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5화
교나라는 세계가 멸망으로 치닫는 중에도 자신의 안위만을 챙기던 썩어 빠진 부패한 황족을 처단하기 위해 불같이 일어난 '천마신교'가 그 목표를 완수하고 새로이 건국한 나라였다.
사실상 나라 전체가 천마신교라 하여도 과언이 아닌 국가.
허나 그 안에 사는 모든 이가 신실한 믿음을 가진 교도는 아니었으니 오히려 민중 봉기에 참여하지 않았던 이들이 더 많았고 봉기에 함께 하였다고 해서 모두가 교도인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저 세상의 변화를 위하여 천마신교를 믿지 않지만 자신의 힘을 보탠 자들도 얼마든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흩어져 모이지 못하였으니 목소리를 내지 못하였고 세상을 바꿀 '힘'으로 성립할 수 없었다.
더욱.
세상의 멸망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었기에.
-신세계로 갈 것이다. 이를 위해 공헌한 자들만이 함께 갈 수 있을 것이니.
멸망하는 세상을 떠나 새로운 세상으로 가기 위해선 그럴 자격을 증명해야 했고 교나라가 만든 시스템의 일부가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상상도 하지 못했던 문물을 접하게 되었고 그런 것들이 일상에 녹아든 세계가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 세상으로 가는 것 이외에 미래를 보장받을 수단은 없었고 개인은 결국, '나라'를 위하여 헌신하는 것 이외에 선택지가 없었다.
그래서 민초들은 헌신하였다.
나라에서 요구하는 것들을 수행하였고 그럼으로써 미래를 보장받기를 원하였다.
…그런데 보장받아야 할 미래가, 멸망보다 더 빠르게 덮친 병마(病魔)로 인하여 불투명해졌으니 '원인불명'의 병이 민초들 사이에 돌기 시작한 것이다.
전염병은 아니었다.
하지만 모두가 비슷하게 몸이 쇠약해지고 감기와 두통 등 온갖 잔병치레에 시달렸으니 심하면 피를 토하고 쓰러져 앓다 목숨을 잃었다.
소문이 퍼졌다.
이세계의 문물로 인해 자연지기가 오염되었고 인간 또한 거기에 영향을 받아 쇠약해지는 것이라고.
민초들은 목소리를 내었으나 교나라는 혹세무민하는 유언비어의 확산을 엄중히 다스리겠다며 엄포를 놓았다. 그리고.
-신세계로 가면 지금 앓고 있는 병을 모두 고칠 수 있다.
그리 말하며 더욱 헌신을 강요하였다.
…제아무리 아는 게 부족한, 정보를 통제당한 민초들이라 하여도 결코 어리석지 않았다.
그들은 이해하였다.
교나라 또한, 그들을 위한 나라가 아니라는 것을.
교나라와 대립하던 진실된 천마신교가 그들 사이로 은밀히, 그러나 넓게 퍼져 나갔고 계기만 있다면 언제라도 들불처럼 번져 교나라를 태울 기반이 갖춰졌다.
그리고 드디어, 불씨가 나타난 것이다.
너무나도 찬연히 타오르는 불씨가.
결코 끊을 수 없는 거대한 족쇄이자 결코 바꿀 수 없는 운명을 상징하였던 공장.
그 공장이 무너졌다는 소문이 퍼져 나갔다.
소천마라고 했다.
고금제일천마 위지혁의 진전을 이은, 진실된 천마신교의 인도자.
그리고 그를 따르는 세계를 삼킨 재앙에 휩쓸려 단절되었다 전해진 천마신교의 전설을 이은 후예들까지.
공장이 무너졌다는 소문보다 더욱 믿을 수 없는 소문에 민초들이 격동하였다.
공장을 무너뜨린 진실된 천마신교는 거침없이 진격하여 도시를 점령하였다.
도시의 점령 또한 채 반나절이 걸리지 않았으니 소천마가 신위를 발휘하여 도시를 감싼 두터운 성벽을 단 한 수에 무너뜨렸다는 것이다.
바로 그 도시에서, 민초들이 목숨을 건 결심을 하게 만든 결정적인 소문이 퍼졌다.
-소천마께서 병든 민초들을 아무런 조건없이 치료하여 주신다.
헌신한 노동자들이, 노동자의 아이들이 원인불명의 병에 걸려 고통받고 목숨마저 잃어갈 때 교나라는 그저 더 큰 헌신을 말할 뿐이었다.
하지만 소천마는, 진실된 천마신교의 교주는 치료를 베풀었다.
대가없이.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무심한 하늘이 아닌 인간의 힘으로 옳다 생각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하여 있는 것이 천마신교이니까요.
-당신들이 불행해지지 않는 것이, 바르게 산 이들이 보답받는 세상이 옳다고 생각하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한 것일 뿐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은 빚을 졌다 생각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리고 그저 그리 말하였다.
그것이 입에 발린 말이 아니었기에.
그저 자신의 진실된 바람을 담담히 말할 뿐이었기에.
민초들은 기꺼이 소천마의 뒤를 따르기를 바라였다.
* * * *
처음엔 수십도 되지 않았던 '천마신교'는 공장을 함락시킬 때 수백이 되었다.
독마전과 투마전의 무인들이 넘어와 합류하였고 공장 주변 마을에 무공을 감추고 흩어져 있던 이쪽 천마신교의 교도들 또한 합류함으로써.
그리고 마을에서 살 수도 없었던, 교에 모든 것을 투신한 교도들이 합류함으로써 이제 군대 단위의 위용을 갖춘 천마신교는 단숨에 커다란 도시마저 함락하여 그곳을 교나라 정벌을 위한 교두보로 삼았다.
그 과정에서 많은 피가 흐르지는 않았다.
공장을 무너뜨리고 그곳에서 얻은 소총 등으로 무장한 군대가 늘어섰고 도진이 홀로 두터운 성벽을 둘로 가른 순간 도시를 지키던 자들은 전의를 완전히 상실했다.
여기에 그들을 다독이고 하나로 모아야 할 도시의 관리자인 2등 교도가 싸우지도 않고 도주함으로써 제대로 된 전투조차 성립하지 않았던 것이다.
제아무리 철마 육주굉을 장대에 매달아 과시하였다 해도 한심한 이야기였다.
단전이 파괴당하였을 뿐 사지 멀쩡한 육주굉을 포함하여 민초의 고혈을 빨아먹던 자들을 도시 외곽에 매달아 죄값을 치르게 만들었다.
대부분의 민초들은 그런 천마신교의 조치를 칭송하였으니 교나라가 민심을 완전히 잃은 것을 극명히 보여주는 광경이었다.
'지금까지는 계획보다 더 잘 풀렸어.'
사실 첫 단추부터 어긋날 뻔 했다.
은폐하여 두었던 포털이 사실은 오래 전부터 감시당하고 있었으니까.
이 때문에 계획을 알고 있는 이쪽 세계의 천마신교 교도들과 합류하여 공장을 친다는 본래의 계획을 실행할 수 없었다.
이쪽 세계의 교도는 세 부류다.
하나는 교나라에 맞서 싸우는, 교나라 안에서 살아갈 수 없는 교도들.
이들은 무림인이면서 저항군이다.
또 하나는 교나라에서 살아가는 평범한 민초들.
이들은 싸울 힘을 가지지 못하였으나 천마신교를 믿는 이들이다.
그리고 마지막 한 부류가 민초로서 살아가지만 은밀히 무공을 익혀 천마신교에 여러 방면으로 힘이 돼 주는 이들이었다.
교나라를 치는 계획은 저항군으로 활동하고 있는 교도들과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수립하였는데 그들이 채 합류하기도 전에 포털이 들켜 급박하게 공장을 쳐야 했고 이 과정에서 계획에 대해 모르고 있던, 은밀히 무공을 익히고 주민으로 살아가던 이들의 힘을 빌리게 된 것이었다.
다행히 공장 공략은 대성공이었고 그 이후로도 일이 크게 잘 되어 여기까지 왔다.
어떻게 보면 교나라의 업보다.
그들의 지금 모습이 자신들의 손으로 멸망시켰던 명나라와 다를 바가 없는 꼴이었으니 말이다.
교나라를 바로잡기를 열망하던 이들이 적지 않았고 그들의 열망을 하나로 모으고 가장 앞에 서 줄 소천마, 도진이 나타났으니 이곳으로 모이는 이들의 기세가 심상치 않은 것이다.
여기에 원인불명의 병증이 사실은 민초들의 건강을 완전히 배제하였던 생산 환경에 있었다는 게 알려지고 퍼져 나가면서 민심이 아예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 버렸다.
"우으."
생각을 정리하던 도진이 고개를 들었다.
도진이 있는 가건물 안으로 첫눈을 연상케하는 새하얀 미녀가 들어서고 있었으니 다름 아닌 '야전 병원'을 구축할 수 있게 해 준 약리지였다.
세계에 명성을 떨치는 의선약가의 후계자이면서 후기지수 약봉으로 주목받았던 그녀는 어느새 한 사람의 어엿한 의사로 성장해 있었다.
도진이 웃으며 그녀를 반겨 주었다.
"고생했어, 리지야."
"아니에요. 고생은 선배가 더 하셨죠."
약리지는 도진을 통하여 아버지 의선(醫仙) 약지후와 함께 이 세상의 비밀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도진의 도움 요청을 받아들여 은밀히 수많은 약재를 가지고 이곳에서 구호 활동을 해 준 것이다.
증상이 깊은 환자를 당장 완치시키는 건 어렵더라도 도진의 약식 벌모세수를 받고 약리지의 치료와 현대의 의료 기술, 약품을 이용하여 시간을 들이면 증세를 완화하고 늦출 수 있다.
증상이 심하지 않다면 이곳에서 완치도 가능하고 말이다.
덕분에 많은 이들을 구할 수 있었고 희망이 끊기지 않게 할 수 있었으니.
"역시 백의선녀야. 마음까지 새하얗네."
"아잇. 부끄럽게."
"그래도 좋지?"
"…그렇죠."
"응, 역시 백의선녀야."
백의선녀(白醫仙女).
민초들이 약리지를 부르는 칭호다.
도진이 '기적'을 일으킨다면 약리지는 현실의 영역에서 민초들을 치료해 주었으니까.
그 헌신과 진심은 결코 흐려질 수 없으니 민초들 또한 진심으로 약리지를 대하였고 격무에도 약리지는 예쁘게 웃는 것이다.
"예전 생각나네요."
"그러게."
무형독, 이단 세력이 퍼뜨린 전염병인 무림 독감 때의 이야기다.
그때도 이렇게 꽤나 고생했었다.
그리고 고생한 만큼 커다란 보람도 느꼈고 명예도 따라왔다.
"우리 의사 후배 덕을 내가 참 많이 봐. 이래서 주변에 의료계에 종사하는 엘리트가 있어야 한다니까."
"아시면 앞으로 많이 잘해 주셔야 돼요."
"물론이지. 음, 안마라도 해 줄까?"
"네."
"헐. 이걸 거절을 안 하네."
"선배 안마가 요새도 꿈에서 어른거리는데 어떻게 거절해요. 한 번 알아 버리면 평생 못 잊는다구요."
"그랬구나. 내가 미안해."
"아시면 얼른 해 주세요."
"그래 그래."
* * * *
좋은 분위기가 제법 오래 이어졌다.
희망을 품고 아픈 몸을 이끌고 도시로 왔던 이들은 건강과 웃음을 되찾았고 희망을 이어 나갔다.
누구 한 명 불행을 말하는 이가 없었으니 마치 이곳이 낙원 같았다.
하지만, 모두가 알고 있었다.
이 시간이 이대로 계속될 수 없다는 것을.
그것은 지평선 너머로 보이는 세계의 경계, 붕괴하여 무너진 시공간처럼 명확했다.
-토벌군이 오고 있다.
'혹세무민하는 사이한 종교'를 처단하기 위해 교나라가 토벌군을 준비하고 있다는 공문이 돌았고 이내 출발하였다는 소식이 들려옴으로써 그것은 다가오는 현실이 되었다.
그리고, 아무도 도망가지 않았다.
도진은 이것을 스스로 원하여 하는 자신의 싸움이라 하였으나 그것이 이제 그들 모두의 싸움이 되었기 때문에.
무인은 무기를 쥐었고 무인이 아닌 자들은 방벽을 쌓고 함정을 팠다.
그렇게 모두의 힘으로 쌓아올린 방벽을 뒤로, 도진은 당당히 서서 오천의 군대 앞에 섰다.
다각.
저편에서는 색이 바래고 낡았으나 그렇기에 위엄마저 느껴지는 갑주로 무장한 늙은 무인이 말을 타고 앞으로 나서 도진과 마주하였다.
누구라도 알 수 있었다.
그가 이 오천의 토벌군을 지휘하는 장군이라는 것을.
장군이 나직이, 그러나 모든 이의 귀에 박히는 선명한 목소리로 말했다.
"스스로 소천마라 주장하는 자여. 나와 겨루어 그것을 증명할 수 있겠는가?"
창을 쥐고 오연히 내려다 보는 형형한 눈빛의 장군의 말에 도진은 스윽 웃었다. 그리고.
두웅-!
천마기가 고동처럼 세상에 퍼져 나간다.
"얼마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