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7화
한유성.
금화의 부회장.
경계를 넘어선 고수.
도진에게 있어 그는 결코 우호적인 인물이 아니었다.
오히려 적이라 해야 하였으니 도진의 울타리 안에 있는 한유아에게 했던 짓들이 그를 악인(惡人)으로 규정짓는다.
전생에서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대한민국 재계 서열 1위의 찬란하고도 화려했던 금화의 안이 그렇게 썩어 있을 거라고는.
제아무리 두 번째 부인의 딸이라지만, 두 번째 부인이라고 회장이 인정한 관계의 결실을.
혼혈, 잡종이라며 사람 취급조차 하지 않다니 결코 정상적이지 않았다.
그들은 한유아를 그저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는 '재화'로 보았고 그 재화의 사용처로 정의검가를 점찍었다.
동맹을 맺기 위한 증거로.
그런 가혹한 삶을 살았으니 한유아는 봉황으로 태어났음에도 그 날개를 펼치지 못했고 평범하지만 그렇기에 더없이 소중하고 눈부신 가정을 동경했던 것이다.
한유아를 그렇게 만든 집안이었고 그 성정으로 인해 무형독에 완전히 썩어 버린 정의검가와 손잡으려 했던 집단의 대표였기에.
한유성은 단연코 악인이었고 적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한 번 더 구분한다.
그렇다면 한유성은, 무형독의 주구일까.
이것은 아직 확실하지 않았다.
한 차원 높은 영역에 이른 세이전의 힘으로도 그것의 구분을 아직 하지 못한 것이다.
"의심가는 정황도 있고 심증도 있어."
이단 세력은 이 세계를 집어삼킬 '대계'를 수립하였고 그를 위하여 세계를 움직일 수 있는, 조종할 수 있는 온갖 세력에 침투하였다.
스스로가 이단 세력을 위해 움직인다는 것도 모르는 간접적인 꼭두각시부터 시작하여 그것을 다 알면서도 주도적으로 움직인 존 스미스와 같은 경우까지.
그 광대하고도 촘촘한 영향력에 세이전은, 천마신교는 아예 일정 이상의 세력에는 무조건 무형독이 스며들어 있다고 가정을 하고서 생각하게 되었다.
금화도 마찬가지였고 실제로 그랬다.
세계에 유행했던 전염병, 무림 독감이 무형독의 바이러스 테러라는 게 밝혀졌고 금화 바이오로직스가 그 진원지 중 한 곳임이 밝혀지지 않았던가.
당시의 일로 금화는 체면을 구겼고 무형독에 대한 분노를 불태우며 미국의 존앤집스 공방의 감시역을 차저했었다.
이 부분을, 다시 의심한다.
추리 소설에서 흔히 사용하는 수법 중 하나가 아닌가.
범인으로 의심받게 하고 누명을 벗김으로써 용의 선상에서 벗어나게 만든다.
하지만 그것이 트릭으로 사실은 한 번 누명을 벗었던 그가 범인인 것이다.
무형독에 당한 피해자라는 인식이 박힌 금화가, 사실은 꼬리를 잘라내고 몸통을 숨김으로써 완전히 시야에서 벗어난 건 아닐까.
그리고 이 추론이 사실이라면 '몸통'은 누구일 것인가.
세이전은 그 몸통이 한유성이지 않을까 가정하고 활발히 조사하고 있는 단계였다.
한데 그 한유성이.
'강원도. 감금상태. 도움 요망'이라는 메시지를 한유아에게 보냈다.
그것도 자신의 아버지이자 금화의 회장인 한동군이 무형독 소속이라면서 말이다.
"어떻게 생각해?"
도진이 나지윤에게 물었다.
나지윤은 수많은 정보가 거세게 휘도는 머리를 정리하며 말했다.
"함정이겠지."
답은 간단하였으나 그 답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은 결코 간단하지 않았다.
한유성의 말을 믿을 수 있는가.
설령 한유성의 말이 사실이라도 어디까지나 그가 그렇게 인식한 것 뿐이며 사실은 그렇게 믿는 한유성마저 이용하여 만든 거대한 규모의 함정일 확률까지도 고려하여 내놓은 답이다.
"한유성이 무형독일 확률은 여전히 반반이야. 하지만 너만이 아니라 유아 선배까지 끌어들이기 위한 함정일 확률이 유력해."
"응."
자신이 갇힌 곳을 말했고 그에 이르는 길을 한유아가 알 거라고 했다.
역의 역, 여기에 또 역으로 생각하여도 결국 이것이 함정일 거라는 결론에 이른다.
하지만 악질적인 건.
"그래도 가 볼 수밖에 없다는 거네."
도진의 말대로 알면서도 걸려주는 게 돌아오는 이득이 큰 선택지라는 거다.
금화는 한동군 회장의 선언 이후 정말로 짐을 싸고 있다.
네티즌들이야 가볍게 금화가 떠나도 '응, 문제 없어'라고 말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그리 쉽게 말할 문제가 아니다.
그로 인한 여파는 대한민국 전체를 다방면으로 뒤흔들어 놓을 테고 이것은 무형독이 원했던 한국의 약화로 이어진다.
침공 대상의 약화는 침략자에게 있어 더없는 호재가 되는 것이다.
놈들이 준비한 함정은 아이러니하게도 이를 막을 수 있는, 더 나아가 무형독에게 있어서도 결코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을 금화를 움직이던 적을 찾아내고 처단할 수도 있는 기회였다.
그러니까 한유성을 찾아가는 건 확정되었고 그에 관한 부분으로 이야기가 넘어갔다.
"한유성은 유아 선배가 길을 알 거라고 했죠?"
"……응. 어릴 적 이야기야."
아직은 한유성도 한유아도 많이 어렸을 때. 그러나 그렇게 어림에도 한유성은 어른들에게 주입당한 지식으로 한유아를 동생이 아닌 자신을 빛내기 위한 '장식'으로 여겼다.
-예쁘다…….
-부러워.
한유아는 어렸을 적에도 누구보다 돋보였고 빛났으니 또래의 시선을 사로잡았고 한유성은 그런 선망의 대상을 마음껏 부리는, 위에 있는 존재임을 과시하기 위하여 한유아를 데리고 다녔다.
그러다 기밀을 요하는 연구 시설의, 오너 가문의 직계만이 이용할 수 있는 비밀 통로까지도 한유아를 데리고 간 적이 있었고 주의를 받았다.
-유성아. 여기는 우리 가문의 사람만이 알고 또 이용해야만 하는 곳이다. 앞으로 주의해라.
-예, 아버지.
…그 어떤 욕도 하지 않았으나 한유아의 가슴에 사무치게 남은, 결코 지워지지 않을 장면이었다.
그래서 한유아는 강원도라는 말에 바로 그곳을 떠올릴 수 있었다.
"바로 거기야."
강원도에 금화의 특급 보안이 적용된 연구 시설이 있다.
세간에 전혀 알려지지 않았고 심지어 지도에도 나오지 않는.
메시지에 따른다면 지금 한유성은 한동군 회장에 의해 그곳에 감금되어 있는 것이다.
"그 비밀 통로를 사용하는 건가요?"
나지윤이 물었고 한유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통로의 사용 방법은 다른 쪽이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한유아에게는 그 비밀 통로의 사용 권한이 없었다.
애초에 그런 통로를 한동군 모르게 이용할 수 있을 리가 없었고 대비를 하지 않았을 리가 없는 것이다.
한유아가 휴대폰을 들어 보였다.
"바이러스 프로그램이야."
한유성이 보낸 메시지에는 첨부 파일이 하나 있었으니 다름 아닌 비밀 통로의 제어 프로그램을 통하여 시설의 시스템에 침투할 수 있는 바이러스 프로그램이었다.
"시설의 제어 프로그램을 완전히 망가뜨릴 거야."
거대한 연구 시설 전체를 사람이 완벽하게 다 커버할 수는 없다.
이에 따라 많은 부분이 제어 프로그램으로 운용 되고 있었는데 그 프로그램을 무력화시킴으로써 커다란 공백을 만든다.
그리고 그 공백을 이용하여, 그리고 외부의 도움을 받아 한유성이 탈출하는 것이 계획의 골자였다.
"바이러스 프로그램이 왜 있는 거야?"
오성아가 물었고 한유아가 답했다.
"한유성은 한동군 회장을 눈엣가시로 여겼거든요. 겉으로 드러내진 않았지만."
처음에는 그저 추악한 집안 싸움이라고만 생각했다.
회장 자리를 놓지 않으려는 아버지와 그것을 빼앗으려는 아들의 싸움.
하지만 그것만이 아니라 한유성이 한동군의 어떤 비밀을, 혹은 수상한 부분을 알게 되었고 대비를 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이 생겼다.
강원도의 연구 시설은 회장 직속이었으니까.
문제는.
"입구까지는 내가 가야 해."
바이러스를 주입하기 위해선 한유아가 거기까지 가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간단히 말하자면 인증 프로그램을 변조하여 생성되는 '뒷문'을 이용해 바이러스를 침투시키는 원리였는데 여기서 변조된 인증을 받는 데 대외적으로는 '직계'로 설정된 한유아의 권한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음…….'
세간에 알려지기로 한유성은 습격 때문에 부상을 입고 알려지지 않은 안가(安家), 보안 시설에 몸을 숨기고 있다고 했다.
제아무리 경계를 넘어섰다지만 현대 화기가 전혀 통하지 않는 건 아니니 그것 때문에 부상을 입었다는 거다.
다만 그 부상이 어느 정도인지, 혹은 다른 목적으로 부상을 입지 않았음에도 부상을 입었다는 소문을 흘린 것은 아닌지하는 의문도 있었다.
중요한 건 결코 큰 부상을 입지는 않았을 한유성을 '감금한' 장소에 한유아가 가야한다는 것이다.
위험했다.
"할게."
하지만 한유아는 그 위험을 감수하겠다 말했다.
"시간이 없잖아? 그리고 나는 아늑한 방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거든."
안전한 곳에서 지켜만 보고 싶지 않다.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하고 싶다.
집단의 구성원으로서 인정받고 싶고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을 하고 싶다는 의지의 피력이었다.
그래서 도진은 옅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해보죠."
* * * *
시간이 넉넉했다면 다른 방법을 진득하게 찾아볼 수 있었겠지만 아쉽게도 시간은 저쪽의 편이었다.
천마신교가 함정에 걸려도 좋고 오지 않아도 나쁠 것이 없다.
전자라면 준비한 함정을 사용하면 되었고 후자라면 결국 금화가 한국을 떠나면서 크나큰 혼란을 초래할 것이었으니까.
이단 세력의 입장에서는 어느 쪽이든 이득을 취하는 것이다.
그래서 도진은 속전속결로, 새벽이 되자 바로 움직였다.
한유아가 연구 시설과 비밀 통로의 위치를 찍어 주었고 천마전에서 그곳까지 이어지는 루트를 이었다.
세이전과 총괄부가 철저하게 계산하고 준비하여 사람의 시선은 물론이요 CCTV마저 완벽하게 피할 수 있는 루트였다.
사람의 시선은 크게 문제가 아니었으나 CCTV는, 기계는 오감을 속이는 등의 방법이 통하지 않았고 대한민국의 도시들은 그런 CCTV가 무림인마저 고려하여 촘촘히 배치된 나라여서 쉽지 않았다.
하지만 세이전과 총괄부는 그 쉽지 않은 일을 또 해냈고 그들이 만들어낸 루트를 따라 은밀히 움직여 비밀 통로 앞에 선 것이 다섯 명이었으니 도진과 장소유에 한유아, 그리고 독마전의 전주인 위취련과 부전주 위연서였다.
그야말로 소수 정예에 비대칭 전력이라 할 수 있는 독을 사용하는 독마전의 두 사람이 함께 한 것이다.
"그럼, 시작할게."
"네."
한유아가 나서서 숨겨져 있던 패널을 드러내고 휴대폰을 갖다댔다.
삐빅-
패널이 휴대폰을 인식한다.
본래는 이렇게 인식한 즉시 관리실에서 방문자를 확인하고 영상이 전송되어야 했지만.
…….
바이러스가 단숨에 퍼져 나가며 패널은 먹통이 되었고 모든 시스템이 정지하였다.
그리고 도진의 손이 길을 열었다.
스윽-
통로를 막고 있던 두터운 합금문이 도진의 손날에 맺힌 검기에 깔끔하게 잘려 나간 것이다.
내부는 어두웠으나 그에 구애받을 만큼 경지가 낮은 사람이 없었기에 도진을 필두로 한 다섯 명은 빠르게 통로를 질주하였고 단번에 연구 시설 안에 진입하였다.
그리고.
"……이건."
"……."
생각지 못했던 광경에 잠시나마, 걸음을 멈추었다.
마치 세상에 전혀 알려지지 않은 첨단 문명의 세계가 펼쳐진 듯한 드넓은 지하 연구 시설의 내부에는.
크, 허어…….
하아아…….
생명을 잃었음에도 움직이는 '좀비'들이, 본래 이곳의 직원이었던 자들이 배회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