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0화
"……."
낯선 천장이었다.
침대에 누워 있었는데 지금이 낮인지 밤인지, 언제 잠들었는지도 몽롱하여 명확하지가 않았다.
그러다 점점 더, 끈적한 몽롱함에서 벗어나면서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기숙사.'
기숙사였다.
김도진.
무림중학교인 문월중학교 3학년.
시계를 보니 오후 6시 7분으로 이 시간에 이렇게 침대에 누워 있다 깨어나게 된 이유는.
욱신-!
…오후 대련 수업에서 명치를 제대로 얻어맞고 정신을 잃었기 때문이다.
"……."
우울한. 너무나도 우울하고 무거운 현실을 자각하였고 그 순간 그것이 도진을 내리눌렀다.
이 좁은 방을 나가고 싶지 않다.
저 문을 열고 싶지 않다.
이대로 시간이 멈춰 버리든가 차라리 죽었으면 좋겠다.
간절히 바라지만 그것이 결코 이뤄질 수 없는 소원이라는 것을 안다.
도진은 스스로를 현실주의자라고 생각했다.
스르륵-
자리에서 일어났다.
…허약한 몸이다.
무림중학교의 학생인데.
몇 달 지나지 않아 이제 어엿한 성인이 될 것이고 또 무림인으로 취급될 텐데.
그리고 그 몸에 걸맞게 무공의 수준 또한, 입에 담기도 처참할 지경이다.
저벅.
바깥으로 나갔다.
슬슬 차가워지는 바깥 공기가 방금 전까지만 해도 이불 속에 있던 도진의 몸을 때리고 서늘함을 느꼈다.
어깨를 늘어뜨리고 힘없는 걸음으로 식당에 들어갔고.
"씨발. 하여간에 똑바로 된 반찬 가져오는 새끼가 없냐."
수저를 든 채 반의 아이들 반찬을 뺏어 먹는 역겨운 일진 놈들을 보게 됐다.
무림 학교 특성상 식단도 허투루 해선 안 됐는데 겨우 구색만 갖춘 문월중은 그것을 학생의 가정으로 떠넘겨 버렸으니 학생들이 도시락을 싸오게 된 이유였다.
그리고 그 도시락을, 일진놈들은 수저만 가지고 빼앗아 먹었다.
놈들의 가정이 넉넉지 않다는 건 당연하게도 그짓거리의 면죄부가 되지 못했지만.
벌을 줄 사람은 이곳에 없었다.
"오, 씨발 김도진. 빨리 도시락 꺼내라."
맡겨 두었던 것처럼 당당하게 다가와 말하는 건 강치환이다.
중3이면서 이미 180이 넘는 키에 도진은 물론이요 학생들 중 누가 와도 대지 못할 근육질의 남학생.
도진을 특히나 괴롭히는 이 학교의 '짱'으로.
욱신-!
도진의 가슴팍을 사정없이 갈겨 버린 놈이기도 했다.
허나 도진은 그런 놈의 말에 순순히 도시락을 꺼내 열었고 따듯한 고기 반찬이 드러난 순간.
"그래, 이거지 씨발."
더러운 젓가락이 그것을 휘적이고선 강치환의 아가리로 옮겨 버렸다.
"나도 한 입."
그리고 하이에나 떼마냥 두어 번 다른 젓가락이 지나가자 더 이상 고기 반찬은 남아있지 않게 되었다.
"씨발. 니 새끼들도 좀 제대로 된 반찬 해달라고 하라고. 하나같이 병신 새끼 같은 것만 쳐 싸와서는."
그딴 소리를 지껄이며, 강치환 패거리는 다른 교실로 가 버렸다.
도진의 앞에는 엉망이 된 도시락만이 남았고.
어머니가 새벽부터 힘들여 싸 준 도시락의 남은 것을, 도진은 묵묵히 먹었다.
욱신-!
피멍이 든 가슴이 아팠다.
* * * *
강치환 패거리는 왕따로 찍힌 도진을 지독히도 괴롭혔다.
대련을 빙자하여 흠씬 두들겨 패는 건 일상이요 돈을 빼앗는 것마저 당당하기까지 했다.
학생들은 누구도 도와주지 않았고 선생들 또한 방관할 뿐이었다.
도진은 그것을 원망하지 않았다.
그게 맞다는 것을, 현실주의자인 도진부터가 인정하고 있었으니까.
어떻게 도와줄 것인가.
괜히 거들다 똑같이 왕따가 될 뿐이고 학창 생활이 지옥으로 바뀔 뿐인데.
선생 또한 마찬가지다.
부모도 아니고 헌신할 이유가 없다.
어설프게 참견해봐야 해결할 수 있는 건 없고 그렇다고 인생을 걸고 헌신할 의무도 없으니까.
체육 선생, 강치환에게 무공을 전수한 양원치 같은 인간에 비하면 차라리 그들은 올바른 삶을 사는 것이었다.
주말.
도진은 도망치듯 집으로 갔다.
기숙사라는 감옥에서 벗어나 집에 왔고 형이자 오빠를 동경하는 동생들을 마주했다.
"형!"
"오빠!"
"……그래."
귀찮다는 생각이 들었고 외면했던 나날들이 떠올랐다.
그래서는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제대로 마주보자 그제서야, 몰라서 깨끗이 씻지 못한 뒷목이 보였다.
"…세수하고 밥 먹을까?"
"응!"
"씻는 거 도와줄게."
"진짜?!"
"그래."
이게 뭐라고.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기뻐하는 동생들의 모습에 욱신, 가슴이 아팠다.
* * * *
일요일 저녁.
지옥같은 기숙사로 돌아가기 전 드물게도 가족이 다 함께 모여 저녁을 먹었다.
"산적!"
오늘 반찬은 낡고 초라한 집과는 어울리지 않게 화려하다.
고급 한정식집에서 일하는 어머니가 반찬을 싸 온 덕분이다.
사실 도진의 도시락이 형편에 비해 훌륭한 것도 그것이 이유였다.
다만 도진은 몇 달째 그것을 제대로 먹어본 적이 없었다.
식사가 끝나고 늦은 밤.
하얗게 새어 버린 듯한 아버지가 하얀 봉투를 건넸다.
"필요한 데 쓰도록 해."
단지 그 말만을 한 아버지가 건넨 봉투 안에는 30만 원이나 되는 돈이 들어 있었다.
30만 원.
집안 형편에, 그리고 몸이 부서져라 일하는 아버지에게 있어 이것이 얼마나 큰돈인지 어린 도진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상상도 못할 정도로 그것은, 무거운 돈이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런 티를 전혀 내지 않고 어머니 또한 장남을 위해 쓰여야만 할 돈이라 여겼다.
욱신-!
가슴이 아팠다.
* * * *
"뭐라고?"
"이건, 들켜서 안 돼."
들켰다.
아버지가 주신 돈을.
도진의 낡아빠진 휴대폰 앱을 '검사'한 강치환이 30만 원을 알게 되었고 내놓으라고 했다.
빌려달라도 아니고 뻔뻔하게, 내놓으라고.
도진은 아버지가 확인할 거라고 해서 안 된다고 했고 강치환은 알아서 둘러대고 돈을 내놓으라고 했다.
도진은 이 큰돈을 빼앗길 수 없었고 고개를 저었고.
빠악!
"컥."
얻어맞았다.
"이 씨발 새끼가."
뻐걱!
잔인하게.
"말귀를 씨발."
중얼거리면서 스스로 화가 솟구쳤는지 강치환은 무자비하게 손발을 휘둘렀고 도진은 몸을 말았다.
빠아악!
하지만 강치환이 양원치에게 전수받은 철중권(鐵重拳)은 방어를 뚫고 눈앞이 하얘질 정도의 고통을 도진에게 때려박았다.
뻐억! 뻐억!
눈이 돌아가 험악하게 도진을 구타하는 강치환을 누구도 말리지 않았다.
일진들은 그저 지켜 보았고 다른 학생들은 외면했다.
심지어 선생들마저도, 외부인의 입장을 취했다.
…원망하지 않았다. 항상 그래왔던 것처럼.
그것이 '차선(次善)'이었으니까.
돕지 못할 것이면 차라리 외면하는 게 옳다.
하지만 도진은 생각했다.
차선을 선택하는 게 옳은 건 잘못된 세상이라고.
애초에 그것이 차선인 것부터가 근본부터 잘못되었다.
최선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하고 그것을 실행에 옮길 수 있는 게 제대로 된 세상이지 않겠는가.
콰득-
주먹을 쥐었다.
무림중학교의 학생임에도 주먹을 쥐는 게 어색할 만큼 한심한 학생이었던 도진의 주먹이 내뻗었고.
"미쳤나 이 씨발 새끼가!!"
뻐걱!
"……!"
숨이 턱 막힐 듯한 발길질이 가슴을 걷어찼다.
퍼억! 퍽!
"미쳤나고 이 씨발 새꺄!!"
이상했다.
저 '수준 낮은' 공격을 분명히 꿰뚫어 볼 수 있는 눈이 있었을 텐데.
이 '하찮은' 공격에 상처입을 리가 없는 세상 그 누구보다 단단한 육체를 가지고 있었을 텐데.
그 어떤 벽이 앞을 가로막아도 그것을 부수고, 뛰어넘을 수 있는 '무공'을 익히고 있었던 것 같은데.
뻐억!
쿠당탕!
그것이 말도 안 되는 착각임을 때려박는 것처럼 한심하게 허우적거리다 처참하게 바닥을 나뒹굴었다.
"또 덤벼! 덤벼 보라고 이 병신 새꺄!"
그 말대로.
다시 일어나 덤볐다.
이상했다.
평소의 자신이 아니란 걸 누구보다 스스로가 더 잘 알고 있었다.
병신. 봇같은 놈.
무공에 일절 재능이란 없고 겁 많고 나약한 데다 몇 년을 병신 같이 살다 보니 그게 오히려 당연한 인간이 되어 버렸다.
스스로 자기합리화하고 속이며 부당한 대우와 잘못된 것마저 합리화하려 들었다.
그런데.
무엇일까.
한 대 맞고 기절한 사이 무언가 엄청나게 바뀌어 버린 걸까.
훅!
주먹을 휘두른다.
마치 온 세상이 그것을 방해하는 것처럼 주먹이 무겁고 또 느리며 궤적이 엉망이다.
원하는 속도로, 원하는 곳으로 뻗질 않는다.
뻐억!
당연히 주먹은 허공을 갈랐고 또 통렬하게 얼굴을 얻어맞고 나뒹굴었다.
한심하게 바닥을 나뒹굴어야 했고 달팽이마냥 몸을 말아야 했는데.
벌떡, 일어날 수 있었다.
겁먹지 않고. 포기하지 않고.
또 그 엉성하고도 한심한 주먹을 내뻗을 수 있었다.
"지랄을 한다 이 씨발 새꺄!"
아까보다 더 아프게, 무자비하게 얻어맞고 바닥을 굴렀지만 도진은 아까보다 더 빨리 일어날 수 있었다.
일어나서, 분명히 다 고갈된 체력과 엉망인 몸으로도 주먹을 내뻗을 수 있었다.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다.
쿠당탕!
꼴사납게 바닥을 나뒹구는데.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 것 같은데.
그저 아프고 엉망이 될 뿐인데.
그것을 감내하고 일어날수록, 오히려 더 정신은 선명해진다.
'그래.'
도진은, 이 세상을 바꾸고 싶었다.
불합리가 오히려 합리가 되는 세상은 잘못되었으니 바꾸고 싶었다.
그야말로 몸을 깎아 가며 가족을 지탱하던 아버지와 어머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전혀 티내지 않으면서.
본래 결코 감당할 수 없었을 무게를 그럼에도, 아버지와 어머니이니까 감당하고 있는 현실도 그토록 간절하게 바꾸고 싶었다.
그럴 힘이 없었다.
그럴 의지도, 가지지 못했었다.
다만 기회가 왔으면 하고. 꼴사납게 바랄 뿐이었다.
꼴사납지만 그럴 수 있는 기회만 있다면.
결코 무너지지 않고 오직 나아가겠다고.
그리고 이상하게도.
벌써 그 기회를 잡았다는 확신이.
정말로 이상하게도 지금 들고 있는 것이다.
그 확신이.
"또, 또 일어났어."
"저새끼……."
꺾이지 않는 심지에 불을 붙이고 도진을 일어나게 하고 있었다.
"지랄을 한다!"
뻐억!
그 어떤 것도 꿰뚫어 보는 눈이 없었다.
빠각!
그 어떤 것에도 무너지지 않는 육체 또한 가지고 있지 않았다.
뻐어억!
그 어떤 것도 부술 수 있는, 비할 데 없이 강대한 무공 또한, 구사할 수 없었다.
그저 사람의 정신을 무너뜨리는 폭력이 무자비하게 쏟아질 뿐이다.
그러나.
"어."
"어어……."
스으으…….
그 어떤 것에도 꺾이지 않는 심지가, 도진을 관통하고 또 일어서게 해 주었다.
흐.
입꼬리가 올라갔다.
이토록 한심하고 비참한 몰골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웃음이 나오는 건, 이것이 결코 불이 붙은 심지를 꺼트리거나 꺾을 수 없다는 걸 확신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고 싶었던 게 있었지."
"…뭐?"
"그래, 그랬어."
나는.
"너를. 그리고 너희를."
꾸욱-
"학교에서 한 번 제대로 개박살을 내 주고 싶었어."
"미친 새끼가!"
멋있게 말 했는데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또 한 번, 바닥을 나뒹굴 뿐이었다.
하지만 도진은 웃었다.
아주 크게.
그리고 벌떡, 일어나는 것이다.
문득.
선명한 정신에 환청이 들렸다.
-형님. 제자가 웃는데요.
-알잖아. 냅둬.
이상한 일이다.
비정상적이고 비상식적인 일이다.
하지만, 또 비정상적이고 비상식적이지만 그것이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꽈악-
어색했던 주먹이 어느새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이 되어 있었다.
이미 만신창이에 체력이 고갈되었지만 끝이라는 생각은 절대로 들지 않는다.
그래.
한계.
도진에게 그것은 분명히.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