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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해서 지존까지-672화 (672/741)
  • 672화

    주차장이 지하 5층까지 여유있게 만들어져 있었기에 차를 대는 건 어렵지 않았다.

    불쾌한 냄새도 없고 환기도 잘 되는 주차장의 엘리베이터를 타고 나오니 제법 강렬한 햇빛이 아래로 쏟아지고 있었으나 이 또한 문제가 되지 않았다.

    눈만 빼꼼 내놓을 정도로 철저하게 방풍 코트를 둘렀기 때문이다.

    흔히 히잡하면 떠올릴 수 있는 이미지 그대로 얼굴까지 가렸고 썬크림도 꼼꼼하게 발랐다.

    이렇게 함으로써 피부의 적인 자외선을 차단함은 물론이요 '천마'와 '천마신교의 안주인'이라는 것도 가릴 수 있었으니 일석이조다.

    사실 부지역(不知域)을 능숙하게 걷고 있는 도진 혼자였다면 아무렇지 않게 도시를 활보한다 하여도 누구 한 명 알아보지 못했을 것이다.

    뻔히 보여도 스쳐 지나간 순간 그 사람이 입고 있는 옷이 무슨 색깔이었는지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말이다.

    하지만 오성아에게는 그런 재주가 없었으니 이렇게 현지 친화적이면서도 자연스럽게 변장을 함으로써 시선을 차단하였다.

    호수가 있고 녹음이 짙은 도시이지만 어찌되었든 사막 복판에 자리한 도시.

    눈만 빼꼼히 내놓은 차림의 사람들은 얼마든지 있었고 두 사람은 숲속의 나무처럼 평범했다.

    여기에 눈매만으로도 시선을 끌 수밖에 없는 오성아는 선글라스까지 꼈으니 그야말로 완벽하다.

    다만.

    "조금, 덥네."

    평소 자신을 드러내는 데 거리낌이 없던 오성아는 조금 답답한 모양새였다.

    도진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일단 코트부터 사러 갈까요?"

    "응. 그러자."

    둘은 함께 쉬르네폴리아의 거리를 걸었다.

    각 분야 최고의 전문가들이 심혈을 기울여 계획한 도시의 도로는 넓고 쾌적했다.

    지상으로는 차는 물론이요 오토바이조차 다닐 수 없기에 여유까지 느껴진다.

    그 도로 주위로 쌓아올린 건물들은 생소하지만 매력적이다.

    하나하나가 동양적이지만 이쪽 세계의 동양이 아닌 무림의 양식에서 영감을 얻은 디자이너들의 역작이었다.

    여유롭게 거리를 걷는 사람들의 복장은 물론이요 분위기 또한 그야말로 생소한 '외국'의 느낌이 물씬 풍기니 과연. 동서양을 가리지 않고 관광객이 많은 게 당연한 일이라고 고개가 끄덕여졌다.

    바로 그 관광객들이 이곳에 오면 필수로 사야 한다는 상품이 있는 가게를 도진과 오성아가 방문하였다.

    "어서오세요."

    "네, 안녕하세요."

    활짝 웃으며 반겨주는 점원은 차이나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착 붙은 옷을 통하여 드러나는 군살없는 몸매가 무공을 익히고 있음을 알게 해 준다.

    무림에서 온 사람.

    그러나 도진과 오성아의 눈에도 전혀 어색함이 보이지 않았으니 이 도시에 잘 녹아들었음이 느껴졌다.

    "도움이 필요하실까요?"

    "아뇨. 우선 좀 둘러볼게요."

    "네. 필요하시면 언제든 불러주세요."

    점원이 물러나고 도진과 오성아가 보기 좋게 전시되어 있는 방풍 코트들을 둘러보았다.

    그래, 방풍 코트다.

    화사한 색감에 좋은 소재를 쓰고 실력있는 디자이너들이 디자인한, 얼굴까지 꼼꼼하게 감쌀 수 있는 방풍 코트.

    여기에 특허받은 특별한 가공법으로 사막의 극한 환경에도 상하거나 오염되지 않는 방수, 방염 기능까지 있다.

    취향에 따라 가볍게 집 안에서 입을 수도 있고 방한성을 높여 겨울에 패딩 대신 입을 수도 있으니 실용성까지 갖추었는데 이곳 쉬르네폴리아에서만 정식 루트로 구매할 수 있어 관광객이 1순위로 사야 하는 물품이 된 것이다.

    첨언하자면 이 방풍 코트의 특허권은 위서린의 하오문이 가지고 있다.

    "흐음. 저거 어때요?"

    "나쁘지 않네."

    "입어 봐요."

    "너, 눈 너무 반짝반짝거리는데?"

    "눈나 같은 예쁜 사람한테 이것저것 입혀보는 거 좋아하거든요."

    "…하여간 반전 매력 가득이야. 우리 교주님."

    오성아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면서도 도진이 가리킨 코트를 들고 탈의실로 향했다.

    사람들은 잘 모르지만, 기우가 있는 교주님은 또 쇼핑을 좋아하는 것이다.

    보통 여자들의 쇼핑에 남자가 따라가면 영혼까지 털리곤 하는데 도진은 아니었다.

    오히려 좋다며 쇼핑에 주도적으로 어울리는 성격이다.

    반대로, 오성아는 이런 곳에 길게 시간을 쓰기보단 합리적이면서도 빠르게 결론을 내리는 스타일이다 보니 도진과 함께 쇼핑하다 보면 기가 빨리곤 했다.

    "오, 좋다. 역시 눈나가 날개네요."

    "다 가렸는데?"

    "옷걸이가 훤칠하니 옷도 훤칠한 거죠. 저것도 입어보죠?"

    "…열 개만 입어볼 거야."

    "콜."

    저항해봐야 소용없으니 오성아는 처음부터 딜을 걸었고 도진이 콜을 외쳤다.

    그렇게 정확히 열 개를 입어 보았고 그 열 개를 포함하여 스무 벌이나 되는 코트를 샀다.

    "이건 소담이 꺼 이건 상미 꺼. 이건 유진이 주고 이건 호진이 줘야겠네."

    나름 외국 여행의 선물로 주변 사람들을 챙긴 것이다.

    "그리고 이건 우리 안티체리 누나들 주고, 이건 소진이네 줘야겠네요."

    "좋아하겠네."

    오성아는 개중 안티체리와 레드슈, 이은지, 그리고 유진이가 특히 유용하게 쓰지 않을까 생각했다.

    안티체리와 레드슈, 이은지.

    바른 엔터테인먼트의 슈퍼스타 트로이카다.

    아이돌이란 카테고리에서 벗어나 이제 세계적인 아티스트로 통하는 그녀들은 특성상 무대 의상을 입고 있는 시간이 많은데 그때 무대가 아닌 곳에서 입기에 딱이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여기에…… 실력으로 자신을 증명하고 아이돌로 우뚝 선 도진의 동생 김유진도 포함된다.

    "이걸로 계산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도진이 결제 기능을 실행한 휴대폰을 점원에게 건넸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사실 오성아는 그것을 조금 걱정하였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무려 천마의 휴대폰인데, 저렇게 쉽게 남의 손에 쥐게 해 주는 걸 말이다.

    뭐 이쪽도 '기인지우'이긴 하지만…….

    가게를 나서는 두 사람은 들어올 때와 달리 화사한 차림이 되었다.

    입은 것을 제외하고는 택배 서비스를 맡겼다.

    투마전이 아니라 이곳의 회사 쪽 주소를 썼기에 직원의 두 눈이 휘둥그레지는 일은 없었다.

    "자, 그럼 이번엔 저쪽으로 가죠."

    "백화점?"

    "네. 눈나 선글라스 사 줄게요. 선물."

    "사양하지 않을게."

    도진의 말에 오성아가 피식 웃으며 말했고 두 사람은 오전 내내 쉬르네폴리아의 관광을 즐겼다.

    여유와 행복이 느껴지는 사람들.

    스스로가 쌓아 올리고 있는 미래를 믿는 얼굴들.

    밝은 도시.

    도진은 웃는 얼굴로 그 광경들을 두 눈에 담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멸망해가는 세계.

    미래가 없는 세계를 살아가던 그들은 이곳에 와서 미래를 붙잡았다.

    낯선 곳이었으나 같은 것을 믿는 이들이 있었고 그들과 함께 자신들의 손으로 이 도시를 쌓아올리면서 이곳을 제2의 고향으로 삼아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

    천천히, 풍경을 음미하듯 걷던 도진이 옆을 보며 말했다.

    "음, 점심은 뜨끈한 국밥 한 번 먹어볼까요?"

    "우리 교주님 원하시는 대로."

    쉬르네폴리아는 국밥이 유명했다.

    언뜻 뜬금없긴 한데, 배경을 따져 보면 고개가 끄덕여진다.

    쉬르네폴리아엔 조금 과장을 보태 주민 전체가 쉬르네폴리아의 건설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이었으니 든든하고 빠르게 나오는 국밥이 대세 음식 중 하나가 된 것이다.

    과연 남쪽 나라답게 맛집으로 유명한 곳에 들어가니 메뉴판에 무려 '낙타 고기 국밥'이란 게 보였다.

    낙타란 버릴 게 없는 동물이었다.

    한국으로 치면 소와 같은 포지션이라고 해야 할까.

    "어때요?"

    "난 패스."

    "그럼 저도 그렇게."

    둘은 과감하게 도전하는 대신 안전하게 돼지 국밥을 프라이빗룸에서 먹고 나왔다.

    "생각보다 더 괜찮네."

    오성아는 합격점을 주었고 도진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요. 그럼 이번엔 호수 한 번 보러 갈까요?"

    "…그래."

    "눈나, 지친 거 아니죠?"

    "난 집순이 타입이거든. 상성이 안 좋아, 이런 건."

    "저도 집돌이 타입이잖아요. 극복할 수 있어요. 눈나 파이팅!"

    그렇게 오성아는 도진과 함께 저녁이 될 때까지 쉬르네폴리아 관광을 함께 하였고 겨우, 어느 건물 앞에서 멈출 수 있었다.

    맛있는 냄새가 풍기는 이곳은 아주 큰 규모로 장사를 하는 고깃집이었다.

    장사가 아주 잘 되는 곳이라 손님으로 가득찬 1층이 웅성이고 또 북적였다.

    도진과 오성아는 그 1층의 카운터로 향했다.

    "수고하십니다."

    유니폼을 차려입은, 무림에서 온 직원이 도진의 인사에 마주 고개를 숙였다.

    "어서오십시오."

    "2층 단체 손님의 일행인데요."

    "성함이?"

    직원의 물음에 도진이 슬쩍, 얼굴을 가리고 있던 천을 내렸다.

    "……!!"

    드러난 도진의 얼굴에 직원의 두 눈이 크게 뜨이고 몸이 굳어 버렸다.

    도진은 옅게 미소지으며 무형지기(無形之氣)로 그의 굳은 몸을 풀어주고선 말했다.

    "김도진. 유호 건설로 예약이 되어 있는 팀의 일행입니다."

    조용한 목소리에 깃든 기운이 무형지기와 함께 직원의 정신을 부드럽게 일깨웠다.

    직원이 자세를 바로 하면서 포권하였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조용하고 간결하지만 더없이 정중한 포권이었다.

    도진이 원하는 대로, 천마가 원하는 대로 이목이 과하게 집중되지 않는 선에서 존경과 예의를 표한 것이었다.

    "매화관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다른 직원이 다가와 도진과 오성아를 안내했다.

    도진의 얼굴을 보지 못했기에 직원은 평소와 같이, 성실한 태도로 안내하였고 도진은 오성아와 함께 프라이빗룸 안에 들어섰다.

    "왔구나."

    "형님."

    두 사람을 가장 먼저 반겨주는 건 중년의 남성과 비할 데 없이 압도적인 피지컬이 돋보이는 청년이다.

    중년의 남성.

    오십이 넘었음에도 젊은이 부럽지 않은 건장한 체구에 탄탄한 근육을 지니고 있다.

    무뚝뚝한 인상이지만 잘생긴 외모에 보일 듯 말 듯 어린 미소가 그것을 중화해 주었다.

    김서우.

    바할라에서 꿈을 이룬 도진의 아버지다.

    그 옆에는 김서우가 작게 보이게 만드는, 인간을 초월한 듯한 피지컬이 돋보이는 거구의 청년이 있었으니 다름 아닌 벽태웅이다.

    도진의 숭무고 후배인 그는 이제 어엿한 한 문파의 문주로 이름을 떨치고 있다.

    "아버지. 태웅이도 오랜만이야."

    "예, 형님."

    꽤 오랫동안 선배님이었는데.

    이제는 더 가까워진 사이만큼 호칭도 바뀌어 형님이 되었다.

    그리고 그 옆에.

    "오랜만에 뵙습니다. 노사님."

    "어서오시게."

    왜소한 체구의, 그러나 그 존재감은 몇 배나 거대한 소거인(小巨人). 벽태웅의 스승 강거혁이다.

    스윽-

    인사를 나눈 도진은 자리에 앉지 않고 뒤로 시선을 향했다.

    와야 할 사람이 더 있었는데 바로 그 사람들의 기척이 가까워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드륵, 문이 열리고 두 사람이 들어왔다.

    다정하게 팔짱을 낀 남녀다.

    큰 키에 제법 피부가 탄 남자, 활달한 인상이 올려 묶은 헤어스타일로 인해 살짝 중화되어 어른스런 느낌이 나는 여자.

    기억 속과 제법 달라진 부분들이 많은 남녀였으나 그럼에도 도진에게는 익숙하고 또 친숙한 두 사람이었다.

    오대용과 주정아.

    숭무고 동기이자 친구였으니까.

    도진이 웃으며 인사했다.

    "오랜만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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