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5화
붕괴는 오직 저쪽에서만 발생하는 현상이다.
그리고 그 붕괴 중 특수한 일부가 위상이 겹치는 이쪽 세상과 이어지는 포털로 '변이'한다.
그러니까 굳이 입구와 출구를 나누자면 저쪽 세계가 입구이고 이쪽 세계가 출구가 된다.
이단 세력은 수많은 시행착오와 연구, 그 과정에서의 희생을 밑거름으로 하여 이 포털을 상당한 수준으로 이해하고 이용할 수 있게 되었고 출구를 원하는 곳으로 지정할 수 있게 되면서 이쪽 세계에 포털의 존재를 완벽하게 감출 수 있었다.
여기에 포털을 넘어 이쪽 세계를 침략한 이단 세력의 존재를 암약하는 흑도인 '무형독'으로 포장하고 그 실체를 감출 수 있도록 해 준 것이 바로 홍괴산의 운해이몰진과 거기에서 파생된 여러 술법이었다.
포털이야 붕괴가 무조건 저쪽에서 발생한다는 절대적인 이점이 있었으나 무형독의 실체는 반대였다.
이쪽 세계를 잡아먹는다는 아득한 규모의 음모를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정보가 새는 부분이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물며 '과학'이 더욱 높은 차원으로 발달하면서 손안에 있는 작은 기기 하나로 공간의 한계를 넘어 통신할 수 있었고 찰나를 붙잡아 남길 수도 있는 시대가 되면서 그 위험은 더욱 커졌다.
이로 인해 이단 세력의 진체가 탄로나는 것을 막기 위하여 그들은 역량을 다하여 연구하였고 이내 홍괴산에 의해 통신은 물론이요 영상의 촬영마저 막는 술법이 탄생한 것이었다.
특히 그것이 안개의 형태인 게 주요했으니 안개는 현실의 영역에 있는 현상이지만 그 안에서 벌어지는 비현실의 영역에 있는 일을 철저하게 감춰주니까.
이를테면 자욱한 안개 속에서 피를 빨아먹는 뱀파이어를 만난다거나 늑대 인간 무리에게 습격당한다거나.
혹은 좀비를 만난다거나.
진법을 이용한 은폐 과정에서 시행착오가 몇 번 있었으나 다행히 소문의 영역에서 그쳤고 지금 시대에서 이 허무맹랑한 소리를 진지하게 믿어줄 이는 지극히 드물었다.
이것은 지금 세계의 정점에 있는 무인인 소천마라 해도 다르지 않았으니 평범한 이들은 오죽했겠는가.
그렇게 이단 세력은 무형독이란 '간판'에 숨어 진체를 감추고 거기에 닿은 이들을 안개 속에서 제거할 수 있었다.
그 안개를, 안개 속의 진실을 증명할 수 있는 증거를 도진은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세이전이 만든 특수한 초소형 카메라를 무려 완벽한 호신강기를 둘러 진법의 영향에서 보호하며 내부를 촬영한 것이다.
그것도 그들에게 들키지 않은 채로.
그렇게 얻은 소중한 증거를 도진은 은밀히 미 국방부에 넘겨 검증하면서 자신의 이야기를 처음으로 믿게 만들었다.
동시에 만약 이 이야기가 새어 나가면 그 안에 있던 인물들 중 이단 세력과 연관된 이들이 있을 테니 추적하여 제거하려는 계획도 세웠다.
한데 놀랍게도, 아무래도 그 안에 이단 세력의 독이 스며든 이가 없었던지 이번의 수작을 걸어왔다.
그들이 만든 술법인 만큼 그들은 우회 방법이 있었을 것이다.
그 방법으로 소천마를 음해하는 영상을 퍼뜨렸고 이를 통하여 한국을 중심으로 하여 여론을 흔들려 했다.
하지만 도진은 그것을 역이용하여 오히려 이단 세력을 크게 한 방 먹였고 아예 '믿기 힘든 이야기'까지 사람들이 믿을 수 있도록 만들었다.
강시. 주술사. 진법 등.
이번 일로 사람들은 마법이라 해야 할 정도로 발전한 기괴한 술법들이 거짓이 아니며 이단 세력이, 무형독이 무기로 삼고 있다는 걸 알고 또 인정하게 됐다.
이 정도라면.
'포털'의 존재마저 인정할 수 있을 거다.
포털을 공개하고 사실은 무형독이라는 흑도가 아닌, 완전히 다른 세계의 침략자들이 이 세계를 노리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
천마신교만이 아닌 지구 전체가 그들의 야욕을 분쇄하게 만들자.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오히려 이게 맞는 방법이다.
하지만, 아니다.
여기에마저 이단 세력은 치명적인 함정을 파 놓은 것이었다.
-포털이란 것이 있어 다른 세계를 오갈 수 있는데 이것을 이용하여 저쪽 세계가 이 세계를 집어삼키려 하고 있다.
이 정보가 알려지는 순간, 진실로 전쟁의 스위치가 눌린다.
소위 말하는 선진국이 되지 못한 많은 국가가 포털을 이용하여 저쪽 세계로 쳐들어간다.
여기에 끌려가듯 중진국이 전쟁에 동참하고 이내 미국 등의 선진국마저 어쩔 수 없이 전쟁의 불길에 휩쓸리게 된다.
그리고 전쟁은 이내 이쪽 세계와 저쪽 세계의 대립에서 변질하여 그저 사람과 사람, 집단과 집단 사이의 대규모 살인이 된다.
이단 세력이 그렇게 되도록 수십 년에 걸쳐 시스템을 만들어 놓았다.
포털의 존재가 알려지는 건 이단 세력에게 있어 목에 칼이 들어온 것과 같다.
그들이 철저하게 숨어서 상대를 농락하는 건 압도적인 우위에 있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정반대로 '정면 대결'에서는 절대로 이쪽 세계를 이길 수 없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포털의 존재와 함께 저쪽 세계는 결코 알려져서는 안 될 비밀이었고 만약 그것이 밝혀진다면, 차라리 목을 찔리기 전에 가지고 있던 폭탄을 터뜨려 양패구상을 노리려고 하는 거다.
그리고 거기서 더욱 상황을 악화시킨 뒤 끈질기게 회복하면서 이쪽 세계를 잠식, '차악(次惡)'을 취한다.
…아무것도 모른 채 보냈던 수십 년은 이단 세력이 이런 비장의 수단마저 준비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
세계 곳곳에 사람과 자원을 투입하여 구축해 둔 시스템이었고 당장 어떻게 할 방법이 천마신교와 황실에는 없었다.
오랜 시간을 들인다면 말단부터 조금씩, 스며든 독을 해독할 수 있겠지만 지금 시간은 이단 세력의 편이었고 그 전에 일이 끝나 버린다.
그런 이유로 도진은 한유성이 어떻게 사라지게 되었는지 알았음에도 사실을 알리지 못한 것이었다.
결국 돌고 돌아, 해결책은 이미 결론이 난 것으로 귀결한다.
모든 것의 시작이자 전부인 이단 세력을 멸함으로써.
그 야욕이 피기 전에 종지부를 찍는다.
* * * *
사아아아…….
'죽음'이 퍼진다.
장소유를 중심으로 하여 퍼지는 그것은 이치의 영역에 이른 침기다.
장호가 불행한 사고로 손녀에게 다 전하지 못하였던, 그러나 도진에 의해 마침내 인연이 이어져 전해진 사신공의 정수.
도진은 그 이치에 침기로 대항하는 대신.
두우웅-!
천마기를 일으켜 자신의 의지로 세상을 물들였다.
천마군림(天魔君臨).
경계를 넘어야 비로소 가능해지는, 나(我)를 넘어 자연과 소통하는 천마신공의 첫 걸음.
이로써 도진은 인간의 육신에 그치지 않고 대해와 같은 자연지기를 다룰 수 있게 된다.
사아아…….
우오오오오-!
선고된 죽음이 도진의 영역을 침식하려 들고 흉포한 천마기가 대항하여 몰아친다.
이대로 '힘싸움'으로 몰고갈 수도 있었으나 도진은 그러지 않았다.
더 나아간다.
더 높은 영역으로. 더 높은 이치를 자아낸다.
나에서 그치지 않고 자연과 소통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 본질을 궁구하였다.
그저 더 많은 힘을 쓰는 것? 아니다.
그것은 나를 확장하는 것이며 근원에 더 가까이 이르는 것이다.
어째서 '나'는 '자연'과 일체화할 수 있는가.
그것은 내가 자연에서 비롯하였기 때문이다.
같은 근원인 것이다.
그러니 내가 자연과 소통하며 그것을 행사하는 건 특별하지 않다.
여기까지가 지금.
천마신공의 6성이다.
그리고 그 너머는.
'나는 자연을 넘어, 우주와 같다.'
더 깊은 본질, 이치에 닿는다.
인간은 자연에서 비롯하였고 자연은 우주에서 비롯하였다.
그러므로 나는, 우주와 같다.
더 깊고 더 넓은 이치에 침잠한다.
피상적인 힘의 크기를 논함이 아니다.
'나'를 자연을 넘어 우주로, 무한한 영역과 무한한 이치로 확장한다.
그것을 논할 수 있는 단계가.
'천마신공의 7성.'
두웅-
울림이 깊게 퍼져 나간다.
흉포했던 천마기에 아득한 이치가 담기고 그 파장은 장소유가 선고하였던 죽음을 그 이상의 이치로 흩어낸다.
'특별한 일'은 아니다.
그저 무한한 이치가 담긴 우주를 인지한 도진이 아주 조금, 그 이치를 흉내내었을 뿐이다.
"아아……."
장소유의 붉은 입술이 살짝 열리고 감탄이 새어 나왔다.
그녀 또한 새로운 깨달음으로 큰 한 걸음을 내딛었거늘.
할아버지의 진전을 이은, 그녀의 세계를 함께 하여 주는 사람은 아득한 저 너머를 걷고 있었다.
경계를 넘어선 곳의 세계는 결코 아름답지 않다.
오히려 잔혹하고 또 잔혹하여서 인간을 꺾이게 만든다.
무한하기에 그 무한한 무게로 사람을 짓누르고 무한한 갈래로 사람이 채 한 걸음을 떼는 것조차 두렵게 한다.
한 발 내딛는 순간 다시는 자신의 위치를 확정할 수 없게 될 것만 같으니까.
때문에 이 세계에서는 한 걸음조차 하늘과 땅만큼이나 차이가 날진대.
이 사람과의 차이는 마치 땅을 딛고 선 인간과 밤하늘에 빛나는 별만큼이나 멀 것이다.
하지만 그것에 질투하거나 절망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환히 웃는다.
그 별은 너무나 밝아서, 언제 어느 때고 마주할 수 있으며 자신을 비춰 주니까.
"수고하셨어요."
"네."
짧지만 모든 것을 한순간에 쏟아낸 비무가 끝나고 나란히 앉았다.
스윽-
그리고 그 어깨에 머리를 기대었다.
단 한 번.
이단 세력의 천마를 참칭하였던 자와 마주하였을 때만큼이나 긴장한 상태로 할아버지와 수련했던 때를 떠올리며, 용기를 내어서 머리를 기대었던 몇 주 전의 자신을 이때마다 칭찬한다.
"…또, 깨달음을 얻으셨군요."
어깨를 기댄 사람이 스윽, 멋있게 웃는 게 느껴진다.
경계를 넘어서며 얻은 감각이 이때마다 고맙다.
눈으로 확인하지 않아도 선명하게 보는 것처럼 느낄 수 있으니까.
"스승님들 덕분에 이치를 곱씹는 수련을 해 왔거든요."
"또 하나의 경계를 앞두고 계신 건가요?"
"아하하. 아직은 머네요. 너무나 큰 이치라서, 이정표 삼아 나아갈 순 있지만 닿기 위해서는 조금 더 많이 걸어야 할 거 같아요."
자연에서 우주로 나를 확장한다.
도가도 비상도(道可道非常道)라 하여 말로 표현하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도가 아니지만 굳이 말로 하자면, 무협 소설식으로 말하자면 화경(化境)에서 현경(玄境)으로 나아가는 길이다.
내가 넓어지는 만큼, 그리고 깊어지는 만큼 더 크고 깊은 이치를 행사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도진은 아직 우주에 이르지 못했다.
그저 그곳으로 이어지는 수많은 길 중 하나의 이정표를 보았고 나아가는 길에 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꾸준히 도진의 세계는 확장하여 천마신공의 6성을 넘어 7성에 이른 것이다.
이 7성마저 넘어 8성에 이르는 순간.
도전은 소천마가 아닌 천마(天魔)라 스스로를 칭할 자격을 얻게 된다.
솔직히 도진의 감각으로도 아득했다.
인간이 태어난 행성을 벗어나 오롯이 자신의 힘으로 우주를 내딛게 된다면 과연 이러할까.
경계를 넘어선 곳에서 한 번 더 경계를 넘어서는 건 그와 같은 감각이었다.
무한한 공간에 진입하여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먼지조차 과분한 존재로 미아가 될 것만 같은 감각.
허나 도진은 그 감각에 잡아먹히지 않았다.
그런 감각을 느끼는 것부터가 우주라는 공간을 자각하고 있기 때문이며 도진은 그 우주를 계속 나아가 이내 오래도록 빛나는 별의 자리(星座)에 이를 만큼의 굳건한 심지를 가지고 있기에.
그 미래에 이를 때까지 도진은 멈추지 않을 것이었다.
다만 그러기 위해 우선은 당장 눈앞에 있는 거대한 장애물을 넘어야 했으니 도진이 어깨에 기댄 아름다운 이에게 물었다.
"소유 씨."
"네, 도진 씨."
"이단 세력의 수괴, 천마를 참칭하는 그 사람을 그쪽 세계에서는 신으로 숭배한다고 하셨죠."
"네. 진심으로 그렇게 믿는 민초들이 적지 않습니다."
저쪽 세계에서 신으로 숭배되는 자.
"그 사람과 지금의 저를 비교하면, 어떤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