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4화
언쟁이 격화되어 터진 소란이었다.
이야기의 끄트머리에서부터야 제대로 들은 도진이었으나 원인을 짐작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참, 힘들었지.
-이주를 결정하고 이곳에 왔는데, 살 집은 스스로 지으라니 말이야. 아무것도 모른 채 와서 이곳에 대해 알아가고 또 집을 짓는 것이 처음에는 막막하지 그지없었어.
조금 심지가 약한 남자의 술기운이 묻어나는 소회였다.
힘들었지만 소중한 추억이 된 과거의 이야기였는데 그에 답한 것이.
-에이. 그게 뭐가 그렇게 힘들다고 그러는가. 난 말이야.
그렇게 시작하는 말이었다.
심성이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은데, 대화에 관한 부분에서 많이 부족했다.
상대를 깎아내리고 화가 나게 하는 스타일.
그닥 얼굴을 마주하고 싶지 않게 하는 타입이었다.
-그래. 자네도 여기 오기 참 힘들었지.
처음 말했던 남자는 그러나 거기에 공감해 주고 대화를 이끌어 나가려 하였지만.
-맞아. 그러니 자네는 꽤 운이 좋았던 편이란 말이야.
상대하는 남자가 계속 그런 식이니 결국 싸움이 나고 말았던 거다.
콰아앙-!
좋게 이야기를 이어 나가려던 남자가 테이블을 거세게 치며 일어났고 주위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도진네 일행 또한 아래로 관심이 향한다.
이곳의 프라이빗룸은 제법 방음이 잘 되는 곳이었으나 거세게 테이블을 치고 일어나 소리치는 것을 못 들을 정도로 경지가 낮은 사람은 없었던 거다.
"…나가지."
고요해진 가운데 테이블을 박차고 일어났던 이의 맞은편에 있던 남자가 한 말이었다.
두 사람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가게의 넓은 뒷마당으로 향했다.
마침 도진 일행이 있는 룸의 창문을 통하여 내려다 보이는 곳이어서 상황을 두 눈으로 볼 수 있게 됐다.
긴장감의 중심에 있는 두 중년인은 친구로 보였다. 그것도 제법 오래 알고 지낸.
대화의 부분에서 결함이 있다 해도 친구가 되지 못할 건 없으니 이상할 것도 없다.
다만 그렇기에. 오래 알고 지내면서 쌓인 것이 이번에 터진 모양이었다.
구경꾼들이 둘러선 가운데 '비무대'가 만들어졌다.
검수(劍手)인 두 사람에게 목검을 건넨 점원이 가운데 서서는 말했다.
"이것은 공정하고 신성한 에이레입니다. 포권하십시오."
진지한 말에 두 남자가 서로에게 검을 든 채 포권하였다.
"시작!"
그리고 외침과 동시에 테이블을 거세게 치며 일어났던, 심지가 조금 약했던 남자가 말투가 좋지 않은 친구에게 쇄도하였다.
따아아악!
힘을 잔뜩 담은 목검이 부딪치며 통렬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따다다닥!
이어서 화려한 검격이 계속해서 타격음을 만들어 낸다.
-투박하지만 단단한 검이로구나.
-예.
스승 천마 위지혁의 평가에 도진이 동의하였다.
철저하게 객관적으로 말하자면, '저잣거리에 나도는 비급' 수준의 검술이다.
하지만 그런 검술이라 하여도 수십 년을 꾸준히 하면 이치가 깃드는 법이니 남자의 검이 그러했다.
아마도 그는 꾸준히 무공을 수련한, 그러나 교나라에 살면서 3등 교도가 되어 끌려가지 않도록 일부러 경지를 제한한 사람인 듯 보였다.
따악-!
그리고 그런 남자의 검을 받아내는, 말투가 좋지 않은 남자는…….
-교도로구나.
-예.
천마신교의 교도였다.
비록 단순한 검술이라 하나 오래 수련하여 이치가 깃든 검을 단 하나도 흘리지 않고 정면에서, 그러나 흔들리지 않고 막아낸다.
천마신교의 기본공인 신마공(身磨功)을 일정 경지 이상 수련함으로써 이룩한 단단한 육체와 내공의 힘이었다.
저 정도라면 교나라가 정한 일정 수준을 넘어 3등 교도, 이쪽 세계와의 전쟁을 위해 끌려가야 했겠지만 이곳에 정착하여 살고 있는 것으로 볼 때 그는 그러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다.
그는 교나라에 대항하여 싸운, 천마신교의 교도였다는 거다.
이렇게 보면 그의 입장에서 생각할 때 어느 정도 발언이 이해가 된다.
교나라에 대항하여 교도로서 투쟁하다 이곳으로 왔으니, 그의 입장에선 정말로 목숨을 걸고 싸운 것이다.
물론.
어디까지나 이해가 된다는 것이지 옳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스스로의 힘듦을 기준으로 남을 평가 절하하거나 폄훼하는 건 결코 정당화될 수 없으니까.
물론 도진이 본 그의 심성에 비추어 보자면 정말로 친구의 고생을 평가 절하하거나 폄훼하려는 의도는 아니었다.
그저 악의없이 한 말. 그러나 그렇기에 더욱 아쉬운 부분이다.
천마신교의 교도라 하여 무조건 그림처럼 완벽한 사람일 수는 없다는 당연한 일면이다.
따악-!
따다닥!
공방은 일방적으로 흘러갔다.
심지가 조금 약한 남자가 끊임없이 공세를 취하고 말투가 좋지 않았던 남자는 그것을 그저 받아내기만 할 뿐 반격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일방적인 공방 속에서 목검이 격돌할 때마다 두 사람 사이에 소리없는 대화가 오가는 것을, 도진은 읽을 수 있었다.
따악-!
"…내가 졌네."
얼마간 이어지던 비무는 심지가 조금 약한 남자가 스스로의 패배를 인정하며 끝이 났다.
"서로 포권하십시오."
직원의 말에 두 사람이 서로 포권을 하였고 목검을 반납한 뒤 자리로 돌아가 마주 앉았다.
어색한 분위기가 잠시 이어졌지만 곧.
"미안하네. 내가 좋지 않은 버릇을 고치지 못해서 자네가 상심하게 만들었군."
"아니야. 나도 계속 고집을 부려 일을 크게 만들었지."
"원인은 내가 아니었던가. 앞으로 더 주의하고 고칠 수 있도록 노력하겠네."
"하하! 내가 그래서 자네를 좋아하지. 한 잔 하세나."
서로 사과하고 웃으며 술잔을 드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도진은 거기까지 듣고서 스윽 웃었다.
"잘 해결됐네요."
"여기 사람들은 에이레를 선호하니까 말야."
그리 말하는 건 뿌듯한 얼굴의 오대용이었다.
에이레.
바할라의 전통 중 하나인 '신성하고 현명한 결투'를 뜻하는 말이다.
감정이 고조되었을 때 그것을 담아두지 않고 해소하기 위한 결투.
다만 그것이 감정에 지배당한 폭력적인 행위가 아닌 신성하고도 현명한 것이 되도록 하니 에이레는 특별한 것이다.
감정이 상했을 때 마음 속에 담아두면 그것은 결코 더 사라지지 않고 좋지 않은 찌꺼기를 남긴다.
그 좋지 않은 찌꺼기가 쌓이면 이윽고 넘치니 바할라의 사람들은 결투를 통하여 찌꺼기를 태워 해소하는 문화가 있었는데 이것이 무림에서 넘어온 사람들에게까지 잘 정착한 것이었다.
비록 감정이 폭발하여 행동으로 나타났다 하나 두 사람은 여전히 친구였고 그 관계를 끝낼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러나 그 상태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으로 넘길 수는 없었으니 두 사람은 에이레를 통하여 감정을 해소하고 '현명한 대화'를 나눈 것이다.
심지가 조금 약한 남자의 화를 말투가 좋지 않았던 남자는 고스란히 받아내면서 사과하였고 그 사과가 받아들여져 두 사람은 화해할 수 있었다.
"좋네."
"그렇지?"
여전히 뿌듯한 얼굴의 오대용이다.
나고 자란 곳은 아니지만 그에게도 제2의 고향이 된 쉬르네폴리아였기에 그런 표정이 되는 것이다.
도진은 피식 웃으며 콜라를 홀짝였다.
요 이틀.
쉬르네폴리아의 좋은 부분을 참으로 많이 보았다.
일부러 그런 것만 골라 본 것이 아니었음에도 그럴 수 있을 만큼 이 도시에는 좋은 것이 가득하였다.
물론.
쉬르네폴리아 또한 천국이 아닌 현실이기에 좋은 것만 있지는 않을 것이다.
이를테면 아까의 친구들끼리의 싸움.
그들은 이상적인 형태로 화해하며 끝을 냈지만 그러지 못한 경우 또한 분명히 있었을 거다.
"태웅아."
"예, 형님."
"너 좋은 일 많이 하고 있다면서?"
내일부터는…… 쉬르네폴리아의 그런 부분들을 좀 둘러볼 생각이었다.
* * * *
회식 이후.
도진은 오성아와 함께 주변의 호텔에 묵었다.
관광객이 많은 만큼 쉬르네폴리아의 호텔 업계는 수준급이었고 불편함없이 머물 수 있었다.
기분 좋게 자고 일어난 도진은 개인 수련 후 오성아의 수련을 도와 주고서 유호 건설로 향했다.
오전 5시 30분.
이른 시간이었으나 도진의 아버지 김서우는 어느새 단정한 모습으로 무복을 차려입고 천마의 가족을 위해 만들어진 연호신공을 수련하고 있었다.
크게 고생을 하였고 50대에 접어든 김서우는 그러나 연호신공을 꾸준히 수련함으로써 생기로 가득하여 도진이 미소지었다.
기억 속, 도진을 지키느라 자신의 모든 걸 잃었던 아버지는 이제 없다.
지금 도진이 보고 있는 아버지는 그보다 더 먼 기억 속. 도진이 살던 세계의 전부와 같던 모습 그대로다.
"왔니."
"예, 아버지. 아침 같이 드실래요?"
"그래."
여전히 무뚝뚝한 아버지다.
다른 아버지는 잘 모르겠지만, 도진의 아버지는 이렇게 속내를 잘 드러내지 않았다.
어릴 적엔 그래서 몰랐고 또 쉽사리 많은 것을 외면하고야 말았다.
하지만 이제는 제법 나이를 먹어서. 그래도 경험이란 걸 많이 해서.
무뚝뚝함 속에 담긴 것들을 읽을 수 있게 됐다.
내심 기뻐하시는 아버지와의 식사를 하고 도진은 구름 다리를 건너 옆의 빌딩으로 향했다.
구름 다리를 통하여 유호 건설과 연결된 이 빌딩의 주인은…… 다름 아닌 벽태웅의 문파 포부문이다.
포부문(抱負門).
벽태웅이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하여 한 발 내딛으며 세운 문파다.
그를 키워 준, 원장님이 아니라 고모부와 고모라 부르라 했던 부모님과 같은 분들처럼.
보육원의 동생들이 무시받지 않고, 엇나가지 않고 미래를 꿈꿀 수 있도록 해 주고 싶었던 그 꿈을 이루기 위하여 세운 문파.
그리고 그것을 실현한 결과가 이 빌딩이었다.
김서우와 함께하면서 포부문은 쉬르네폴리아에서 손꼽히는 중요 문파가 되었고 그 위상을 유호 건설과 이어진 쌍둥이 빌딩이 상징하고 있다.
"큰형님!"
그 빌딩을 걷던 도진에게 한 남자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단정하게 빗어 넘긴 머리에 은색 테의 안경이 조금 사나운 인상을 중화하는 지적인 이미지를 부여한다.
여기에 하얀 셔츠와 체크무늬 회색 양복이 더해지니 제법 잘 나가는 회사원의 모습이 완성되었다.
어릴 적과는 확연히 다른 이미지가 된 그의 이름을 도진이 웃으며 불렀다.
"서강아."
"예. 큰형님!"
서강. 조서강.
벽태웅이 나고 자란 보육원의 이를테면 행동대장 같았던 아이다.
타고 올라가면 무형독까지 얽혀 있던 동네의 마약 사건에 연루되었던 아이.
주변에서는 비행 청소년이라 낙인 찍었으나 사실은 그저 주변의 무관심과 혐오, 그리고 보이지 않는 미래에 절망하여 방황하던 것이었다.
친구들을 괴롭히지 않았고 오히려 보육원 출신이라 하여 혐오하고 배척하였던 또래에 저항하였을 뿐.
그로 인해 실수를 하였으나 반성하고, 바로잡고, 열심히 하여 이 자리까지 왔다.
"이제 아주 화이트칼라가 다 됐어?"
"하하! 큰형님이 보셔도 그렇습니까? 제가 공부를 아주 열심히 했습니다."
농담만은 아니었다.
조서강은 정말로 코피가 나도록 열심히 공부했다.
유호 건설과 쌍벽을 이루는, 쉬르네폴리아에서 한 손에 꼽히는 포부문의 간부라는 건 친분만으로 되는 게 아니었다.
특히나 그것이 머리를 써야하는 쪽이라면 더더욱.
어릴 적 주먹을 쓰던 조서강은 그렇기에 공부를 하고 머리를 쓰는 일을 하고 싶다고 간절히 바랐으니 그 간절함을 원동력 삼아 이렇게나 지적인 포지션을 쟁취해낸 것이다.
조금 어긋난 길을 방황하였던 아이였기에 이렇게 꿈을 이룬 모습이 보기 좋다.
대견하다는 도진의 눈빛에 조서강이 좋으면서도 부끄러움에 화제를 바꾸었다.
"이야기는 형님께 들었습니다. 오늘 봉사를 도와주신다구요."
"그래. 보육원에 간다고 했지?"
"예, 맞습니다."
포부문은 쉬르네폴리아의 외곽에 커다란 규모의 보육원을 운영하고 있다.
그곳은, 서부 무림과 연결된 도시의 어둠이 묻어나는 곳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