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해서 지존까지-676화 (676/741)
  • 676화

    바할라는 남쪽에 있는 나라로 겨울이 없다.

    더욱, 북쪽으로 올라갈수록 사막의 비중이 넓어지며 쉬르네폴리아는 바로 그 사막의 가운데 세워진 도시였다.

    비록 도시 안에 녹음의 비중을 높이고 커다란 호수를 만들었다 하여도 근본적인 환경 자체를 바꾼 건 아니었으니 쉬르네폴리아는 사막 도시의 범주 안에 있었다.

    그런 쉬르네폴리아의 외곽에 있어 사막과 맞닿아 있는 프로니모스 사립 학교의 실내 체육관 안에서 지금.

    서걱-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대규모 '여름 김장'을 하고 있다.

    벽태웅이 솔선수범하여 나르기 시작한 결과물인, 그야말로 산처럼 쌓인 배추를 도진이 하나씩 가져와 서걱 반으로 나누고 또 그것을 반으로 나누면 곁에 있던 붙임성이 좋은 남자 아이, 최태호가 옆의 배추를 씻고 소금을 치는 곳으로 옮겼다.

    도진과 최태호처럼 2인 1조로 짝을 나누어 배추를 써는 사람만 스무 명이 넘었으니 조금 과장을 보태면 동네 사람들이 다 모여 함께 김장을 하는 수준의 규모다.

    그렇게 한창 작업을 하는 동안 최태호가 심심하지 않도록 조잘조잘, 이야기를 해 준다.

    "여기도 사실 채소 먹기가 쉬운 도시는 아니거든요."

    "그렇지."

    아무래도 사막에서 신선한 채소를 구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바할라에서 그 부분에 관한 좋은 정책들을 펴고 있어서 고기보다 비싸거나 돈이 있어도 못 먹는 경우는 없지만 지역 특성상, 그리고 시간상 아직 쉬르네폴리아는 근본적으로 그 부분을 다 해결하지 못했다.

    "그래서! 김장을 하게 된 거예요."

    "…이야기가 너무 생략됐는데?"

    "요새 길게 설명하면 설명충이라고 욕 먹어요."

    "아니, 그래도 이건 너무 생략했잖아. 이러면 또 욕 먹어."

    "어휴. 형도 까다로운 성격이시네요. 그래선 장가도 못 가는 수가 있어요."

    "뭐, 임마?"

    "알았어요. 형이 원하셨으니 조금 더 설명해 드릴게요."

    "오냐."

    그리하여 이어지는 설명은 이랬다.

    바할라엔 여러 곳에서 온 다양한 사람들이 있었는데 개중에 한국인의 비중도 적지 않았고 그들의 김장 문화가 널리 퍼졌다는 거다.

    신선한 채소를 먹기가 힘든 환경.

    설령 신선한 채소가 있다 해도 대량 구매를 할 수 없고 구매한다 해도 오래 보관할 수 없다.

    이런 환경에서 김치는 기름진 식탁 위에 올릴 수 있는, 오래 보관할 수 있는 음식이었으며 수고를 들이면 가계 사정에도 보탬이 되니 자연스레 전파가 된 것이다.

    여기에 한 가지를 더하여 쉬르네폴리아는 도시의 형성 과정으로 인한 한국의 품앗이 문화와 닮은, 서로 돕고 사는 게 일상화 되어 있었는데 그것이 김장에도 적용되어 이렇게 함께 모여 김장을 하는 문화가 생긴 것이었다.

    최태호의 설명에 도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구나."

    서걱.

    이야기를 듣는 사이에도 도진이 든 식칼은 정확하게 배추를 4등분하여 밀어 놓고 있다.

    압도적으로 빠르진 않지만 오가는 최태호가 부담없이, 그러나 공백 없이 움직일 수 있는 템포를 정확하게 맞춘다.

    그런 도진과 배추를 유심히 보며 최태호가 말했다.

    "형, 진짜로 고수인가 봐요?"

    "왜?"

    "배추 써는 게 능숙해서요."

    그 말에 도진이 피식 웃었다.

    "사실 김장은 익숙하거든."

    "김장이요? 아, 한국인이시지."

    "뭐, 꼭 그래서는 아니고."

    그것은…… 이번 생은 아니고 전생에서의 이야기다.

    감당할 수 없는 불행이 덮치고 가세가 기울었던 시절.

    도진의 어머니 서정원은 식당에서 일하였으니 다름 아닌 도진의 숭무고 동기 서태주의 부모님이 운영하는 한식당 '중정'이었다.

    한식당, 그것도 제법 고급 식당인 중정의 세일즈 포인트 중 하나가 다름 아닌 오랜 전통의 방식으로 직접 담그는 김치였다.

    겨울 김장은 당연했고 여름 김장 또한 빈번했는데 도진이 어머니와 함께 여기에 한 손 거들고 김치를 따로 더 얻어 오곤 했었다.

    왼쪽 다리가 마비되었고 왼손도 겨우 움직일 뿐 일정 이상의 힘을 줄 수 없던 도진이었기에 도울 수 있는 범위도 한정 되었고 그리 도움이 되지 않았던 걸 생각하면, 당시 서태주의 부모님이 상당한 배려를 해 준 것이다.

    그런 좋은 분들이었으니 지금 'TJ 그룹'의 성공이 또 참으로 기쁘다.

    학폭에 괴로워하던 서태주를 도우면서 본격적으로 인연이 이어진, 자그마한 회사였던 서태주네 부모님의 회사는 급성장을 하여 이제 규모 있는 TJ 그룹이 되었다.

    그 TJ 그룹의 사업 중 하나가 국내에 알려지지 않은, 그러나 실력 있는 농가의 농산물을 매입하여 해외로 수출하는 것이었는데 지금 도진이 자르고 있는 배추가 바로 TJ 그룹의 수출품이었다.

    포장의 겉에 새겨진 TJ 그룹의 로고. 그 로고가 새겨지는 과정에서 TJ 그룹 성장의 주역이 된 어머니 서정원의 수고도 있었다는 걸 아는 도진의 미소가 짙어진다.

    전생을 생각하면, 지금의 이 상황이 참으로 많은 감정을 자아내게 만든다.

    어디까지나 부정적이 아닌 긍정적인 방향으로.

    그리고 그런 긍정적인 방향은 육체를 더 활발하게 만드니.

    "아이고……."

    "그러실 거 같더라."

    점심 시간.

    절인 배추를 재워두고 식당으로 온 도진은 푸짐한 식사 앞에서 곡소리를 냈다.

    최태호가 도진의 모습에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맞은편에 앉았다.

    "아무리 무림인이라도 김장을 만만하게 보면 큰코다친다구요."

    김장은 어마어마한 육체 노동이다.

    특히나 김장을 하는 동안의 자세는 몸에 정말정말 좋지 않으니 나 무림인이요하고 덤벼들었다가 저녁에 곡소리를 내는 사람들을 최태호는 적지 않게 봐 왔던 것이다.

    "그래, 그렇지."

    도진은 피식 웃으며 최태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잘 알고 있다.

    성치 않은 몸으로 김장에 참여했었던 도진은 더더욱.

    "걱정하지 마. 무리한 건 아니니까."

    "진짜요?"

    "그럼. 좀 있으면 괜찮아져."

    "형. 지금은 젊어서 괜찮겠지만 나이 들면 지금 무리한 게 그대로 나타나니까 조심하세요."

    "와, 너 그런 것도 아냐?"

    "나 어린애 아니거든요?"

    "몇 살?"

    "열 넷이요."

    "우리는 열 넷을 꼬마라고 부르기로 했어요."

    "초등학생도 아니고 중학생이 왜 꼬마예요!"

    "음. 나도 그랬던 시절이 있었지."

    어린 아이와 농담을 주고받는 게 제법 즐겁다.

    똘망똘망한 눈동자에 깃든 자신감과 희망 때문인 것 같았다.

    이곳에 있다는 건 결코 긍정적이지만은 않은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의 눈동자에는 자신감과 희망이 깃들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너, 친구들이랑 밥 먹지 않아도 돼?"

    문득 도진이 물었다.

    아이의 성격상, 그리고 이곳의 분위기로 보건대 최태호가 왕따를 당하거나 그에 준하는 좋지 않은 일을 겪고 있지 않다는 걸 확신하고 있었기에 한 말이었다.

    실제로 최태호는 식당에 들어오면서 몇몇 아이들과 짧지만 사이 좋아 보이는 모습을 보여 주었고.

    도진의 물음에 최태호가 씨익 웃었다.

    "친구들은 얼마든지 볼 수 있지만 형 같은 손님은 오늘 하루밖에 볼 수 없잖아요. 그러니까 많이 봐야죠."

    "오……. 뭔가 있어 보이는 생각인 걸?"

    "그리고 저는 사람들이랑 대화하는 걸 좋아하니까요. 특히 그게 처음 보는 사람이라면 더 그래요."

    "그래, 그렇구나. 눈부신데. 나 같은 아싸에겐 너무 눈부셔."

    "뭘 그렇게까지야."

    볼수록 호감이 가는 녀석이라고 도진은 생각했다.

    식사 후 쉬는 시간을 가지고 다시 김장이 재개되었다.

    김장 양념을 만들기 위하여 갖은 재료를 넣고 풀물을 부어 섞어주는 과정이 제법 중노동이었는데 끙끙 앓던 도진이 또 날아다니며 몇 개나 되는 대야의 양념을 만들었다.

    "와, 진짜 살아나셨네. 무리하는 거 아니죠?"

    "괜찮아, 괜찮아."

    웃으며 말하는 도진은 정말로 괜찮았다.

    끙끙거렸던 게 모두 연기는 아니었다.

    정말로 도진은 힘들었으니까.

    그냥 움직이는 게 아니라 연신극기공으로 몸에 부하를 주며 움직였으니 평범하게라면 하루 종일이라도 문제없었을 활동이 강도 높은 수련이 되었다.

    여기에 가장 중요한 부분인 몸을 망가뜨리지 않고 효율적인 자극이 되도록 부하를 잘 조절하였으니 정말로 괜찮았다.

    김장 양념을 다 만들고 나서는 잘 절여진 배추에 골고루 양념을 바르고 담는 것으로 김장이 끝났다.

    어느새 해가 져 제법 추워진 저녁에 뜨끈한 수육에 겉절이를 싸 먹으니 그렇게 꿀맛이 또 없었고 축제와 같은 분위기에서 피로를 풀었다.

    그리고 하나 둘.

    각자 가져온 통에 자신의 몫을 담고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갔고 체육관에는 아이들만이 남았다.

    그렇게 남은 아이들은 또 둘로 나뉘었으니 한쪽은 이곳 기숙사에 머무는 아이들.

    또 한쪽은 이곳에 살지 않는, 쉬르네폴리아에 살지 않는.

    서부 무림에 살아 그곳으로 돌아가야 하는 아이들이었다.

    * * * *

    아홉 시.

    도진은 최태호와 함께 낙타를 타고 최태호네 집으로 가고 있었다.

    늦은 밤. 사막.

    그것도 서부 무림에 있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도진이 동행한 것이다.

    무법 지대를 덜렁 아이만 걷게 할 수는 없었기에 포부문은 아이마다 한 명씩은 포부문의 무인이 동행하게 조치하였다.

    포부문의 표식을 새긴 무인이 동행하였으니 비록 한 명씩이라 하여도 서부 무림의 불한당들이 습격할 걱정은 거의 없었다.

    미묘한 공백 지대인 서부 무림에 공식적으로 무언가를 선포한 건 아니지만 암묵적인 힘의 논리다.

    직접 소리 내어 서부 무림에 개입하지는 않지만 그렇기에, 서부 무림에 기생하는 범죄자들 또한 포부문을 건드려 개입의 빌미를 주는 미친 선택을 하지는 않는 것이다.

    아이밖에 없다면.

    설령 표식을 가지고 있다 하여도 쥐도 새도 모르게 삼킬 수 있지만 그 아이와 동행하는 포부문의 문도가 있다면 건드릴 수 없다.

    반대로 포부문의 문도 또한 저쪽에서 먼저 건드리지 않는 한 나설 수는 없었으니 유지되는 균형이다.

    다만 그렇다 하여도.

    "설마 나랑 같이 가겠다고 할 줄은 몰랐네."

    도진은 최태호가 자신을 선택할 거라곤 예상치 못했다.

    김장에도 끙끙거리는 모습을 보여준 '그저 그런 무림인'을 말이다.

    도진의 앞에 앉은 최태호가 고개를 돌리며 웃었다.

    "형 고수라면서요."

    "그렇지. 고수지."

    "김장하는 것만으로도 힘들어 하는 고수지만요."

    "간지럽힌다?"

    그 말에 최태호가 두 팔을 바짝 모아 겨드랑이와 옆구리를 방어했고 도진이 피식 웃었다.

    최태호는 그 자세 그대로 말했다.

    "아무리 서부 무림이라도 누가 간 크게 포부문을 건드리겠어요. 그러면 많이 못 볼 형이랑 가는 게 더 좋지 않겠어요."

    "어이구, 예쁜 녀석."

    "아악! 간지럽히지 마요!"

    푸하하 웃으며 장난을 쳤다.

    그러면서 집으로 가는, 제법 먼 거리에 있는 서부 무림의 작은 마을까지 가는 동안은 최태호의 말대로 그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은밀히 숨어 지켜보는 시선이 가는 길에 몇 개나 있었지만 포부문의 표식에 감히 칼을 뽑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자꾸 이딴 식이면 곤란해.

    -자네. 갑자기 그러면 어떡하나. 우리 사정을 뻔히 알면서.

    -아니, 씨발! 그러니까 말이야!

    '…….'

    저 멀리 보이기 시작한.

    포부문의 이름이 닿지 않는 서부 무림 속 작은 마을에서는 좋지 않은 분위기가, 날카롭고 또 뾰족하게 내려앉아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