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6화
이곳은 현대인의 기준으로 '무림'이라 부를 수 있는 세계였으나 전쟁의 양상은 무림하면 떠올릴 수 있는 것들과는 상당히 달라져 있었다.
현대의 기술이 흘러들었으니까.
포털을 통과하는 순간 일정 이상의 기술로 만들어진 것은 모두 고장나 버린다지만 사람의 지식과 기술은 고스란히 남는 것이다.
그리하여 무선 통신이란 것이 가능해졌고 현대에는 못 미치는 수준이지만 소총에 자주포마저도 생산하여 이용할 수 있게 되었으니 이곳에서의 전쟁은 차라리 몇십 년 전의 현대에 가까웠다.
이렇게 보면 오천의 토벌군이 출정하였을 때 도진의 천마신교는 일반인들을 대피시켜야만 했다.
사람의 목숨이 한순간 폭발하는 포탄과 함께 아무런 의미없이 스러질 포격전이 벌어졌을 것이니까.
하지만 토벌군의 수장이 창마(槍魔) 현무도로 정해지면서 이야기가 달라졌다.
창마 현무도.
마주한 늙은 무인을 도진의 신안이 읽어낸다.
세월의 흔적에 깎인 바윗덩이 같은 사람이다.
경계를 넘어선 고수로 비할 데 없이 단단하고 굳건하지만 겉으로 드러난 깎여나간 흔적들이 그가 짊어진 고단한 삶의 무게를 짐작케 하였다.
화려함을 완전히 배제하고 최소한의, 장군의 상징만을 새긴 갑주를 걸친 늙은 무인은 그래서 육체보다 더 거대하게 마주하는 이에게 인식된다.
'차악을 선택한 사람.'
위서린과 장소유는 현무도를 그렇게 정의하였다.
올곧고 굳건한 사람.
그러나 최선을 선택하기엔 힘이 부족하였고 요령도 부족한 사람이어서 차악(次惡)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사람이라고.
자식들에게, 손자와 손녀에게 미래를 주기 위하여 교나라에 헌신하였고 민초들에게만 희생을 강요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으로 자녀들에게도 같은 헌신을 요구하였다.
그리고 자식들이. '원인불명의 병'에 걸렸다.
현무도는 그래서 차악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가슴 속에 담은 터질 듯한 수많은 것들을 그저 억누른 채.
신세계로 가야만 한다.
가서, 병에 걸린 이들이 구원받을 수 있도록 해야 했고 나라를 분열시키는 이단을 처단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였다.
그 과정에서 불필요한 희생이 없도록 하였고 특히나 민초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노력하였다.
그의 진심이 통해서 교나라를 부정적으로 보는 이들마저도 현무도는 인정하였으니 그야말로 '차악'을 선택한 이의 모습이었고 그것이 지금, 도진과 현무도가 마주 서게 된 이유이기도 했다.
포격전을 하면.
전력 대 전력이 부딪치는 전쟁을 해 버리면 수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을 수밖에 없다.
현무도는 그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신세계로 가는 데 쓰여야 할 귀중한 자원들을 의미없이 소모해서는 안 된다는 명분을 내세우고선 모든 것을 드러내고 당당히 진군하면서 요구한 것이다.
김도진. 네가 소천마라면 내 앞에서 증명해 보아라, 고.
그리고 그 요구를 도진은 거절하지 않았다.
쿠웅-!
현무도가 자신의 창을 꺼내 대지를 찍었다.
그의 키보다 큰 창은 통짜 합금으로 만들어져 평범한 이는 드는 것조차 버거웠고 웬만한 무인이라 하여도 그것으로 정교한 초식을 구사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창마는, 그것이 가능한 경계를 넘어선 무인이었다.
"가겠다."
꾸웅-!
내딛은 진각이 대지를 터뜨리며 폭발적인 가속도를 현무도에게 부여하였다.
그야말로 공간을 접은 듯한 쇄도였고 인식한 순간.
훅-
창날은 이미 도진의 미간을 꿰뚫고 있었다.
꽈앙-!!
그렇게 착시를 일으킬 만큼 초고속의 세계에서도 찰나의 간격만을 둘 정도로 미세하게 상체를 물린 도진이 창대를 때렸다.
평범한 이였다면 여기서 창이 부러졌을 것이다.
지극히 미세한 상체의 반동만으로도 도진은 그것을 극한까지 증폭시키고 천마기까지 담아 거대한 일격으로 만들어내니까.
하지만 현무도는 그 일격을 똑같이 거대한 힘으로 받아쳤다.
란창(攔槍).
창을 회전시키며 바깥으로 밀어내는 기초 방어 창술.
그러나 경계를 넘어선 무인의 극한까지 연마한 기초 방어 창술은 그 자체로 절기가 되었으니 태풍을 압축한 듯한 회전력이 도진의 손마저 튕겨낸 것이다.
오른손이 란창에 손이 튕겨 나간 도진의 가슴팍이 열린다.
어느새 수축하며 더욱 거대한 힘을 품은 현무도의 창이 도진을 꿰뚫기 위하여 폭발하였다.
찰창(扎槍).
깎아내리자면 그저 내뻗을 뿐인, 초식조차 되지 못할 기초 창술.
그러나 허리부터 시작하여 창을 돌리는 손에 이르기까지, 현실마저 초월한 영역에 있는 무인의 온몸에 깃든 이치는 앞서와 마찬가지로 그 기초 창술을 절세신공의 영역에서 자아낸다.
소리마저 따라오지 못하는 모든 것을 꿰뚫는 필살의 일격.
도진은 그것을 피하는 대신 왼손으로 받아쳤다.
튕겨 나간 오른손에 남은 힘을 흘려내지 않고 어깨부터 시작하여 허리를 통하여 증폭, 회전하는 왼손에 담아 천마기와 함께 폭발시킨다.
효아(哮牙).
폭렬권(爆裂拳).
꽈아아아아아아앙-!!
귀를 찢는 폭음이 일대를 뒤흔들었다.
인간과 인간이 부딪쳐 만들어냈다고는 믿을 수 없는 힘의 격돌이었고 민초들은 물론이요 무인들마저 굳어 버렸다.
하지만 그 격돌의 장본인들은 아니었다.
꽈아아아아아앙-!!
"허억!"
"흐읍."
다시 한 번 폭음이 터지고 지켜보던 이들이 숨을 삼켰다.
그 폭음이 한 번 회수한 창과 주먹이 다시 한 번 격돌하며 터진 것이라는 걸 알아본 이는 극소수였다.
꽈아아아아앙-!!
꽈아아아아앙-!!
마치.
눈앞을 가득 채우고 하늘마저 가리는 태산과 태산이 부딪치는 걸 보는 것만 같았다.
보는 것만으로도 감히 감당할 수 없는 현상에 저도 모르게 압도되어 정신이 무너질 것 같다.
창마 현무도와 소천마 김도진의 격돌은 그런 것이었다.
한 수 한 수가 숨이 막힐 듯한 전력을 다한 일격이었다.
한데 그런 전력을 다한 일격이 호흡을 고를 틈조차 주지 않고, 보는 것조차 허락지 않는 초고속의 영역에서 끝없이 이어진다.
이런 것이 가능하다는 걸 오늘 처음 알았고 그야말로 화경이 '현실을 넘어선 비현실의 영역'이라는 걸 새삼 깨닫는다.
허나, 도진과 현무도의 대결은 그저 단순히 화경이기에 가능한 것이 아니었다.
"……."
한계다.
서로가 알았다.
이미 호흡은 매말랐고 육체도 비명을 내지른다.
물리적인 한계에 이제 서로가 거리를 벌리며 한 번은 호흡을 골라야 할 순간이다.
하지만.
꾸웅-!
도진은 한계를 넘어선 한 걸음을 내딛었고 그것은 현무도 또한 마찬가지였다.
물러섰다면.
물러선 쪽이 패배하였을 바로 그 순간에 둘 다 한계를 넘어선 한 걸음을 내딛은 것이다.
그리고 격돌한다.
꽈아아아아앙-!!
한계를 넘어서 쥐어짜낸 일격이었음에도 전혀 위력이 쇠하지 않았다.
그제서야 두 사람 다 물러나 찰나의 한 호흡을 정돈한다.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도저히 버틸 수 없는 순간까지 호흡을 참고 온몸을 쥐어짜내야만 하니까.
거기서 또 한 걸음을 더 나아가야만이 패배하지 않을 수 있는 대결이었다.
하지만 도진은 웃었다. 그리고.
"……."
세월에 깎여 나간 무인인 현무도 또한, 지극히 옅게나마 미소를 보였다.
다시 한 번 창이 쏘아진다.
이번에도 걸음을 내딛은 순간 이미 창은 이마에 닿을 듯한 곳에 도달해 있었다.
기기묘묘한 초식의 공능이 아니다.
그저, 그것이 가능할 만큼 극한의 속도를 낼 수 있도록 평생 고련한 것이다.
꽈앙-!
창의 끝을 도진이 후려친다.
기다란 창의 끝점을 거대한 힘으로 후려쳤으니 흔들려야만 하는데.
뿌득-!
현무도의 평생에 걸쳐 짜올린 육체가 그 흔들림을 허락지 않았다.
후웅-!
오히려 그 힘을 고스란히 담아 창대 끝이 도진의 갈비뼈를 노리고 쇄도한다.
꽈아아아앙-!!
팔꿈치로 창대를 내리쳐 그 공격을 막아낸 순간 폭음이 터지고 땅에 처박혔어야 할 창은 어느새 회수되어 수축한 육체의 명령에 따라 다시 폭발하듯 쏘아졌다.
다시 한 번, 한 호흡으로 이루어진 찰나의 세계에서 전력과 전력이 끊임없이 격돌한다.
그 격돌을 통해 도진은 알 수 있었다.
이 늙은 무인이 어떤 사람인지.
꽈아아아아앙-!!
이 무인은 신마파산공(身磨破山功)으로 경계를 넘어선 사람이다.
말 그대로 육체를 갈고닦아 산을 부술 수 있는 영역에 이른 무인.
그리고 그 영역에 이르렀음에도 여전히 한계를 넘기 위하여 매일 스스로를 채찍질하는 사람이다.
안주해 버리고 스스로와 타협하여 이내 나태해져 버린 육주굉과는 질적으로 다른 무인인 것이다.
그 어떤 일이 있어도 결코, 스스로와 타협하지 않는다.
스스로를 이기기 위하여 온몸이 비명을 내지르고 눈앞이 아득해져도.
꽈아아아앙-!!
기어코 한 걸음 더 내딛고 마는 것이다.
그 한 걸음 한 걸음이 쌓여 이루어진 육체는 그렇기에 도진의 '한 걸음'에 뒤쳐지지 않는다.
꽈아앙-!
한계에 달한 순간 한 번 더 내딛는 도진의 걸음과 한 수는 그 영역에 이르지 못한, 진짜가 아닌 자들은 결코 도달하지 못할 격차를 만들어낸다.
육주굉이 '똑같은 화경'임에도 허무하게 무너지게 만들었던 그 격차.
꽈아아아앙-!
현무도는 그 격차를 따라잡고 마주 창을 내뻗음으로써 도진과의 경합을 계속해내고 있는 것이다.
그는 화려한 초식을 구사하지 않는다.
다만 그저 평생을 고련한 창술에 그럼으로써 얻을 수 있었던 이치를 담아낼 뿐.
그래서 강력하고 올곧으며.
꽈아아아아아앙-!!
결코 부서지지 않는다.
도진은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현무도와의 대결.
단순하게 보면 도진 쪽에게만 일방적으로 유리한 상황 같다.
전쟁을 하여 서로가 같은 손해를 보아도 도진 쪽이 훨씬 큰 피해를 입은 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교나라에서도 이름 높은 현무도가, 도진과 1:1 대결을 자청하였으니 일방적으로 유리한 상황 아니겠는가 말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도진은 단순한 개인이 아니라 천마신교 그 자체.
그러니 반대로 현무도가 도진을 이긴다면 그것만으로 '반란군'을 뿌리째 뒤흔들고 무너뜨릴 수 있는 지극히 위험한 대결이기도 한 것이다.
특히나 그것이 교나라에서도 명망 높은 현무도라면 더더욱 치명적이었으니 더 이상 민초들의 지지조차 얻지 못하게 된다.
그런 기대를 교나라가 할 수 있을 만큼, 현무도는 대단한 무인이었다.
꽈아아아앙-!
다시 한 번 서로가 거리를 벌린다.
도진은 미소지었다.
"당신은, 존경할 만한 무인이네요."
"……."
현무도는 대답하지 않았다.
사사로이 인연을 만들지 않겠다는 의지가 느껴진다.
하지만, 도진의 신안이 그 의지의 치명적인 틈을 이미 보고 있었다.
두웅-!
"……!"
현무도가 두 눈을 부릅떴다.
세계가 한 번 크게 흔들리고.
초살(初煞).
다음 순간 세계가 그를 꿰뚫기 위하여 쏘아졌다.
'막을.'
두웅-!
폭음은 없었다.
그저 도진의 주먹에서 시작한 경력이 현무도를 꿰뚫었을 뿐.
털퍽!
현무도가 차가운 대지에 무너졌다.
"자, 장구우우우우우우운!!"
그리고 그를 보좌하던 자들이 절규하듯 외치고서는.
"우오오오오오오!!"
스물일곱의 무인들이 창을 들고 도진에게 덤벼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