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2화
['가장 앞에 서 이끌어 주는 자' 천마 김도진, 남방 영토 회의까지 이끌었다.]
[출범 후 줄곧 멈춰 있던 남방 영토 회의. 드디어 첫 발 내딛나?]
그날 저녁 뉴스의 헤드라인은 남방 영토 회의가 되었다.
현재 지구에서 가장 큰 서부 무림인 남쪽 나라의 서부 무림에 관하여 남방 영토 회의에서 이야기가 나올 것이라는 예상이 사실로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다른 누구도 아닌 천마 김도진에 의해서.
-ㄷㄷㄷ.. 이게 진짜 되네.
식견이 있는 이들은 모두 알고 있었다.
남방 영토 회의는 바할라를 제외하면 철저하게 보여 주기 위한 요식 행위일 뿐 그 구성원들에게 문제 해결 의지가 전혀 없다는 것을 말이다.
그것이 무려 5년 동안 고착화되었으니 설령 천하제일인, 천마신교의 교주인 김도진이라 해도 단번에 무언가를 보여주진 못할 거라는 의견이 제법 힘을 얻고 있었는데.
-평화로운 분위기 속에서 긍정적인 결과가 나왔습니다.
무려 첫날부터 원하던 긍정적인 결과가 나왔다는 인터뷰를 해 버린 것이다.
-아니 ㅋㅋㅋ 진짜 어케함?ㅋㅋㅋ 그새끼들 개노답 아니었음?
-분명 이 악물고 몰라레후 하던 놈들이었는데? 어케했누;;;
-천마가 칼들고 협박한 거 아님? 그런 얼굴들이었는데.
다른 사람도 아니고 무려 '천마'가 참석하여 발언한다고 했음에도 성과에 의문을 품었을 만큼 남방 영토 회의는 다른 의미로 유명했다.
하지만 또, 다른 사람도 아니고 무려 천마가 원하던 결과가 나왔다고 했으니 믿지 않을 수 없었고 사람들은 내일 회의가 끝나고 나올 발표를 기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건방진 놈이……."
숙소에서 뉴스를 보며 노르드의 왕자 아무스는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래. '경황이 없어' 어디까지나 '실수'로 서부 무림에 관한 논의를 하자는 데 동의하기는 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가.
본래 이런 중요한 회의에서의 내용은 완전히 다 끝나고서 협의 하에 발표하는 게 기본 아니었던가!
이런 식으로 가볍게, 장난처럼 섣불리 발설을 해 버리다니.
여기에 더 미치겠는 건 상황이 이렇게 돼 버려 오해였다고 말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는 물론이요 다른 이들도 인정하기는 싫지만.
여기서 아니라고 한 다음의 감당을 할 자신이 없었으니까.
별수 없이 최소한의 성과라도 내는 방향으로 일을 진행할 수밖에 없었고 그것이 너무나 짜증나고 화가 나 감정을 억누르기가 힘들었다.
아무스는 결국 넓은 거실을 왔다갔다 하다 버럭 소리를 쳤다.
"위무관!"
"예, 왕자 저하!"
그의 외침에 즉시 안에 들어서는 건 아무스 왕자의 호위 무인으로 오늘 회의에서도 아무스의 뒤를 지킨 자였다.
그를 보며 아무스가 물었다.
"오늘 천마가 무슨 수작을 부리진 않았던가?"
…어이가 없는 소리였다. 또 한심했고.
상식이 있는 이라면 할 수가 없는 소리였으니까.
허나 그는 전혀, 찰나조차 그런 티를 내지 않았다.
위무관(衛武官)이라 하면 왕실 직속으로 상당한 금액의 봉급을 받는 자리다.
진짜 실력 있는 자들은 외부로 빠지고 고만고만한 수준의 무인들 사이에서 그 자리에 오르기 위해서는 무공 이외의 강점이 있어야 했으니 그에겐 그 강점이 '처신'이었던 것이다.
그는 짧은 사이에 생각을 정리하고서 말했다.
"예. 교묘한 수작을 부렸습니다."
"…정말인가?"
스스로 말해놓고선 진짜라고 하니 두 눈을 크게 뜨는 아무스였다.
위무관이 예, 하고서 말을 이었다.
"일부러 격식을 어겨 왕자님을 당황케 하고 기세를 일으키진 않았으나 교활하게 위협을 가하여 혼란을 유도한 것입니다."
굳이 교활하다는 단어를 쓰는 것이 투박한 인상과 달리 제법 머리가 돌아가는 그의 면모를 보여준다.
아무스는 그럼 그렇지하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렇지. 그렇지 않고서야 회의가 그렇게 될 리가 없었지. 교활한 놈……."
중얼거리고선 다시 위무관을 보았다.
"무언가, 방법이 없겠나?"
있을 리가 있나.
천마를 상대로는 아무스가 아니라 국왕이 와도 닥치고 눈을 깔아야 할 텐데.
허나 그렇다고 해서 방법이 없다고 할 수는 없었으니 위무관이 조심스레 말했다.
"몸을 보하고 심신이 흔들림이 없도록 해 주는 영단을 미리 복용하고 오히려 강하게 나간다면, 적어도 밀리진 않을 것 같습니다."
"호오, 그래. 강하게 나가란 말이지."
듣기 좋은, 원하는 부분을 읊조리며 아무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다.
저쪽이 그러는데 이쪽도 격식 차리고 엉덩이를 뒤로 뺄 필요가 어딨겠나.
그냥 똑같이 들이박아 버리는 거다.
그런다고 해서 천마가 날뛸 수는 없을 테니까.
아무스는 번뜩이는 그 좋은 생각을 뜻을 같이 하는 이들과 공유하였고 다음날 즉시 실행에 옮겼다.
후욱-!
평범한 사람은 평생 돈을 모아도 엄두도 못낼 영약이 몸속을 돌며 자신감을 채워준다.
그래. 어제야 당황해서 실수했다지만 두 번 당할 수야 있나.
이쪽도 그냥 똑같이, 그대로 들이박아 버리면 되는 거다.
이곳은 어디까지나 '법'에 따라 '말'로 싸우는 전장.
하물며 그들은 무려 5년 동안 이곳에서 싸워오지 않았던가.
쫄 것 없다!
쿵!
커다란 문이 열리고 아무스를 필두로 한 이들이 회의장 안으로 힘차게 한 걸음을 내딛었다.
그리고.
드드드드드드…….
"……어."
무시무시한, 흉악한 기세를 내뿜으며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린 천마를 마주하게 됐다.
'뭐, 뭐야시발.'
누구나 그럴싸한 계획은 있는 법이었다.
실전이 닥치기 전까지는 말이다.
* * * *
주춤.
저도 모르게 아무스가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에 밀리듯 보무도 당당하게 그 뒤를 따르던 무리 또한 한 걸음 물러났고.
스으으…….
도진의 시선이 향하자 아예 호흡마저 멎은 듯 얼어붙었다.
'왜, 왜, 왜.'
생각이 이어지지 않는다.
완전히 겁을 집어먹어 주변에 어떻게 보일지에 대해 생각할 수조차 없었고 이대로 오줌을 지릴 뻔한 순간에.
"아. 죄송합니다."
도진이 거짓말처럼 웃으며 사과하였다.
"예, 예?"
멍청한 얼굴로 아무스가 반사적으로 물었다.
도진이 웃는 얼굴로 말했다.
"서부 무림의 범죄자들이 저지른 범죄들에 관한 보고서를 읽고 있었는데 너무 화가 나서요. 오신 줄도 모르고 화를 내고 있었네요. 죄송합니다."
"……."
천마가 사과를 했다. 그것도 거듭.
그런데 왜. 왜 이렇게 화가 나는 걸까.
파르르…….
손이 통제를 벗어나 떨렸고 아무스는 다 집어치고 한 번 맞짱, 아니 비무를 해 버릴까 하는 생각이 들어 버렸다.
물론.
"괜찮습니다……."
이성은 감정에 따르지 않고 말 그대로 이성적인 판단을 하여 행동했고 평화롭게 2일차 회의가 진행되었다.
어제 모두가 '동의'하였기에 영토 경계선에 대한 이야기 대신 서부 무림에 대해 이야기하였다.
"서부 무림에서 흘러나온 검은돈을 추격하고 있습니다."
"헉."
숨을 삼키는 건 벨라의 왕자였다.
아무스는 이 멍청한 놈의 행동에 뿌득 이를 갈았지만 그 이상의 행동을 할 수는 없었다.
"분명히 놈들에게 협조하는 자들이 있을 겁니다. 찾아야겠죠."
벨라의 왕자가 조심조심 손을 들고 물었다.
"차, 찾아서 어쩌실 건가요?"
도진이 친절한 얼굴로 웃었다.
그리고 단 한 순간에 거짓말처럼 싸늘하게 식었다.
"찢어 버려야죠."
"허어어어억!!"
목에 칼이라도 들어온 듯 벨라의 왕자가 부들부들 떨었다.
"하하하. 농담입니다."
장난처럼 웃는 도진의 말에 벨라의 왕자가 멍해졌다.
"노, 농담?"
"예. 농담입니다. 제가, 사람을 죽일 리가 없잖아요?"
"……."
분명히 웃으며 말했는데 벨라의 왕자는 더 무서운 걸 본 얼굴이 되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 자리의 누구도 모르지 않았다.
천마의 '불살(不殺)'이 어떤 의미인지 말이다.
그래서 벨라의 왕자는 그 이상 어떤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부들부들 떨었고.
'이, 이 시발…….'
결코 당당할 수 없는 아무스도 벌벌 떨리려는 몸을 억지로 붙잡아야만 했다.
그리고 그 모습을 지켜보며 도진의 곁에 앉은 오성아는 보이지 않게 조소한다.
세간에서는 영원히 남방 영토 회의에서 진척이 없을 것처럼 회의적이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마음만 먹으면.
이렇게 결과를 얼마든지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어낼 수 있었다.
물론 아무나 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도진이 아닌 슈미트라여도 가능한 일이었다는 말이다.
그저 준비가 되지 않았기에 일을 추진하지 않은 것 뿐.
한데 그것을 눈앞의 이 애송이들은 모르고 그동안 기고만장했다.
애송이들은 그야말로 우물 안의 천상천하 유아독존이었다.
그들의 곁에 있는 모두가 떠받들어주고, 양보해주고, 긍정해 주고 있음을 망각할 지경으로 당연하게 여기는 인간이 돼 버린 것이다.
그러니까 간단하다.
"놈들과 협력하는 자들을 잡는 겁니다. 그리고, 죗값을 치르게 하는 거죠."
"……."
덜덜 떠는 게 너무 적나라하여 애처로울 지경이다.
그들보다 강한 자가 조금만 압박하면 이렇게 된다.
"그, 그건."
"네, 그렇죠. 그러면 좀 늦을지도 모르겠네요."
"……예?"
그리고 여기서 조금, 당근을 흔들어 주면.
"그러니까 지금은 그것보다 그냥 아주 빠르게, 서부 무림을 소탕하는 쪽에 집중하는 게 좋지 않을까 싶은데. 어떠세요?"
"조, 좋습니다!"
이렇게.
"동의합니다."
"좋은 의견입니다!"
간단하게 낚여 버리고 마는 것이다.
"음. 역시 소문은 믿을 게 못 되네요. 이렇게 다들 나라를 위하여 의욕이 넘치시는데."
도진은 웃으며 고개를 연신 끄덕이고선 말했다.
"그럼, 내일은 구체적인 방안에 대해 의논하면 되겠네요. 무림인인 제가 거기에 대해 자세히 논할만큼의 소양은 갖추지 못했으니 여기, 우리 오성아 좌부주와 이야기 나누시면 될 것 같습니다."
성대하게 낚인 자들의 시선이 오성아에게로 향한다.
정신을 못 차리고 있던 그들이 서서히 평정심을 되찾고 처음에는 더러운 감정이 오성아를 훑는 시선에 묻어난다.
그리고 다음은, 분노.
제아무리 멍청해도 되짚어 보면 농락당했다는 것 정도는 대번에 눈치채는 것이다.
허나 그 분노를 감히 천마 김도진에게는 쏟아낼 수 없으니 자연스레.
겉보기에 만만해 보이는, 무공으로는 이름을 떨친 적 없는 오성아를 상대로 그것을 쏟아내려 드는 것이다.
오성아는…… 거기에 화를 내지 않았다.
화를 낼 정도의 가치도 없었다.
그저, 이 아무것도 모르는 멍청이들을 상대로 동정심을 가지지 않기로 했을 뿐이다.
펜이 칼보다 강하다는 말이 있다.
이 자리는 그 말을 증명하기에 가장 적합한 전장이었으며.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오성아가 가장 좋아하고 가장 자신있어하는 전장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3일차 남방 영토 회의.
천마가 불참하자 애송이들은 그야말로 사기충천하여 오성아에 덤벼들었고.
"그럼, 이대로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
"……."
"……."
"……."
오성아는 펜으로 애송이들의 정신을 도륙 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