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7화
할아버지.
그 단어에 심상세계에서 듣고 있던 장호의 기척이 크게 일렁였다.
"소유. 할아버지께서 지어주신 제 이름입니다."
장소유.
비로소 듣게 된 그녀의 이름을 지어준 건, 다름 아닌 장호였다.
"수많은 사람들이 재앙에 휘말려 다시는 볼 수 없게 되었고 재앙은 구분을 두지 않아 저의 부모님 또한 비껴가지 않았습니다."
이단과 이단에 잠식당한 이들의 거센 파도 속에 전쟁은 계속되었고 그 전쟁을 구분없이 덮쳤던 재앙에 그녀의 부모님 또한 휩쓸리고 말았던 것이다.
"그렇게 부모님을 잃은 저를 보듬어 주신 것이, 할아버지셨습니다."
부모를 잃은 작디작고 여린 아이는 고금제일천마 이래 최고의 무인이자 공포로 군림하던 사신(死神)의 손에 자랐다.
허나 그 사신은 서툴지만 너무나 따듯해서.
채 5년이 되지 못한 세월의 온기가 결코 꺼지지 않고 그녀의 가슴에 남았다.
"재앙은 할아버지마저 앗아갔습니다. 하지만 저는 혹시나하는 기대를 버리지 못했던 것입니다. 재앙에 휩쓸린 이들의 흔적이 이곳에서 발견되곤 했는데 그렇다면."
"혹시, 할아버지라면 그럼에도 이곳에 살아계신 것은 아닐까. 그저, 나를 기억하지 못하시는 것 뿐이지 않을까, 하고."
그리고 그녀의 시선이 도진과 마주한다.
깊고 투명한 눈동자.
아름다운 곡선을 그려 분명히 장호와는 다른 눈매이지만 누구보다 더 선명하게 장호를 연상케하는 그녀를 마주하여.
"……스승님께서는, 돌아가셨습니다."
도진은 조금 늦게, 그렇게 답하였다.
"…그렇, 군요."
부지역에 이르러 자신을 완벽하게 다스릴 수 있을 그녀는. 그럼에도 조금 흔들리고 말았다.
그런 그녀를 보듬어 주고 싶어서.
도진은 앞서와 달리 빠르게 말을 이었다.
"하지만, 스승님의 진전은 분명하게 제가 이었습니다."
도대체 그것이 그녀에게 있어 무슨 위로가 될까.
그런 의문이 말하면서도 들고 말았던 도진이지만.
"예. 그렇군요. 분명히 그랬습니다."
장호의 손녀. 장소유는 너무나 선명하고 아름답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할아버지의 진전을 이은 당신께서 계시니, 저는 여전히. 계속 혼자가 아니었어요."
* * * *
회의를 소집하기로 했다.
천마신교의 핵심이 되는 이들 모두가 모여서, 장소유가 깨어나며 알게 된 것들을 공유하고 앞으로의 방침을 정하기로 하였다.
그 회의에 앞서.
도진은 심상세계에 침잠하여 스승들을 마주하고 있었다.
"이제야 기억이 났다."
위지혁이 말했다.
"……."
그리고 장호 또한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따져보면 정말로 수많은 모순이 있던 이야기들이다.
고대 무림 시절 죽었던 위지혁이, 그리고 그보다 300년이나 뒤의 인물이었던 장호가 함께 저승에 있었고 탈주하였는데 짐작조차 가지 않는 미래의 도진에게 깃들었다.
처음부터 현실적이지 않았던 이야기라 의문을 가지지 않아서 그렇지 이상하다 생각하는 순간 한없이 이상한 이야기가 된다.
하물며.
위지혁과 장호는 이제서야 자각할 수 있었다.
스스로가 '왜', '어떻게' 죽었는지를 전혀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음을.
"영혼의 소실……이군요."
"그렇구나."
차원의 붕괴에 휘말려 육체를 잃고 죽음을 맞이하였다.
그러나 지고의 영역에 이른 영혼은 소멸하지 않고 차원을 넘었으니 위지혁과 장호는 '저쪽'이 아닌 '이쪽의 저승'에 가고 말았던 것이다.
그리고 두 사람 사이의 시차도 300년이 아니었다.
'시공간의 붕괴는 간접적으로도 우리의 삶에 영향을 끼쳤으니 시간의 흐름을 어지럽혔습니다.'
어떤 곳은 1년이 다른 곳의 10년에 해당할 정도로 느리게 흐르는가 하면 또 어떤 곳은 10년이 1년에 해당할 정도로 빠르게 흐르기도 했다.
사실은, 두 사람의 시간차는 절대적인 기준을 두면 100년이 채 되지 않았다는 게 밝혀졌다고 주서린은 알려 주었다.
이것도 현대의 문명이 저쪽에 흘러들어가며 밝혀진 것이었다.
그렇게 시간의 어그러짐으로 인해 동시에 불안정한 차원을 넘게 된 위지혁과 장호는 영혼을 일부 소실하였고 기억을 잃은 채 무엇이 잘못되었는지조차 자각하지 못하였다.
-너희는 이곳을 통하여 전생은커녕 재판을 받을 수조차 없다는 말이다!
-에에이! 왜 하필 또 여기서 사고가 나는 거냐!
그런 채로 알 수 없는 소릴 지껄이며 전생조차 할 수 없는 영혼이라는 놈들의 앞에서 상을 뒤엎고 이승으로 나온 것이었다.
그리고 온전하지 못한 영혼이었기에 점점 힘을 잃어가다.
도진에게 깃들 수 있었다.
위지혁은 같은 시간을 살았던 이들을 생각했다.
탁탑마왕, 투마 구지천.
광룡군, 용마 강룡서.
독마 하연화 등.
위지혁을 따랐던 이들 중 다수가 위지혁과 마찬가지로 이곳으로 넘어와 그 흔적을 남겼음을 알게 되었다.
위지혁 사후 천마신교가 은둔하여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고 장호가 말했었는데 그 이유가 이것이었다.
핵심이 되는, 기둥들이 위지혁과 함께 재앙에 휘말렸으니 흔들리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사이.
뿌리뽑지 못했던 이단이 종말을 향해가는 세계에 득세하였고 지금에 이르렀다.
'하지만.'
희망의 불씨는 이어졌다.
재앙에 휘말렸으나 그들은 죽지 않고 후대에 자신의 것을 전하였다.
그렇게 전해진 소중한 것들이 이어지고 또 이어져.
결국 위지혁과 장호가 깃든 도진과 이어졌으니까.
이 시대에, 이 세계에 천마신교는 다시 그 이름을 선포하였고 이제 저쪽에 있는 천마신교와 이어질 다리가 놓일 것이었다.
천마 위지혁과 공주 주려취의 후손인 주서린이자 위서린, 그리고 사신 장호의 손녀인 장소유를 통하여서 말이다.
"……."
그리고 손녀를 보게 된 장호는 평소 이상으로 침묵이 무거웠다.
재앙으로 딸과 사위를 잃었음을, 그 딸과 사위를 대신하여 보살폈던 손녀를 잊고 있었음을 이제서야 기억해냈기 때문이다.
그것을 잊고 있었다는 것 자체가 장호에겐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자신이 영혼으로나마 남았다는 걸 손녀에게 말하지 못했다.
그녀가, 장소유가 자신에 관하여 물었을 때 장호는 제자에게 말하였다.
-나는 죽어 다시 만날 수 없는 사람이다.
그리 말하여 달라고.
실제로 장호는 죽었으며 도진의 심상세계에 깃들어 있을 뿐 도진을 제외한 누구와도 소통할 수 없는 입장이었다.
그런 입장에서 사실은 영혼으로나마 도진에게 깃들어 있고 너를 보고 있다고.
그렇게 말하는 건 손녀에게 있어 더 잔인한 일이라는 걸 장호는 지극히 이성적으로, 판단했던 것이다.
그의 존재를 간접적으로밖에 증명할 수 없고 대화조차 도진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해야만 한다.
그것이 얼마나 잔혹한 일일 것인가.
그래서 대신 제자에게 부탁하였다.
"그 아이는, 나의 사신공을 그리도 열심히 익혔다."
그럼으로써 할아버지와 더욱 가까워질 수 있다 믿었다.
더 확실하고 명확하게 소통할 수 있다 믿었다.
그러니까 할아버지의 사신공과 완벽하게 똑같은 사신공을 익히길 바라였다.
그런 장소유였기에.
정통한 후계자로서 사신공을 익힌 도진의 침기와 마치 연리지처럼 얽힐 수 있었던 것이다.
"네가, 나를 대신하여 소유를 지켜다오."
처음으로 스승 장호가 분명히 부탁하였다.
도진은 그 어느 때보다 분명한 의지를 담아 예, 하고 대답했다.
"세상 그 누구도. 다시는 소유 씨를 다치게 할 수 없을 겁니다."
"물론, 서린 씨도요."
* * * *
다른 차원으로 간 황녀는 상류층을 이단 세력이 단단히 장악하고 있는 현실을 마주하게 됐다.
그들보다 아득히 빠르게 이 세계로 넘어온 이단 세력이, 그에 동조하는 자들이 결코 흔들 수 없을 정도로 공고히 세력을 구축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황녀는 가장 낮은 곳에서부터 시작하였다.
그들을 모으고, 보듬고, 올바른 길로 나아갈 수 있도록 가장 낮은 곳에서부터 기반을 다지고 힘을 모았다.
무수한 시행착오와 여전히 풀어야 할 많은 문제들을 안고 있었지만 이내 작게나마 그 결실이 열매를 맺었을 때.
그녀는 이단 세력에 의해 살해당하였고 세상에 남은 '황녀'는 단 한 명이 되었다.
"…이 아이를 지키기 위하여 저는 황녀를 위장하였고 지금에 이른 것입니다."
장소유가 이 세계의 천마신교 사람들 앞에서 이야기하였다.
황녀가 살해당하고 그녀의 딸이 유일한 황실의 정통을 이은 존재가 되었을 때.
유일한 희망인 그녀를 지키기 위하여 자매처럼 자랐던 장소유는 자신을 황녀로 위장하였다.
그리고 유일한 황녀가 된 위서린이자 주서린은 기억을 봉인하고 시간마저 조작된 기억을 가진 채 이쪽 세계로 보내진 것이었다.
스스로마저 속인 위장에 이단 세력은 속아넘어갔고 그들은 장소유를 필사적으로 죽이기 위해 전력을 집중하였다.
허나 사신의 손녀는 결국, 이곳에 섰다.
"……."
나지윤, 오성아, 한유아.
서소담, 윤상미, 우서진, 클로에, 성민혁, 성지인.
위취련, 위연서, 우벽진, 소여은, 민지서.
여기에 서태주와 약리지 등 천마신교의 울타리 안에 있는 이들 중 당장 모일 수 있는 이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
그렇게 모인 이들은 믿기 힘든 이야기에 잠시 침묵하였다.
그리고 그 침묵을 가장 먼저 깬 것이.
"그래, 그랬구나. 이제야 명확해졌어."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는 나지윤이었다.
"내가 모자란 건 줄 알았는데. 이렇게나 결정적이지만 결코 생각할 수 없는 요소가 비어 있었던 거였구나."
그리 말하는 나지윤을 시작으로 하여 모두가 장소유의 이야기를 받아들였고 앞으로의 일을 논했다.
"전쟁은 피할 수 없을 거예요. 계획을 이루기 위해 필수적인 것이니까요."
기억을 모두 되찾은 황녀 주서린이 말했다.
이단을 중심으로 한 세력은 저쪽 세계를 버리고 이쪽으로 이주하려 했다.
간헐적으로 일어나는 국소적 재앙 때문에라도 저쪽 세계에서는 더 이상 살 수 없다.
하지만 천만이 넘는 인간이 동시에 이쪽으로 넘어왔을 때.
그들은 '인권'을 보장받을 수 있을 것인가.
그리 주장하며 '천마'는 싸워야 한다고 했다.
그를 따르는 수뇌부는 설득할 것도 없었다.
누리던 것을, 손에 쥔 것을 결코 놓지 않으려 했고 항상 더 많은 것을 쥐려는 자들이었으니까.
다른 세상과 이야기하는 대신 은밀히 스며들어 빼앗기로 했다.
그래서 그들은 이 세계를 움직일 수 있는 위치를 차지하려 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더 많은 것을, 세계 자체를 차지하려 한다.
"전쟁 속에 수많은 절차와 사소한 것들은 무시될 테고 그런 시기라면 적어도 자신을 따르는 세력은 문제없이 데려올 수 있을 거라는 계산이네요."
나지윤의 말에 주서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단의 수괴가 원하는 체제도 구축할 수 있으니까요."
종말에 치달은 세계에서 덩치를 키운 이단의 수괴.
천마이자 황제를 참칭하는 자.
이미 구축된 것들을 파괴하고 원하는 대로 새로 지으려 한다.
그 과정에서 흐를 피와 눈물은,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놈들의 의지가 확고한 이상 억지로라도 전쟁은 일어날 테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명확하네요."
그것은 이미 결론이 난 이야기다.
최대한, 그들의 세력을 축소시켜야 한다.
그를 위하여 도진이 유럽으로 갈 예정이다.
그리고.
"세력이 축소되더라도 이제와서 이단이 물러설 리는 없어요."
전쟁은 피할 수 없고 수많은 비극을 불러올 것이다.
그러니까 가능한 빠르게 전쟁을 종식시켜야 했고 가장 간단한 방법이, 하나 있었다.
주서린과 장소유, 그리고 모두의 시선이 도진에게 모였다.
"소천마. 당신께서, 이단을 참(斬)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