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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해서 지존까지-627화 (627/741)
  • 626화

    명(明)나라가 멸망하였다.

    300년의 역사를 지닌 나라의 멸망이었으나 충격은 그리 크지 않았다.

    그것이 이미 확정된 미래였으며 그깟 나라가 아닌, '세상'이 멸망해가는 시대에서.

    인류는 살아가고 있었으니까.

    그것을 무어라고 해야 할까.

    천재지변(天災地變)?

    아니. 천지의 재앙이라고 하기엔 그 단어가 너무 초라하다.

    너무 강한 말이어서 오히려 거부감이 느껴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멸세(滅世)'의 재앙이라고밖엔 칭할 수 있는 단어가 없었다.

    갑자기.

    세상이 뒤틀리고 붕괴하였다.

    사람들은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할 수가 없었다.

    '시공간이 붕괴한다'는 개념을 그 시대의 사람이 어찌 이해할 수 있었겠는가 말이다.

    시간과 공간이 뒤틀려 붕괴하였으니 그곳에는 무엇도 존재할 수 없었고 휘말린 인간 또한 다시는 볼 수 없었다.

    처음에는 국소적인 현상이었으나 마치 댐이 무너지듯 그 영역이 넓어져 명나라는 고립되고 말았다.

    명나라의 사람들은 알고 있었다.

    세상은 명나라에서 끝나지 않으니 아득히 먼 곳에 구라파(歐羅巴. 유럽)라 불리는 땅이 있어 그들과 외모가 많이 다른 색목인(色目人)이 산다는 걸 알았다.

    그뿐인가.

    심지어 세상 끝까지 물로만 가득 차 있을 것만 같은 바다 너머에 또 다른 대륙이 있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세상은, 그토록 넓은 명나라조차 작을 만큼 넓다는 걸 민초들마저 아는 시대였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 세상은 그렇게 넓지 않다.

    대부분이 붕괴하여 사람이 존재할 수 없었다.

    오로지 붕괴 안에 감싸인 명나라의 대륙만이 사람의 존재를 허락하였다.

    그야말로.

    세상이 붕괴하여 멸망을 향해 가고 있었고 누구도 그것을 부정할 수 없었다.

    그래서였다.

    구세(救世)를 논하는 종교가 득세한 건.

    천마신교가 널리 퍼진 것은.

    그것은 불같이 일어나 민초를 휩쓸었고 이내, 무능하면서도 잔악하였던 관리를 능지처참하고 황궁마저 불태워 버렸다.

    그리고 황족은.

    단 한 명도 남김없이 오체분시 당하여 잿더미가 된 황궁 위에 버려졌다.

    멸망이 주는 공포와 그 공포를 덧씌우는 종교의 광기가 그런 광경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그 광기의 가장 높은 곳에서.

    스스로를 '천마(天魔)'라 주장하는 이는 선언한 것이었다.

    -내가 무심한 하늘을 대신하여 너희를 구원할 것이다.

    신위(神威)를 보이며 저항하는 황군을 학살하였던 그에게 사람들은 복종하였으니 이대로 멸망해 가는 세상에 천마가 군림할 것 같았다.

    하지만 어느 문관(文官)에 의하여 상황이 급변하였으니 그가 공개한 한 권의 실록(實錄) 때문이었다.

    명사실록(明史實錄).

    황제마저 관여할 수 없었던.

    명나라 역사를 오로지 진실로만 기록한 역사서.

    거기에는 존재가 지워졌으나 신분을 박탈당하지 않았던 황실의 공주가 있었고 그 공주의 후손이 있다는 내용이 기록돼 있었다.

    무엇보다.

    그 공주와 혼인한 것이 고금제일인이자 고금제일천마였던 위지혁이란 것이 알려진 것이 결정적이었다.

    위지혁.

    역사상 가장 위대했던 천마이자 민초들에겐 하늘보다 더 신성시되었던 인물.

    그와 황실의 공주가 낳은 후손의 핏줄이 이어지고 있다는 이야기는 스스로를 천마이자 황제라 참칭하였던 천마신교의 '이단'에게 너무나 치명적이었던 것이다.

    그가 진실된 천마가 아니었으며 민초를 이끌던 것이 진실된 천마신교조차 아니었다는 것이 알려졌고 사태는 급변하였다.

    공주의 후손이 머물던, 속세와 멀어진 채 은둔하였던 천마신교가 사태에 휘말렸고 가까스로 살아남았던 귀족들이 이단에 물들지 않은 민초들과 함께 모여들었다.

    그리하여.

    멸망해 가는 세계에서 두 집단은 대립하게 된 것이었다.

    * * * *

    "…가겠습니다."

    "아니됩니다!"

    황녀의 말에 신하들이 기함하였다.

    허나 결코 흔들리지 않는 심지가 눈동자에 고스란히 드러나는 황녀는 물러나지 않았다.

    "가지 않으면, 이대로 몸을 사리기만 하면 멸망할 뿐이라는 걸. 그대들 또한 알고 있지 않습니까?"

    "……."

    신하들은 그 말을 부정하지 못했다.

    거짓으로라도, 부정할 수 없을 만큼 그들은 몰리고 있었다.

    "그들은 이제 누구나 벽력을 뿜어낼 수 있는 화기를 쓰고 있습니다. 그에 비해 우리는 어떻습니까. 무공조차 익히지 않은 이에게 수 년을 고련한 무인이 허무하게 목숨을 잃고 있거늘, 우리는 그들에게 닿지도 못하는 화살밖에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들이 아득한 거리를 무시하고 목소리를 주고받을 때, 우리는 불을 피우고 전서구조차 그 벽력에 꿰뚫리는 걸 두려워하여 쉽사리 날리지 못하고 정보에서 뒤쳐지고 있습니다."

    "허, 허나."

    "나는 이대로 말라죽고 싶지 않습니다. 무어라도 하고 싶고, 할 수만 있다면 나를 바라보고 있는 모든 백성을 살리고 싶습니다. 그것이. 나의 삶을 가치있게 할 유일한 방법입니다."

    "…황녀 전하."

    신하들이, 그리고 그들을 지켜보던 무인들마저 감복하여 고개를 숙였다.

    채 서른도 되지 않은 젊은 나이.

    하지만 그 눈동자 너머로 비치는 심지는 과연 모든 이가 스스로 그녀를 떠받들게 할 만큼 위대하다.

    고금제일천마의 후광이 비치는 듯 하였다. 그래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겠어요. 죽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고 모두를 구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어요. 그래야만 하니까요."

    황녀의 다짐과 선언을 누구도 부정할 수 없었던 것이다.

    '다른 차원'에 직접 가겠다는 선언을.

    * * * *

    "다른 차원."

    믿을 수 없는, 그러나 부정할 수 없는 황녀 '주서린'의 말에 도진이 그것을 소리 내어 말했다.

    "네. 다른 차원, 입니다."

    주서린은 그것을 고개를 끄덕여 재확인시켜 주었다.

    "세계의 영구적인 붕괴를 가져온 현상은 계속되지 않았습니다. 명나라가 고립된 이후 멈추었지요. 하지만 상대적으로 작은, 그러나 사람을 삼키기에는 충분한 붕괴가 빈발하였으니 그에 휘말려 사라지는 이가 적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붕괴가 사라지지 않고 일정 시간 유지되는 경우가 있었으니 그것이."

    다른 차원과 이어지는 '문(門)'이라는 걸, 이단이 알아내었다.

    천마신교보다 너무나 앞서서.

    "이단은 문 너머의 세상을 알게 되었습니다. 너무나 이질적인 그 세계를, 이단은 백 년이 넘도록 시간을 들여 조사하였고 공부하였으며 이내. 스며드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그것은.

    "…무형독."

    "예. 그들입니다."

    도진의 머리가 진실을 앎으로써 풀 수 있게 된 수많은 수수께기로 인해 일순 가득찼다.

    그래. 이제서야.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진실로 인해 수많은 의문이 해소되었다.

    "이 세계의 무림에 관한 흔적은 본래 우리 세계의 파편입니다. 이를테면, 알 수 없는 우주적인 요인으로 인해 지구에 대부분이 흩뿌려진 운석의 파편이었던 것입니다."

    주서린의 세계에 시공간의 붕괴를 일으킨 것이 어떤 것인지는 알 수 없다.

    허나 그로 인해 세계가 붕괴하였고 그 파편이 '지구'에 박힌 것이었다.

    "우리의 차원과 지구의 차원은 겹쳐 있습니다. 그러니까 차원이 다를 뿐 같은 곳에 있다고 할 수 있지요. 그래서, 어떤 우주적 요인에 의해 붕괴된 세계의 파편은 우주나 차원을 떠돌지 않고 같은 위치에 있는 지구에 박혀든 것입니다."

    어려운 부분을 제외하고 도식화하면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다.

    그리고 그 이야기로 인해 세계의 거대한 의문 하나가, 풀렸다.

    '과거가, 아니었어.'

    끊임없이 제기된 가설이 있었다.

    사실 고대 무림은 고대에 존재한 적이 없었던 게 아닐까, 하고.

    고대의 특정할 수 없는 시대에 있었던 게 아니었다고.

    특정할 수 없는 시대에 무림이 있었고 그것이 후대까지 이어지지 못하고 문명이 멸망하였다는 게 가장 타당성이 있어 주류가 되었지만 그들조차 설명하지 못하는 모순이 많았던 것이다.

    허나 그 누가 있어 다른 차원의 '문명'이 지구의 시공간에 끼어들었다는 생각을 할 수 있었겠는가.

    "중요한 건 그렇게 파편이 스며듦으로써 본래 다른 차원에 있던 두 세계가 연결되었다는 것입니다."

    '통로'가 생겼다.

    그로 인해 다른 차원의 '기(氣)'가 이 세계로 스며들었고 인류는 그 기를 다룰 수 있는 방법인 무공(武功)을, 본래 없었던 것을 갖게 되었다.

    밀도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이동하듯 기 또한 이동하였고 파편화된 세계의 흔적 중 무공을 발견하게 되면서.

    이 세계에 무림이 탄생한 것이다.

    "간헐적이었고 무작위로 생성된 통로는, 두 세계가 점점 섞이며 커지고 또 유지가 되기 시작했습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문'으로 보인다 해서 섣불리 들어설 이는 없었다.

    인간을 대신하여 넣은 물건 등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고 동물 또한 마찬가지였으니까.

    이것은 처음엔 그저 '유지되는 붕괴'로 여겨졌다.

    하지만.

    "…저쪽에서, 동물이 넘어왔습니다."

    이쪽이 아닌 저쪽에서.

    동물이 넘어왔고 이 너머에 고립된 명나라의 대륙 바깥이 있을 수 있다는 가능성이 생기면서 이야기가 달라졌다.

    "말씀드렸듯 문을 먼저 넘은 건 이단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거리낌없이 귀중한 목숨을 버림패로 사용하여 우리를 앞선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희생이 있었습니다."

    문은 그 당시 온전한 통로가 아니었다.

    일방통행인 경우도 있었고 단 한 명의 통과로 기능을 잃기도 하는 등 수많은 제약이 있었고 무엇보다, 영혼의 소실을 감당하여야만 했다.

    "영혼의 소실."

    "예. 문을 넘는 과정에서 자신을 구성하는 여러 요소를 상실하고 마는 것입니다."

    그 단계에서, 도진의 머릿속에 스치는 것이 있었다.

    "…서린 씨는 천마신교에서 나고 자랐다고 하셨죠."

    "예, 맞습니다."

    "그러면 혹시. 천마신교의 기둥들에 관해서, 알고 계신가요?"

    많은 것이 생략된 물음이었다.

    하지만 주서린은 도진이 누구에 관해, 무엇을 물은 것인지 바로 알아들었다.

    '멀지 않은 때'의 이야기였으니까.

    "예. 그분들은, 가장 위대했던 천마였던 위지혁 교주님과 함께."

    "세계의 붕괴에 휘말리셨습니다."

    "……."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답을 찾은 것 같은데 아귀가 맞지 않아 혼란이 불쑥불쑥 훼방을 놓는다.

    '스승님들은 저승으로 가셔서 재판을 받아야 했으나 그것을 거부하고 이승으로 오셨어.'

    '그게 내가 고등학생이 되기 얼마 전의 일이었지.'

    '하지만, 그래.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었어.'

    시대를 특정할 수조차 없는 시대의 사람이었던 위지혁과 장호가, 그토록 오랜 세월을 넘어 도진이 있던 시대에 있다는 것에 의문을 가져야만 했다.

    '용마.'

    용마(龍魔). 광룡군 강룡서.

    그에 관한 일도 곱씹을수록 이상한 부분 투성이였다.

    당장 자세히 짚을 순 없지만 시간에 관한 부분에서 '모순'이 있다는 걸 느낀다.

    그동안 많은 부분에서 느꼈던 모순이 사실은 고대 무림이 먼 시대가 아니라 그리 멀지 않은 과거의, 다른 차원이었음을 알게 되면서 해소되었으나 그럼에도.

    여전히 시간적인 모순이 있다.

    그로 인해 고민하는 도진에게 조용히 지켜보던, 사신공의 후예가 물었다.

    "한 가지. 개인적인 질문을 드려도 괜찮을까요?"

    "아, 네."

    장호를 연상케하는, 틀림없이 장호의 후손일 그녀가 물었다.

    "혹시. 장씨 성에 호 자를 쓰시는 분을 알고 계신가요?"

    두근.

    깊디 깊고 투명한 그녀의 목소리 이상으로 본능적인 어떤 예감이 심장을 뛰게 만들었다.

    도진이 그 감정을 다스리며 조심스레 말했다.

    "어떤 관계인지. 물어도 될까요?"

    그녀는 거리낌없이 답하였다.

    "저의, 할아버지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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