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7화
'이거, 중2병 아니야……?'
모여든 시선.
금방이라도 터질 듯한 상황에서 주욱 늘어난 시간 속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고 말았다.
공권력의 공백에 세워진 마을.
술집에서 낭인과 범죄자들이 싸움을 일으켰고 그것이 격화되는 상황.
외부에서 온 젊은 무인이 개입한다.
범죄자들은 당연히 화를 내며 공격하지만 가볍게 제압.
여기에 총이라는 극단적인 수단이 등장하여 남자를 쏘지만 그것마저 통하지 않는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드러나는 정체를 상징하는 문양!
-후후. 그렇다.
무얼 감추랴.
남자는 멋드러지게 후드를 하늘 위로 벗어던지고 자신의 정체를 당당하게 외치는 것이다!
-오오!
그 선언을 장식하는 건 범죄자들의 경악과 지켜보던 이들의 감탄.
그리고 스포트라이트는 이제 자신을 비추고 있다.
'…조, 좋은 거 같기도 하고?'
꾸욱-
그녀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생각해 보니…… 하고 싶어졌다.
꿀꺽!
안 그래도 멈칫한 그녀로 인해 분위기가 한없이 고조되고 있는 상황.
그녀는 힘주어 코트를 벗어던졌다.
화락-!
솜씨 좋게 그녀를 가리고 있던 방풍 코트가 하늘을 난다.
"오, 오오……!"
방풍 코트 안에 가려져 있던 그녀의 아름다운 자태가 대번에 자리에 있던 모두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미의 여신이 강림한 것 같다.
단순히 예뻐서가 아니다.
길고 늘씬한 팔다리에 본능적으로 완벽하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몸매가 더 크게 작용했다.
미(美)적으로도 무(武)적으로도.
그녀는 흠잡을 데 없이 아름다웠다.
"요, 용봉."
용봉(龍鳳).
"드래곤 레이디……!"
혹은 드래곤 레이디(Dragon lady).
무려 천마신교의 '네임드' 중 한 명인 성지인이었다.
"……."
성지인의 새하얀 볼이 미미하지만 발갛게 물들었다.
좀 부끄러운 거 같은데 이게 또 부끄러운 것보다 기분이 더 좋기도 하다.
하지만 그런 부끄러움과 기분 좋음이 뒤섞인 예쁜 얼굴은.
"서, 성민혁에 성지인."
"성 남매다!"
"…아니야!!"
빠아아악!!
'성 남매'라는 단어로 대번에 일그러졌으니 소리친 범죄자를 대번에 후려쳐 날려 버렸다.
"겨, 격공장!"
격공장(隔空掌).
허공을 격하고 원하는 지점에 은밀히 경력을 터뜨리는 고등 수법.
본래 현대에서는 공상의 영역에 있던 수법이었으나 무림이 섞여 들면서 현실이 되었다.
물론 어디까지나 현실이 되었다 뿐이지 아무나 할 수 있는 건 아니었는데 그것을 이제 겨우 20대 초반의 성지인이 아무렇지 않게 선보였으니 주변이 웅성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의도치 않게 범죄자들의 기를 팍 꺾은 성지인에 이어 성민혁이 무소처럼 진각을 밟고선 돌진했다.
목표는 총을 꺼내 쏘았던 범죄자들의 대장이다.
"어."
'어어'라는 얼빠진 소리를 채 다 내지도 못했는데 시야 가득 무시무시한 주먹이 채워졌다.
방아쇠를 당기기는커녕 조준할 틈도 없이 그의 면상에 흉기보다 더 흉악한 투마전의 주먹이 꽂혔다.
뻐어어어억!
비명은 없었다.
쿠당탕탕탕!
그저 성대하게 바닥을 구르는 '얼굴(이었던 것)'을 달고 있는 인간이 있을 뿐.
"씨, 씨발!"
범죄자들이 발악하듯 욕지거릴하며 덤벼들었다.
대화의 여지는 일절 없으며 도망 또한 불가능했기에 궁지에 몰린 쥐가 되어 덤벼든 것이다.
흔히 궁지에 몰린 쥐는 고양이를 문다고 하는데 그 말을 연상케 할 정도로 기세가 심상치 않다.
하지만.
쿠오오오오오-!
궁지에 몰린 쥐가 발악해 봐야 쥐일 뿐이고 심지어 지금 쥐가 마주하고 있는 건 고양이도 아닌 용(龍)이었다.
용음(龍吟)과 함께 성지인의 안을 휘도는 격룡기의 기세가 퍼져 나간다.
자포자기하여, 눈이 뒤집혀 달려들었던 이들의 정신마저 번쩍 들게 하는 거대한 기운이 성지인의 주먹에 깃들고.
"으."
꾸우우웅-!
비명마저 집어삼키며 덤벼들던 이들을 휩쓸었다.
무형의 기세가 용의 발톱처럼 꿰뚫었으니 놈들은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뻐억!
여기에 양떼에 뛰어든 사자와 같은 모습으로 범죄자들을 때려눕히는 성민혁까지.
낭인들을 때려눕히고 기세등등하던, 총까지 가지고 있던 열둘의 범죄자들이 침묵하기까지는 채 5분도 필요치 않았다.
* * * *
범죄자들은 특수 제작된 합금 오랏줄로 한 덩이가 되어 묶여 주막 근처의 기둥에 매였다.
성민혁과 성지인이 놈들을 호송하기 위한 지원을 기다리는 김에 식사를 할 동안 그렇게 두게 된 것이다.
난장판이 되었던 술집은 주인과 점원들의 익숙한 처리로 거짓말처럼 제 모습을 되찾았다.
솜씨가 좋기는 하지만 결국 공산품이 아닌 투박함이 그대로 느껴지는 의자에 앉은 성민혁이 속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집기들이 이런 거구나.'
이 술집은 술과 식사를 야외에서만 팔았다.
한데 그 술과 식사를 제공하는 자리가 흔히 말하는 공산품이 아닌 수제, 그러니까 직접 만든 상당히 불편하고 투박한 테이블과 의자였던 게 눈에 들어왔었다.
그 이유를 이제 알 것 같다.
낭인에서 그치지 않고 범죄자들마저 당당하게 마을 안을 활보하는 비상식적인 환경.
오래 못 가 부서질 것에 많은 투자를 할 수가 없었던 거다.
아예 예비까지 직접 만들어 두고 이렇게 일이 있을 때마다 교체하는 방식으로 주인은 손해를 메꾸고 있었다.
"알고는 있었는데."
"응. 직접 보는 건 역시 많이 다르네."
성민혁의 중얼거림에 성지인이 답하여 말했다.
분쟁 지역.
남쪽 나라의 명확히 정해지지 않았던 국경선으로 인해 생긴 드넓은 공권력 공백 지대.
이곳을 세간에서는 '서부 무림'이라 부르곤 했다.
이미 현대 사회에 완벽히 녹아든 무림이 아닌 약육강식의, 날것에 가까운 무림.
여기에 총을 소지한 자들이 적지 않으니 법은 멀고 무공과 총은 가까운 서부 무림이란 곳이 탄생해 버린 거다.
현대 사회를 살던, 거기서 나간 적이 없었던 성민혁과 성지인에게는 참으로 낯선 환경이었다.
평범하게 사는 이들마저 피와 칼을 두려워는 하지만 또 익숙하게 대한다.
다만 생소한, 재앙의 상징이었던 총만이 공포의 대상일 뿐.
"식사 나왔습니다."
오래 지나지 않아 식사가 나왔다.
"음, 이건."
주문한 것들의 몇 배나 되는 호화로운 식탁이 만들어졌다.
주인이 웃으며 말했다.
"서비스입니다."
"…잘 먹겠습니다."
성민혁과 성지인은 길게 거절하지 않고 호의를 받아들였다.
언뜻 두 사람이 먹기에는 과한 양처럼 보였으나 무림인은 본래 대식가이며 두 사람은 특히나 더 대식가였기에 남김없이 테이블을 비웠고 후식으로 커피를 들었다.
그리고 계산은.
"저희가 하였습니다."
"아. 감사합니다."
"감사라니요. 목숨을 구함받았는데 이런 걸로 감사를 받을 수는 없지요."
범죄자들과 싸웠던, 그들에게 목숨을 잃을 뻔 했던 낭인들이 대신 하였다.
음식값만큼을 팁이란 이름으로 주려 하였는데 그만큼의 값을 그들은 낭인답게 고려하여 계산을 했다.
낭인들은 아까의 일이 없었던 것처럼 넉살 좋게 다가와 말을 건넸다.
"여기서 이렇게 성 남, 유명한 두 분을 보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입버릇이었던 듯 자연스럽게 '성 남매'라 말할 뻔 했던 낭인이 물 흐르듯 바꾸어 말했다.
성 남매.
아는 사람은 아는데, 이건 성지인의 주먹을 부르는 키워드다.
별로 심각한 건 아니고 팬들의 놀림 때문이었다.
성민혁과 성지인은 제법 많은 공통점이 있었다.
어려운 삶에서 도진을 만나 바뀌었고 숭무고 동기였으며 성까지 같았다.
자연스레 '둘이 남매 아님?'이라는 이야기가 돌았고 이게 밈이 되어 버린 것이다.
사실 그것만이라면 별 거 없었겠지만 인터넷에서의 팬들이 어디 그걸로 끝낼 사람들인가.
온갖 형태로 놀리곤 했으니 그 놀림의 모든 것이 '성 남매'라는 세 글자에 담겨 있는 것이다.
더욱 환장하는 건 이 부분에 관해 잘 모르는 자들은 성 남매를 아예 별호처럼 외쳤으니 성지인으로서는 주먹이 나가지 않을 수 없었던 거다.
다행히 '무림'에서 건너와 사회를 거부하는 낭인은 그러나 이 세계에 관해 무지하지는 않았으니 이 부분에 대해서 알았고 말을 바꾼 것이었다.
"하하! 아쉽군요. 술이라도 샀어야 했는데 말입니다."
낭인은 거친 면이 없지 않아 있었으나 기본적으로 친화력이 좋은 사람이었고 나쁘지 않게 대화가 이어졌다.
그렇게 분위기가 나쁘지 않았기에 성민혁은 슬쩍, 자신의 생각을 말하게 됐다.
"바할라에서 함께 살면, 좋을 텐데 말이죠."
조용히 이야기하는 성민혁의 시선이 마을을 훑었기에 안에 담긴 뜻을 짐작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낭인은 후, 웃었다.
"예. 그렇겠지요. 훨씬 발전한 사회의 테두리 안에서 살아간다면. 아주 많은 것을 누릴 수 있을 겁니다."
무림에서 왔으면서도 쉽게 동의하는 말을 하는 낭인은 그러나 칼로 끊듯 다만, 이라고 하며 말을 이었다.
"사람이란 그렇지 않습니까. 아무리 좋다 해도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 있는 법이죠."
"……네."
긍정적인 단어를 말하는 성민혁이었으나 정작 그 안에 동의는 담겨 있지 않았다.
낭인은 그런 성민혁을 이해했다.
어디까지나 머리로만, 말이다.
"평생 쌓아온 삶의 방식이 있는 거지요. 그리고 그것이 이 시대와는 결코 맞물릴 수 없는 겁니다. 그렇게 이 세계의 사회와 맞물릴 수 없으니 사회의 바깥에서 살 수밖에요. 불편하더라도."
십인십색(十人十色).
사람이 열 있으면 열 개의 다른 색이 있는 법이다.
개중에는 쉽게 섞이는 색이 있는가 하면 절대로 섞이지 못하는 색도 있다.
마을의 주민들. 낭인들. 그리고 범죄자들까지도.
성향은 다르지만 한 가지, 섞이지 못하는 색이라는 공통점으로 그들은 이곳에 묶여 있었다.
낭인이 씨익 웃었다.
"너무 마음 쓸 것 없습니다. 어쩌겠습니까. 이렇게 살 수밖에 없는 것을. 바꿀 수 없는 것은 그저 흘려보내는 게 좋다고. 저는 생각하면서 살게 되더군요."
그래. 낭인의 말은 하나의 정답이었다.
싫다는 이들을 자신의 잣대로 더 좋다고 판단한 곳에 억지로 밀어넣는 건 옳지 않은 일이다.
거기서부터 시작하여 씁쓸하지만 이것은, 생각하면 할수록 어떻게 방법이 없어 보인다.
그렇다면 낭인의 말대로.
차라리 순리대로 흘러가게 놔두는 게 방법이지 않겠는가.
성민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네요. 그것이 차라리 차선이겠군요."
차선(次善). 최선의 다음.
대개 세상 일이란 차선만 해도 절반 이상은 가는 선택이 된다.
"크크크. 좋은 걸 처먹고 좋은 걸 차지한 새끼들이 번지르르한 소리를 하는구나."
갑자기 끼어들어 그런 소릴 내뱉은 건 묶여 있던 범죄자들 중 한 명이었다.
이미 다 포기했는지 킬킬거리며 성민혁을 조롱하는 것이었다.
성민혁은, 그리고 성지인은 그런 범죄자의 조롱과 더러운 눈빛에도 분노하지 않았다.
그에 분노할 만큼 두 사람의 신념과 믿음이 가볍지 않았기 때문이다.
조용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성지인이 말했다.
"우리는 차선에 만족하지 않아요."
"예?"
"우리는, 만족해서 멈추기보다 아무리 멀고 힘들더라도 더 나은 것을 선택하고 싶거든요."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깊고 아름다운 눈동자는 이곳에 없으나 언제라도, 그 무엇보다도 빛나는 누군가를 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