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5화
"태웅이는 아직 밖이야?"
함께 걸으며 도진이 물었다.
조서강이 예, 하고 답했다.
"아침 시찰이 좀 늦어지는 모양입니다."
아침 시찰.
포부문이 맡은 현장을 둘러보며 간밤에 어떤 문제가 없었는지 살피고 하루의 시작을 여는 스케줄이다.
'시찰'이라고 하니 약간 부정적인 뉘앙스도 묻어나지만 사실은 정반대다.
이곳 쉬르네폴리아에서 포부문은 바할라와 치안 유지 계약을 체결하고 최선을 다하여 도시에 헌신한 유지이자 명문이었으니까 말이다.
김서우의 유호 건설과 벽태웅의 포부문, 그리고 오대용의 오성 건설 쉬르네폴리아 지사는 그저 사막이었던 쉬르네폴리아와 함께 성장하였다.
오로지 사막이었던 땅에 터를 다지고 이곳에서 살기로 한 사람들과 함께 먹고, 자고, 마시며 그 위에 주춧돌을 놓았던 것이다.
단순히 돈을 투자하거나 철저하게 비즈니스적으로 대했던 다른 곳들과 달리 유호 건설과 포부문, 오성 건설은 이곳을 또 다른 고향으로 삼고 함께 삶을 살았으니 특별했다.
힘을 합쳐 기둥을 세우고 힘을 합쳐 지붕을 얹었다.
아프면 걱정하여 주었고 힘들면 서로 등을 기대고 앉아 쉬었다.
불한당이 쳐들어 올 때도 있었지만 단결된 그들의 벽을 단 한 놈도 넘지 못했다.
그 형태는 쉬르네폴리아가 화려하게 개화한 지금도 다르지 않다.
유호 건설과 함께 이 도시에서 두 번째로 가장 높은 빌딩의 주인이 되었음에도 벽태웅은 변함없이 이른 아침에 현장에 나가 그들과 함께 걷고 있다.
도진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좋은 일이네."
시간을 정확하게 정해 놓지 않고 그저 오후가 되기 전에 방문하겠다 말했다.
시간을 정해 놓으면, 혹여 벽태웅이 거기에 신경을 써서 해야 할 일을 못할 수도 있었으니까.
실제로 지금.
벽태웅은 해야 할 일을 하느라 아직도 밖에 있었다.
"넌 아침은 먹었어?"
"물론입니다, 큰형님. 동생들이랑 국밥 한 그릇 시원하게 말았습니다."
"그래."
잠시 기다릴 겸 휴게실로 향했다.
직원 복지를 위한 공간이 곳곳에 있었는데 직원들이 일하는 데 방해되지 않도록 개중 방문하는 이가 적은 곳으로 골랐다.
그곳에서 조서강이 타 준 결명자차를 홀짝이며 문득 떠오른 걸 도진이 말했다.
"그런데 서강아."
"예, 큰형님."
"그 큰형님이란 호칭 말야. 어쩐지 조폭 같지 않니?"
"허어! 조폭이라니요, 큰형님. 그런 좋지 못한 단어를!"
조서강이 펄쩍 뛴다.
그 반응이 생각보다 커서 피식 웃고 만 도진이었다.
"그런가?"
"그렇죠! 어디까지나 우리 태웅 형님의 형님이시니 당연히 더 존중하는 마음을 담아 큰형님이라 하는 건데 그러시면 섭합니다."
"아하하. 그래, 그래. 나도 알아. 너 인텔리인 거."
"음. 인텔리. 참 좋은 단어입니다."
사람은 자신에게 부족하거나 없는 것을 동경하고 바란다 했던가.
조서강은 어릴 적 간절히 바랐지만 될 수 없을 거라 생각했던, 지적이고도 유능한 회사원으로서의 이미지를 특히나 좋아하는 모양이었다.
도진이 알기로 조서강은 이 포부문에서도 넘버3 정도는 되는, 총무 격의 역할을 맡고 있으니 꿈을 아주 크게 이룬 격이다.
보통은 그렇게 꿈을 이루고 나면 꽤 마음이 식는 법인데 조서강은 그렇지 않은 듯 보인다.
그렇게 조서강과 가벼운 대화를 나누고 있는 사이 돌아오는 벽태웅의 기척을 느낄 수 있었다.
"태웅이 왔네."
"그렇습니까?"
"응. 저기 차 오는 중."
도진이 창가를 가리키며 말하자 조서강이 목을 주욱 빼며 시선을 향했으나 차를 찾지 못했다.
"아마 5초 뒤에 보일 거야."
조서강이 무어라 말하기 전 그보다 빠르게 도진이 말했고 정말로 5초 뒤, 조서강은 벽태웅이 타고 나갔던 회사 차를 볼 수 있었다.
"와……. 그게 보이십니까?"
"보는 게 아니라 느끼는 거지."
"당연한 말이겠지만 진짜 큰형님, 존경스럽습니다."
"푸후후. 그래. 고맙다."
잠시 기다리니 벽태웅이 보육원의 동생들이자 회사의 기둥인 직원들과 함께 올라왔다.
조서강과 마찬가지로 꽤 멋이 나는 정장 차림인데 이쪽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텔리라기보단 '인자강', 인간 자체가 강한 포스가 더 압도적이다.
물론.
"형님."
도진에게 있어선 든든한 동생이지만 말이다.
"그래. 잘 다녀왔어?"
"예."
"오셨습니까, 교주님."
"에이, 뭐들 그렇게 딱딱하게 그래. 태웅이 동생이면 나랑도 남이 아닌데."
태웅이 꾸벅 고개를 숙이며 인사하자 뒤의 동생들 중 처음 보는 얼굴들이 잔뜩 긴장한 얼굴로 예를 차렸다.
도진이 편하고 부드러운 인상을 받도록 신경썼지만 '천마'는 그저 이름만으로도 이름 높은 포부문의 구성원들마저 긴장하게 만드는 것이다.
다만 그 긴장이 두려움이나 경외보다는 긍정적인 동경에 가까워 도진은 웃으며 그들이 긴장을 풀 수 있도록 하였고 조서강이 '큰형님이야, 큰형님!'하며 힘을 보태 원하는 방향으로 태도가 바뀌게 됐다.
좋은 분위기 속에서 준비가 다 끝났고 벽태웅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출발하자."
* * * *
포부문은 쉬르네폴리아에 많은 공헌을 하고 있었다.
일일이 열거하기엔 너무 길고 많았는데, 개중에 특히 큰 것 중 하나가 바로 사립 학교였다.
사립 학교(私立學校).
말 그대로 개인이나 법인이 세운 학교로 포부문은 따로 교육 재단을 설립하여 커다란 학교를 세운 것이다.
바할라가 특히 교육에 힘써 어느 나라와 비교해도 뒤지지 않을 훌륭한 교육 시스템을 갖추고 그것을 거의 무상으로 제공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다면 언뜻 이해가 가지 않을 수 있다.
당연히 쉬르네폴리아에도 그런 바할라가 운영하는, 국민이라면 누구나 입학할 수 있는 학교가 있으니까.
여기에는 쉬르네폴리아의 어두운 면과 이어지는 사정이 있었으니 앞서 말한 것 중 하나.
'국민'이라는 조건을 충족하지 못하는 이들이 포부문이 사립 학교를 세운 이유였다.
차를 타고 이동하며 도진은 오성아에게 들은 내용을 되새겼다.
-국가의 법이라는 건 가능한 한 보수적이어야 하거든. 그러니까 바할라의 국민이 되기를 거부한 아이들에게도 그냥 무상으로 교육을 제공할 수는 없는 거야.
결격 사유가 없는 이들 중 원하는 이는 누구나 바할라의 국민이 되어 쉬르네폴리아에서 살아갈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원하지 않는 이'는 바할라의 국민이 되지 않을 수 있다는 거다.
그렇게 바할라만이 아니라 아예 이쪽 세계의 시스템에 속하는 것 자체를 거부하는 이는 생각보다 적지 않았으니 그들은 무법 지대이면서 공백 지대, 소위 서부 무림이란 곳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고집을 부리면서도 미래를, 아이를 생각하는 부모들이 있으니까.
자신은 이쪽 세계의 구성원으로서 살아가길 바라지 않는다.
그러나 부모로서 아이마저 그렇게 살게 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는 이 또한 적지 않았던 거다.
그것이 고집이란 것도 알고 무엇이 옳은지, 무엇이 더 나은지도 알고 있으며 이런 삶이 계속 될 수 없다는 것도 안다.
그러니까 아이만큼은.
아이만큼은 자신의 고집에 함께 고생하지 않고 미래를 찾았으면 하고.
염치없지만 바라고 마는 것이다.
포부문이 세운 사립 학교는 그 부모들의 염치없는 바람을 이루어주기 위하여 세워졌다.
국가의 법은 보수적이어야 하고 구성원이 되길 거부한 이들을 간단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하지만 사립이라면.
무림의 문파인 포부문이 세우고 책임지는 사립 학교라면 그들의 아이를 받아들이고, 가르치고, 이끌어 줄 수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탄생한 것이 프로니모스 사립 학교.
지금은 서부 무림에 살고 있지만 미래엔 바할라에서 함께 살 이들의 배움터였다.
그리고 이 배움터가 바로, 저쪽 세계와 이쪽 세계에 남겨진 갈 곳 없는 아이들의 집이기도 했다.
이 세계는 물론이요 저쪽 세계도 결코 이상적이지 않으니 보살펴 줄 보호자를 잃은 아이들은 끊임없이 나오고 마는 것이다.
프로니모스 사립 학교는 그 아이들을 품어 주고 또 미래를 꿈꿀 수 있도록 가르쳐 주고 이끌어주는 요람이기도 했다.
짙은 녹음으로 둘러싸인 넓고 아름다운 학교와 그 학교를 가득 채우고 있는 활기에 도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학생이 많이 늘었네."
6개월 전만 해도 학교의 규모에 비해 학생이 너무 적어 어쩔 수 없이 휑한 느낌이 있었는데.
반 년만에 학생이 세 배는 더 늘어 제법 활기를 띠게 되었다.
보호자를 잃은 아이가 폭증하는 비극적인 일은 요 근래 없었으니 이것은 그러니까.
"예. 마음을 바꾼 사람들이 많이 늘었습니다."
서부 무림에 사는 사람들이 아이들의 미래를 생각하여 이곳에 보내는 일이 늘었다는 거다.
"일이 좀 많았겠네?"
도진이 스윽 웃으며 물었고 벽태웅이 마주 웃으며 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다행히 다 좋게 해결이 됐습니다."
아이들끼리, 그것도 복잡한 배경이 있는 아이들끼리 모이면 트러블이 발생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이 트러블이란 것은.
책임을 지고 해결하려 들면 트러블의 수십 수백 배의 품이 들어가게 된다.
무엇을 잘못하였는지 아이가 알게 하고 인정하게 하여 이윽고 뉘우치게 해야 했고 그럼으로써 다시는 잘못을 반복하지 않고 옳은 방향으로 이끄는 건 그렇게나 힘이 드는 것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프로니모스 사립 학교는 힘이 들지만 그렇게 옳은 방향으로 이끄는 것만을 방침으로 삼았고 계속 그 방향을 고수하고 있다.
정규 수업이 없는 토요일.
그러나 오늘은 평소와 달리 수많은 아이들은 물론이요 동네의 사람들까지 상당히 많은 인원이 모여 있었다.
개중 아이들이 도도도 달려와 벽태웅 일행을 반겼다.
"오셨어요, 형."
아직 어린 아이들은 형, 형님. 혹은 오빠.
조금 머리가 굵어진 아이들은 문주님이나 이사장님이라는 호칭의 비중이 높았다.
따지고 보면 학교 재단의 이사장보다 높은 사람들이 온 것인데 분위기는 그렇게 경직되어 있지 않았으니 포부문이 진심으로, 자주 이곳에 왔기 때문이다.
실제로 벽태웅과 그 동생들 주위로 삼삼오오 모여드는 아이들의 얼굴에는 반가움이 깃들어 있었으니 그 훈훈함에 도진이 또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그리고.
"형은 오늘 새로 왔어요?"
붙임성 좋아 보이는 남자 아이 하나가 도진에게 다가와 물었다.
이곳에 와서 산 화사한 방풍 코트를 두르긴 하였으나 얼굴을 가리지 않은 도진을 아이는 천마라 알아보지 못하였는데, 이는 아이가 무지한 것이 아니라 도진의 사신공이 경지에 오른 것이 그 이유다.
굳이 얼굴을 가리지 않더라도.
자연스러운 평범함으로 도진은 주위에 인식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평범한 청년'에게 다가와 묻는 아이에게 도진은 웃으며 앉아 눈높이를 맞추고선 말했다.
"맞아. 오늘 처음 와 봤어."
"그러시구나. 형도 포부문에 입문한 거예요?"
"아니, 그건 아니야. 형은 그냥 이곳에 와 보고 싶어서 온 거야."
"흐음. 그러시구나. 형, 고수예요?"
도진이 하하, 소리내어 웃었다.
"음. 제법 고수긴 하지?"
"그러시구나. 다행이네요. 오늘은 좀 힘든 거 하거든요."
"힘든 거?"
"네."
힘든 거라니, 무얼까.
그리 생각하는 도진은 이곳으로 가까워지고 있는 트럭에 실린 것들을 감각으로 훑었다.
'배추. 무. 고춧가루에 마늘…… 이거?'
몇 대나 되는 트럭에 가득 실린 배추와 그 외 갖은 재료들이 도진에게 유력한 정답으로 보이는 단어 하나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그리고 아이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오늘, 김장하는 날이거든요."
'…여기서 진짜 김장이 나온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