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6화
용기와 객기는 분명하게 다른 개념이다.
그 차이를 몰라 무턱대고 나서는 걸 용기로 포장하는 경우가 있는데, 높은 확률로 그 결과는 파탄이다.
그러니까 적의 역량도 모르면서 내가 분명하게 이길 거라 믿고 나서는 건 객기이자 만용의 영역이니 분명히 경계해야만 한다.
그런 것들을 잘 알고 있는 천마신교였기에 이단 세력의 본거지를 쳐야한다는 말에 가장 먼저 그들의 전력에 관해 짚었다.
위서린과 장소유는 이단 세력과 오랜 세월을 대립하였기에 이 부분에 관해 상세히 설명할 수 있었다.
"나라가 멸망하고 남은 모든 것들을 이단이 흡수하였습니다."
천마신교의 이단들이 세계의 종말을 등에 업고 득세하여 이내 썩어 빠진 나라를 멸망시켰다.
스스로도 제어할 수 없는 분노에 의한 결과였다면 그 후 사분오열하고 지리멸렬하였겠지만 그들은 오히려 더욱 계획적으로 움직여 남은 세계 전체를 지배할 수 있는 체계를 갖추었다.
그저 단순한 사이비가 아니라 나라를 삼킬 역량을 갖춘 자들.
"이단 세력이 지배하는 나라 그 자체가 적이라 해야겠군요."
"그렇습니다."
멸망한 건 어디까지나 무능한 황족들뿐이고 나라는 오히려 하나로 결집하였으니 비록 그 방향에는 문제가 있어도 이전보다 더 강력한 나라가 된 꼴이다.
그것도 믿음이 굳건한 이들의 나라가.
만약 그 상태가 유지되었다면 이단 세력은 더 이상 '이단'조차 아니게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공고한 체제가 오래가지 못했으니 살아남은 황족이면서 동시에 고금제일천마의 후손이 있다는 게 알려졌다.
이단 세력의 나라는 흔들렸고 여기에 '진짜' 천마신교가 움직이면서 대립이 시작되었다.
"부끄럽게도, 저희는 이단 세력을 징치하지 못하였습니다."
고금제일천마의 후손이면서 동시에 살아남은 황족이었던 전서린의 어머니를 중심으로 한 세력은 그러나 나라를 차지한 이단 세력에 비하여 힘이 부족하였고 레지스탕스, 저항군의 입장에서 싸워야 했다.
"이단은 신교의 무공에 그치지 않고 혈교마저 흡수하여 술법사를 키웠습니다."
천마신교가 세상의 멸망에 휩쓸려 휘청이는 사이 이단이 득세하였고 놈들은 신교의 무공을 익혔을 뿐 아니라 혈교의 잔당마저 흡수하여 사이한 술법도 가리지 않고 발전시켜 나갔다.
도진이 만난 현랑전의 무인들과 우호법 홍괴산이 그 일부다.
그리고 그 정점에 있는 것이.
"위천마(僞天魔) 가소천."
천마를 참칭하는 거짓된 천마. 가소천이었다.
"지금의 이단 세력이 성립하고 있는 이유는 가소천입니다."
가소천.
그는 그저 이단의 수괴가 아니었으니 나라를 집어삼키고 그것을 운영할 수 있는 세력를 휘어잡은 걸물로 세간에서는 신(神)이라고까지 불리었다.
"신."
나지윤의 중얼거림에 위서린이 예, 하고 고개를 끄덕이고선 그가 행한 '이적'을 말했다.
역병이 돌았던 마을 앞에 그가 서서 일갈하니 마을이 저절로 불타 역병과 함께 사라졌다는 이야기.
감히 천마를 의심하여 그를 해하려 들었던 이들을 하늘에서 갑자기 내리친 번개가 심판한 이야기 등.
단순하지만 항거할 수 없는 힘을 보여주는, 이해하기 쉬운 이적들이다.
"가소천은 주기적으로 민초들의 앞에 나서 자신의 능력을 과시함으로써 신앙을 공고히 하였습니다."
위서린의 어머니로 인해 흔들린 세간의 믿음을 수습하고 강력한 힘과 존재감으로 이단 세력을 하나로 묶고 있는 존재. 그는.
"강력한 술법사이기도 하다는 거군요."
"그렇습니다."
가소천은 저쪽 세계에서 천마를 참칭할 수 있을 만큼의 경지라고 했다.
그러니까 경계를 넘어선 무인으로 이단 세력 내 가장 강한 무인이었다.
한데 방금의 이야기로 그에 그치지 않고 민초들을 현혹할 수 있을 만큼의 술법 또한 구사할 수 있는 강력한 술법사라는 걸 알게 되었다.
"까다로운 놈이네요."
이쪽 세계에 있어 술법은 생소한 개념이다.
무공은 일상이 되었지만 술법은 여전히 허구에 가까운 개념이었고 간단한 술법조차 차라리 마법이었다.
경계를 넘어선 무공 이상으로 술법은 위협적이다.
하지만 대처가 불가능하진 않았으니 그런 가소천을 상대해야 할 진실된 천마의 진전을 이은 도진이 술법을 상대할 수단을 익히고 있다는 거다.
도진은 술법사로서도 경지에 이른 사신 장호 또한 스승으로 모시고 있었으니까.
술법을 보는 눈과 그에 대항할 수 있는 수법을 익히고 있으니 무력하게 당할 일은 없다.
"가소천의 능력은 어느 정도인가요?"
나지윤이 필히 확인해야 하는 부분을 물었다.
장소유는 가소천을 실제로 마주한 적이 있었다.
몇 번 되지 않았고 손을 섞은 적도 없지만 그녀는 '암살자의 공부'를 한 사람.
암살자라면 필히 가져야 할 상대를 정확하게 가늠하는 공부를 하였다.
장소유는 잠시 눈을 감고 깊이 고민한 뒤에 말했다.
"우리가, 이길 수 있습니다."
* * * *
장소유는 말했다.
가소천의 무인으로서의 경지는 자신보다 높다고.
여기에 술법사로서의 능력은 미지수이니 정면대결로는 자신이 결코 이길 수 없을 거라 했다.
하지만, '암살자'로서 싸운다면 이야기가 달랐다.
암살자는 찰나의 순간 모든 것을 다해서 상대의 빈틈을 찌르고 그 한 수로 기필코 숨을 끊어 놓으니까.
다만 성공 확률이 채 일할(10%)도 되지 않았으니 저항군의 핵심인 그녀는 섣불리 목숨을 걸고 시도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제 상황이 달라졌다.
채 다 전수받지 못했던 사신공의 정수를 전수받아 진일보하였고 그녀와 함께 해 줄 사람이 있었으니까.
설령 상황이 좋지 않더라도 결코 지지 않을 것이라고.
장소유는 장담하였다.
그것이 그리 오래되지 않은 때의 일.
그리고 오늘.
장소유는 더 분명하게 확신하였다.
"도진 씨가, 분명히 승리할 것입니다."
가소천의 정확한 수준은 물론이요 도진의 깊이도 다 헤아리지 못한 장소유였다.
하지만 이것은 그런 수치적인 단계에서 논할 이야기가 아니다.
조금 더 근본적인 부분에서의 이야기.
스스로의 모든 것을 걸고 확신할 수 있는 영역에서의 이야기였고 도진은 그런 그녀의 확신에 미소지었다.
* * * *
이단 세력의 본거지를 치고 천마를 참칭하는 자를 꺾어 사태의 근본을 해결한다.
이야기는 확정되었고 총괄부를 중심으로 하여 계획을 짜는 나날이 이어졌다.
전쟁의 불씨는 천마신교를 중심으로 한 세력이 최대한 억누르고 있었으나 점차 확대되고 있는 가운데 계획 또한 점점 가시화되었고 커다란, 전쟁을 막기 위한 전쟁이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일상은 계속된다.
"언니이이이이!"
오랜만의 휴가에 낮부터 배부른 고양이와 같은 모습으로 솜이와 뒹굴던 유진이가 두 팔 벌려 환영하는 건 다름 아닌 소담이었다.
"안녕, 유진아. 호진이도."
"언니, 폭신폭신해요!"
"응, 샤워하고 왔으니까."
도진과의 특훈을 끝내고 샤워까지 마친 뒤 집에 들른 소담을 그녀를 지지하는 유진이가 격하게 반겨주는 광경이다.
"저녁 먹고 갈 거죠?"
"응. 그래도 되지?"
"언니는 언제나 대환영이에요!"
훈훈한 모습에 도진이 흐뭇하게 웃으며 짐을 들고 부엌으로 향했다.
아쉽게도 오늘은 부모님이 함께하지 못하고 유진이와 호진이, 소담과 함께 저녁을 먹어야 한다.
그런 오늘의 요리사는 다름 아닌 도진이었다.
"밥 해 줄 테니까 씻고 기다려."
"네에!"
"내가 도와줄게."
"괜찮아. 오늘은 앉아 있어."
"맞아요, 언니. 오빠가 손에 물 안 묻히게 해 준다잖아요."
"아, 응."
유진이의 말에 소담이 하얀 얼굴을 살짝 붉히며 자리에 앉았다.
철저하게 노린 발언이었고 소담의 딱 드러나는 반응에 유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해.'
이건 밀어붙이면 무조건 새언니가 된다는 믿음으로 여러가지 발칙한(?) 계획을 세우는 사이 저녁 식탁이 차려졌다.
흰 쌀밥에 소고깃국을 메인으로 하여 고기와 나물 반찬이 갖춰진 식단이다.
가정식의 느낌이지만 고기의 비중이 높은 데서 도진의 취향이 드러난다.
"잘 먹겠습니다!"
소담과 동생들은 도진이 차려준 저녁을 맛있게 잘 먹어 주었다.
처음엔 상당히 긴장했는데 이제는 제법 자신감이 붙은 도진이었다.
연신 수저를 움직이며 밥그릇을 비우는 모습에 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전생에선 챙겨주지 못했던, 해 주지 못했던 것들을 이제라도 해 줄 수 있어서 좋았다.
식사가 끝나고서는 소담이 사 온 디저트를 즐기며 담소를 나누었다.
그 시간에 감사하며 도진은 생각한다.
기필코, 이 시간이 계속되도록 하겠다고.
이단 세력을 징치하는 건 다르게 말하면 세상을 구하는 일이었다.
거창한 게 아니라 객관적으로 보아서.
그러니까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고 감당해야 할 것은 너무나 거대했다.
하지만 도진에게는 조금 다른 이야기다.
솔직히 말해 세상을 구하기 위해 하려는 게 아니다.
조금 더 좁은 범위 내의 이야기.
동생들이 꿈을 이룰 수 있도록 해 주고 싶었다.
아버지가, 어머니가 하시고 싶은 것들을 할 수 있도록 해 드리고 싶었다.
지금 곁에 있는 소담은 물론이요 자신의 울타리 안에 있는 이들이 웃을 수 있도록 해 주고 싶었다.
도진은 그 바람을 이루고 싶었고 그를 위해 해야 할 일이 조금, 스케일이 클 뿐인 이야기다.
새로운 삶을 사는 도진에게는 그것이 조금 힘들다고 해도 얼마든지 감당하고 해낼 수 있었기에.
해낼 것이다가 아니라 해낸다.
답은 정해져 있었다.
"도진아."
"응, 소담아."
밤.
집으로 데려다 주는 길에 소담이 도진을 불렀다.
눈을 맞추고 대답하는 도진에게 소담이 말했다.
"계속, 옆에 있어도 되지?"
도진은 웃으며 대답했다.
이쪽도 답은 정해져 있었다.
"응. 얼마든지."
* * * *
전쟁의 불안이 고조되는 가운데 느리게 시간은 흘러갔다.
이쪽이 고정적으로 쓸 수 있는 포털이 없었던 탓에 정보를 주고받기가 어려워 일의 진척이 더뎠으나 그 어려움을 딛고 계획이 구체화되었다.
이제 시기를 맞추어 저쪽으로 넘어가는 것으로 되돌릴 수 없는, 결판을 내야만 하는 싸움이 시작된다.
바로 그런 시기에.
[속보! 한유성 부회장, 러시아에서 모습 드러내!]
예상치 못했던 형태의 도발이 있었다.
[한유성 부회장. "한국과 천마신교가 결탁하여 나를 모함하였다."]
["위협을 느껴 은밀히 탈출하여 러시아에 보호를 요청했다." 한유성 부회장의 주장. 진실인가?]
다름 아닌 한국에서 모습을 감추었던 한유성이 러시아에서 모습을 드러내고 그런 주장을 펼친 것이다.
"저러려고 그 아까운 포털을 쓴 건가?"
"그러게 말이야."
도진이 하, 웃고선 말했고 나지윤도 어깨를 으쓱였다.
일전의 혐의로 금화가 무너지긴 했지만 모든 게 사라진 건 아니었다.
이단 세력이 뒤에서 수작을 부려 많은 부분이 러시아로 넘어갔지만 또 많은 부분은 한국에 남았고 여기저기에 인수돼 여전히 한국에서 기능하고 있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이단 세력의 사주를 받은 소수가 문제이지 죄없는 다수를 희생시켜선 안 될 일이니까.
한유성은 그것을 천마신교와 한국이 결탁하여 본사를 이전하는 금화를 고깝게 보고 다 가져가지 못하도록 잘게 찢어 삼켰다는 식으로 러시아에서 나타나 주장한 것이다.
얼토당토않은 소리였지만 그래도 세계적 기업인 금화의 부회장이 하는 소리라 반응이 제법 있었다.
요즘 시기에 편승하여 막 나가고 있는, 이단 세력이 잠식해 버린 러시아가 뒤를 받쳐주고 있으니 더더욱.
하지만 도진은 필요 최소한의 범위에서 대응할 뿐 적극적으로 상대해 주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이건 곁가지니까.
지금은 저런 '잔챙이'에 신경쓸 때가 아니었다.
"곧이지?"
"응."
도진의 곁에는 언뜻 휴대폰으로 보이는 기기가 놓여 있다.
첨단 기술이 집약된 그것에는 언뜻 전혀 어울리지 않는 노란 괴황지(槐黃紙)가 화면 위에 붙어 있었으니 킬 스위치(Kill switch).
이단 세력의 포털 시스템을 셧다운 시킬 수 있는 물건이었다.
그것을 쓸 때가, 코앞으로 다가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