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해서 지존까지-633화 (633/741)
  • 632화

    발트 에번드윅 공작.

    소위 말하는 순혈 귀족으로 혼란기 유럽을 평정한 '이야기 속 영웅'.

    무(武)를 게을리하지 않았던 공작가 소가주 발트 에번드윅은 축복받은 재능에 노력까지 거듭하여 경지에 이르렀고 그 힘을 올바른 일에, 적극적으로 사용하였다.

    유럽의 뒷골목을 지배하던 무뢰배들이 무공을 얻었고 혼란기에 뭉쳐 쉽사리 손댈 수 없는 거대한 조직이 되어 온갖 패악을 일삼을 때.

    귀족의 의무를 다하기 위하여 발트 에번드윅이 검을 들었고 온갖 위협에도 굴하지 않고 그들과 맞서 싸웠다.

    그런 발트 에번드윅에 감화되고 감동한 이들이 모여들어 군대를 이루니 이내 흑도 무뢰배들에 승리하여 그들을 물리쳤다.

    그 공적을 바탕으로 하여 그야말로 귀족의 귀감이요 민중의 영웅으로 그는 유럽 전체의 박수를 받으며 에번드윅 공작가의 가주로 취임한 것이다.

    취임식에서 그는 말했다.

    -이 시대의 무림인이란 언제든 강도로 돌변할 수 있는 자들이니 경계하여야 한다.

    -귀족은 명예를 지켜야 하고 모두를 올바로 이끌 책무가 있다.

    무림인은 언제든 강도가 될 수 있는 위험한 자들이며 귀족의 명예는 지켜져야 한다고.

    그런 인물이었으니까.

    그런 인물이 이번 파티와 회의에 참석할 거라고 은밀히 귀족파의 소수에게만 연락하였기에.

    이번 자리를 준비하던 귀족파의 소수는 소천마 김도진을 노리고 간단하면서도 확실한 한 수를 준비한 것이었다.

    심지어 울고 싶은데 뺨 때려주는 격의 사건이 터지기까지 했다.

    귀족가 자제를, 무림특별법을 상징한다고까지 할 수 있는 소천마가 때린 것이다.

    평범하게 보면야 '정당방위'지만 지금은 무림특별법을 두고 극심하게 대립하고 있는 때.

    발트 에번드윅이라면.

    분명히 귀족파의 편을 들어줄 것이다.

    …라고 생각했는데.

    "자네는…… 정말 믿기 힘들 정도로 발전하는군."

    "그것이 앞에 서는 이의 의무니까요."

    소천마와 발트 에번드윅이, 사이좋게 악수를 하며, 덕담을 나누고 있다.

    "……?"

    "무……"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동공 지진을 일으키는 이가 있는가 하면 무슨 일이냐고 말하려다 급히 입을 다무는 이들도 있었다.

    진영을 가리지 않고.

    소천마와 에번드윅 공작이 사이좋게 악수와 덕담을 나누는 모습은 그만큼 상상도 못한 일인 것이었다.

    "그래, 나도 적당히 이야기는 들었는데. 꽤나 의견 차가 심한 모양이야?"

    "네. 그렇네요."

    그렇게 사람들이 넋을 놓고 있는 사이 에번드윅 공작이 소천마와 함께 사건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듣자하니 저 아이가 수행원에게 폭력을 행사했다고?"

    에번드윅 공작의 형형한 눈동자가 향하자 벨토 로번이 흠칫 몸을 떨었다.

    무어라도 말을 해야 할 것 같은데 이곳에 오기 전 아버지에게 단단히 주입당한 것이 있었기에 입을 다물었다.

    대신 도진이 말했다.

    "네. 클럽에 가고 싶다고 하더라구요. 근데 수행원 분이 말리시니까 홧김에 주먹을 휘두르더군요."

    슥-

    "흠. 하지만 저 친구는 저 아이보다 꽤나 윗줄의 고수라 별달리 위협은 되지 않았겠군."

    저도 모르게 손을 올리고 발언하려 했던 웰론 백작이 멈칫하였다.

    다른 귀족들도 에번드윅 공작의 말에 얼떨떨함에서 벗어나 조금 여유가 생겼다.

    소천마 김도진과 악수를 나누며 분위기가 좋길래 경악하였는데.

    당연한 이야기지만 겉으로 보기에 그렇다고 해서 에번드윅 공작이 소천마의 편이 된 건 아닌 것이다.

    때문에 자신에게 시선이 집중되는 가운데 에번드윅 공작이 말을 이었다.

    "게다가 조금 궁금한 게 있는데 말이야."

    "네."

    "아무리 저 아이가 술에 취해 있었어도,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자네가 나섰는데 쉽사리 덤벼들었다는 게 좀 신기하군."

    "으음."

    "그러고 보니 그렇군요."

    그래, 이상한 부분이었다.

    아무리 술에 취했다지만 완전히 이성을 잃은 게 아니었다.

    최소한의 사리분별은 가능했고 그런 상태의 벨토 로번이, 배알이 뒤틀리는 것 같지만 어쨌든 무림의 정점에 있는 소천마에게 덤벼드는 건 상식적이지 않았다.

    이미 알고 있었음에도 공작의 등장까지 아껴두었던 부분을 당사자인 에번드윅 공작이 짚었고 귀족파 진영이 동의하여 의문을 키웠다.

    이에 도진은 싱긋 웃더니.

    "헛?!"

    "……!!"

    모두가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에번드윅 공작과 마주하여 이 공간 전체에 자신의 존재감을 발산하던 소천마가, 갑자기 사라졌기 때문이다.

    "어엇."

    "아, 아니."

    ……아니, 아니었다.

    소천마는 어디로 가지 않고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다만, 그 자리에 있음에도 소천마가 아닌 존재감이 희미한 동양인으로 보여 모두가 눈을 비비게 만들었다.

    "뭐, 이런 겁니다."

    그리고 입을 연 순간 '존재감이 희미한 동양인'은 다시 소천마로 돌아왔다.

    "…대단하군. 기세를 자연스럽게 희미하게 만들 수 있다니. 여기에 어두운 새벽이기까지 했으니 로번가의 저 아이가 못 알아보고 주먹을 휘둘렀던 거군."

    "예. 맞습니다."

    에번드윅 공작은 진심으로 감탄한 얼굴이었다.

    가장 가까이서 마주보고 있음에도, 그조차 소천마가 소천마로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것은 곧.

    소천마가 치명적인 권역까지 파고든다 해도 그에 맞는 수준의 경계가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이른다.

    하지만 여기까지 생각하지 못하는 귀족파의 귀족 중 한 명이 섣부르게 나섰다.

    "그건, 사기가 아닙니까!"

    "……."

    에번드윅 공작의 시선이 목소리를 높인 이에게로 향했다.

    "사기?"

    귀족파 내에서도 강경파인 신경질적인 인상에 대비되는 푸짐한 뱃살을 억지로 옷으로 감싼 이가 흠칫하고선 다시 입을 열었다.

    "그, 그렇지 않습니까. 소천마는 벨토 로번을 속여 덤벼들도록 유도하였습니다! 그를 통하여 논란을 만들도록!"

    동의하는 분위기가 귀족파 내에서 퍼져 나간다.

    그 분위기를 등지고 에번드윅 공작은 다시 도진을 마주하였다.

    "그렇다고 하는군. 어떻게 생각하나?"

    도진은 스윽 웃고선 간단히 답하였다.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부분을 가지고 또 스스로의 명예에 먹칠을 하는 주장이군요."

    "뭐, 뭐라!"

    웅성웅성.

    또 한 번 나온 강한 발언에 귀족파가 술렁였다.

    "왜 그렇게 되는 것이지?"

    "간단한 이야기입니다. 저건 그러니까, 제가 약자로 보였으니까 주먹을 휘두른 것이고 강자였다면. 소천마였다면 그러지 않았을 거라는 지극히 한심한 소리가 아닙니까?"

    "……."

    귀족파들의 술렁임이 뚝 멎었다.

    그리고 그들의 반발이 터져 나오는 것보다 빠르게.

    "그래. 바로 그거야."

    쿠궁-!

    발트 에번드윅 공작의 기세가 강렬하게 터져 나왔다.

    귀족파의 귀족들을 향해.

    "고, 공작님?"

    주춤하는 못난 귀족들에게 발트 에번드윅이 일갈했다.

    "부끄러운 것도 모르는 한심한 작자들 같으니라고!"

    "헉."

    "귀족이란 명예를 알고 항상 존경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거늘! 강자에 약하고 약자에 강한 논리를 입에 담다니. 그러고도 귀족이란 말이냐!"

    쿠구궁-!

    넓은 실내를 울리는 에번드윅 공작의 호통에 귀족파의 귀족들은 붕어마냥 입을 뻐끔거렸다.

    이런 순간에조차.

    그들은 스스로의 못남을 부끄러워하기는커녕.

    '왜, 왜 공작님이 우리를 비난하시는 거지?'

    '이, 이것도 우리가 모르는 어떤 계획인 건가?'

    …그런 한심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 * * *

    귀족파는 대패하였다.

    사실은 일발역전을 위해 위장했던 초반의 열세.

    허나 그 역전을 위해 필요했던, 판을 완전히 뒤엎어 주어야 했던 에번드윅 공작이 소천마의 편을 들면서 귀족파는 시종일관 무어라 제대로 된 일설도 하지 못한 채 패배한 꼴이 되었다.

    그 영상이 다른 곳도 아니고 지상파를 통하여 적나라하게 송출되었고 무림특별법을 반대하는 세력의 기세가 크게 꺾이고 말았다.

    -에번드윅 공작님이 저렇게까지 말씀하시다니..

    -하긴, 공작님의 말씀대로야. 요즘 귀족이란 사람들은 명예를 몰라.

    -무림특별법을 반대하는 것도 무림인이 자기들한테 고개 숙이지 않는다는 게 이유였지.

    -명예를 알고 따를 만한 사람이라면 설령 경계를 넘어선 고수라 해도 따를 텐데. 저들은 그럴 만한 그릇이 되지 못한다고 스스로 인정한 자들이지.

    다른 무엇보다 유럽에서 '가장 명예로운 귀족'인 발트 에번드윅 공작이 소천마의 편에 선 것이 치명적이었다.

    가장 중요한 명분. 그리고 국민들의 여론이 급격하게, 되돌리기 힘들 정도로 무림특별법의 찬성으로 기울었다.

    그렇게 유럽을 움직인 발트 에번드윅 공작은.

    "못난 것들."

    소천마 김도진과 따로 마주한 자리에서 그렇게 한탄하였다.

    "나때는 저런 놈들이 있었으면 정신을 차릴 때까지 바깥에 내보내지 않았는데."

    '라떼는 말이야'를 시전하는 발트 에번드윅 공작은 과연 깐깐한 사람이며 전근대적인 면이 있었다.

    그가 무림인을 싫어하는 것도 맞았고 무림인은 언제든 강도로 돌변할 수 있는 놈들이다, 라고 한 발언 또한 한 치의 와전도 없는 사실이었다.

    그가 살던 시대에 본 명예를 모르는 수많은 무림인들은 실제로 강도로 돌변하여 온갖 패악을 부리던 자들이었으니 명예로운 귀족 그 자체였던 발트 에번드윅이 무림인을 싫어하는 것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사람의 인식은 환경에 따라 변할 수 있는 법이다.

    그는 변했다.

    세상에서 그가 '전설'이 될 세월 동안 알려지지 않은 경험을 하면서 말이다.

    그는…… 천외천(天外天)이었다.

    경계를 넘어선 그는 귀족이지만 동시에 전인미답의 경지에 발을 내딛은 무림인으로서 더 높은 경지를 갈구하였고 그 갈증의 해소를 미끼로 유혹하던 무형독에게 속아넘어가고 만 것이다.

    실제로 같은 경지에 오른 이들과, 그보다 높은 경지에 이른 무인과 대련할 수 있었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허나 거기에 취하여 눈이 흐려졌고 저도 모르게.

    무형독이라는 세상을 좀먹는 자들을 돕고 있었다는 걸, 소천마로 인하여 깨달을 수 있었다.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고서 천외천을 위해 한다 생각했던 일들이 무형독을 돕는 일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치욕스러웠다.

    자신의 추태를 알리고 모든 훈장마저 내려놓고 싶었다.

    하지만 그것을 소천마가 말렸다.

    그런 식으로 도망치지 말고, 명예에 걸맞는 책임을 지라면서.

    -저들을 막아야죠. 공작님에겐 그럴 수 있는, 책임질 수 있는 능력이 있잖아요?

    책임을 져라.

    그 말이 공작의 영혼을 꿰뚫었고 그는 소천마라는 인물을 위하여, 그리고 자신의 명예에 걸맞는 책임을 지기 위하여 세상에 나선 것이었다.

    스스로를 속인 것은 아니었다.

    비록 속아서 들었다지만 천외천에서 그는 여러 친구를 사귈 수 있었고 무인에 대한 부정적인 선입견을 씻어냈다.

    그리고 그와 같이 여러가지 방식으로.

    세상에는 지금 무형독에 속았음을 알게 된 천외천의 수많은 자들이 속죄하기 위하여 그늘에서, 그러나 양지 이상으로 거대한 영향력을 발휘하며 혼란을 억누르기 위하여 노력하고 있었다.

    그들이 그렇게 행동하도록 만든 젊은, 그러나 무림의 정점에 있는 무인을 보며 발트 에번드윅은 생각했다.

    '…이 친구가, 이 시대의 중심인 게야.'

    과거 한 나라의 중심이었던 경험이 있기에 바로 알 수 있었다.

    지금 이 시대의 중심은 소천마 김도진이라는 것을.

    그런 시대의 중심에게 발트 에번드윅이 물었다.

    "소천마."

    "네, 공작님."

    "애쓰고 있지만 이미 불은 붙어 버렸고 그것을 끄는 것은 불가능할 게야."

    그도 지금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이 자연적인 것이 아닌 인위적인 계략에 의한 것임을 안다.

    문제는, 그것을 알고 있음에도 이 인위적으로 퍼지는 불을 끌 수 있는 근본적인 방책이 떠오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무언가. 찾은 것이 있나?"

    기대를 하긴 했으나 그것이 크지는 않았다.

    하지만.

    "네."

    "음?"

    "본거지에. 놈들의 수장을 칠 방법을, 찾았어요."

    "……!"

    돌아온 대답은 놀라운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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