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해서 지존까지-630화 (630/741)

629화

또로록…….

도진과 마주한 벨토 로번의 눈동자가 정말로 소리라도 날 것처럼 또로록 굴렀다.

도진의 영어는 유창하였고 단어의 선택에도 틀림이 없었기에 그 뜻이 명확하게 전달 되었으나 벨토는 그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광산? 김가? 무슨 뜻이지?

가문의 36대라고 했으니 이건 '귀족'가의 후손이라 말한 건가?

조심스레 구르는 눈에 비해 머리는 팽팽 돌았으나 답을 도출해내지 못했고 도진은 씨익 웃었다.

"반갑습니다. 로번가의 벨토님."

"아, 그. 예. 반갑, 습니다."

결론이 나지 않았으니 행동도 명쾌하질 못하다.

벨토는 버벅이며 도진과 악수를 했고.

"……."

"……."

침묵이 어색함에 비례하여 쌓였다.

도진과 클로에는 전혀 불편하지 않은데 벨토는 시시각각 불편함에 몸이 베베 꼬일 것만 같았고 결국.

"즈, 즐기시기를."

"네. 벨토씨도요."

바보같은 말을 남기며 후퇴하고 말았다.

어쩐지 뒤에서 도진과 클로에가 자신을 비웃는 것만 같은 느낌에 시달리며 어느 무리에 합류한 벨토는 따가운 비난의 시선을 감당해야 했다.

"어이, 벨토. 뭐한 거야. 도대체."

"그 멍청한 모습이라니."

"그, 그게 아니야."

"아니긴 뭐가 아니야."

유약한 벨토는 몇 번이고 버벅이다 겨우 스스로의 행동을 항변할 수 있었다.

"쾅, 솬?"

"가문의 36대손이라고 했다고?"

"그래. 그랬다니까!"

기가 센 친구들이 그제서야 벨토의 말을 듣고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한국에도…… 귀족 같은 제도가 있긴 했지?"

"아니. 그건 옛날 이야기고 한국에 귀족 같은 건 없을 텐데."

"맞아. 일본에야 천황이라는 게 있다지만 한국은 아예 왕실 자체가 사라졌다고 들었어."

"그럼 소천마가 한 이야기는 뭐야?"

그들은 혼란에 빠졌고 결국, 그날 계획의 실행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다름 아닌 유럽의 청년 귀족 모임이다.

개중에서도 악질적인 철부지들.

그들은 세상 물정을 모르는 어린아이가 아니면서도, 오히려 그렇기에 더욱 남들을 짓밟고 그 위에 서길 원했다.

그들이 그렇게 자란 건 당연하게도 집안의 영향이 컸다.

유럽의 귀족들은 과거 귀족들이 그러했듯 당연히 무(武)를 등한시하지 않았다.

일정 수준 이상의 무공을 익혀야만 했고 자연스레 그들은 귀족이면서 동시에 무림인이었다.

이렇게만 보면 그들은 무림특별법을 찬성할 것 같았지만, 아니었다.

대략 절반 정도의 귀족들.

그들은 오히려 무공을 익힌 무림인이기에 이번 무림특별법의 개정에 찬동했다.

다른 이유가 아니다.

지금의 무림특별법이 그들마저도 '하층민과 동일한 입장'으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이다.

무림특별법은 무림인 사이의 '폭력적인 대결'에 합당한 이유가 있다면 그것을 정당하다고 인정한다.

이 때문에 그들은 귀족이면서도 귀족으로서의 '권위'를 휘두를 수가 없었다.

명예롭고 고귀한 귀족임에도 그 권리를 행사할 수가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 그들은 무림특별법의 개정을 통하여 상위의 심판 기구를 도입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무림인이지만 똑같은 무림인이 아니다.

그들은 무공에 더하여 신분과 권력이란 것을 가지고 있으니 이로써 심판 기구의 자리를 차지하여 우위에 서려는 의도를 가진 것이다.

하층민에게 목줄을 채움으로써 주인으로 다시 설 수 있다.

그런 사상에 물든 귀족가의 청년들이 파티에서 뭉쳤고 무림특별법을 지지하는 이들 중 대표격인 소천마 김도진을 노릴 '계획'을 짠 것이었다.

계획은 그리 거창하거나 복잡한 게 아니었다.

오히려 단순했으니 '귀족이 아닌 무림인' 도진과의 마찰을 통하여 소란을 일으키려 했다.

소천마 김도진은 무림특별법을 옹호하는데 귀족이 아닌 평민이다.

그런 평민이 귀족과의 마찰로, 그것도 신분과 관련한 문제로 소란을 일으킨다면.

과연 파티에 모인 귀족들이 소천마를 곱게 보겠느냐는 거다.

무림특별법에 관한 부분에서야 대립하고 있다지만 어쨌든 같은 귀족 사이다.

신분에 관한 일로 마찰이 발생하면 귀족들은 팔이 안으로 굽을 수밖에 없다.

만약 여기서 소천마가 신분에 관하여 안 좋은 소리라도 하면 금상첨화다.

귀족들이 아닌 정치인이나 기업가들도 이 소란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않으니 파티에서 소란을 일으킨 자체가 부정적인 이미지를 가지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그 다음은 어른들에게 맡기면 된다.

그런 목적으로, 의도적으로 접근하여 도발을 한 벨토 로번이었으나.

'광산 김가 36대손 김도진입니다.'

도진의 그 한 마디로 벨토가 속한 청년 귀족들은 어이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물론!

포기한 건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일보 후퇴였고 정보 수집에 나섰다.

"켈리가 케이팝이니 드라마니에 빠져 살았지?"

"맞아. 켈리라면 뭘 좀 알고 있을 거야."

한국 노래와 드라마에 빠져 사는 '오타쿠'가 한 명 있어 우선 그녀를 찾았다.

귀족가의 여식이면서도 큰 안경에 감자칩을 우걱이며 소파에서 드라마를 보는 꼴이 한심했으나 내색하지 않고 그들은 소천마의 발언에 관하여 물었고.

"아, 그거. 양반가 자손이란 뜻이야."

그녀는 아는 분야에 관한 질문에 어깨를 펴며 답했다.

"양반?"

"어. 그러니까 귀족가 자손이란 거지."

설마했는데.

정말로 소천마 김도진이 귀족가 자손이라는 말에 청년 귀족들의 표정이 나빠졌다.

"그런데 그거. 그냥 말만 양반이지 한국에서는 우리처럼 귀족 같은 취급을 받지 않아. 애초에 한국인 대부분이 양반이거든."

"뭐?"

* * * *

다음날.

클로에 덴젤과 함께 파티에 참석하여 많은 이들의 주목을 받았던 소천마는 오늘 더 큰 주목을 받게 되었으니.

"허."

"아디나 영애까지……."

오늘은 웨일스 후작가의 영애를 에스코트하며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리고 입장해서는 프랑스를 대표하는 명장이자 경계를 넘어선 고수, 안토니오 덴젤과 클로에 덴젤이 자리한 테이블에 합석하여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나누었다.

이후 웨일스 후작이 아들과 함께 나타나서 두 개의 테이블을 차지한 뒤로는, 누가 보아도 그곳이 파티의 중심이 되었다.

덴젤 공방과 웨일스 후작가.

프랑스와 영국의 한 손에 꼽히는 두 가문이 함께 하였으니 안면을 트려는 이들이 모여들었고 '진실'을 알게 된 청년 귀족 모임은 이를 바득바득 갈면서도 쉽사리 소천마에게 접근하지 못했다.

알고는 있었다.

알고는 있었는데, 이렇게 실제로 보게 되니 새삼 소천마란 존재가 어느 정도인지를 싫어도 깨닫게 된다.

"제길."

"의기양양해서는."

그들은 거칠게 말했지만 사실은.

"오빠. 저 겨울 방학 때 놀러가도 돼요?"

"물론이지. 릴리는 언제나 환영이야."

"정말이죠? 나 가이드 해 줘야 해요."

"맛있는 것도 사줄게."

"와! 사랑해요, 오빠."

"어허. 다 큰 애가."

…부러웠다.

"클로에. 있다 저녁에 오랜만에 같이 대련이나 할까?"

"예. 감사합니다."

"감사는 무슨. 우리 사이에."

…진짜 부러웠다.

동경의 대상이지만 단단하고 날카로운 성격에 한 마디 말을 거는 것조차 조심스러운 릴리 아디나 웨일스에 클로에 덴젤과 저렇게 허물없는 사이라니.

이가 바득바득 갈리고 손발이 벌벌 떨릴 지경이다.

그래서 그들은 두 눈을 부릅뜨고 시비를 걸 기회를 노리다.

"…소천마님."

도진이 자연스럽게 홀의 외곽으로 나온 그 순간 득달같이 달려든 것이었다.

"오, 로번가의 벨토님. 오늘도 오셨군요."

오늘도 오셨군요? 어? 화나네?

큰 의미도 없는 말인데 벨토는 화가 났다.

그 화를 담아 눈을 번뜩이며 말했다.

"예. 저희가 이런 자리에 빠질 수는 없는 일이지요."

"그렇군요."

성의없이 받아치는 소천마.

벨토는 즉시 공세에 나섰다.

"어제 소천마께서 광산 김가 36대손이라고 하셨지요."

"예. 그랬었죠. 죄송하게 됐습니다."

"예? 무엇이요?"

"동양의 문화를 당연히 아실 거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닐 거라는 생각을 못해서 당황스럽게 해 드렸네요."

"…아니, 아닙니다."

그것도 모르냐.

그런 의도가 읽히는 것 같아서 벨토는 붕붕 고개를 젓고선 빠르게 말을 이었다.

"생각해 보니 말씀대로 제가 그 부분에 관하여 잘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공부를 좀 해 왔습니다."

"오, 그러셨군요."

"한국은 똑같은 김이라도 같은 가문이 아니고 본관이란 것이 있어 구분이 되더군요."

"예, 맞습니다. 하루 사이에 정말 잘 조사하셨네요."

칭찬을 받고 있는데 재롱을 부리는 동물을 보고 손뼉을 치는 것 같아 또 화가 나는 벨토였다.

하지만 그걸 티내면 지는 거다.

그러니까 벨토는 열심히 표정관리를 하며 말을 이었다.

"광산이란 것은 그 본관이고 광산 김씨는 상당한 명문가라는 걸 알았습니다."

"하하. 감사합니다."

…그걸 왜 감사하는데.

베알이 뒤틀리기 시작한 벨토 로번.

그는 슬슬 칼에 손을 올렸다.

"한데, 그렇게 조사하다보니 좋지 않은 내용이 보이더군요."

"좋지 않은 내용이요?"

"예. 한데 말씀드리리가 좀 조심스러운 것이……."

말을 흐린다.

흘끔-

그러면서 눈치를 보는 것이 누가 보아도 제발 물어달라는 구애를 하고 있다.

도진은 이 어리숙한 귀족 청년의 장단에 타 주었다.

"괜찮습니다. 말씀해 보시죠."

그러자 화색을 다 감추지 못하며 벨토 로번이 말했다.

"예. 그러니까 그게, 대한민국에서 양반가라 하는 사람 대다수는 사실 노예, 한국말로는 '상놈'이라는 이야기가 있더라구요."

"……."

"……."

자극적인 단어에 은근히, 그러나 귀를 바짝 세우고 있던 이들의 시선이 대번에 쏠렸다.

지금.

세상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이라는 말이 과언이 아니라고까지 평가받는 소천마 김도진에게.

귀족가의 애송이가 감히 입에 담기도 어려운 소리를 해 버렸다.

그 애송이를 마주한 도진은, 그러나 여전히 옅게 웃는 얼굴이었다.

아는 사람들은 벌벌 떨었을 텐데.

본래 하룻강아지는 범 무서운 줄을 몰라 기세등등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본래 귀족이란 소수의 선택받은 신분입니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말기에 이르러 족보의 판매가 빈번했고 혼란기에는 아예 위조하여 노예, 상놈들마저 양반을 자처하는 지경에 이르렀다더군요."

"정말로 많이 조사하셨네요. 이 정도면 어디가서 한국 양반에 대해 좀 안다고 자신하셔도 되겠는걸요?"

…이놈이 그래도 여유있는 척을.

벨토 로번은 배에 힘을 빡 주고 칼을 뽑았다.

"그래서 말입니다, 소천마."

"네."

"소천마께서는 당연히 정통 양반가의 후손이시겠지요?"

쿠궁-!

지켜보던 이들은 머릿속에서 그런 소리가 울리는 것 같았다.

'와…….'

'저놈이 기어이.'

'저걸 질러 버리는구나.'

사실 오만하고 신분에 취해 사는 어린 애송이들의 수작 따위야 닳고 닳은 이들은 다 꿰뚫고 있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무림특별법에 찬성하는 이들도, 반대하는 이들도 그들을 말리지 않았으니 반대하는 쪽은 오히려 그렇기에 잘 되면 좋은 명분으로 삼을 생각이었고 설령 좀 어긋나더라도 뭘 모르는 어린 친구들의 실수나 치기로 포장할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찬성하는 쪽도 마찬가지로 그것을 명분삼아 반대하는 이들을 공격할 수 있었고 무엇보다.

'소천마를 건드리다니.'

'미친놈도 소천마는 안 건드릴 텐데.'

저게 자살행위란 걸, 아니 차라리 자살행위가 더 안전한(?) 행위란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두의 시선이 한껏 집중된 가운데 도진은 아무렇지 않게.

"그게 중요한가요?"

라고 말했고 벨토 로번은 주먹을 불끈 쥐며 속으로 소리쳤다.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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