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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해서 지존까지-663화 (663/741)
  • 663화

    가소천은 이름조차 없는 고아였다.

    그러나 그 삶은 결코 비참하지 않았으니 자신을 '인지'한 순간부터 평범하게 불행한 고아로서의 삶을 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인간으로서의 격이 달랐다.

    그를 제외한 모든 인간이 너무나 우둔하여 형언하는 것조차 힘들 지경이었고 그저 시간만 조금 들이면 모든 것을 이룰 수 있었기에.

    "주, 주인 어른."

    지역 유지의 가문에 그저 잠시간 시간을 들이는 것으로 아가씨라 부르던 여자가 시비가 되었으며 본래 '주인 어른'이라 불리던 무인 또한 몸종으로 전락하였다.

    그 한 번의 경험으로 이름없는 고아는 대번에 깨달았다.

    아, 내가 마음만 먹으면 세상의 주인이 될 수 있구나.

    이름없는 고아는 한 번 마음먹은 대로 해 보기로 했다.

    원대하거나 거창한 뜻이 아니라 그저, 격이 다른 인간으로서 가진 사소한 목표였다.

    한데.

    "조, 종말이 왔다!!"

    돌연 세상이 멸망하기 시작했다.

    만인지상(萬人之上)의 자리에 오르기 위해 준비했던 것들 대부분이 무위로 돌아가고 말 정도로, 그마저도 전혀 생각지 못했던 변수.

    그러나.

    그런 변수마저 더욱 유용히 이용할 수 있는 게 그였고 두 개의 긍정적인 변수를 더하여 마주하게 되었으니 하나가 정체 모를 '책'이었고 또 하나가.

    "젊은 아이야. 천마가 되지 않겠느냐?"

    추레한 몰골의 '천마'와 조우한 것이었다.

    이름없는 고아는 그 재능으로 대번에 알아보았다.

    이 단전을 잃고 다 죽어가는 추레한 늙은이가 정말로 천마신공을 익혔음을.

    그래서 늙은이의 제안을 수락하였고.

    "너에게 내 모든 것을 전수하겠다."

    이름없는 고아는 '가소천'이란 성과 이름을 얻게 되었다.

    "내 눈이, 틀리지 않았구나."

    가진유란 이름의 늙은이는 그저 가소천의 격이 다른 재능에 감탄하였고 꿈에 부풀었다.

    아들과 같은 제자가 빼앗겼던 천마의 이름을 되찾고 천마신교의 지존이 될 거라는 꿈에.

    그리고 그 꿈이 이루어지는 과정조차 눈에 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애초에 단전을 잃고 천산에 유폐되어 있던 늙은이가 혼란기에 먼 길을 살아서 이동한 것만으로도 선천진기가 다 소모될 정도로 무리한 것이었던 게 이유였다.

    살릴 수 있었지만.

    가소천은 굳이 그럴 이유를 찾지 못하고 그가 죽게 내버려 두었다.

    이후는 너무나 쉬웠다.

    정체 모를 책의 내용을 해석하여 세상의 이치를 뒤트는 주술을 익혔고 또 천마신공을 익힌 천마가 되어 멸망을 앞둔 어리석은 자들이 천마를 신봉하고 절대적으로 따르게 하였다.

    불같이 일어난 천마신교가 민중을 집어삼켰으니 '나라'는 이미 가소천의 것이었고 황족이란 허울을 뒤집어쓰고 있던 하찮은 것들을 배제하고 옥좌에 앉게 되었다.

    그렇게 목표를 달성한 뒤 잠시 권태를 느꼈지만.

    -고금제일천마의 후예이자 마지막 황족이 있다!

    -새로운 세계가 발견되었나이다!

    …더 큰 목표로 삼을 것들이 나타난 것이다.

    그리고 여기까지 왔다.

    앞서보다 더 큰 목표인 새로운 세계를 집어삼키는 것.

    그 과정에서 알게 된, 고금제일천마 위지혁과 사신 장호의 진전을 이은 무인의 존재.

    둘 다 가지기 위하여 계획을 진행하고 또 수정하였으니 성공이 코앞까지 다가왔다.

    스으…….

    흔들리던 가소천의 호흡이 평소의 것을 되찾았다.

    방금 전보다 진일보한, 그래서 가소천을 압박하였던 도진의 주먹을 그가 인지하였다.

    '그래.'

    인정하였다.

    눈앞의 놈은, 하찮은 것들 중에서는 제법 난 놈이었고 놈으로 인해 잠시 눈이 흐려졌음을.

    그럴 필요가 없음을 잠시간 마음을 다스림으로써 깨달았다.

    놈은 분명히 내 뒤를 쫓고 있다.

    하지만 그것을 두려워할 이유는, 그 어디에도 없다.

    세계라는 화폭에 자신의 심상으로 이치를 자아낸다.

    그것이 위지혁이 더 높은 차원으로 끌어올린 천마신공의 기본이자 오의(奧義).

    김도진이란 놈은 가소천이 자아내는 이치를 신안으로 훔쳐내어 자신의 양분으로 삼아 진화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으로 나를 따라잡을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김도진이 달리는 것보다 훨씬 빠르게 가소천은 달릴 수 있다.

    제아무리 가소천의 깨달음을 훔쳐 달리는 속도에 더한다 하여도.

    애초에 가소천을 따라잡을 만큼의 속도에 이를 리가 만무한 것이다.

    놈은, 영원히 나를 따라잡을 수 없다.

    쿠웅-!

    가소천의 의지가 세상을 물들인다.

    세상을 제 편으로 하여 내지르던 도진의 주먹이 기세를 잃는다.

    '영역 싸움'에서 밀리는 것이다.

    더 강대하고 더 깊은 이치를 담은 가소천의 의지가 도진의 의지로 물들어 있던 세상을 빼앗으니 도진의 기세가 죽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렇게 기세가 죽은 도진의 주먹을 부수는 건 가소천의 '천격(穿擊)'이다.

    꽈아아아앙-!!

    가까스로 꿰뚫리지 않고 받아낸 도진은 그러나 굉음과 함께 튕겨나가고 만다.

    일부러 천격으로 받아쳤다.

    격차를 극명하게 인식시키기 위하여.

    물론 도진은 그에 굴하지 않고 다시 맞서지만.

    구오오오오오오-!

    가소천의 '천괴(天壞)'가 마치 천벌처럼 도진을 짓누른다.

    꽈과과과과광-!!

    오히려 도진의 것보다 더 깊고 복잡한 이치를 담은 하늘의 파편에 도진은 나아가지 못하고 연신 물러나야 했으니 이 또한, 가소천과 도진의 격차였다.

    기껏 그 거대한 파편을 부수고 호흡을 고르려 하니.

    꽈과과과광-!

    호흡의 순간을 완벽하게 읽은 가소천이 천신처럼 벼락을 내리쳐 도진을 궁지로 몰아 넣었다.

    후욱, 후욱.

    도진이 거친 숨을 몰아쉰다.

    그런 도진을 하늘 위에서 내려다 보며 가소천은 자비를 베풀듯 말했다.

    "그리 발버둥칠 필요가 어디에 있지?"

    "……."

    "네가 제아무리 필사적으로 기어봐야 바닥을 기는 하찮은 것에 불과하니 날개를 펼친 대붕은 결코 쫓을 수 없음이다."

    "세계를 구하고 싶은 것이냐? 하지만 그것은 전제부터 잘못되었으니 나는 세계를 멸망시키려는 게 아니다. 오히려 구원할 존재이니."

    "……."

    "그 누가 있어 나보다 뛰어나겠느냐. 그런 내가, 세상을 구할 것이니 너는 그렇게 필사적으로 나에게 맞설 필요가 없지 않느냐."

    "내가 아둔한 자들을 이끌 것이니 그저 나를 따르기만 하면. 인류는 눈부신 문명의 발전을 이룩할 것이다."

    "그런 나를 네놈이, 아둔한 인류가 나를 거부할 이유가 어디에 있는 것이지?"

    명백한 이야기였다. 의심의 여지가 없는.

    가소천이 이끎으로서 인류는 더 높은 곳으로 나아갈 수 있다.

    한데 그걸 네놈이 무슨 자격으로, 왜 거부하냐고.

    가소천은 물었다.

    도진은.

    "후."

    웃었다.

    그리고 말했다.

    "하나부터 열까지, 틀린 게 너무 많아서 정리 좀 해야겠네."

    "…뭐라?"

    "일단 첫 번째. 나는 세상을 구하려는 거창한 생각으로 여기 있는 게 아냐."

    그래. 도진에게는 '세상을 구한다' 같은 거창한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던 것이다.

    "내가 바라는 건, 내게 있어 소중한 사람들이 행복하게 사는 것이었고 그게 우연히. 너를 잡는 게 된 것 뿐이란 말이지."

    "그딴 하찮은 이유로."

    "하찮아? 하. 정말로, 멍청한 새끼로구만."

    도진이 가소천을 비웃었다. 진심으로 멍청한 인간을 보는 시선으로.

    까득-

    가소천은 분노하였으나 손을 쓰지 않았으니 도대체 무어라 지껄일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수많은 사람들은 세상을 구하느니 어쩌느니 하는 소릴 하면서 살지 않아. 그저 내가, 그리고 나의 소중한 사람들을 위해서 살지."

    "그리고 그 마음들이, 행동들이 모여서 세상을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끄는 거야."

    "지도자라고 하면 그 마음과 행동을 더 효율적으로, 더 강한 형태로 발휘될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이겠지."

    "하지만 넌, 아니었잖아."

    도진의 말이 날카롭게 가소천을 향한다.

    "넌 수많은 사람을 불행하게 만들었어. 그걸 대가로 효율을 추구하는 게 옳다고 난 생각하지 않아."

    "…능력도 없는 놈이 이상론을 지껄이는구나."

    "능력이 없는 건 너겠지."

    "……!!"

    가소천의 눈에 불이 튀었다.

    결코 상상조차 하지 않았던 소리였기에.

    "이상을 원하고 거기에 도달하기 위해서 조금씩이라도 나아가는 게 사람이고, 그런 사람들로 인해 세상은 분명하게 이상에 가까워지고 있다고. 나는 생각하거든."

    "너처럼, 이상이라 치부하고 나태하게 현재에 만족하는 놈 따위는 겉만 번지르르한 달변가일 뿐이지."

    "복잡하게 이야기할 거 없어. 너는 잘못됐고 나는 그렇게 잘못된 짓거릴 계속하려는 놈을 두드려 패기 위해서 온 것 뿐이야."

    그래. 거창한 듯 말했지만 사실은 그저 그 뿐인 이야기였다.

    "그럼 어디, 해 보아라!"

    분노한 인신(人神)의 일갈이 벼락을 부른다.

    꽈과과과과광!!

    그야말로 뇌전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듯 벼락의 비가 초식에 따라 도진을 노리고 쏟아지고.

    쩌저저저적!!

    숨쉬는 것조차 허락지 않겠다는 듯 공기가 얼어붙으며 도진의 호흡을 제한한다.

    쿠오오오오오오-!!

    가소천의 광룡(狂龍)이 날뛰는 듯한 심상은 시시각각 도진의 심상을 씹어먹으며 그 영역을 줄여 나간다.

    그에 비하면 묵묵히, 위태위태하게 버티고 있는 도진은 그저 사람의 형상이다.

    그 원대한 사상의 차이를 보여주는 것 같다.

    '그래. 네놈은 하찮은 인간에 불과한 것이다.'

    가소천은 압도적인 능력으로 도진을 찍어누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격차는 하늘과 땅만큼이나 명백하다.

    비록 아득바득 버티고 있지만.

    그 눈으로 가소천이 담은 이치를 훔쳐내어 소화하려고 허우적거리고 있지만.

    '인간 따위가 신에 저항할 수 있을 리가 없는 것이다.'

    가소천은 그저 짓눌렀다.

    동요하지 않고.

    필연적으로 행해질 '심판'을 계속한다.

    한데.

    '…….'

    무너지지 않는다.

    짓눌리지 않는다.

    '…….'

    가소천의 압도적인 재능으로 했던 판단이.

    이미 무너질 거라고 했던 '예언'이.

    '…….'

    쿠웅-!

    적중하지 않는다.

    쿠르릉…….

    무너지는 하늘을 뚫고 도진이 일어선다.

    피에 절고 망가진 몸은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될 것이었다.

    일어날 수 있을 리가 없는 상태였다.

    그런데.

    스으으…….

    "……!!"

    눈이 마주한 순간 가소천은, 단 한 치도 흐트러지지 않은 가소천은 다시 한 번.

    공포를 느끼고 말았다.

    "건방지다!!"

    벼락처럼 소리치며 꽈앙, 도진을 짓눌렀으나 그것은 이상하게도 겁먹은 짐승이 짖는 것만 같았다.

    '왜. 왜……!'

    가소천은 혼란스러웠다.

    또 일어나고 마는 도진을 처음으로.

    살면서 처음으로 완전하게 이해할 수가 없었다.

    무엇이.

    도대체 무엇이 '저것'을 일어나게 만드는가.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가.

    열이 날 듯 고민하고 또 고민해 보아도 답을 알 수가 없었다.

    …알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가소천에게는 그런 경험이 없었으니까.

    타오를 수도 없게 젖어 버리고 망가져 버렸던 도진이 경험했던 세월을.

    상상조차 하지 못할 무게를 짊어지고.

    짊어진 것만으로도 모자라 도진으로선 엄두도 내지 못할 거친 길을.

    스스로가 망가져 감을 알면서도. 결코 돌이킬 수 없게 됨을 알면서도 나아갔던 아버지와 어머니의 희생을.

    그리고 결코 장남을 원망하지 않고 지지해 주었던 동생들의 삶을.

    경험한 적이 없었으니까.

    그럴 리가 없음을 알면서도 바꿀 수 있다면.

    간절히 바라였고 기적이 일어나 그것이 이루어졌다.

    힘들다고.

    머리가 새하얗게 물들고 앞마저 보이지 않게 되어도.

    산소를 갈구하여 가슴을 쥐어뜯는 고통조차 느낄 수 없는 지경이 되어도.

    그토록 오랜 세월의 희생과 그것을 무력하게 받아들여야만 했던 아픔에는 결코 비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까 기적적으로 타기 시작한.

    결코 꺼지지 않으며 꺾이지 않을 심지가 도진을 지탱하고 무너지지 않게 하였다.

    두근-!

    그리고.

    그렇게 무너지지 않고 나아가는 도진이기에 비로소.

    -그래. 그것이다. 제자야.

    -너의 그 심지가.

    두웅-!

    기어코 도달하고 마는 것이었다.

    -네가 천마(天魔)의 길에 도달하고 계속 나아가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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