다.

    * * * *

    서서히 해가 지기 시작한 때.

    도진은 안정을 취하기 위하여 잠이 든 장소유의 이불을 덮어 주고 진궁의 더 높은 곳으로 향했다.

    하늘 정원.

    천마전과 함께 진궁의 특징적인 그 장소에 들어서자 만나고자 했던 이가 있었다.

    짙게 쏟아지는 노을색으로 물든 아름다운 정원 한가운데.

    술과 술잔이 놓인 테이블 위에 공을 들여 모양을 내었던 머리카락이 제멋대로, 그러나 아름답게 흐드러져 있다.

    그렇게 머리카락을 흐트러뜨린 채 비스듬히 상체를 숙이고 있던 그녀의 두 눈동자가 도진과 마주하였다.

    유일하게 남은 명나라의 혈통.

    그러나 도진에게 있어 그보다 중요한 건 그녀가 스승 위지혁의 후손이라는 것이다.

    지금은 진나라의 여황.

    하지만 도진에게는 스승의 후손인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서린 씨."

    도진의 부름에 그녀가 여황이 아닌 개인으로서, 위서린으로서 노을에 음영이 진 얼굴로 옅게 웃으며 답했다.

    "네, 도진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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