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0화
"참으로, 광오하구나."
다시 한 번 마음을 다스린 홍괴산이 말했다.
정말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결코 흔들리지 않는 저 눈동자.
광오하기 짝이 없어 자신을 하찮게 보는 저 눈동자.
무엇보다 자신의 것이어야 하는 장소유를 따듯하게 보는 눈동자가!
그것을 더 두고 볼 수 없어 준비한 것들을 풀어놓기 시작했다.
"그르륵."
이지를 상실하고 짐승의 소리를 내는 것들이 안개를 뚫고 모습을 드러냈다.
하나, 둘.
이윽고 수십이나 되는 것들이 도진과 장소유의 주변을 둘러쌌으니 다름 아닌 실패작들이었다.
거듭된 개조로 명백히 인간의 수준을 넘어선 비대한 근육을 가진 그것들은 차라리 맹수라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인간으로서의 지능을 가지지 못했으니 어디까지나 평범한 맹수에 불과했고 실패작일 따름이다.
그래도 괜찮다.
캬아아아아-!!
홍괴산의 명령에 따라 도진과 장소유를 덮치는 실패작들은 지능이 없다 하나 웬만한 무인을 압도하는 피지컬을 가지고 있으며.
스각-!
팔이 잘려도.
스각!
다리가 잘려도 결코 고통을 느끼지 않고 공포마저 느끼지 않으니 끈질기게 들러붙어 그 체력을 갉아먹는 것이다.
소천마 김도진.
감히 천마를 참칭하는 놈은 인정하기 싫지만 분명히 괴물이었다.
지금 '천마신교'에 가장 위협이 되는 대적자.
그러나, 그렇다 해도 인간이다.
인간인 이상 그 힘에는 한계가 있는 법.
100의 힘을 가졌다 해도 그것은 불변하는 것이 아니니 사용할수록 깎여나가는 것이 진리다.
이는 장소유 또한 다르지 않다.
'장소유.'
나를 광적인 사랑에 빠지게 만든 그녀는 과연 아름답고 또 예술적이라고 홍괴산은 새삼 감탄하였다.
사신의 후예.
처음에는 그저 사신공을 얻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였는데 어느새 마음을 완전히 빼앗기고 말았다.
사신공에는 무조건 장소유가 함께여야만 한다.
나보다는 장소유가 사신공을 구사하도록 하고 싶다.
중요한 것은 장소유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완벽하게 그의 것이었으면 한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런 생각과 집착이 홍괴산에게 본래 특기가 아니었던 강시술을 포함한 육체와 정신을 조종하는 술법을 파고들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 준비는 이제 다 갖추어졌다.
오늘 이 자리에서 기필코, 손에 넣을 것이다.
스각-!
군더더기없이 깔끔한 만큼 소름이 돋게 만드는 절단음.
장소유는 칼로, 도진은 무려 손날로 실패작들을 절단하고 있었다.
강시와 달리 이들은 아직 '생명'이었기에 심장을 꿰뚫는 등 손쉽게 무력화할 수단은 얼마든지 있다.
"그르르르륵!"
하지만 괜찮다.
그가 지금 깃들어 있는 이 '쓸만한 것'을 만들기 위하여 거쳐 온 실험품이 아직 이곳에 수백은 배회하고 있다.
그리고.
쿠웅-!
"……!"
사신공을 무력화하기 위해 만들어낸 그의 역작, 침기진(沈器陣)이 둘을 잠식한다.
실패작을 베어내던 장소유의 움직임이 일순 멎는다.
거침이 없던 도진의 움직임에도 파탄이 보였다.
"대비를 하지 않았느냐? 아니면 하지 못한 것이냐."
홍괴산이 이죽였다.
장소유를 손에 넣기 위해 집요했던 홍괴산이었으나 사신공을 무력화하는 진은 크루즈에서 처음 보여 주었다.
당연히, 대비를 할 여유는 없었을 것이다.
하물며 이곳에 자신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을 거라고 그는 짐작했다.
그러나 방심하지 않고 그는 즉시 움직였다.
훅-
한동군의 것이었던 육체가 돌연 사라졌다.
아니. 사라진 것이 아니다.
시선(視線)을 이루던 두 점 중 하나였던 그가, 선에서 벗어난 것이었다.
떠엉-!
그 점을 다시 이으며 도진이 장소유에게 접근하려던 홍괴산을 쳐냈다.
"크흐흐."
힘에서 밀려 물러난 홍괴산은 그러나 킬킬 웃었다.
도진과 장소유에게서 감정의 동요를 읽었기 때문이다.
홍괴산이 사용한 것은 무흔잠영이었다.
그래. 결코 부정할 수 없는, 점과 점을 이어 선을 긋는 것에서부터 시작하는 분명한 무흔잠영.
도진과 장소유 이외엔 결코 구사해서는 안 될 무공.
그것을 놈이 구사할 수 있었던 이유를 도진은 대번에 짐작할 수 있었다.
'지식을 훔쳐낸 것은 소유 씨만이 아니었던 거야.'
장소유는 그 집요했던 놈의 함정에 빠져 영혼을 제압당할 뻔 했던 적이 있다고 했었다.
다행히 그 술법을 격퇴할 수 있었으나 그 과정에서 장소유가 그러했듯 놈 또한 은밀히 그녀의 지식을 일부 훔쳤고 불행히도 그것이, 사신공이었던 것이다.
사신공의 침기를 상쇄한다는 말도 안 되는 술진이 탄생할 수 있었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스으으…….
놈에게서 침기를 느낀다.
지극히 변질되어 역겨운 그것은, 그렇게 성질이 달라졌기에 이 술진 안에서도 기능할 수 있었다.
두우웅-!
침묵하는 장소유를 지키기 위하여 도진이 천마기를 일으켰다.
덤벼드는 자들, 그리고 무흔잠영을 구사하여 '선의 바깥'에서 집요하게 장소유를 노리는 홍괴산을 도진은 묵묵히 막아냈다.
"오만한 자야. 너는 내가 있다는 걸 안 그 순간 도망쳤어야 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으니 너는, 대가를 치러야 함이다."
즈즈즛-!
침기진이 요동친다.
"……."
그리고 도진의 기세 또한 일렁였으니 도진의 안에 있던 침기가 침기진의 기운에 통제를 벗어나 제멋대로 날뛰려 했기 때문이다.
사신공이, 침기가 무엇인지 알게 된 이상 홍괴산은 연구를 통하여 그것을 배우고 또 응용할 수 있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부서뜨리는 건 그 외의 어떤 것보다 쉬운 일이다.
"하하하하하!!"
홍괴산이 희열에 젖어 굉소하였다.
놈이 자신을 보고도 도망치지 않은 건 아마도, 침기가 무력화되어도 천마신공으로 만회할 수 있다고 계산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이 오만이요 패인이다!
제멋대로 날뛰는 진기는 곧 주화입마로 이어진다.
장소유는 폐인이 될 것이고 오만한 이단자 또한 최소 큰 내상을 입게 될 터.
이단자는 죽여 실험 재료로 쓸 것이고 장소유는 살려서 그의 것으로 만들 것이다.
조금 부서져도 괜찮다. 얼마든지 고쳐 쓸 수 있으니까.
오히려 부서진 것을 자신의 취향대로 다시 만들 수 있다.
비원의 달성을 코앞에 두었다 생각한 그는 그런 생각들로 찰나 눈이 멀었고.
"……!"
서걱!
그야말로 사신이 휘두른 것만 같은 갑작스런 예기에 경악하여 크게 물러났다.
그가 들고 있던 검이 손잡이만 남기고 잘려 나갔으며 가슴팍 또한 제법 깊게 베였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경악스러운 건, 베인 부위가 실시간으로 괴사하여 피 한 방울조차 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침기?'
홍괴산은 이런 현상을 만드는 기운을 알고 있었다.
너무나 잘 알고 있었으니 사신공의 기운, 침기(沈氣)였다.
그래서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떻, 게."
눈앞에 장소유가 서 있었다.
침기를 마치 사신이 두르는 죽음의 기운처럼 흩뿌리면서.
장소유를 잠식해야 할 침기진이 역으로 그녀에게 잠식되어 마치 괴사하듯 붕괴하였다.
그리고 그녀와 같은 기운을 두른 도진이 말했다.
"안개를 보는 순간부터 알았지. 니가 있을 거라는 걸."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안개, 강시, 독.
홍괴산이 이것들을 즐겨 다룬다는 걸 장소유에게 들었으니 운해이몰진과 강시들을 본 순간 당연히 홍괴산을 떠올릴 수 있었다.
홍괴산이 있다면 자연스레, 결코 잊을 수 없는 사신공의 침기를 무력화하는 진법은 당연하고 그 이상마저도 대비하여야만 했다.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만용을 부리지 않고 피하여야 한다.
그것을 피하지 않았다는 건.
"이 진법은 더 이상 통하지 않아."
푸스스…….
홍괴산이 실험체에게 새겼던, 사신공을 모욕하는 이름을 가진 진법을 구성하는 술식들이 침기에 잠식당하여 재가 돼 흩어졌다.
믿을 수 없는 일에 홍괴산이 중얼거린다.
"어, 어떻게."
"할아버지의 무공을, 감히 너 따위가 희롱할 수는 없다는 이야기야."
싸늘한 목소리와 함께 장소유는 다시 한 번 침기가 깃든 검을 휘둘렀다.
"크흐윽!"
홍괴산은 침기를 두른 검을 감히 맞상대하지 못하고 물러나기 급급했다.
사신공에 관한 지식을 훔쳤기에, 알고 있기에 본능의 단계에서 이해할 수 있었다.
'저것'은 감히 맞상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밀려드는 홍괴산에 의한 희생자들을 편히 해 주며 도진은 뒤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스승님의 손녀분이시네요.
무흔잠영에서 시작하여 이내 부지역에 이르듯, 침기 또한 단계가 있다.
그저 단순히 특이한 내공이 아니다.
불치병을 고치기 위하여 연구를 거듭하고 이내 그것을 극복하게 만든 기운은 장호에 의해 이치에 닿아 생(生)과 사(死)마저도 담게 되었다.
그러니까 상처를 낫게 하고 상대의 장기마저도 기능을 멎게 만드는 것을 넘어 본질에 이른 침기는, 모든 것을 그 이름대로 잠식할 수도 있다.
침기를 상쇄하고 이내 오염까지 시키는 술진이라고?
가소(可笑).
도진을 통하여 장호가 다 전하지 못했던 깨달음을 얻어 침기의 본질에 이른 장소유에게는 더 이상 효용을 발휘하지 못한다.
그녀와 깨달음을 함께 한 도진 또한 마찬가지다.
하지만 굳이 나서서 함께 홍괴산을 치지는 않는다.
다 전하지 못하였던 할아버지의 깨달음을 수습하고 구사하기 시작한 장소유만으로도 충분하였으니까.
스으으-
"크으윽! 이런, 이런 게 더 있었다니!!"
홍괴산은 모른다. 사신공의 정수를. 본질을.
그저 단순히 '보이지 않아서' 사신이 사신이었겠는가.
아니다.
결코 붙잡을 수 없는 사신은 또한 결코 거부할 수 없는 '선고'를 내릴 수 있기에 사신이었던 것이다.
장소유가 두른 진실된 침기는 그렇게 홍괴산이 두른 껍질에 죽음의 선고를 내렸고 선고는 절대적이었다.
비할 데 없는 장사(壯士)라 하여도 사신의 낫에는 무력한 법.
털퍽-
그 강대한 육체가 모든 힘을 잃고 괴사하여 엎어졌다.
사아아…….
그리고 짙었던 안개가 옅어지기 시작했다.
'음.'
운해이몰진이 핵을 잃고 약해지는 현상에 도진은 떨어졌던 일행의 무사를 알 수 있었다.
더 이상 덤벼드는 자도 보이지 않았고 홍괴산이 뒤집어썼던 한동군의 육체도 완벽히 무력화시켰으니 모든 게 끝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아니었다.
"이대로, 끝낼 것 같으냐!"
두웅-!
이미 죽어 버린, 그러나 그에 깃든 홍괴산의 영혼이 한동군의 육체로 소리쳤고 돌연 세상이 일그러졌다.
"……!"
도진과 장소유는 그 일그러짐에서 벗어나지 못하였고 다음 순간.
캬아아아아-!!
믿을 수 없는 곳에 서게 되었다.
* * * *
캬아아아아아-!
키야아아악!!
괴성을 내지르는 건 기묘한 형태의 괴물이었다.
아니, 괴물들이다.
드넓은 미지의 공간을 가득 채운 그것들은 경계를 넘어선 도진으로서도 한눈에 다 담지 못할 어마어마한 수였다.
그리고 그 괴물들 사이로 보이는 것이.
봉황(鳳凰), 기린(麒麟), 해태(獬廌) 등. 상상 속의 영물들이다.
후오오오오-
하지만 그런 엄청난 수의 괴물들과 영물들마저 무색하게 만드는 것이 하늘을 노니고 있었으니 '용(龍)'이었다.
그래, 용.
전설 속에서나 존재할, 저쪽 세계에서도 그저 전설일 뿐이었던 생물이 하늘을 가득 채우고 구름 속을 유영한다.
도저히 현실 같지 않은 광경을 도진과 장소유는 마주하였고 이내 두 사람 사이로 하늘을 뒤덮고 있던 흉악하고도 거대한 용의 머리가 접근하였다.
그 머리 위에.
"크흐흐흐……."
홍괴산이 타고 있었다.
추악한 영혼을 꼭 닮은 본래의 모습으로.
"…이것도 술법인가."
도진이 중얼거리듯 말했고 홍괴산은 부정하지 않았다.
"그래, 술법이다. 내가 가진, 가장 강력한 비술이지!"
"너희는 나의 심상세계에 먹힌 것이다. 내가 바라는 모든 것을 구현할 수 있는!"
이곳은 현실이 아니다. 홍괴산의 정신 안인 것이다.
그 안으로 도진과 장소유가 끌려온 것이었고 이는 아주 심각한 일이었다.
본래 꿈 속에서는 꿈 속의 주인이 무적인 것처럼, 이 안에서 홍괴산은 정신력이 허락하는 한도 내에서 온갖 이적을 일으킬 수 있었으니까.
그것은 현실에서 그가 부릴 수 있는 힘을 아득히 넘어서 있었으니 이 영물들로 이루어진, 세계를 멸하고도 남을 대군(大軍) 또한 그 이적의 일부에 불과하다.
"철저하게, 너희의 정신을 파괴할 것이다. 하하하하하!!"
"심상세계……라고."
굉소하는 홍괴산의 아래에서 도진과 장소유는 그저 멍한 얼굴이다.
그것이 더욱 기꺼워 크게 웃는 홍괴산의 뒤에서.
"형님, 이 새끼 웃는데요?"
"냅둬. 술법 성공해서 기쁜갑지."
초대한 적 없는 손님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