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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해서 지존까지-658화 (658/741)

658화

늦은 밤.

'전기'를 끌어와 형광등으로 밝힌 천막 바깥으로 나서자 현무도의 제자 스물일곱 명이 무릎을 꿇고 있었다.

소리를 차단하지 않았기에 도진과 현무도의 대화를 고스란히 들을 수 있었고 스승과 마찬가지로 도진의 뜻에 따르겠다는 뜻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고맙구나."

현무도는 그저 그 한 마디로 제자들과 마음을 주고받았다.

이들은 단순한 사제 관계가 아니었다.

일부는 현무도가 직접 거두어 내제자(內弟子)로, 자식과 같이 키운 아이들이었으며 그렇지 않은 제자들 또한 현무도에게 평생에 걸쳐 갚아야만 할 은혜를 입었다.

그렇기에 그들은 목숨을 걸고서라도 현무도와 함께 할 것이었으며 그것이, 현무도가 원하고 그들 또한 원하는 일이었기에 진심으로 소천마를 따르겠다고 맹세하는 것이었다.

"일어나세요."

도진의 말에 따라 스물일곱의 무인이 일어섰고 현무도의 뒤를 따라 걸었다.

향하는 곳은 다름 아닌 오천의 토벌군이 주둔하고 있는 평야다.

그들은 노심초사 기다리고 있던 현무도와 스물일곱의 무인들이 무사히 나타나자 웅성이며 모여들었다.

-스스로 정하기 힘들다면 현무도 장군을 기다려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겁니다.

스물일곱의 무인까지 쓰러뜨린 도진은 토벌군에게 그렇게 말했다.

나직이 말함에도 모두의 귀에 선명하게 들리는 목소리였고 그것만으로도 병사이자 무인들을 휘어잡기에 충분했다.

그들 대다수는 현무도와 그 제자들을 보고 뒤를 따른 무인들이었으니까.

'전쟁'임에도 불구하고 현무도와 제자들을 죽이지 않고 오히려 살리기 위하여 상처를 감당한 도진의 말은 그만큼의 무게가 있었던 것이다.

현실적인 이유도 충분했다.

이대로 싸워봐야 패배할 뿐이다.

적나라하게 말하자면 개죽음이었고 때문에 망설이고 있는 차에 도진이 그렇게 말하자 지휘에 공백이 생긴 병사들은 홀린 듯 그 말에 따라 진지를 구축한 것이었다.

그렇게 이루어진 기묘하면서도 불편한 대치가 이어지던 중에 드디어 현무도가 나타난 것이다.

소천마와 함께.

고요한 가운데 현무도가 단상 위에 섰다.

그리고 내공을 담아 말했다.

"나는, 누군가를 이끌기엔 턱없이 모자란 사람이었다."

"바라는 것이 있으나 그것이 너무 컸고 혼자서는 이룰 수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수많은 이들을 이끌고 큰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의 뒤를 따라 길을 닦는 역할을 자처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 길은 옳지 않았다. 옳지 않았지만, 그것보다 더 나은 길로 이끌어 줄 이가 없어 옳지 않음을 알고서도 그 길을 따랐고 길을 닦으며 나는 할 수 있는 것을 최선을 다해 하고 있다고 스스로를 속여왔다."

"그리고 드디어. 나는 내가 바라는 것을, 아니 내가 바라던 것보다 더 나은 길로 이끌어 줄 인도자를 만나게 되었다."

"천마신교는, 무심한 하늘을 대신하여 인간의 힘으로 옳은 일을 행하기 위하여 탄생한 곳. 그리고 그 옳은 일을 행할 수 있도록 가장 앞에서 인도하여 주는 이가 바로 천마인 것이다."

"그렇다. 나는 드디어 천마를 만났으니 소망을 이루어줄 인도자의 뒤를 따르기로 결정하였다."

"……."

조용하다.

오천의 병사들 중 누구 하나 입을 열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소리에 한한 이야기일 뿐.

현무도의 말을 듣고 있는 모든 이들의 마음이 격동하고 있었다.

잘못되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알고 있었지만, 일개 개인의 힘으로 세상을 바꿀 수는 없었기에.

그저 세계의 자잘한. 몇 개쯤 없어도 되는 톱니바퀴로서 미래를 바꾸어 줄 나라를 지탱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현무도가 말했다.

세상을. 인간의 힘으로 바꿀 수 있도록.

모두를 이끌고 하나로 모아 인도해 줄 이를 만났다고.

"나는 그 미래를 믿는다. 결코 의심하지 않으니 분명히 이루어질 것이다."

"하지만. 나와 생각이 같지 않은 이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다른 생각으로 다른 길을 걷고자 하는 이도 있을 것이니 그 생각을 존중하겠다."

"소천마께서도 인정하실 것이니 그 어떤 해코지도 하지 않을 것이다. 뜻이 같지 않은 자는, 돌아가도 좋다."

그리고 침묵이 제법 길게 이어졌다.

켜켜이 쌓이는 침묵은 사람들의 어깨를 내리 눌렀고 이내.

저벅.

한 사람을 시작으로 몇 백의 병사가 어둠 너머로 사라졌다.

소천마를 믿지 못하는, 현실적인 선택이었다.

그들의 선택을 현무도는 물론이요 누구도 비난하지 않았다.

말 그대로 스스로가 살아갈 세계를 바꾸는 선택은 스스로 해야만 하는 것이다.

다만 그 선택에 대한 대가 또한 스스로 져야 할 뿐.

그렇게 그들이 떠나고.

사천오백이 넘는 사람이 남았으니 그들은.

천마신교와 함께 한다는 선택을 한, 도진의 뒤를 따르기로 결정한 사람들이었다.

* * * *

천마신교는 그야말로 마른 들판에 번지는 불처럼 거세게 퍼져 나갔다.

부패한 명나라를 무너뜨리고 들어선 교나라가 명나라와 다르지 않음을 모두가 알게 되었다.

진실된 천마신교가 알음알음 퍼져 나갔고 설령 천마신교를 돕지 않더라도, 마음만큼은 천마신교에 둔 이가 적지 않았으니 이미 교나라는 바싹 마른 들판과 같았던 것이다.

바로 거기에 소천마라는 불씨가 던져졌고 유일하게 교나라의 민초들이 믿고 의지하던 현무도마저 소천마를 따르겠다 천명하였으니 거세게 타오르는 불길은 걷잡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제 배만 채워 살이 찐 돼지를 처단하자!"

우오오오오오오-!!

개인은 그저 흐름에 휩쓸릴 수밖에 없다.

허나 수많은 개인이 모인다면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낼 수 있으니 기존의 흐름에 저항하여 거세게 부딪쳤다.

"이, 이 천한 것들이!!"

"국가는 국민이 있음으로써 성립하는 것이다!"

"저 자를 끌어내려라!!"

"히, 히익!"

곳곳에서 혹사당하던 민초들이 들고일어섰다.

천마신교의 교도들이 중심에서 힘이 되어 주었고 그들의 고혈을 빨아먹던 거머리들을 처단했다.

현무도를 따르는 이들. 그리고 그들의 가족들이 있는 마을이 동시에 힘을 합쳐 일어나 교나라의 썩어빠진 자들을 처단하였으니 그 모습이 '천마신교'가 명나라를 무너뜨릴 때와 다르지 않았다.

"현무도 장군의 인망이 이렇게나 두텁군요."

"소천마께서 이끌어 주시기에 가능했던 일입니다."

생각 이상으로 일의 진척이 빠르다.

교나라가 바뀌길 바라는 이들이 적지 않았고 그들과 함께 이렇게, 이런 식으로 세력을 이루어 위천마 가소천을 치는 쏘아진 화살과 같은 그림을 그렸었는데 그 그림보다 훨씬 큰 화살이 수십 대나 수도로 향하고 있는 형국이다.

"이제 교나라는, 국운을 걸고 우리를 상대해야만 할 것입니다."

교나라의 핵심 인사였던 현무도가 확신을 담아 말했고 그 말대로였다.

그들이 말하는 신세계, 도진이 살던 세계를 집어삼키기 위하여 국력의 대부분을 소모하고 있는 교나라였다.

때문에 굳이 토벌군이란 것을 새로 징집하여 도진의 세력을, 그것도 민심까지 휘어잡는 형태로 단번에 거꾸러뜨리려 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그 전략은 철저하게 실패했다.

오히려 더욱 천마신교가 불같이 번지게 만들었으니 이제 전쟁 이외엔.

교나라가 천마신교를 억누를 방법은 없어졌다.

도진은. 그리고 천마신교는 그 전쟁을 피하지 않을 것이다.

결국 현실이자 세상을 바꾸는 데 피가 흐르지 않는 방법은 없으니까.

그렇게 피를 흘림으로써 스스로가 세상을 바꾸어야만 한다.

천마신교는 이상만을 추구하는 도가(道家)도 불가도 유교도 아니니까.

무심한 하늘이 아닌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 쟁취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가소천. 그리고 좌호법과 무선이 핵심일 것입니다."

앞으로의 일을 논하는 자리.

현무도는 우선 그 셋을 꼽았다.

"무선은 가소천의 책사로 교나라의 재상 역할도 겸하고 있습니다. 실질적으로 교나라를 운영하고 저쪽 세계의 침공에도 깊이 관여하고 있지요."

그야말로 교나라의 뇌와 같은 인물이었다.

"좌호법은…… 아시다시피 황룡무상신공을 대성한 자입니다."

그리고 좌호법 우경신.

그는 황룡무상신공으로 경계를 넘어선 자였다.

그래, 황족의 무공인 황룡무상신공이다.

본래 익히고 있던 무공을 기반으로 황룡무상신공을 더하여 경계를 넘어섰다고 들었다.

도진의 시선이 자연스레 위서린과 맞닿았다.

위서린은 미소지으며 말했다.

"부패하여 멸망을 자초한 자들이었으니 슬플 것은 없습니다."

위서린에게 있어 황룡무상신공은 어머니가 물려주신 소중한 무공이지만 그 외의 의미는 없었다.

애초에 멸망한 황족은 가족도 아니었으니 우경신은 그저 이단 세력의 핵심 인물 중 한 명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란 것이다.

그리고 천마를 참칭하는, 이단 세력의 교주이자 교나라의 황제인 가소천까지가 최우선 목표였다.

이들을 잡기 위해선 교나라의 수도를 쳐야 했고 그곳에는 수도답게 교나라의 최정예군, '신군(神軍)' 주둔하고 있다.

약 삼천의 군대가 화기로 무장하고 있는데 정예군을 상대로 공성전을 치러야 함을 감안하면 일만 이상의 군대로 봐야 한다.

도진과 현무도, 위취련이 있지만 저쪽에도 도진의 세계에서 암약하고 있는 지들을 제외하고도 화경에 이른 무인만 가소천을 포함하여 다섯은 있다고 예상해야 하니 원군 등 변수까지 고려하면 더욱 쉽지 않다.

때문에 밤이 늦도록 이야기가 오고갔는데.

다음날.

"뭐라?"

심상치 않은 소식이 전해졌다.

* * * *

도진을 필두로 한 천마신교의 '군대'가 수도를 향하여 진격하기 시작했다.

전날 전해진, 쉽게 납득하기 어려운 소식 때문이었다.

-수도의 성문이 열리고 신군을 뒤로 물렸습니다.

어떻게 해야 최대한 피해없이, 빠르게 수도를 함락시킬 수 있을 것인가를 논하고 있는데 적이 문을 열고 수비군을 빼 버렸다.

그러니까 무기를 집어넣고 문을 연 채 손님을 맞이하는 모양새를 취했다는 말이다.

여기에 수도에 살던 이들마저 주변의 도시로 강제로 보내 버려 내부를 텅텅 비게 만들었다는 소식이 이어졌으니 더욱 천마신교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마지막으로.

"…위천마가, 성문 밖에 모습을 드러냈다구요."

"예."

위천마 가소천이 직접.

성문 밖에 자리를 만들고 거기에 앉아 차를 즐기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마치 보란 듯이. 보고서 도진에게 전하라는 듯이.

너무 적나라하고 노골적이어서 차라리 함정이란 생각조차 하기 힘들다.

도진은, 가소천이 부르고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사실 한참 전부터 그런 생각을 했었다.

가소천은 나를 만나려 하는 게 아닌가, 하는.

나를 만날 수 있는 방향으로 일을 벌이고 있는 거 아닌가.

어디까지나 가정이지만 꼭 그런 것만 같은 느낌이 있었는데 그게 지금 확신이 된 것이었다.

도진은 씨익, 보는 이들의 불안을 씻어주는 호쾌한 미소를 짓고선 말했다.

"가도록 하죠."

* * * *

도진이 이끄는 천마신교는 거침없이 수도로 향했다.

본래 쉽지 않은 길이 될 것이라 예상하였다.

피로써 세상을 바꾸기 위한 길을 쟁취하여야만 하는 여정.

허나 교나라는 그 길을 단 한 번도 막지 않았고 채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 천마신교는 수도에 도달하게 되었다.

그리고.

"드디어 만났구나."

소천마 김도진과 위천마 가소천이 마침내.

"찬탈자 위지혁의 후계자."

서로를 마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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