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1화
쿠웅-!
강하게 한 걸음 내딛는다.
그저 한 걸음이지만 그것은 백척간두(百尺竿頭) 진일보(進一步).
백 자나 되는 높은 장대 위에서 한 단계 더 높은 곳으로 나아가는 한 걸음과 같았다.
만신창이에 고갈된 체력이었으나 내딛은 한 걸음은 강력하게 대지를 즈려밟고 힘을 만들어낸다.
그렇게 발생한 힘을 허리로 옮기고 회전을 줌으로써 증폭, 물 흐르듯 연결되어 움직이는 어깨에서 팔, 마지막으로 주먹에까지 회전을 거쳐 전달할 수 있다면 거대한 힘이 된다.
경(勁). 발경(發勁).
무인이라면 당연하게 사용할 수 있어야 하는 체술(體術)의 기본 중의 기본.
그러나 문월중학교에서는 심지어 강치환조차 제대로 구사하지 못하는 것이었고.
뻐억!
도진 또한 성공하지 못했다.
쿠당탕!
반격에 허무하게 자세가 무너지고 다시 바닥을 나뒹굴었다.
강치환은 씩씩거리며 입꼬리를 비뚜름하게 올리고선 으르렁거렸다.
"이 씨발놈아! 니깟 개새끼가 지금 꼴에 무공 흉내를 내냐? 응? 이 병신 새꺄!"
뻐억!
팔을 들어 막았다.
앉은 자세에서 땅에 굳건하게 뿌리를 두고 최대한 충격을 흘려내는.
쿠당탕!
…성공하지 못했다.
쏟아지는 폭력에 무엇 하나 도진은 공격에도 방어에도 성공하지 못하고 철저하게 실패하였다.
"너같은 병신 새끼가! 개 버러지 새끼가! 될 거 같냐! 될 거 같냐고!!"
강치환의 끝없이 쏟아지는 비난에 도진의 의지를 따라주지 못하는 스스로의 육체까지도.
세상 모든 것이 도진을 거부하고 무너뜨리려 들었다.
안 된다고.
너 따위는 결코 안 된다고.
성공할 리가 없고 시도함으로써 오히려 더욱 비참해질 뿐이니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 못한 것.
'최악(最惡)'을 선택하고 말았다고 선고하는 것 같다.
차라리 포기하는 것이 더 낫다고.
그게 항상 네가 선택해왔던 최악보다 나은 차악이라고 속삭인다.
물론.
쿠웅!
다시 한 번 세게 땅을 딛고 일어나는 도진에게 그것은 스며들지 못했다.
누가 무어라 하든.
설령 세계가, 신(神)이라 하여도.
도진의 선택을 바꿀 수는 없었다.
이미 선언한 것이다.
강치환을, 그 패거리까지도 이 학교에서 개박살을 내겠다고.
도진에게 있어 선언이란 지켜야 한다가 아니라 '지켰다'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기필코 이루어져야만 하는 것.
그렇기에 선택도 선언도 함부로 할 수 없었고 그것이 나쁘게 작용하는 삶을 살고 말았지만.
이제는 아니다.
아니라는 걸 확신한다.
기회를 잡았다.
그토록 간절히 바라던 기회를 잡았으니 또한 지켜야만 할 다짐이 있지 않은가.
쿠웅-!
결코 무너지지 않고.
빠각!
오직 나아가겠다고.
"이, 이 새끼가……!"
통렬한 소리가 울려 퍼졌지만 도진은 무너지지 않았다.
기어코, 앉은 채로 버티고서는.
파악-!
강치환의 거구를 밀어내며 두 발로 일어섰다.
후욱, 후욱.
"이 씨발 새끼가!!!"
쾅쾅!
인정사정없이 강치환이 주먹을 쥐고선 덤벼든다.
도진은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앞으로 나아갔다.
뻐억!
멍청할 정도로 정직한 투로를 따라 뻗은 주먹의 위력이 최고조가 되기 전에 마주 주먹을 내뻗어 공격이 성립하지 않도록 했다.
욱신-!
이쪽은 최대의 위력으로 부딪쳤거늘 오히려 더 많은 피해를 입고 말았다.
이번에도 원하는 대로 몸이 움직이지 않았기 때문에.
엉망이 된 육체는 그 이상으로 도진의 의지를 수행해내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위축되지도 물러서지도 않는다.
또 나아간다.
괴성을 내지르며 뻗은 반대편 주먹을 앞으로 나아가며 사선으로 몸을 숙여 흘려냈다.
퍼억!
실패해서 어깨가 깎여 나갈 것 같지만 흔들리지 않고 비어 버린 강치환의 명치에 주먹을 내뻗었다.
퍽!
"지랄을 한다!!"
일말의 타격조차 주지 못한 듯 강치환이 아랑곳 않고 무릎으로 도진을 찍어 버렸다.
쿠당탕!
비참하지? 아무리 해도 결코 넘을 수 없을 것 같지? 꼴사나운 꼴로 얻어맞을 뿐이니 포기하는 게 맞겠지?
속삭이는 소리가 머릿속에 때려 박힌다. 그러나.
"하하."
도진은 또.
"저, 저거."
"…미친 새끼가."
웃으며 일어나 버렸다.
그리고 말했다.
"그렇구나."
* * * *
퍼억!
빠각!
"……."
"……."
일방적인 싸움이 숨막힐 정도로 오래, 계속되었다. 비정상적으로.
결코 정상적이지 않았다.
분명히 '쉬는 시간'이었을 텐데.
강치환의 일방적이고도 무자비한 폭력에 저항하는 도진의 모습이 도대체 얼마나 오래되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허나 그 이상으로 비정상적인 건.
"후욱, 후욱."
그 오랜 시간을 버티고 또 일어나, 꺾이지 않고 주먹을 쥐는 도진이었다.
그리고 싸움의 양상은 어느새.
가랑비에 옷이 젖는 것처럼 변하고 있었다.
부웅-!
해머처럼 휘둘러지는 강치환의 주먹.
그에 비하면 도진의 주먹은 미미한 힘만을 담고 '완벽하지 않은 경로'로 맞서고 있었다.
이대로면 강치환의 주먹이 도진의 주먹을 부수고 얼굴에 때려박힐 상황.
그러나.
스으으-
한 번의 호흡과 함께 미미하게 바뀌는 '흐름'이.
틱.
강치환의 주먹이 거짓말처럼 바깥으로 빗나가게 만들었다.
"……!!"
강치환이 두 눈을 부릅뜨며 당황하며 커다란 빈틈을 드러냈다.
도진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쿠웅-!
진각을 밟고.
부욱-!
공기를 꿰뚫는 경력(勁力)이 담긴 주먹을 내뻗었다.
뻐억-!
강치환이 그것을 다급히 다른 손으로 그것을 쳐내 공격은 무위로 돌아갔지만 도진은 전혀 아쉬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씨익-
웃으며 반겼다.
"다시 할까?"
"미친 새끼가!"
분명히 덩치도 기세도 강치환이 압도적인데.
이상하게도 강치환이 도진에게 필사적으로 덤벼드는 모양새가 되었다.
부웅!
흉기와 같은 주먹이 휘둘러졌고 맞으면 분명히 치명적일 그 공격에 도진은 역시나 오히려 앞으로 나선다.
훅-
담긴 힘도 체구도 압도적인 열세.
거기다 그 자세 또한 마치 '세상이 개입한 것처럼' 도진이 원하는 형(形)에서 어긋나 있다.
하지만.
스으으-
도진의 깊어진 눈은 그것마저 읽어내고 이치를 그리니.
틱-
허무하리만치 작은 소리와 함께 강치환의 주먹은 또다시 도진에게 닿지 못하고 튕겨 나가는 것이었다.
알게 되었다.
'이 세상'이 도진이 바라는 이치대로 육체를 움직이는 걸 허락하지 않는다는 걸.
허나, 완벽하게 지금의 육체를 파악한 도진은 그 방해마저 포함하여 원하는 이치를 그릴 수 있게 되었다.
그러자.
"어우. 쉬는 시간 다 끝나겠다."
"야, 그만 놀고 걍 밟자."
도진이 주먹을 내뻗으려는 순간 그리 말하며 지켜보던 다른 일진놈들이 덤벼들었다.
자그마한 희망이 결코 커지지 않도록.
완벽하게 짓밟으려는 것처럼.
물론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응, 그렇지. 쓰레기들은 성질이 급한 법이지."
도진은 오히려 환영하며.
그 끝을 알 수 없도록 깊어진 눈으로 무엇이든 꿰뚫을 수 있는 주먹을 쥐었다.
* * * *
훅-!
쥐새끼, 혹은 멸치라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는 놈의 주먹을 사선으로 반 걸음 나서는 것으로 흘려냈다.
본래 완벽하게 피해야 할 움직임이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고 흘려내는 형태가 된 것이다.
허나 이 또한 도진의 '의도'였으니 문제는 없다.
훅-
발경이 되지는 못했으나 단단하게 땅을 딛고 선 하체를 뿌리로 하여 허리를 틀어 회전에서 기인한 힘을 만들고 팔을 지나며 증폭한 힘을 멸치놈의 명치에 때려박는다.
뻐어억!
놈을 무너뜨리는 데엔 이 정도로 충분하다.
"……!"
눈과 함께 아가리를 크게 벌리지만 목소리는 당연히 나올 수 없다.
무너지는 놈의 턱을 성대하게 걷어차 허공에서 화려하게 회전하고선 땅에 처박히게 만들었다.
"궤에에엑!"
땅에 처박은 얼굴을 스스로의 오물로 더럽히는 꼴이 썩 마음에 든다.
놈만이 아니라 덤벼들었던 놈들 모두가 같은 꼴로 제가 내뱉은 토사물에 면상을 처박은 꼴로 만들어 주었다.
그렇게 보기 좋은 몰골로 나뒹구는, 싹이 노란 걸 넘어 새카만 것이 살아 있어봐야 세상에 해만 끼칠 일진놈들을 지나 숨을 헐떡이는 강치환을 마주하였다.
"뒤져엇!"
악을 쓰듯 온몸의 힘을 실은 주먹을 내뻗지만 그것은 더 이상 도진에게 닿을 수 없다.
스으-
그다지 힘이 담기지 않은 움직임.
처음부터 만신창이에 고갈된 몸은 '세계의 의지' 때문에 결코 도진의 의도대로 움직이지 못했지만.
틱-
그럼에도 어긋난 그 자체로 이치가 깃들어 강치환의 주먹을 빗겨내 버리는 것이다.
"으아아아!!"
아무리 괴성을 내지르며 힘을 싣고 내공을 담아도.
틱-
결코 도진에게 강치환은 닿지 못한다.
그리고 도진의 공격은.
뻐억!
본래 갈비뼈를 후리려 했으나 단단한 가슴팍에 주먹이 꽂힌다.
퍼퍽!
무릎을 찍으려 했으나 살이 두터운 허벅지에 발이 꽂힌다.
어떤 공격도 도진이 원하는 곳에 닿지 않았다.
하지만 괜찮다.
가슴팍에 꽂히는 건 호흡을 끊고 허벅지에 꽂히는 것 또한 단단하게 고정되어야 할 하체를 흔들 수 있으니까.
'정답'만이 정답이 아니다.
도진은 그것을 알게 되었고.
뻐버버버벅!!
역겨운 강치환을 오래도록 두드리는 것 또한, 나쁘지 않은 경험이었으니까.
그리고.
뻐어어어어억!!
마침내 마지막.
도진의 경(勁)이 실린 주먹이 강치환의 명치를 제대로 꿰뚫어 버렸다.
콰당탕!!
아가리를 쩌억 벌린 채 강치환의 거구가 뒤로 넘어갔다.
이대로 죽어 버린 건 아닐까 싶은 광경.
그러나 도진은 전혀 신경쓰지 않는 얼굴로, 여유 가득한 얼굴로 아무도 없는 허공을 보며 말했다.
"더 해도 상관없는데."
그러자.
"의미없는 일을 계속할 필요는 없지."
후욱-
세상이 변하여 교나라의 수도 앞, 소천마 김도진과 위천마 가소천이 대치하고 있었다.
가소천은 놀람을 다 숨기지 못한 얼굴로 말했다.
"네놈은, 정말로 이질적이로구나."
도진은 피식 웃었다.
"덕분에 제법 유익한 훈련을 할 수 있었어."
대지는 여전히 지진이 난 것처럼 요동치고 있다.
그러나 그 이상으로 지맥의 거대한 기운이 감각을 휩쓸며 뒤흔들고 있어 딛고 선 땅의 진동이 잘 느껴지지 않을 지경이다.
이 기운이, 일대의 모든 인간을 잡아먹고 사실보다 더 사실 같은 환각을 보여 준 것이었다.
인간을 끝없는 절망에 빠뜨리고 무너뜨리는.
허나 도진은 가소천이 지맥을 이용하여 준비한 그 거대한 절망마저도 부숴 버린 것이다.
부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자신의 양분으로 삼아 버리기까지 했다.
하지만.
"크, 크흐흐."
그럼에도 가소천은 웃었다.
"그래. 그렇게나 발버둥쳐서 진을 깨고 나온 것이 기쁘더냐."
원하던 것을 손에 넣은 얼굴로.
"네가 그토록 힘겹게 발버둥치며 했던 모든 것들이 또한, 나의 양분이 되었음에도."
…그것은.
굳이 풀어 설명하지 않아도 뜻이 전달되는 말이었다.
도진은 대번에 알았다.
진법 안에서 도진이 행했던 모든 것들을. 거기에 담겨 있던 모든 이치들을.
가소천이 훔쳤다는 것을.
가소천은 모든 걸 이해한 도진을 마주하며 주욱, 찢어질 듯 입을 늘이며 웃었다.
"네놈이 쌓은 모든 것들이 지금, 나의 것이 되었다는 것이다."
절망을 선고했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씨익-
절망은 결코 도진에게 닿을 수 없다.
도진은 웃는 얼굴로 말했다.
"해 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