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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해서 지존까지-677화 (677/741)

677화

제대로 손질하지 않은 수염과 기다란 머리카락이 지저분하고 거친 인상의 무인들이었다.

그러면서 걸치고 있는 무복은 현대의 첨단 기술이 가미된 튼튼하면서도 편안한 무복이었으니 제법 언밸런스한, 어떻게 보면 예산을 아주 이상하게 절약한 무림 영화 속 배우들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긍정적인 직업을 가지고 있지 않았으니.

"돈을 빌렸으면 갚는 게 당연한 일이잖아! 먹물 냄새 나는 놈들한테 이런 것까지 가르쳐 줘야 하나, 내가?!"

서부 무림에 살아가는 이들의 고혈을 빨아먹는 수금꾼들이었다.

허리에 차고 있는 서슬 퍼런 날붙이를 꺼내 들지는 않았으나 마을 사람을 윽박지는 기세만으로도 미약한 빛이 힘겹게 어둠을 몰아내고 있는, 허름한 마을을 살벌한 분위기로 가득 채우는 데엔 충분했다.

수금꾼의 윽박에 마주 선 중년인이 말했다.

"알고 있네. 그래서 내 이렇게 미안하다 사과하고 있지 않나."

"아니 씨벌. 사과하면. 사과하면 다 해결 되나? 하여간 이래서 먹물쟁이 새끼들 뻔뻔한 게 주먹이 나가지 않을 수가 없다니까!"

그러면서 손을 번쩍 드는 수금꾼의 행동에 히익, 어이구 하는 소리가 주변에서 나왔다.

허나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이 마을 사람들과 안면이 있던 수금꾼의 손은 위협에서 그치고 폭력으로 연결되지는 않았다.

그리고 정작 폭력의 대상이 될 뻔한 중년인은 담담한, 전혀 흐트러지지 않은 태도로 말한다.

"조금만 말미를 주게. 항상 그랬지 않나. 이자는 한 번도 밀리지 않고 꾸준히 냈고 원금은 천천히 갚아도 된다고 하였지 않나. 그런데 어찌 이렇게 요즘 우리를 핍박하는 겐가."

수금꾼이 중년인의 말에 순간 입을 우물거렸다.

그 말이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곧 그렇게 우물거린 것을 감추듯 더 크게 화를 내며 말했다.

"어디까지나 배려를 해 준 것인데 하여간 이렇게 배려를 해 주면 그게 호의인 줄 안다지! 갚아야 할 돈을 갚으라고 하는 게 잘못 됐어? 어?!"

버럭버럭 화내는 수금꾼의 고함 소리가 밤의 사막에 퍼져 나간다.

그리고 그 소리의 끝자락에, 낙타에서 내려 모래 위에 앉은 최태호와 도진이 있었다.

모래 더미에 기대앉은 최태호가 말했다.

"아버지는…… 금랑회에 돈을 빌려 이곳에 정착했어요."

금랑회(金狼會). 알고 있는 이름이었다.

"가지고 있는 재산은 거의 없었는데 여기서 살아가려면 필요한 게 적지 않았으니까 어쩔 수 없는 일이었죠."

가진 재물이 없는데 이곳에 대한 지식마저 없는 '무림의 난민'에게 다가가 돈을 빌려주는 것이 금랑회였다.

-같은 입장에 있다 성공하신 회주님께서 건네는 작은 도움입니다.

그리 말하며 그들은 돈만이 아니라 정착에 필요한 여러가지를 건넨다.

이를테면 살아가기 위한 집, 혹은 집을 짓기 위한 재료.

저쪽 무림에서는 너무 귀하여 3등 이상의 교도만이 사용할 수 있었던 전기까지도.

허나 그것은 결코 공짜가 아니었다.

무언가를 얻기 위해선 대가를 지불해야만 했고 정착을 위해 받은 건 모두 빚이 되었다.

이곳에 정착하는 이들 대부분은 그렇게 금랑회에 빚을 지고 있다.

그리고 살아가며 사용하는 모든 것에도 요금을 지불하여야 했으니 지금 도진이 보고 있는 마을의 창백하리만치 연약한 빛 또한 그런 연유였다.

어디까지나 최소한으로.

약한 빛은 시력에 지극히 좋지 않겠지만 그런 '미래의 사치'를 고려할 정도의 여유가 그들에겐 없는 것이다.

"마을 공동으로 쓰는 태양열 발전기? 그게 있거든요. 근데 넉넉하지가 않아서 아껴 쓰는 거예요. 가능하면 안 쓰면 좋을 텐데 밤까지 해야 할 일이 있어서."

빚을 갚기 위한 일거리를 주는 것도 금랑회였다.

힘쓰는 일부터 시작하여 소일거리까지.

열심히, 새벽부터 밤늦게까지도 할 수 있을 만큼 일거리는 끊이지 않았지만 빚을 갚는 건 요원한 일이었다.

겨우 이자를 갚을 정도. 아주 가끔씩 원금 일부를 갚을 때도 있었지만 그만큼 이자를 다 내지 못하여 거기에 또 이자가 붙는 일도 있었다.

모두 함께 쓰는 태양열 발전기란 것부터가 밤에도 일하기 위해 마을 전체가 빚을 지고 들여온 물건으로 그 빚을 갚는 데만 몇 년은 걸릴 거라고 했다.

조용히, 그러나 진중하게 들어주는 도진에게 최태호가 옅게 웃으며 말했다.

"솔직히. 그런 생각을 해요. 아버지가 고집부리지 않고 쉬르네폴리아에서 살기로 했으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하고."

냉정히 말하자면.

그것이 정답이었다.

어리석은, 어리석기 짝이 없는 고집을 부려 하지 않아도 될 고생을 하고 모욕을 당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그게 아버지 입장에서는 최선, 이니까요."

최선(最善). 할 수 있는 가장 좋고 훌륭한 선택.

최태호는 그렇게 말했다.

"아버지는 명나라에 헌신한 분이었거든요."

명나라.

부패하여 썩어빠진 탓에 천마신교의 이단 세력이 불같이 일어나게 만들었고 또 절멸한 나라.

그러나 그렇게 절멸한 나라라 하여도, 그 안의 모든 이들이 썩어빠진 건 아니었다는 거다.

최태호의 할아버지가 그러했다.

부사(府使)라 하여 민생을 살피는 기관의 장(長)이었던 그는 썩을 대로 썩어 무너지기 일보직전이었던 명나라를 그나마 지탱하던 이였고 그런 사람이었던 만큼, 충심 또한 비할 데 없이 깊었다.

그런 아버지를 보고 자란 최태호의 아버지 또한 할아버지만큼이나 충심이 깊었으니.

"나라를 무너뜨리고 황족을 시해한 이교도들을 용서할 수 없다고 하시면서, 유일하게 남은 정통 황족이셨던 주서린 여황님을 따라 반란군을 후원하셨죠."

"그랬구나."

아버지의 좋은 면을 보고 자란 좋은 사람이었고 훌륭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는 쉬르네폴리아를, 진나라를 인정하지 못하였다.

-선조가 묻힌 땅을 떠나는 건 이해할 수 있나이다. 그러나, 선조께서 대대로 지켜 온 이름을 버리고 전통마저 바꾸겠다니. 어찌 그러실 수 있나이까.

그 또한 지극한 충신이었기에.

그는 명나라가 아닌 진나라를 인정하지 못하였고 이 현대에서 살아가기 위한 삶의 방식 또한 인정하지 못하였다.

그것이, 피상적으로 보기에 어리석고 또 어리석어 가족들마저 고생시키는 가장이 된 최항선의 선택의 이유였다.

"힘들겠네."

도진은 담담히 그리 말하였다.

최태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하지만, 아버지를 원망하지는 않아요."

그랬다.

자신의 사정을 이야기하는 최태호에게서 아버지에 대한 원망은 읽히지 않았다.

"나는 아버지를 존경했으니까요. 아버지를 존경할 수 있었던 이유인 신념을 꺾지 않고 계속 관철해 나가시는 것을 어떻게 원망할 수 있겠어요."

"어른이네."

"말했잖아요. 난 어른이라니까요."

"그래. 지금 보니 그런 거 같아."

정말로, 어른스런 아이였다.

"괜찮아요. 내가 조금만 더 크면, 아버지도 어머니도 고생하지 않으실 수 있을 거예요."

"어떻게?"

"무공을 배우고 있어요. 쉬르네폴리아에서는 올바른 심성만 갖추고 있다면 얼마든지 무공을 알려주잖아요."

"응. 그렇지."

천마신교, 혹은 포부문.

문을 두드린 자의 심성이 올곧다면 얼마든지 무공을 배울 수 있었다.

최태호는 거기서 무공을 배우고 있었고 도진은 이미 신안(神眼)으로 그것을 알았다.

그 나이 또래에선 적수가 많지 않을 정도로 제법이었다.

"저 사람들이 함부로 무공을 쓸 수 없는 고수가 될 거예요. 그리고 쉬르네폴리아에서 어엿한 한 사람의 문인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되면, 아버지도 저를 인정해 주겠다고 하셨어요."

문인(文人). 최항선이 그렇게 말했다면 관직을 뜻하는 단어였을 것이다.

그것이 진나라의 관직이든 혹은 쉬르네폴리아의 공무원이든 가리지 않겠다고, 아버지가 말씀하셨다고 최태호는 말했다.

"아버지가, 뜻을 어느 정도 꺾으신 거구나."

"맞아요. 아버지는…… 저에게까지 명나라에 대한 충절을 바라지는 않으셨어요."

스스로의 삶을 바꿀 수는 없다.

그러나 자식마저 그렇게 '무의미한' 삶을 살게 하지는 않겠다는 마음이었다.

아들이 진나라에 충성하는 문인이 된다면, 부모로서 그 충절을 방해할 수 없다는 명분으로 스스로를 납득시키는 거다.

"그래. 니가 그렇게 열심히 하는 건, 그렇게 해서 부모님을 편히 모시고 싶은 마음인 거구나."

"히히. 뭐 그렇게 거창한 건 아니구요. 그냥, 천마께서 말씀하신 대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있는 거예요."

"하하."

천마께서 하신 말씀.

그러고 보면, 그런 말을 했었다.

그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다고.

그 말을.

두 눈동자에 담긴 희망이 결코 꺼지지 않는 아이가 실천하고 있었다.

아이의 현실은 결코 녹록지 않다.

오히려 절망하여 무릎 꿇고, 고개를 들 수조차 없을 만큼 아득하니 막막하다.

아이가, 설령 마을 사람들이 제아무리 아등바등하여도 서부 무림에서 돈놀이를 하는 무림 문파인 금랑회를 어찌할 수 있을 것인가.

나아가면.

금랑회와 같은 문파가 몇 개나 활보하고 다니는, 바할라에도 굽히지 않는 나라들로 인해 생긴 무법 지대인 서부 무림을 어찌할 수 있을 것인가.

애초에 아버지의 충절로 인해 감당하고 있는 현실이었다.

현실을 바꿀 수 없다면 당장 가능한 원망의 대상에 부정적인 감정을 쏟을 수도 있었을 텐데.

아이는 그러는 대신, 할 수 있는 최선을 택할 수 있도록 그저 노력하고 있었다.

부모님의 뜻을 지키되 자신이 바라는 미래를 이루기 위하여.

근본적으로 바꿀 수 없는 당장에 절망하는 대신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다.

정말로, 장하다.

도진은 그 감정을 담아 옅게 미소지었다.

"흐음."

최태호는 조금, 볼을 붉게 물들이고선 자리에서 일어나 엉덩이를 툭툭 털었다.

"이제 가요, 형."

마을의 소란은 아까 전 잦아들었다.

수금꾼들이 떠나고 마을에 드디어 밤의 고요가 내려앉은 것이다.

도진은 저 멀리 어둠 너머, 떠나는 수금꾼들을 조용히 두 눈에 담았다.

그리고 최태호가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고서는.

"이거 줄게요, 형."

도진에게 내밀었다.

"이걸 왜?"

최태호가 내민 건 다름 아닌 오늘 점심 특별 간식으로 나온 초콜릿이었다.

도진의 손바닥보다 조금 작은 그것은 그러나 아이에겐 제법 컸는데 꽤나 비싼 만큼 쉽사리 맛 볼 수 없는 보물과도 같았다.

최태호는 그런 보물을 도진에게 내민 것이었다.

최태호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저 때문에 연장 근무 하셨잖아요. 그러니까 이건 제가 드리는 연장 수당이에요."

마을의 소란을 듣고 잠시 쉬어가자고 말했던 게 최태호였다.

그러니까 그것 때문에 도진이 연장 근무를 하게 되었으니 이렇게 연장 수당을 준다는 소리였다.

당돌한 그 말에 도진이 코로 훗, 하고 웃었다.

"그런 것도 챙겨?"

"원래 이런 걸 잘 챙겨야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는 거예요."

"하하."

도진이 유쾌하게 웃었다.

그리고 사양하지 않고 최태호가 내민 초콜릿을 받아들었다.

"오케이. 의뢰주가 준다는데 받아야지. 대신."

"나도 양심적인 사람이거든. 아무래도 이건 거스름돈이 조금 남을 거 같아. 그러니까 언제가 되었든, 필요한 게 있으면 연락해. 거스름돈만큼은 부탁을 들어줄 테니까."

* * * *

다음날.

도진은 심상 세계에서의 수련과 새벽 수련을 마치고 본격적인 하루를 시작하였다.

"잘 잤어요, 눈나?"

"응."

오성아와 아침 인사를 나누고 수련과 하루 일과에 대해 논한다.

그리고.

"민혁이랑 지인이가 잡아 온 범죄자들 중에 이단을 전파하는 이교도가 있는 모양이야."

첫 마디부터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이야기가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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