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1화
"……."
힐끔.
"……."
또르륵…….
웃음이 나올 것만 같은 광경이었다.
손을 든 천마를 지극히 의식하는데 정작 시선은 똑바로 천마에게 닿지 못하고 주변을 맴돈다.
겨우 어깨나 가슴팍, 그것조차 못하여 옷자락을 보는 자들마저 있으니 아예 촌극이다.
천마 김도진이 손을 듦으로써 일어난, 아니 사실은 회의 시작부터 계속된 광경이었다.
슈미트라와 오성아를 포함하여 극소수만이 천마와 눈을 마주할 수 있었다.
그 외 모든 이들은 감히 도진과 똑바로 마주할 수조차 없었으니 그 원인은 천마가 아닌 그들 스스로에 있었다.
스스로 당당하지 못하였기에.
무공 이전의 차원, 스스로의 심지조차 똑바로 세우지 못하고 감당하지 못하는 그들이 천마 김도진이란 존재를 마주하는 건 어불성설이었던 것이다.
평소라면.
부지역(不知域)을 걷는 도진은 그런 자신의 존재감마저도 지웠겠으나 이번만큼은 그러지 않았고 결국, 회의 내내 참석자들은 도진을 똑바로 보는 것조차 하지 못하고 우스꽝스런 몰골로 헛소리를 내뱉어야만 했다.
언제나와 같이 회의에서 헛소리를 하기는 해야 했다.
그런데 그러면 천마의, 그 무시무시하다는 '천벌'이 떨어지는 건 아닐까 조마조마하여 천마가 앉은 자리를 힐끔거린다.
다만 똑바로 볼 수는 없으니 정말로 죄를 지은 것마냥 말하는 도중에 힐끗거리고 또 눈치를 보는 한심하기 짝이 없는 모습이었다.
그러다 도진이 계속 침묵하니 아주 약간은 기세가 살아서 지껄이고 있었는데 이렇게 손을 들어 버리니 화들짝 놀라 자라목이 되어 버린 거다.
그리고 모두의 시선은 이번 회의의 의장을 맡은 노르드의 왕자 아무스에게로 향한다.
아무스는 짐짓 태연한 척을 하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씨발…….'
하필이면. 하필이면 내가 의장인 거냐고 대상없는 원망을 했다.
남방 영토 회의의 의장은 개최국의 책임자가 맡는 게 관례였고 관례에 따라 이번 의장은 아무스 왕자의 차례였다.
별수 없이 그는 최대한 목소리가 떨리지 않도록 배에 힘을 빡 주고서 말했다.
"발언하세요."
…부자연스럽게 눈을 아래로 깔은 스스로는 애써 무시하면서.
"감사합니다."
스윽-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는 도진에게서는 지극히 미미한 소리만이 났으나 그것마저 참석자들에겐 천둥소리처럼 들렸다.
그리고 나온 발언 또한.
"이번 회의에서는, 진척도 없을 영토 경계선에 관한 회의는 접어두면 어떨까 싶은데요."
커다랗게 그들의 귀를 때렸다.
"…뭐라구요?"
"진척도 없을 영토 경계선에 관한 시간 낭비는 그만두고 서부 무림에 관한 이야기를 했으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
뭐지? 막나가자는 건가?
다수의 참석자들은 그런 생각을 했다.
평소 같았다면.
'당신 지금 뭐라고 했어?!'
발언자가 평범한 범주에 있었다면 생각에서 그치지 않고 그렇게 말과 행동을 했을 것이며 당장 자리를 박찼을 텐데.
"……."
"그…… 발언이 좀 과한 것이 아닙니까?"
적나라하게 말해 '쳐맞을까봐' 감히 그러지는 못하고 개중에, 그나마 용감한 이가 정중하고 조심스레 반발하였다.
스으-
도진의 시선이 발언한 이에게로 향했다.
"……."
또르륵.
그는 억지로 얼굴은 들었지만 눈동자가 반쯤 잠길 정도로 아래로 향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도진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죄송합니다. 아무래도 제가 무림인이다 보니 격식을 잘 몰라서 그렇게 들리신 모양입니다."
"……."
그게 뭔 개소리야, 라고 할 뻔 했다.
틀린 말은…… 배알이 뒤틀리다 못해 춤을 출 거 같지만 아니었다.
천마 김도진은 무림인이다.
자국에서는 물론이요 웬만한 나라에서도 대통령 선거에 출마만 하면 농담이 아니라 압도적인 표로 당선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지지율이 높은 사람이지만.
그는 정계로 나아가지 않았고 천마신교의 교주로 남은 무림인이었다.
당장 오늘도.
한국이나 바할라의 관계자가 아니라 철저하게 천마신교를 대표하여 무림인으로 나왔으니 입고 있는 것 또한, 금으로 수놓은 용이 눈에 띄는 천마신교의 정장 무복이었다.
누구 한 명 딴지를 걸기는커녕 눈을 맞추지도 못하니 도진이 자유롭게 계속 발언하였다.
"안타까움에 드린 말씀이었습니다. 이걸 보고 있으니 그런 생각이 들더라구요."
그러면서 손에 드는 건 다름 아닌 휴대폰이었다.
반으로 접히는, 폴더블의.
'이게 뭔.'
'회의를 하면서 휴대폰을 봐?'
펼침으로써 평범한 폰의 두 배나 되는 대화면의 폰을 보고 있었다는 소리에 정신이 아득해지는 참석자들이었다.
폰을 보고 있었다고는 온 신경을 향하고 있었음에도 전혀 몰랐다.
하지만 스스로 봤다고 하니 그렇다고 생각할 수밖에.
그런데 그걸 스스로 말하고선 뭘 잘못했냐는 얼굴로 아주 당당하니 정신이 나갈 것 같았고 곁에 앉은 오성아는 그 면면을 보며 몰래 웃음 참기 챌린지를 해야만 했다.
도진은 아예 그 대화면을 내밀어 보고 있던 것을 공개하였다.
평범한 휴대폰의 두 배는 된다지만 그래도 휴대폰. 그것도 휙휙 화면이 넘어가고 있었지만 모두는 액정에 뜨는 내용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재능이 바닥을 친다 해도 그들은 '높은 사람'이었고 돈과 영약을 포함한 자원을 비효율적으로라도 때려박아 A-1, 일류에는 올라 있었기 때문이다.
그 경지의 안력(眼力)에 보이는 것은.
-벨라 왕자도 무림인 아님? 남쪽 나라 애들이 못해도 무공이 평타는 친다던데.
-그 덩치를 봐라. 되겠냐 ㅋㅋㅋㅋㅋ
-왜. 돼지들이 그래도 질량은 있는데 그 질량으로 때리면 아프진 않을까?
-질ㅋㅋㅋㅋ량ㅋㅋㅋㅋㅋㅋ
-진지빨고 말하자면 돼지가 아니라 멧돼지가 와도 저랬을 거임.
-왜?
-그, 내가 교주님을 멀리서긴 한데 직접 본 적이 있거든. 그래서 앎.
-???
-그러니까 뭐시냐. 그래. 에베레스트산이 그냥 걸어오는 거 같았음.
-에베레스틐ㅋㅋㅋㅋㅋㅋㅋ
-농담 아니라 진짜임. 그게 진짜, 막 사람으로 압축됐는데 질량이나 느낌 자체는 그대로인 그런 거? 그런 게 너한테 다가오면 어떨 거 같냐. 제정신일 수 있는 사람은 드물걸? ㅋㅋㅋ
-뭔지 모르겠는데 몬가몬가 알 거 같기도.
-그러니까 저 돼지 입장에서는 그럼. 갑자기 존나 큰 산봉우리 하나가 휘둘러지는 그런 느낌?
-엌ㅋㅋㅋㅋㅋㅋㅋ
-야, 안 지린 것만 해도 훌륭했네 ㅋㅋㅋㅋㅋ
-어쩌면 요도가 콜레스테롤로 막혀 있을지도 몰라.
-ㄴ개너무하네 ㅋㅋㅋ
-나 봤음. 돼지 옆에 애도 허리 뒤로 뺀 거 ㅋㅋㅋ
-영상 다시 보면 걔들 존나 재밌음 ㅋㅋㅋ 돼지가 워낙 돋보여서 그렇지.
-다시 보러 간다.
"……."
"……."
참석자들의 얼굴이 하나같이 일그러지며 붉어졌다.
부끄러움과 분노가 복합된 붉음이었다.
도진이 안타까운 얼굴로 말했다.
"여러분들은 노력하고 계시겠지만 사람들이 보는 건 결과이지 않습니까. 그 결과가 나오지 않으니 이렇게 감정이 좋지 않아 나쁜 말이 나오는 것이고 저로선 그것이 안타깝더군요."
근본적인 문제는 너잖아.
"그러니까 답이 나오기 힘든 영토 경계선에 관한 이야기는 미뤄두고, 당장 결과를 낼 수 있는 서부 무림에 관한 이야기를 했으면 좋겠습니다."
누구 맘대로.
머릿속에선 온갖 반발이 튀어오르고 있었으나 소리가 되어 나오는 건 단 하나도 없었다.
때문에 잠시 어색하고 무거운 침묵이 있었다.
"교주께서는 어떤 고견이 있으십니까?"
그 침묵을 지금껏 조용히 있던 바할라의 왕, 슈미트라가 깼다.
"네. 간단하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이 자리에 모인 나라들이 모두 힘을 합쳐, 서부 무림을 정리하는 겁니다."
"좋은 말씀이신 것 같습니다."
뭐라는 거야.
저게 뭔 소리야.
둘러앉은 이들 사이에 부끄러움과 분노에 어이없음이 더해졌다.
허나 도진은 멈추지 않고 기세를 탔다.
"괜찮지 않습니까. 지금 서로 의견이 맞지 않아 비어 버린 여섯 나라의 영토에 범죄자들이 살고 있잖습니까. 기껏 합의를 보아도 범죄자들을 몰아내는 데에 또 시간을 써야 할 텐데 그렇다면 아예 그것부터 처리를 하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목적이 같으니 싸울 일도 없고 힘을 합칠 수 있습니다. 거기에 여섯 나라가 똑같이 힘을 합친다면 사이도 좋아질 테고 이 부분 가지고선 싸우지 않을 테니 이보다 좋은 일이 없겠네요."
"……."
뭐라고 반박해야 하지.
참석자들은 머리가 잘 굴러가지 않았다.
뭔가 떠오르는 건 많은데 정리하여 말로 꺼내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개중 아무스가 억지로 쥐어짜듯 말했다.
"그렇게 쉽게 말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닌 것 같습니다. 관련 예산도 편성해야 하고 군대를 동원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니……."
"군대를 동원할 필요는 없지 않겠습니까."
"예?"
"철저하게 무림의 일로 하면 되지 않습니까. 남쪽 나라하면 강한 무인이지 않습니까. 자원하는 무림인들이 힘을 합쳐 서부 무림을 토벌하면 될 겁니다. 국가는 그 무인들에게 지급할 예산만 편성하면 족하지 않을까요?"
"그, 거기다가 아무리 서부 무림이라지만 관련해서 인권에 관한 논란도 ……."
"범죄자한테 인권이 어딨습니까?"
서걱.
마치 실체가 있는 것이 잘린 듯한 소름돋는 차가운 목소리에 아무스가 꿀먹은 벙어리가 됐다.
다른 이들 또한 마치 자신이 썰리기라도 한 듯 얼어붙었다.
분위기를 그렇게 얼려 버린 도진이 병주고 약주듯 싱긋 웃으며 말했다.
"범죄자를 적극적으로 나서서 옹호하는 이는 드물지 않습니까. 설령 설친다 해도 동의해주는 여론은 지극히 미미합니다. 오히려 무형독 아니냐고 욕이나 듬뿍 먹곤 하죠. 그러니까……."
도진의 눈이 한 명 한 명. 참석자들을 훑었고 그들은 부르르, 몸을 떨었다.
"범죄자가 아니고서야 문제 없지 않겠습니까?"
* * * *
오후. 3일에 걸쳐 이어지는, 그러나 몇 년 동안 진척이라곤 없던 남방 영토 회의의 1차 회의가 끝나고 참석자들이 바깥으로 나왔다.
천마가 참석한 오늘만큼은 평소와 다를 거라 믿으며 기다리고 있던 기자들이 우르르 그들에게 달려갔고.
"어?"
"뭐야?"
넋이 나간, 혹은 누가 칼들고 협박이라도 한 듯한 표정의 참석자들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저래?"
"누가 칼들고 협박이라도 했나?"
"뭔 소리야."
어떤 기자의 말에 또 어떤 기자가 피식 웃었다.
세상에 그런 일이 어딨다고.
애써 달라붙어 기자들이 마이크를 내밀었지만 들어갈 때와 마찬가지로 참석자들은 인터뷰에 응해주지 않았다.
호위 무인들이 철저하게 주위를 둘러싸고 기자들의 접근을 차단했다.
속으로 궁시렁거리며 어떻게든 한 마디라도 따내려고 하던 기자들은 그러나 천마가 나와 멈춰 서 주자 자석에 끌리는 철가루처럼 그곳으로 우르르 몰려들었다.
모여든 기자들이 천마를 빙 둘러싸고 마이크를 자신의 앞에 들었다.
아는 것이다.
천마의 목소리는, 거리에 상관없이 선명하다는 것을.
그 선명한 목소리로 천마 김도진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묻는 기자들에게 웃는 얼굴로 말했다.
"평화로운 분위기 속에서 긍정적인 결과가 나왔습니다."
'큽.'
곁에 서 있던 오성아가 방풍 코트 속에서 입술 대신 주먹을 꽉 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