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0화
"이렇게 가 보자고."
소천마의 예상치 못한 말에 당황하여 하루를 날려 먹은 청년 귀족들의 모임은 켈리의 조언과 자료 조사를 통하여 계획을 수정하였다.
알고 보니 김도진이 '양반가 후손'인 건 거짓이 아닌 것 같다.
그러나.
그것이 '진짜 양반가의 후손'인가에 대해서는 의문 부호가 붙었다.
그 시대의 말기에 나라가 엉망이라 신분을 사고팔거나 아예 위조하여 양반 행세를 하는 것들이 넘쳐났다고 하니 말이다.
그러니까 그 부분을 파고들기로 했다.
'너, 양반이라고 했는데 진짜 양반 맞아?'라고.
진짜이든 가짜이든 공격할 시나리오를 짜 두었는데 역시 최고는 진짜 양반이 아니어서 이리저리 말을 돌리거나 둘러대는 식으로 나오는 것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게 중요한가요?"
라고, 소천마는 확답을 회피하였으니 벨토 로번이 저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쥘 만큼 기뻐한 것이다.
여유를 되찾은 벨토 로번이 하하 웃으며 말했다.
"조사를 하다 보니 궁금해져서 말입니다. 한국의 젊은 사람들은 이런 부분의 지식에 관심이 없어 아예 모르는 사람도 많다던데 소천마께서는 제법 많은 걸 알고 계시는 것 같아서요."
"아버지께서 이 부분에 관해서 많이 알고 계셔서요. 덕분에 저도 알게 된 정도죠. 다만."
벨토 로번이 말하려는 순간을 절묘하게 도진이 끊으며 자신의 말을 이었다.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게 아니고서야 굳이 그런 신분에 관한 부분에 구애될 필요는 없다고, 저는 생각하네요."
추하게 변명하고 말을 돌리는구나.
벨토 로번은 그 감정을 다 감추지 못한 얼굴이었다.
"신분에 관해 구애될 필요가 없다니. 그건 자신의 선조와 가문에 관한 부분이 아닙니까. 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건 맞죠. 자신의 뿌리에 관해 알고 자긍심을 가지는 건 중요한 일이니까요."
"한데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그래요.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건, 양반이니 천민이니 하는 신분 이전에 스스로의 품격이 먼저라는 거예요."
"……."
도진의 말에 벨토 로번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게, 그의 역린이기 때문이었다.
'이 새끼.'
알고 도발한 건가.
사실 벨토 로번은 사고뭉치로 언론에서 몇 번이고 보도되면서 SNS에서 심심하면 씹히는 인간이었다.
음주 운전을 하다 붙잡혔고 양다리를 걸쳤다 들통나기도 했다.
하지만 가장 조롱을 당한 건 술집에서 만취하여 행패를 부리다 또래 무림인에게 흠씬 두들겨 맞고 나뒹군 사진이었다.
사진을 보는 순간 휴대폰을 그 자리에서 박살내고 미친놈처럼 소리를 질렀고 두들겨 맞은 자신이 오히려 가해자가 되면서 그는 무림특별법을 특히나 증오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 벨토 로번을 사람들은 '신분에 안 어울리는 모자란 인간'이라 하였는데 하필 그걸.
소천마 김도진이 말하였으니 어리숙한 그가 감정을 표정에 드러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흔들린 감정은 당연하게도 실언으로 이어진다.
"하, 하. 신분 이전에 스스로의 품격이라니. 그 품격을 갖추지 못하는 핏줄이 있으니 신분이란 게 구분되는 거 아니겠습니까."
마주한 도진의 눈이 커졌다.
"음? 그렇습니까? 핏줄에 따라 귀함과 천함이 구분되는 거였군요?"
"……."
너무 과장된 반응에 벨토 로번이 정신을 차리고 아차했다.
실제로 그렇게 생각했지만, 이건 공식적인 자리에서 입 밖에 내서는 안 될 말이었던 것이다.
벨토 로번이 급히 고개를 휘휘 저었다.
"아니, 아닙니다. 그런 뜻이 아니라……."
"예, 그렇죠. 품격을 갖추기에 그 사람은 귀족이라 불릴 수 있는 거죠. 이게 맞는 거겠죠?"
"그, 그렇습니다."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 일단 동의부터 한 벨토 로번이었다.
그리고 급한 불을 끄고 나니 자신의 꼴이 어떻게 비칠지 파악할 수 있었고 속에서 천불이 났다.
'귀족파'인 자신이 신분보다 인간 그 자체의 품격이 중요하다는 반대파의, 그것도 간결하면서도 적나라한 논리에 동의를 해 버린 것이다.
'이, 이 새끼가…….'
머릿속으로 온갖 쌍욕이 끓어올랐으나 차마 입 밖에 내지 못하고 그래서 더 화가 중첩되어 얼굴이 벌개질 것 같다.
여기에.
"아. 그리고."
"?"
"저는 정통 양반가의 후손이 맞습니다. 연구회와 종가의 검증을 받았거든요. 뭐, 중요한 이야기는 아니지만 질문하셨으니까요."
* * * *
"으아아아아아!! 씨발!"
쾅!
마셨던 술을 더럽게 튀기며 주먹을 내리치는 건 로번가의 벨토다.
치미는 분을 삭이지 못하고 발작하는 그를 모임의 친구들은 말리지 않고 방치하였다.
저녁의 파티에서 처참하게 농락당하고 못난 꼴을 보인 놈을 굳이 말릴 만큼의 친분은 없었기 때문에.
"…역시 만만한 놈이 아니네."
"그러게 말이야."
파티장과 일곱 층이나 차이나는, 방음 처리가 완벽하게 된 별실에서 진탕 술판을 벌이며 젊은 귀족 자제들은 한숨을 내쉬었다.
자존심 상하지만 소천마가 '어나더 클래스'라는 건 부정할 수 없었고 인정해야만 했다.
하지만 이런 간단한 계획에서조차 농락당하게 될 줄이야.
너무나 자연스럽게 그들을 스쳐간 시선으로 계획을 완전히 읽고 있다는 것까지 소천마는 알려 주었다.
그들과 비슷한, 아니 오히려 어린 편에 속하는 나이일진대 너무나 차이가 났다.
"별 수 없지. 이건 어른들에게 맡길 수밖에."
"그래. 마지막날엔 공작님도 오신다고 했으니까."
공작님.
유럽의 '살아있는 전설'이라 불리는 분이 참석하신다고 했다.
그분이 오시면 소천마를 내세운 귀족의 본분을 저버린 것들마저 고개를 숙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우린 우리의 파티나 즐기자고."
속편한 결론을 내린 그들은 진탕 술에 절었다.
장소가 장소인지라 아가씨들과 뒹굴 수는 없으니 술에 더 집중을 한 것이다.
그렇게 새벽까지 술에 절은 청년들은 이곳 호텔의 객실을 예약한 일부는 수행원에 의해 객실로 이동하였고 그렇지 못한 일부는 따로 머물고 있는 숙소로 이동하기 위하여 바깥으로 나왔다.
벨토 로번은 호텔의 객실을 예약하지 못한 쪽이었다.
때문에 근처의 다른 호텔로 이동하기 위해 수행원의 부축을 받으며 바깥으로 나왔는데.
"…안 됩니다, 도련님."
"뭐?! 안 돼?! FUCK!!"
고요한 새벽에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행패를 부리기 시작했다.
"도련님. 아버님께서 말씀하셨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조용히 놀다 들어가겠다는데 뭐가 문제냐고!"
다른 이유가 아니었다.
도저히 이대로는 못 자겠으니 클럽에 가서 질펀하게 놀아야겠다고 했는데 수행원이 말렸고 거기에 버럭 화를 낸 것이다.
민감한 시기였다.
시선이 집중되어 있었고 이런 시기에 안 그래도 저녁에 소천마와의 대화로 어그로를 끌었던 벨토 로번이 클럽에 나타나 봐라.
다음날 바로 기사가 날 일이었다.
그걸 알기에 그와 함께 온 친구들은 얌전히 차에 탔는데 술에 절어 버리고 생각이 짧은 이 어린 귀족 도련님은 그런 걸 싹 다 무시하고 지금 기어코 클럽에 가야겠다고 어거지를 부리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결국.
"이 씨발!!"
뻐어억!!
190의 거구에 근육질인 벨토 로번의 주먹이 수행원을 후려치고 말았다.
귀족가 도련님을 수행하기 위해 고용된 수행원은 벨토보다 고수였기에 최대한 충격을 흘리며 무너지지 않았다.
그 모습이 더욱 벨토 로번의 화를 돋궜고 연신 주먹을 내지르게 만들었다.
퍼퍽! 퍼퍽! 빠아악!
수행원은 묵묵히 벨토 로번의 주먹을 감당해낸다.
계약서에 기입된, 도련님의 폭력을 받아낸다는 조항이 이미 있었기에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결코 보기 좋은 모습은 아니었고.
"아무리 보는 눈이 적다지만, 귀족이 할 짓이 아니네요."
실실 웃으며 지켜보던 친구들 대신, 갑자기 나타난 누군가가 나서서 그 행동을 지적했다.
"넌 또 뭐야!!"
귀에 선명히 박히는 목소리에 벨토 로번이 버럭 소리를 지르며 눈을 부라렸다.
새벽의 어둠에 반쯤 묻힐 정도로 존재감이 약한데다 저보다 키가 작고 왜소해 보이는 남자 하나가 보였다.
그래서 벨토 로번이 씩씩거리며, 쿵쿵거리며 다가가 그를 내리깔아 보며 물었다.
"뭐냐. 시비거는 거냐?"
그 한심한 성격과 별개로 벨토 로번은 좋은 근골을 타고났다.
여기에 귀족가의 도련님으로 지원을 받아 제법 실력 있는 무인이 되었고 그것이 더욱 그를 안하무인으로 만들었다.
친구들 사이에서야, 동등한 이들 사이에서는 유약한 인간이었으나 자기보다 약하다 판단한 이들에게는 이렇게나 용맹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여기에 술까지 들어갔으니 앞뒤조차 보이지 않고 기분대로 날뛴다.
벨토 로번을 올려다 보는 남자는 주눅들지 않고 말했다.
"자신을 위해 조언해주는 이에게 폭력을 행사하다니. 부끄럽지 않습니까?"
"뭐, 이 새끼야! 네가 뭔데 참견해서 잘난 듯 지껄이는 거야!"
"명예를 아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이런 불의를 보고서 참지 않고 나서는 게 정상 아니겠습니까."
"명예? 불의? 이 새끼가! 나랑 싸우자는 거야? 어?! 이 벨토 로번이랑?!"
큼지막한 주먹을 불끈 쥐고서 쳐들며 벨토 로번이 소리쳤다.
웬만한 이라면 그 이름과 주먹을 보는 순간 꼬리를 말고 물러났다.
벨토 로번은 이번에도 그렇게 될 거라 생각했으나.
"주먹을 믿고 이토록 안하무인으로 싸움을 건다면, 제 명예를 위해서라도 물러날 수 없겠네요."
아니었다.
이 자기보다 작고 이렇다 할 기세조차 느껴지지 않는 허수아비 같은 놈은 주제 파악도 못하고 싸우자고 덤비는 것이었다.
"오, 그래. 결투하자는 거지. 너, 오늘 잘못 걸렸어."
뿌드득-!
벨토 로번이 두 주먹을 꽉 쥐었다.
안 그래도. 진짜 안 그래도 속에서 천불이 올랐던 걸 술로 겨우 달래던 차였다.
한데 그 화를 분출하라고 이렇게 하늘이 샌드백을 보내 주셨으니 감사할 따름이다.
조금 과하게 손을 쓰겠지만, 괜찮다.
이 세계엔 그 이름도 대단하신 '무림특별법'이 있지 않은가.
서로가 결투에 동의하였고 자신의 수행원은 물론이요 친구들도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다.
이 허수아비놈이 다소 심하게 다쳐도 그는 얼마든지 정당방위라는 소리다.
…그렇게 후폭풍이 엄청날 일을 단순하게 생각한 벨토 로번은 거침없이 주먹을 내뻗었다.
허나 기세와 달리 조금은 힘을 뺐으니 단 한 방에 놈이 나가떨어져서는 안 됐기 때문이다.
어디까지나 바닥을 구르지 않을 정도로만.
그래서 화가 풀릴 때까지, 아슬아슬할 정도까지 두들겨 팰 생각이었다.
훙-!
술에 취해 있지만 그래도 꾸준히 단련한 주먹은 투로를 따라 빠르고 강하게 쏘아졌다.
우선 안면에 한 방.
이빨 두어 개 정도는 허공에 뿌려 주자.
툭.
'……?'
자신만만하게 그런 계획을 세웠던 벨토 로번은 갑자기 세상이 기우뚱, 기울자 이해를 하지 못하고 반응이 늦었다.
세상이 기울어 똑바로 내뻗었던 주먹마저 헛손질이 되었다.
뭐지? 세상이 기울다니?
그렇게 생각하는 벨토 로번은 자신의 주먹을 쳐낸 가벼운 손짓 한 번이 몸 전체를 기울게 했다고는 상상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뻐억!
"꺽."
안면을 후려치는 거대한 충격에 벨토 로번은 대번에 필름이 끊겨 쿠당탕, 꼴사납게 바닥을 나뒹굴었다.
그 일이 있고서 날이 채 밝기도 전에.
[소천마 김도진, 벨토 로번을 때려 눕혔다!]
유럽의 새벽이 사건으로 떠들썩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