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1화
식사를 끝낸 도진과 오성아는 숙소에 짐을 풀었다.
뭐 대단한 건 없었고 몇 개의 옷가지 등 생활에 필요한 것들을 제외하면 대부분이 업무에 필요한 서류였다.
새로이 수도가 될 도시의 중심에 지어진, 세간에서는 정식 명칭보다 '투마전(鬪魔殿)'이란 이름으로 더 많이 불리는 왕성의 별관은 상당히 호화로워서 두 사람에게 배정된 곳만 해도 차라리 마당 딸린 호화 대저택이라 불러야 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다.
그 호화스런 별관의 거실.
오성아가 태블릿 PC를 연신 톡톡 터치하며 곁에 쌓아둔 서류들을 함께 체크하고 있었다.
과장없이 눈높이와 맞먹는 높이의 서류 기둥을 몇 개나 세워두고 하나씩 능숙하게 처리하며 정리까지 하는 모습이 비현실적일 정도로 대단하여 별호(?)인 오피스의 여신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게 만든다.
그런 오성아를 도진은 고요하고도 깊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조용히 지켜 보았다.
돕지 않고 그저 지켜만 보는 건 이미 도진이 해 줄 수 있는 것은 다 해 주었기 때문이다.
오성아는 자신이 해야만 할 일, 그리고 자신이 하고 싶은 일과 그 외의 일을 철저하고도 효율적으로 구분하였다.
남이 해 줄 수 있는 일과 남이 해야만 할 일을 분명하게 나누어 맡긴 뒤 자신의 일을 소화하는 스타일이다.
그러니까 그녀가 해야 할 일을 하고 있을 땐 차라리 지켜만 보는 것이 도와주는 게 되는 거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한 3일을 꼬박 새야 할 양이었으나 오성아는 놀랍게도 그것을 세 시간만에 처리해 버렸다.
그렇게 일을 다 끝내고서야, 오성아가 시선을 도진에게로 옮기고선 말했다.
"왜 그렇게 뚫어지게 보는 거야."
"보기 좋아서요."
"새삼스럽게."
도진이 싱긋 웃었다.
일반적으로 앉아서 작업하는 사람들의 자세는 알면 알수록 보는 이가 괴롭고 걱정이 될 정도로 좋지 않다.
허리가 구부정하고 목 또한 부러지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부담이 가도록 숙이고 있다.
'바른 자세'란 걸 조금만 관심을 가지면 알 수 있지만 그 조금의 관심조차 가지지 않는 사람이 대다수였고 일부는, 그걸 알면서도 지키지 않는다.
그에 비하면 오성아는 진짜 '여신'이다.
곧게 편 허리가 몸의 중심에 딱 자리잡고 아름다운 라인을 지키고 있으며 시선 또한 적절한 위치에 둠으로써 목의 부담을 최소화하였다.
바르지만 불편한 자세.
허나 그 자세를 평생 철저하게 유지함으로써 그녀에게는 그것이 편한 자세가 되도록 했다.
"…이렇게 만든 게 너잖아."
오성아는 자기 관리가 철저한 사람이었다.
남들이 칭송하는 그 프로페셔널한 외모는 그냥 얻은 게 아니라 평생 쌓아 온 그녀의 노력의 결과인 것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였으니 도진이 천마신교의 연신공인 신마공(身磨功)을 조금 개량하여 오성아에게 가르쳐 주었다.
바른 자세를 통하여 육체의 균형이 어긋나지 않도록 하면서 한계까지 넓혀 나갈 수 있게 하였으니 오성아는 격무에도 지치지 않았다.
사소하게는, 그 매끈한 피부의 탄력이 떨어지는 일 또한 없었으니 오성아로서도 매일 거르지 않고 시간을 내어 연신공을 계속 수련하였다.
도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죠."
짧지만 많은 것이 담긴 답이었다.
그 안에 담긴 것이 어떤 것인지, 눈을 맞추고 있는 오성아는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눈앞의 연하는. 그러나 그녀의 인도자는 그녀와 약속을 하였다.
원하는 것을, 꿈을 마음껏 펼치게 해 주겠다고.
그녀의 꿈은 주도적으로 무언가를 이루는 것이었다.
누군가의 지시에 따라서가 아니라, 그녀 스스로가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는 삶을 바랐다.
그런 그녀의 꿈이 천마신교가 되었고 인생을 올인하였으니 세상에서 천하제일문파라 부르는 것이 그녀가 모든 것을 걸고 이룬 꿈의 결과였다.
아니. 결과란 말은 맞지 않다.
이것은 아직 과정에 있으니까.
그녀의 꿈은 너무나 컸으니 아직 만족하기엔 부족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그녀는 지치지 않는다.
모든 것이 즐겁고 또 너무나 즐거우니 그런 그녀이기에 비로소, 천마신교의 안주인이란 칭호가 어울리는 것이다.
즐겁게 꿈을 향해 나아가는 모습을 도진이 흐뭇하게 지켜볼 수 있는 이유이기도 했다.
"그럼, 오늘도 수련해 보도록 할까요?"
자리에서 일어난 도진이 말했고 오성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무엇을 하든, 그를 위해선 체력이 필요한 법이었다.
* * * *
다음날.
푹 자고 일어난 도진과 오성아는 슈미트라와 사적인 자리에서의 아침 식사를 함께 한 뒤 주차장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눈길을 확 사로잡는 디자인의 전기차가 한 대 있었으니 다름 아닌 슈킨팍시 로드런너 S 그레이드의 3세대 풀체인지 모델이었다.
슈킨팍시는 도진과 오성아에게도 나름의 의미가 있는 자동차다.
오성아로 인해 도진의 첫 차가 슈킨팍시가 되었으니 말이다.
그때 탔던 슈킨팍시가 로드런너 S 그레이드의 첫 모델이었고 10년 가까이 몰고 다니다 근래에 바꾼 것이 바로 이 3세대의 풀체인지 모델이다.
운전석에는 도진이 아닌 오성아가 앉았다.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이야기로 오성아의 취미가 차이기 때문이다.
한때 오성아가 직접 차의 보닛을 열고 정비하는 사진이 인터넷을 완전히 뒤집어 놓았던 일이 있었을 정도로 오성아의 차에 대한 취미는 제법 진심이었다.
우우웅-
'START' 버튼을 누르자 근육이 깨어나는 듯한 낮고 묵직한 구동음과 함께 모든 액정에 불이 들어왔다.
오성아는 멋드러지게 기어를 D에 놓고 액셀을 밟아 도로를 나아갔다.
목적지는 트윈 시티 쉬르네폴리아.
이곳에서 대략 3시간은 걸리는 상당히 먼 거리에 있는 도시로, 그냥 3시간이 아니라 평균 시속 150을 밟아 신호를 포함하여 멈출 일이 전혀 없는 전용 도로를 달려야 가능한 시간이다.
일반적으로는 그저 달리기만 해야 하는 지루하고 힘든 운전이 되었겠지만 오성아에게는 아니었으니.
"시원하네."
이 도로는, 제한 속도 무제한이었기 때문이다.
오직 차만이 다닐 수 있는 도로였으며 주변이 탁 트여 있고 급격한 커브도 없다.
말인즉슨.
차량의 성능이 허락하는 내에서, 운전자가 컨트롤 가능한 한도 내에서 무제한으로 달릴 수 있다는 거다.
한국에서는 할 수 없는 속도 무제한의 도로에서 차량의 성능을 한계까지 이끌어 내어 달리는 경험.
그것은 오성아에게 있어 스트레스가 다 날아가는 힐링인 것이다.
콰아아아아아-!
아예 창문을 다 열어 놓고 바람을 맞으며 달리던 오성아가 문득 입을 열었다.
"아쉽다……."
오성아의 옆얼굴을 보며 도진이 물었다.
"뭐가요?"
"우리 각시 데려와서 달리면 더 좋았을 텐데."
"하하. 그것도 그렇네요."
각시. 흔히 말하는 각시가 아니라 '각 슈킨팍시'의 줄임말이다.
정확히는 슈킨팍시라는 이름을 처음으로 부여받고 세상에 나온 슈킨팍시 클래식을 뜻한다.
현대와는 다른 정직한 직선과 곡선의 디자인이 특징으로 출시된지 30년이 넘은 지금 보아도 클래식한 멋으로 시선을 잡아끄는 차.
마니아들 사이에서는 부르는 게 값이라고 할 정도로 귀한 차인데 그 차를 무려 도진네가 한 대 가지고 있었다.
당시엔 아직 별다른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고 그저 낡은 중고차였던 것을 도진의 아버지 김서우가 사서 업무용으로 몰고 다니던 것이다.
오성아는 그것을 본 그날부터 눈독을 들이다 결국 얼마 전 김서우에게서 선물로 받는 데 성공했다.
웬만한 사람이라면 그대로 폐차해 버렸을 상태였지만 오성아는 오히려 그래서 더 좋았다.
개인용 차고에서 그 차를 구석구석까지 알아가며 뚝딱이는 게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즐거움이었으니까.
전기차가 아닌 내연 기관의 차이면서 철저하게 수동으로 기어를 조작해야 하는 차를 이곳에서, 그것도 스스로 정비한 차의 성능을 한계까지 끌어내면서 드라이버로서의 테크닉을 최대한 발휘하여 달린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지만 안타깝게도 오성아의 '각시'는 개인 점검만으론 한계가 있어서 오버홀에 들어갔고 오늘의 드라이빙에 함께하지 못하게 되었다.
도진은 그런 이유로 아쉬워하는 오성아에게 싱긋 웃으며 말했다.
"너무 아쉬워하지 마요. 오늘은 대신에 내가 각시해 줄 테니까."
"뭐어?"
"왜요. 우리가 같이 지낸 세월이 얼만데. 내가 각시해 줄 수도 있는 거지."
"아이고……."
오성아는 이마를 탁, 짚었다.
"그런 건 나 말고 유아랑 하면 안 되겠니?"
"음. 유아 선배랑 하면 끝을 모르고 2절 3절을 계속하게 되거든요. 그러니까 눈나랑 하는 게 딱 맞는 거 같아요."
"끄응."
오성아는 결굴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말았다.
뭐. 그래도 그런 느낌으로 심심하지 않게 이야기를 나누면서 속도를 즐기다 보니 이윽고, 목표했던 두 개의 도시가 보이기 시작했다.
사막을 배경으로 하여 위치한 거대한 두 도시는 마치 나무가 모인 숲 같았다.
각 도시의 중심에 우뚝 솟은 빌딩을 시작으로 삼각형의 실루엣을 이루는 도시는 동시에 녹음으로 가득하여 비유가 아니라 정말로 사막에 자리잡은 숲이었다.
두 도시의 사이에는 오아시스처럼 남쪽에서 물길을 이어 만든 거대한 호수가 있었고 도시 부지의 절반이 식물로 이루어져 있어 신기루보다 더 환상적인 광경을 이룬다.
전봇대는 물론이요 차와 기차 등이 다니는 도로는 모두 지하로 옮겼고 도시의 디자인은 세계 유수의 건축가와 디자이너들의 손을 거쳐 무엇 하나 감탄이 나오지 않는 것이 없다.
하지만 이 도시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 그렇게 특별한 사람들만은 아니었다.
이곳에서 살아갈 사람들. 살기로 한 사람들.
다른 차원에서 온, 그러나 같은 것을 믿는 무림의 사람들.
그리고 그들과 함께 살아가기로 한 바할라의 사람들과 또 다른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 이 도시를 함께 쌓아올렸다.
그 과정에서 이곳을 제2의 고향으로 여기게 되기를 바라는 의도였다.
아직 도시는 완공되지 않았기에 도진은 곳곳에서 구슬땀을 흘리는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다른 나라의 사람들. 다른 차원에서 온 사람들.
그들은 구분없이 힘을 합쳐 땀을 흘리며 미소짓고 있었고 그 표정에서 도진은 슈미트라의 바람이 이루어졌음을 확인하고 그들과 같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저 껍데기만 아름다워서는 안 된다.
사람이 살아가는 곳에는 활기가 있어야 하고 행복이 있어야 하며 그로 인한 미소가 있어야만 한다.
다행히, 쉬르네폴리아는 그 모든 것을 품고 있는 아름다운 도시로 완성되고 있었고 그것이 도진은 좋았다.
이 도시를 만들어 나가는 사람들 중에 그의 소중한 사람들이 많았기에 더더욱.
주차장에 차를 대고 오성아와 함께 지상으로 나온 도진의 시선이 빌딩숲으로 향했다.
그 시선은 빌딩숲 사이에서 두 번째로 높은 빌딩에서 멈추었으니 서로 다른 디자인의 두 빌딩이 사이에 하늘 다리를 두고 연결되어 있다.
처음에는 컨테이너 두 동으로 시작하여 저렇게나 크고 멋진 건물이 되었다.
도시와 함께 자란, 도시와 역사를 함께 하며 도시를 꿈과 함께 키워나간 이들의 보금자리.
그러니까 그것은 도진을 미소짓게 만드는.
도진의 아버지 김서우의 꿈의 실현이었다.
도진이 한껏 미소지으며 말했다.
"갈까요, 누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