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0화
기실, 천마가 바할라와 쉬르네폴리아에 방문하는 건 처음이 아니었다.
간간이라고는 해도 꾸준히 천마 김도진은 바할라와 쉬르네폴리아에 방문하였으니 주기적인 일정이라 보아도 무방했다.
거창한 무언가의 목적이 있는 것도 아니다.
쉬르네폴리아에 아버지가 있고 친밀한 관계의 사람들이 있었으니 오직 그들을 만난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방문의 이유가 되었다.
그러니까 그저 단순한 방문일 뿐이었다면 그것이 설령 천마라 하여도 속보니 무엇이니 하면서 크게 들썩이진 않았을 것이다.
이것은 곧.
"이거, 위험한 거 아니야?"
통째로 전세를 내어 버린 고급 호텔의 특실에서 중얼거리는 어떤 높은 신분의 남자가 불안에 중얼거릴 정도의 다른 목적을 천마가 가지고 남쪽을 방문하였다는 말이 된다.
왕족에게만 허락된 금으로 수놓은 전통 복장을 걸친, 그러나 비대하여 위엄이라곤 찾을 수 없는 남자는 불안에 안주를 우적우적 씹었고 맞은편에 앉은, 그와 동등한 신분인 타국의 신경질적인 인상의 남자가 마음에 안 든다는 얼굴로 술잔을 기울이며 혀를 찼다.
"쯧. 뭐가 그리 걱정인가. 어차피 우리야 적당히 이득만 보고 빠지면 되는 것을."
그들은 바할라를 포함하여 '1강 5중'이라 묶여 불리는 남쪽 나라의 여섯 국가 중 두 곳의 왕족이었다.
왕위 계승 서열은 미묘하게 낮지만 애초에 그것을 포기하여 제법 강력한 권력을 쥐었으며 '뒷주머니'를 단단하게 차 그 권력을 더욱 강화하였다.
필연적으로 뒷주머니란 것은 더럽고 어두운 곳과 이어지니 뚱뚱한 남자는 혹여 그것 때문에 천마의 '천벌'을 받지 않을까 벌벌 떨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맞은편에 앉은 남자의 신경을 더욱 건드리고 있었다.
"자네는 그 성격이 문제야. 우리가 뭘 잘못 했나. 우리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어. 그저 잘 봐달라고 바치는 선물을 받았을 뿐이란 말야. 알겠어? 헛소리만 하지 않고 당당하면 문제가 없다고."
손가락질까지 하며 강하게 말하는 친구의 말에 뚱뚱한 남자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이 또 한심하여 신경질적인 남자가 날카롭게 말했다.
"정신 차려.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다고. 그냥 하던 대로만 하면 돼. 천마라고 해도 사람이라고. 사람!"
한심한 놈이 워낙 겁을 집어 먹고 있어 그는 자신의 불안을 속이며 더욱 강하게 말했다.
그래. 달라질 건 하나도 없다.
이번 남방 영토 회의에서 그 전까지와 달리 본격적으로 서부 무림에 관해서도 논의하게 되었다지만 그게 뭐 어쨌다는 건가.
지금껏 해 왔던 대로.
억지를 부리고. 알고도 모른 척을 하면서.
그저 이 영토 분쟁을 조금이라도 더 길게 끌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랬는데.
"……어."
직접, 그 두 눈으로 천마를 마주한 순간.
'아…….'
그는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걸 본능의 영역에서 강제로 깨달아야만 했다.
* * * *
바할라를 포함하여 여섯 개의 나라가 참석하는 남방 영토 회의가 열리는 당일이 되었다.
이번 회의는 여섯 개의 나라 중 북쪽에 있는 노르드의 수도대회관에서 열렸다.
바로 작년 회의만 해도 완전히 식어 버리는 걸 넘어 아예 싸늘해져 버린 관심과 여론 탓에 구색이나 겨우 맞출 정도의 기자들만이 있었는데.
오늘은 평소 10%도 채우지 못하던 수도대회관의 주차장에 자리가 없을 정도로 기자들이 몰려들었다.
"오늘!"
"서부 무림에 관해서!"
신경질적인 인상의 남자, 노르드의 왕자 아무스는 일그러지려는 표정을 간수하며 기자들과 자신 사이에 호위 무인들을 두텁게 두르고 나아갔다.
저 앵앵거리는 외국인 놈들의 인터뷰에 응해 줄 생각 따윈 전혀 없었기에 한 순간도 멈추지 않았다.
'이미 알고 있으면서 뭘 묻는단 말이야.'
소문은 벌써부터 파다하게 퍼져 있었다.
이번 남방 영토 회의에선 지금껏 방치하고 있던 서부 무림에 관해 진지하게 논의할 거라고.
다른 어디도 아닌 천마신교가 칼을 뽑아들 것이니 평소와는 완전히 다를 거라고.
뜬소문이 아니었다.
실제로 이번 남방 영토 회의에서 서부 무림에 관해 논의하자고 천마신교에서 강력하게 이야기를 꺼냈으니까.
무려 세계를 구하신 분이 교주로 있는 천마신교에서 그리 말하니 세계 무림맹은 물론이요 각계에서도 목소리를 내었고 남쪽 나라들은 어쩔 수 없이 '논의하겠다'고 할 수밖에 없었던 거다.
당연히 기분이 좋을 수가 없었다.
노르드만이 아닌 바할라를 제외한 다섯 국가 모두가.
자신들의 일에 괜히 다른 곳에서 참견한 꼴이니 어찌 기분이 좋을 수 있을까.
바할라를 제외한 모두가 한 마음이었고 참석한 이들은 이심전심, 아주 한 번 제대로 성질을 부려 보자고 이를 갈고 있는 중이다.
"천마신교다!"
"왔다!!"
그렇게 안 그래도 속에 불이 나 있는데 부채질을 하듯 천마께서 오셨다는 소식에 기자들이 우르르 몰려갔다.
'개같은…….'
애초에 눈길도 안 주고 있었으면서 정작 관심이 완전히 떠나버리자 또 화가 난 자들이 천마신교가 들어서는 곳으로 시선을 향한다.
그리고.
"……어."
하나같이 멍하니, 굳어 버렸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단 하나만 제외하고서.
아니, 그 하나가 전부였다.
천마. 김도진. 천하제일인이면서 천마신교의 교주.
그를 수식하는 말은 적지 않았지만 무엇 하나 와닿지 않았다.
그저, 숨이 막혔다.
감당할 수 없는 거대한 어떤 것이 거리를 좁히고 있다.
이성의 통제를 벗어난 몸은 그러나 덜덜 떠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았으니 그저, 멍하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무, 무림특별법 위반.'
참석자들 중 한 명, 허울로는 아무스의 친구인 뚱뚱한 남자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머리로 그런 생각을 한다.
남쪽 나라 또한 국제 사회에 섞여 살아가는 만큼 제대로 돌아가지는 않지만 국제 무림특별법을 수용하고 있다.
그 국제 무림특별법에서 말했다.
무림인은, 고의로 기세를 일으켜 타인을 위협하여서는 안 된다고.
지금 천마는 그 기본적인 법을 지키지 않고 있는 게 아닌가.
그런데 왜 아무도 지적을 하지 않는 것이지?
그는 억지로 고개를 돌려 주위를 살폈으나 누구 한 명 나서는 이가 없다.
그리고.
스윽-
천마가 손을 들자.
"히이익!"
그는 크게 몸을 움츠리며 두 손으로 얼굴을 막았고.
"……."
"……."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집중되고 말았다.
* * * *
[히익!]
-ㅋㅋㅋㅋㅋㅋㅋㅋㅋ 뭐냐
-히익! 때리디마! 히익히익!
-ㄴ미친놈ㅋㅋㅋㅋㅋ
남방 영토 회의는 내부 중계가 허락되지 않았다.
때문에 오직 입장시의 영상만을 송출할 수 있었는데 이게 또 회의 결과를 기다리는 동안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길 수 있는 커다란 화제가 될 장면이 찍혔으니 남쪽 나라의 1강 5중 중 5중에 해당하는 벨라의 왕자가, 도진이 악수를 위해 건넨 손에 뜬금없이 겁을 집어먹고 방어 자세를 취해 버린 것이었다.
어이없고 황당한 상황에 시선이 집중된 가운데 침묵이 있었고 벨라의 왕자는 한술 더 떠서 아예 건물 안으로 도망을 쳐 버렸다.
너무나 한심한 그 모습에 수행원으로 온 사람들도 부끄러움에 억지로 몇 마디를 남기고선 들어갔으니 벌써부터 인터넷에서는 벨라의 왕자를 가루가 되도록 조리돌림하는 중이었다.
-저딴 놈이 대표랍시고 자리에 앉아서 회의를 하고 있으니 일이 제대로 될 리가 있나 ㅋㅋㅋㅋ
-ㄹㅇㅋㅋ 바할라가 아무리 노력하면 뭐함. 저런 새끼들이 땡깡을 부리고 있으니...
-존나 화나네. 걍 내가 저기 앉는 게 더 나을듯?
평소 좋은 모습을 보여 주었다면 여론이 좀 나았겠으나 그 반대로 남방 영토 회의에서 안 좋은 소리만을 지껄이던 자였기에 조롱은 심해지기만 했고 그것에 동정표를 줄 수조차 없을 정도로.
"그러니까, 쉬르네폴리아를 중립으로 두는 정도가 아니면 우리가 어떻게 그걸 진심으로 받아들이겠습니까."
벨라의 왕자를 포함한 다섯 국가의 사람들이 회의에서 지껄이는 소리는 아주 가관이었다.
회의의 초반부는 항상 그러했듯 국경선에 대한 서로의 주장이었다.
"저희의 입장은 변함이 없습니다."
바할라는 아주 짧게 말했다.
매년, 바할라는 양보하여 경계선을 뒤로 물려 주었다.
사실 온통 사막이었고 어느 쪽으로든 그리 가치가 없는 그저 넓기만 한 땅이었기에 미련없이 양보한 것이다.
하지만 다섯 국가는 하나같이 터무니없는 욕심을 부렸다.
"여기까지가 우리 선조가 유목민 시절부터 활동하던 범위 아닙니까."
명백하게 바할라의 북쪽 영토인 곳까지를 유목민들이 다녔다고 주장하는 놈부터 시작하여.
"바할라가 쉬르네폴리아를 교두보로 하여 영토를 확장할 의도가 없다면, 쉬르네폴리아를 진나라의 독립 자치구로 할 수도 있는 것 아닙니까."
이마를 짚을 정도로 어이없으면서도 건방지기 짝이 없는 헛소리를 하는 놈까지 있었다.
유목민의 활동 범위를 따지면 오히려 바할라 유목민이 더 유리하다는 것조차 모르는 놈에 바할라의 중심에 있는 도시를 주제넘게도 진나라의 독립 자치구로 하라는 소릴 당당하게 하는 놈까지 도진은 감탄이 나올 지경이었다.
다만 그 꼴을 '이해'는 할 수 있었으니.
'무형독이 아주 제대로 나라를 망하게 해 놨구만.'
남쪽의 나라들에는 무형독, 이단 세력이 아주 깊게 관여하고 있었다.
심지어 바할라에도 그러했으니 다름 아닌 바할라의 2왕자에게 손을 뻗어 내란을 유도했었던 것이다.
투마전의 후예인 슈미트라가 있는 바할라가 그럴 지경이었으니 주변의 이렇다 할 게 없던 나라들은 어땠겠는가.
유능한 자는 죽거나 떠나고 무형독의 입맛에 맞는 무능한 자들만이 남았으니 바로 그 무능한 자들이 지금 이 자리에 나와 떠들고 있는 상황이다.
근시안적이고 당장의 이득에 눈이 멀었다.
강해 보이는 건 허세요 딴에는 머리를 굴리고 있다지만 머리 굴러가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니 모두 뻔히 보인다.
일부는 정말로 아무 생각이 없다.
그냥 서부 무림에서 상납하는 것이 상당히 이득이어서, 서부 무림이 사라지지 않길 바라며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하고 있다.
하지만 일부는 일부러 헛소리를 하고 회의를 망치고 있었으니 제3자가 아닌 관련자의 입장에 있었다.
"아니, 잠시만요. 그곳은 우리의 영토여야 하지 않습니까."
"뭐요? 이게 어떻게 당신들 영토입니까?"
"당신들? 이봐! 당신들이라고 했어?!"
"어디서 반말이야!"
가관이다.
이젠 아예 저들끼리 싸우며 내 땅이네 네 땅이네하고 있다.
더욱 헛웃음이 나오는 건, 그게 진짜로 싸우는 게 아니라 보여주기 식이라는 거다.
바깥에서야 욕을 먹겠지만 무슨 상관인가.
이렇게 이 자리서 쇼만 조금 하면, 아주 많은 것들이 손에 들어오는데 말이다.
평생 닿을 일이 없는 아랫것들의 수군거림이야 이 세상에서 없는 것과 같다는 마인드다.
그게 참, 마음에 들지 않았다.
스으-
"그……."
"……."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의자마저 나뒹구는 지경에 이르렀던 '개판'이 거짓말처럼 뚝, 멎었다.
모두의 시선이 본능에 따라 한곳으로 향했다.
지금껏 단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있던.
그러나 모두가 단 한 시도 그 존재감에서 신경을 떼지 못했던.
"발언해도 될까요?"
천마가 웃는 얼굴로 한 손을 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