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해서 지존까지-636화 (636/741)

635화

다시, 봄이 왔다.

동장군이 물러가고 어느새 바람에 온기가 깃들 무렵.

도진의 집 거실에는 이제 그곳에 있는 것이 당연하게 된 윤상미가 있었다.

앞치마의 끈을 리본 모양으로 맨 뒷모습이 햇빛을 받아 한 폭의 그림과 같은 장면을 자아낸다.

그 멋진 장면을 목격한, 공부를 하다 간식을 가지러 내려 온 도진네 가족의 막내 김호진은 생각했다.

'상미 누나가 아무리 봐도 맞는 거 같은데.'

…라고.

다른 게 아니다.

호진이가 생각하는 그것은 새로운 식구다.

그러니까 도진과 결혼하여 호진이의 형수님이 될 사람으로 윤상미를 첫 손에 꼽은 것이었다.

"맛있게 먹어."

"네, 누나. 고맙습니다."

꾸벅 인사하는 자신에게 미소지어주는 상미의 모습에서 호진이는 가장 이상적인 어떤 모습을 보았다.

'예쁘고 착하고 세상에서 형을 가장 좋아하는 누나잖아?'

장수를 잡으려면 말부터 쏘라고 했던가.

그런 부분에서 볼 때 상미는 미래의 '도련님'을 벌써부터 완벽하게 공략한 셈이다.

"글쎄?"

호진이의 누나, 도진네 가족의 둘째인 김유진의 생각은 조금 달랐지만 말이다.

오후.

요즘 들어 바깥에서 보내는 시간이 더 많아진 유진이는 상미 누나가 맞지 않겠느냐는 동생의 말에 그렇게 다른 태도를 보인 것이었다.

"왜?"

부쩍 크고 몰라볼 정도로 예뻐진, 그러나 호진이에게 있어선 어디까지나 '인간 여자'인 유진이가 말했다.

"상미 언니도 좋긴 하지만 나는 그래도 소담이 언니가 더 좋은 거 같아."

"음. 그럴 수 있지."

간단히 납득해 버리는 호진이다.

다른 입장이긴 하지만 소담 누나는 인정이었으니까.

어릴 적.

당시 누나를 질투하여 시비를 걸었던 정구 형과 누나가 싸웠던 날.

형과 함께 와서 누나와 자신에게 커다란 과자를 주었던 소담 누나를 기억한다.

그 외에도, 꾸준히 찾아오는 소담 누나는 그 자체로 특별했다.

소담 누나와 형이 결혼하는 건 그야말로 특별함이 곁에 와 일상이 되어주는 그런 느낌이다.

다만.

"문제는 형이지."

"응, 그렇지."

이건 어디까지나 호진이와 유진이의 의견이지 당사자인 도진의 의견이 아니라는 거다.

평범 이상의 특별한 관계라는 건 누가 보아도 뻔한데, 정작 도진이 그 이상으로 나아가질 않고 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형이 소담 누나나 상미 누나의 마음을 모를 거 같진 않은데…….

"언니가 둘만 있는 게 아니니까 일부러 전쟁을 미루고 있는 걸지도……."

"설득력 있네."

…그런 식으로.

맏이의 장래에 관한 이야기를 두 동생이 하는 사이 해가 지고 저녁 식사 시간이 되었다.

"잘 먹겠습니다."

유진이와 호진이에 어머니 서정원, 맏이 도진에 상미와 소담이 함께하는 자리였다.

다시 회사로 돌아가더라도 최대한 저녁은 함께 먹으려는 서정원과 마찬가지로 저녁만큼은 함께 먹기 위해 노력하는 도진이었다.

여기에 '어머님'에게 전수받은 솜씨를 십분 발휘하여 저녁을 차린 상미와 요즘 도진과의 대련으로 빠르게 실력을 키우고 있는 소담이 대련을 끝내고 함께하여 모인 면면이다.

그리고 휴대폰 너머로 세 사람이 더 참석하였으니.

-하하. 이럴 수도 있구나.

"그렇네요, 아버지."

바할라의 신도시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는, 바할라에 머물고 있는 아버지 김서우와 벽태웅, 그리고 벽태웅의 스승인 소거인 강거혁이었다.

한국과 바할라는 6시간의 시차가 있는데 저녁을 먹는 도진네 가족과 점심을 먹는 김서우 쪽의 식사 시간이 그렇게 겹친 것이다.

재미있는 우연이었고 이렇게 된 것 영상 통화를 유지한 채 함께 밥을 먹기로 했다.

특별한 이야기는 오가지 않았다.

그저 소소한, 특기할 만한 거라곤 그렇게 영상 통화를 하면서 식사를 했다는 것 하나가 전부인 일상의 이야기들.

그리고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더 바랄 것이 없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그랬구나."

"네."

도진은 그 이야기를 천마전으로 돌아와 복도를 걷다 마주친 한유아, 그리고 민지서에게 해 주었다.

한숨 돌리러 나온 한유아와 민지서가 함께 캔커피를 들고 있었고 여기에 도진이 캔콜라를 들고 합류하면서 나온 이야기였다.

집에서 저녁 먹고 왔겠네, 네. 그런 식으로.

나란히 앉아 음료를 마시며 한유아가 말했다.

"유진이가 곧 데뷔할 것 같지?"

"네. 그래서 요즘 바깥에서 먹는 날이 많아졌어요."

어느새 유진이도 고등학생이 되었다.

새삼 시간이 참 빨리 간다고 느끼면서도 도진의 입장에서는 아직 애 같은데.

아이돌 업계에서는 그렇지가 않았다.

고등학생이면 얼마든지 데뷔를 할 수 있는 나이이며 오히려 그 이상이면 늦었다고까지 해 버리는 것이다.

그런 세태에 맞춘 건 아니었지만 안티체리와 레드슈라는 쌍두마차가 이끄는 바른 엔터에서 그 기세를 이어갈 새로운 걸그룹의, 유진이가 포함된 그룹의 데뷔가 코앞이었고 이미 소문이 파다했다.

"호진이는?"

"수학자가 되고 싶대요. 요즘 꽤 본격적이에요. 문과인 저랑 다르게 이과 체질이더라구요."

"흐응. 그러고 보니 도진이 너 수학은 좋아하지 않았지?"

"아뇨. 싫어하는 건 아닌데 그냥 잘하는 분야가 아니었던 거죠. 안타깝게도."

"사실 나도 그랬어. 시험은 만점 받았지만."

도진이 스윽 웃었고 한유아 또한 웃었다.

그렇게 한 번 텀을 두고서 한유아가 말했다.

"평범, 하네."

"그게 제일 좋은 거죠."

한유아는 '응, 그렇네'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유진이는 유진이 나름대로, 소설로 써도 될 정도로 아이돌 세계에서의 '특별한 일상'을 즐기고 있지만 그건 충분히 평범의 범주에 들어가는 이야기일 것이었다.

호진이는 그야말로 평범한, 그러나 하고 싶은 것을 하는 평범하면서도 즐거운 나날을 보내고 있다.

그래. 그 평범함이 가장 좋다.

삶 속에서 평범하게 겪는 시련이나 아픔 등은 괜찮지만 지극히 특별한 가혹함 같은 건 없었으면 좋겠다고 도진은 생각했다.

그런 건 전생의, 도진의 기억 속에만 남은 것으로 충분했으니까.

유진이와 호진이는 그냥 이렇게. 웃으면서 살도록 해 주고 싶다.

그렇게 하고 싶으니까.

새로운 삶을 사는 도진은 그렇게 할 것이었다.

그 의지를 도진의 눈에서 읽은 한유아가 예쁘게 웃었다.

"우리가 이기겠네."

"네. 이길 거예요."

얼마 전.

천마신교는 장소유의 제안에 따라 홍괴산을 치기로 하였다.

홍괴산을 잡아 그녀가 말한 '킬 스위치'를 획득하는 게 목적이다.

위험하기도 했고 변수도 있었다.

한 번 크게 데인 홍괴산이 다시 장소유를 노린다면 앞서 벌였던 것 이상으로 철저하게 준비를 할 것이다.

하물며 놈이 준비하는 건 무공이 아닌 '마법이라 칭할 영역의 술법'이 주가 될 것이니 변수를 다 예측할 수도 없고 장소유가 위험해질 수 있다.

하지만 그래도 하기로 한 건 그들의 의지와 상관없이 홍괴산은 피할 수 없는 위험 요소이기 때문이다.

놈의 영혼과 접하였기에 도진은 확실하게 알았다.

놈은, 장소유의 말대로 그녀에 대한 광적인 집착으로 영혼이 가득 차 있었다.

무엇이 어찌되었든 무슨 수를 써서라도 기필코 장소유를 노릴 것이니 차라리 할 수 있는 최대로 준비하여 놈을 끌어들이는 형태로 위협을 제거하는 게 맞았다.

나아가.

이 세계의, 도진이 바라는 동생들의, 소중한 이들의 평범한 삶을 위협하는 것들마저도 모두 제거할 것이다.

"좋네……. 나도 가족 가지고 싶어졌어."

싱긋 웃으며 하는 말이었지만 내용은 그리 가볍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한유아에게는 가족이 없었으니까.

친어머니는 없고 그 외 모든 '가족'은 그녀를 혼혈로 사람 취급조차 하지 않았다.

그녀의 어머니는 금화 회장의 두 번째 부인으로 정식으로 이름을 올렸음에도 가족은커녕 사람으로 보지도 않았던 거다.

때문에 도진은 이 부분에 있어서는 한유아의 앞에서 말을 골라 했었는데 오늘은 그녀가 먼저 말을 꺼내어 자연스럽게, 그러나 이야기가 다른 쪽으로 흐르도록 유도한 것이었는데…….

"선배 가족이라면 바로 곁에 있잖아요."

한유아는 씨익 웃었다.

"응, 맞아. 지서는 내 가족이지. 아. 단어 선택을 잘못했어. 미안해, 지서야."

"아닙니다. 오해하지 않습니다."

묵묵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민지서는 담백하게, 그러나 분명한 의지를 담아 말했다.

그녀에게 있어 이것은 일말의 오해조차 끼어들 여지가 없는 믿음이었다.

그 마음을 읽은 한유아가 '응, 안심했어'하고는 다시 말했다.

"정정할게. 그러니까 가족은 가족인데 아이를 가지고 싶어."

"픕."

"……."

민지서가 마시던 커피를 살짝 뿜었고 도진도 조금이나마 눈이 커졌다.

민지서에게 그것은 성대하게 뿜는 것과 다름이 없었고 도진에게도 그것은 눈이 왕방울만 해진 것과 같았으니 그만큼이나 크게 놀랄 정도로 폭탄 발언이었다.

"기왕이면 내추럴하게 아이를 가지고 낳아서 기르는 그런 거 말야. 사실 나 그거 꽤 로망이거든?"

"그, 그러시군요……."

이해하지 못할 로망은 아니었다.

오히려 고개가 끄덕여진다.

한유아의 삶과 주변 환경이 그랬으니까.

평범하게 사랑하여 결혼하고 평범하게 아이를 낳아 사랑을 주며 기른다.

한유아에게 있어 그것은 그야말로 로망인 것이다.

그리고 그 로망을 위한 최고의 상대가 눈앞에 있지 않은가.

한유아는 씨익 웃었고 도진은 아하하, 웃었다.

"평소라면 아무렇지 않았을 텐데 우리 후배가 오늘은 좀 텐션이 다르네? 아! 이런 거에 약한 거야?"

약점을 찾은 얼굴로 한유아가 짓궂게 거리를 좁힌다.

도진은 그녀가 접근하는 만큼 상체를 슬쩍 뒤로 물리며.

딱콩.

"아야."

그녀의 하얀 이마에 가볍게 딱밤을 먹이고선 말했다.

"어디 조그마한 여자애가 벌써부터 이렇게 발랑까진 말을!"

"내가 연상이거든! 그리고 나 키 크거든!"

"열 살은 더 먹고 주장하십쇼."

"지서 엄마! 도진이가 괴롭혀!"

"……."

하아.

민지서가 안겨 든 한유아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 * * *

다음날.

새벽부터 대한민국 전체를 경악케하는 뉴스가 온갖 매체를 장악하였다.

[긴급1) 공정당 고주단 당대표 피살당해]

[긴급2) 금화 부회장 한유성 의문의 무리에게 피습당해]

몰락하였다지만 그래도 대한민국 제1야당인 공정당의 당대표인 고주단이 피살당했다는 한 줄짜리 긴급 속보.

여기에 하나 더 한 줄짜리 긴급 속보로 무려 금화의 부회장이자 경계를 넘어선 고수인 한유성이 정체를 알 수 없는 이들에게 습격을 당하였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당대표나 되는 정치인이 피살당했다는 것도 믿기 힘든 일이었으나 금화의 부회장이자 경계를 넘어선 고수인 한유성이 습격당했다는 건 아예 말도 안 되는 오보라는 소리부터 나오는 기사였다.

대번에 나라 전체가 술렁이며 진위 여부에 관심이 집중되었고.

[속보!) 금화, 러시아로 본사 이전한다?!]

[금화 한동군 회장. "러시아로 본사 이전할 것."]

앞선 기사의 진위 여부가 가려지기도 전에 대한민국 재계 서열 1위의 대그룹.

금화의 회장 한동군의 발언이 더욱 크게 대한민국을 뒤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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