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3화
도진의 인사에 먼저 답한 건 주정아였다.
"그러게! 오랜만이야. 잘 지냈어?"
반가움을 가득 담은 활달한 목소리에 도진의 미소가 진해진다.
"그럼. 잘 지냈지. 우리 제수씨 얼굴이 밝은 거 보니 대용이가 사고치진 않았나 보네?"
그 도발에 오대용이 대번에 반발했다.
"야. 형수님한테 제수씨라니."
"뭐어?"
"이 형님의 아내분이시니 형수님이잖아."
제법 재밌는 도발이었다.
그래. 두 사람은 결혼했다.
오성의 직계이자 천마의 친구, 그 외 여러가지로 유명하고도 중요한 인물인 오대용.
그런 오대용이 어린 시절 절망하고 또 방황하며 길을 나아가지 못하고 힘들어 했을 때, 한결 같이 믿고 기다리며 또 이끌어 주었기에 오대용이 꼼짝을 못한다는 소꿉친구 주정아.
두 사람의 결혼식은 한국을 넘어 세계에서 크게 다루어졌을 만큼 성대하게 치러졌다.
아무렴. 바른 엔터의 아티스트들이 축하 공연을 하고 천마를 필두로 하여 천마신교의 주요 인물들이 참석한, 금화가 사라지고 그 빈자리를 메꾸며 대한민국 재계 서열 1위가 된 오성의 직계와 1차 협력사 성운의 직계의 결혼식이었으니까.
혹자는 요즘 시대에 결혼이 빨랐다고도 하지만 도진은 전혀 동의하지 않았다.
오대용은 주정아 거였고 주정아는 오대용 이외엔 생각하지 않는 천생연분이었으니 늦고 빠르고 이전에 이미 결정난 일이었던 거다.
…그건 그거고.
도진은 그렇게 소꿉친구와 결혼에까지 골인해 버린 순애 그 자체인 친구의 도발에 스윽, 입꼬리를 올렸다.
"대용아. 그러다가 처남이 되는 수가 있다?"
"……뭐?"
"니가 그렇게 날 몰아붙이면, 궁지에 몰린 내가 어떻게 해야 되겠어? 눈나에게 달려가서 우리 결혼해요 해 버리는 수가 있단 말이야."
"아니, 뭔."
"처신 잘 하라고. 계속 도발을 하면, 그땐 내가 매형이 되는 거야."
"이런 미. 끄으응……."
오대용은 이런 미까지만 하고 그 뒤의 친을 다 내뱉지 못했다.
도진의 뒤에는, 도진의 아버지 김서우가 있었으니까.
"후후. 여기엔 우리 아버지가 계시지. 넌 이미 진 거다."
"와 나. 비겁한 놈 같으니라고."
"어휴. 나이 먹어도 애라니까. 진짜."
"아니, 누나. 왜 날 봐. 쟬 보고 이야기 해야지!"
"그래, 그래. 대용아. 괜찮아."
"애 취급하지 마……."
도진이 낄낄 웃었다.
그리고 티내지 않았지만 김서우도, 오성아도 내심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천마(天魔)는 그 어디서도 이렇게 가벼운 장난을 쉽게 칠 수 없다.
여기이기에.
이곳에 모인 이들의 면면이 특별했기에 이렇게, 그저 김도진이 되어 친구와 가벼운 농담을 주고받으며 장난도 칠 수 있는 것이다.
김서우는 아들이 그런 모습을 보여주는 것에 속으로 미소지을 수 있었고 오대용 또한 변함없고 허물없는 친구의 모습에 즐겁게 미소지을 수 있었다.
오늘 이 자리는. 그런 특별한 사람들과 저녁 식사를 함께 하는 자리였다.
고기가 들어오고 벽태웅이 집게를 잡았다.
보육원 출신으로 항상 동생들의 고기를 구워 주었던 경험으로 그는 가히 고기 마스터라 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스킬을 가지고 있었다.
벽태웅이 정확하고도 신속하게, 모자람없이 완벽하게 구운 고기가 각자의 앞접시에 놓였다.
"그럼."
그리고 이 자리에서 빠질 수 없는 술이 등장할 차례다.
뚜껑을 따는 건 도진이었다.
"아버지."
"그래."
도진이 두 손으로 병을 들었고 김서우가 언뜻 무뚝뚝하게, 그러나 채 다 감정을 숨기지는 못한 얼굴로 잔을 들었다.
쪼르르…….
맑은 술을 따르며 도진은, 감개가 무량해졌다.
고작 술 한 잔 따르는 거지만 도진에게는 그것이 결코, 결코 고작이 아니었기에.
전생에는 단 한 번도 아버지에게 술을 따라드리지 못했다.
어려서는 몰랐다.
너무나 철이 없었고 애써 외면하였다.
아버지 홀로 늦은 밤에 술을 따르던 것을 기척으로 알았음에도 모르는 척 하였다.
딱 두 번, 그랬던 날이 있었는데 단 한 번도 방에서 나간 적조차 없었다.
커서는, 그럴 수가 없게 되었다.
아버지는 술을 입에 대서는 안 되었으니까.
그러니까 후회로 남았다.
이미 늦어버린 한(恨).
본래는 결코 되돌릴 수 없기에 후회인 것일진대.
도진은 그것을 되돌릴 수 있었고 이렇게 아버지의 술잔에 술을 따라드릴 수 있는 삶에 감사했다.
김서우의 다음으로는 강거혁의 잔이 채워졌다.
"그리고 눈나도 한 잔. 우리 대용이랑 정아도 한 잔."
"형님께는 제가 한 잔 드리겠습니다."
"땡큐."
도진의 잔은 벽태웅이 채워 주었다.
언제나 그러했듯 오늘도 술이 아닌 콜라다.
"건배!"
"건배!"
그렇게 잔이 몇 번 돌고 이야기가 오갔다.
"3개월 만이지, 이번이?"
"그렇네."
"이제는 다 끝났거야?"
"응. 그렇게 될 거 같아."
가장 먼저 나온 이야기는 도진이 해왔던 무림에서의 일이다.
가소천을 쓰러뜨렸으나 그걸로는 다 끝나지 않았던, 무림에서의 일.
가소천을 잡는 것으로 하나의 커다란 일을 해결할 수 있었지만 그것으로 모든 것을 끝낼 수는 없었다.
오히려 더 많은 일들이 남아 있었으니 차분히 단계를 밟아 일을 처리한 게 아니라 속전속결로 머리만을 치는 형태였기 때문이었다.
최악의 경우 인류 멸망으로까지 치달을 수 있었던 핵 전쟁이자 세계 대전을 막기 위하여서는 그래야만 했다.
그래서 도진은 일직선으로 교나라의 수도로 진격했고 가소천과의 일전을 치르는 데 집중, 그 외의 것들은 모두 뒤로 미루었으니 그렇게 미룬 것들을 처리하는 데 생각보다 더 오랜 시간이 걸린 것이다.
주정아가 도진의 말에 웃으며 말했다.
"잘 됐네. 이제 거기 안 가도 되는 거지?"
"일단은, 그렇지."
도진의 긍정에 남몰래 안도하는 사람이 있었으니 김서우다.
아버지로서 티를 내지는 못하였으나 그럴 수밖에 없었으니 저쪽의 무림은, 멸망해 가는 세계였으니까.
도진과 천마신교는 가소천이 사라지고 나서 파편화되어 흩어진 이단 세력을 토벌하는 것과 동시에 무림의 사람들을 이쪽 세계로 이주시키기 위하여 헌신하였다.
세간에서 천마신교의 이름이 회자되고 있을 때 양지에서 뽐내는 대신 보이지 않는 곳에서의 헌신을 계속하였던 것이다.
분명히, 후대에 칭송받을 위대한 헌신이었지만 아버지의 입장에서 김서우는 마냥 그것을 자랑스러워 할 수는 없었으니 아들의 안위를 걱정하였기 때문이다.
멸망해 가는 세계. 잘 와닿지 않지만 그곳은 그 이름대로 멸망을 향해 가는 세계였다.
시공간의 붕괴가 일어났고 지극히 좁은 영역만이 남아 있는 세계.
그리고 그 좁은 영역마저도 서서히, 사라지고 있는 세계라는 게 조사 결과 드러났다.
조금씩 조금씩. 붕괴는 그 영역을 넓혀가고 있었고 간헐적으로 국소적인 붕괴마저 일어났으니 거기에 휘말린 사람은…… 결코 돌아오지 못했다.
비록 그 붕괴를 조기에 감지할 수 있는 시스템이 이미 교나라에 구축되어 있었고 그를 이용, 만전을 기하면서 활동했지만 그럼에도 아버지로서 어찌 그런 곳에 있는 아들을 걱정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때문에 김서우는 아내와 함께 남몰래, 큰일을 하는 아들을 말릴 수는 없고 그저 속으로 걱정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한시름 놓을 수 있게 된 것이었다.
저쪽 세계에 살던 대부분의 백성들이 이곳으로 넘어왔다.
거기에 섞여 이단 세력 또한 넘어와 이쪽 세계의 골칫덩이가 되었지만 굳이 지금 이 자리에서 언급할 만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이쪽 세계로 넘어오길 거부하고 그곳에서 삶을 마무리하겠다는 이들도, 말이다.
이곳의 서부 무림에 사는 이들도 그렇지만 나고 자란 곳에서 생을 마감하겠다는 그들의 의사 또한, 설득에도 흔들리지 않는 굳건한 그 의사를 도진과 천마신교는 존중해 주기로 하였다.
도진은 옅게 웃으며 말했다.
"도시는, 여전히 좋네요."
그 말에 오대용이 씨익 웃었다.
"그렇지?"
"응. 정말로, 좋아."
많은 것이 함축된 '좋다'였고 그에 담긴 것들을 이 자리의 모두가 읽을 수 있었다.
쉽지 않은 일이었다.
다른 나라도 아니고 다른 차원의 사람들을 받아들이고, 이 땅에서 함께 살아갈 도시를 만드는 일은.
하지만 그 쉽지 않은 일을 많은 사람들이 힘을 합쳐 이렇게 훌륭하게 성공하였고 눈부시게 그 결과를 보여주고 있다.
천마신교라는 공통된 믿음의 교집합을 시작으로 하여.
새로운 터전에 스스로의 힘을 더하여, 그리고 함께 살아갈 사람들의 도움을 보태어 집을 짓고 살아간다.
그렇게 지어진 집들이, 사람들이 모여 탄생한 도시가 쉬르네폴리아였고 거기에 김서우와 벽태웅, 오대용과 주정아의 노력 또한 녹아들어 있었다.
신생의 작은 회사였던 유호 건설은 이곳에서 대기업으로 거듭났으며 쉬르네폴리아라는 눈부신 성과를 이룩해 나가고 있다.
그저 단순히 번듯한 건물만을 지은 게 아니라 이곳에서 함께 성장하고 함께 살아가면서 이룩한 아버지의 꿈이었고 그 꿈이 참으로 좋아서, 도진은 더 기분이 좋았다.
물론. 모든 것이 동화처럼 순탄했던 건 아니었다.
시행착오가 있었고 갈등도 있었다.
냉정하게 현실을 말하자면, 약자(弱者)라고 해서 결코 선인(善人)으로 단정지어선 안 된다는 이야기다.
이곳에 넘어와 살기를 바라는 무림의 사람들 중에서는 물론이요 망명이나 이민을 원하였던 이들 중에서도 악인이 적지 않았다.
그들을 걸러내고, 추방하고, 그 정도가 아니라면 본보기가 되도록 벌을 주는 과정을 거쳤다.
누구도 억울한 사람이 없도록 하여야 했고 그러면서도 벌이 죄에 비해 가볍거나 무겁지 않도록 또 신중하여야 했다.
사실, 어려운 일이었다.
부담이 되는 일이었고.
그러나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그것이 그들을 세심히 살피고 이끌어야만 하는 자리에 있는 국가의, 지도자의 의무였으니까.
그리고 쉬르네폴리아가 있는 바할라의 국왕 슈미트라는 그 의무를 결코 저버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편하게 갈 수 있는 길을 택하지 않고 의무를 다하는 길을 걸으며 노력한 슈미트라는 그럼으로써 모두가 납득하고 따를 수 있는 법(法)을 쉬르네폴리아에 적용시켰다.
그 법에 김서우와 오대용, 그리고 벽태웅 등의 사람들이 도덕과 양보, 인정(人情)을 더하여 오늘 도진이 보았던 도시 곳곳의 따듯함이 되었다.
오늘 보았던 그 따듯함을 되새기던 도진은 그러나 문득 들리기 시작한 어떤 소리에 감각이 향했다.
'…….'
평소 도진은 감각을 넓게 펼치지 않는다.
정확히는, 경계를 넘어선 고수들이 자연스레 터득하게 되는 어떤 '필터'를 감각에 두는 느낌이다.
불필요한 것들. 이를테면 타인의 사생활 같은 것에 굳이 의식을 두지 않는 것이 요령이라 할 수 있는데 그만큼 거기에 해당하지 않는 의식해야 할 것들을 더 정확하게 감지할 수 있다.
그러니까.
-자네, 지금 뭐라고 했나?
사람을 긴장시키는 불온한 분위기 같은 것이다.
아랫층의 소란의 파도에 섞인 미미한 것이었다.
하지만 필터에 걸린 순간 도진의 감각이 목소리의 근원지에 감도는, 금방이라도 터질 듯한 분위기를 선명하게 읽어냈다.
그리고.
콰아앙-!
결국 그 분위기가 터지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