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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해서 지존까지-626화 (626/741)
  • 625화

    일반인과 무림인 사이의 갈등은 언제고 있어왔다.

    무림인을 아예 돌연변이라 부르는 자들이 있는가 하면 일반인을 진화에 뒤쳐져 멸종할 열등종이라 부르는 자들도 있었다.

    그야말로 극단적인 사상을 가진 자들.

    그러나 그것이 어디까지나 극소수의 극단적인 사상으로 끝날 수 있도록 시행착오를 거쳐 성숙한 사회가 되었기에 문제가 발생하지 않은 것이었다.

    일반인과 무림인은 다르지 않다.

    무림인이 일반인이며 또한 일반인이 무림인이다.

    그렇게 생각할 수 있도록 시스템이 구축되어 있다.

    당장 많은 이들이 성공을 위해 매달리는 A-3 자격증이 단적으로 시스템을 상징한다.

    일반인이 노력하여 A-3, 일류의 경지에 오른 무림인이 되어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살아가는 것이다.

    이미 사회와 무림이 다르지 않다.

    그것이 당연한 세상인데.

    "…사회는 무림인을, 무림을 특별하고도 위험한 집단으로 분류하고 그로 인해 무림 또한 사회를 경계하고 적대시하게 될 겁니다."

    나지윤의 말대로 지금 세상이 나쁜 쪽으로 변하려 하고 있었다.

    그 중심이 된 러시아의 행보는 모순 범벅이다.

    '무림인의 정당 방위'를 주장하며 전쟁을 벌여 놓고선 이제와서 무림특별법을 훼손하려 든다.

    "독재를 하려는 걸까?"

    한유아가 그렇게 추론했다.

    일리있는 추론이었다. 러시아는 겉으로는 민주주의라지만 사실상 독재국가니까.

    상황이 급진적이고 복잡해진 가운데 어찌되었든 '위험한 사태를 넘기기 위하여 예무르와 화해하였다'는 명분으로 자신들의 체제를 공고히하는 선택을 한 것이다.

    전쟁으로 인해 삶이 어려워진 지금 어떤 형태로든 전쟁을 종식시키려는 행보에 시민들은 찬성표를 던질 수밖에 없다.

    반발할 무림인들 또한 본래 러시아가 자신들을 위하여 나섰는데 설마 배신을 하겠느냐는 여론도 있을테니 일을 추진하기가 쉬워진다.

    하지만, 모든 가정은 무형독으로 인해 복잡해진다.

    "러시아와 예무르를 시작으로 무림특별법 개정의 목소리가 높아지면 무림인들도 가만있을 수 없으니 목소리를 내게 될 겁니다."

    "무림인들 중 기득권이 적지 않고 그렇기에 동시에 무림인들을 견제하려는 무림인이 아닌 기득권 또한 적지 않죠."

    "여기에 무형독이 뒤에서 부추긴다면."

    …전쟁, 이다.

    알 것 같았다.

    "전쟁은 많은 것을 무시하고 또 많은 것이 가치를 상실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죽으면서 공백이 생기죠."

    거기에 무형독이.

    무색무취의 무형독이 스며드는 것이다.

    굳은 얼굴로 오성아가 말했다.

    "전쟁을 막는 게 최선이겠지만."

    "최악의 경우엔 실패하겠죠."

    이미 전쟁이 벌어졌고 많은 나라들이 얽혔다.

    여기에 사회와 무림의 갈등까지.

    화약고의 문은 열려 있고 휘날리는 불씨를 다 막는 건 어려운 일이다.

    이 모든 걸 계획하고 의도하여 진행했다면.

    인정할 건 인정해야 한다.

    전쟁을 막는 건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도진이 옅게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해야죠."

    일견 무책임한 발언이다.

    하지만 그 발언을 한 사람이 무엇이 되었든 책임을 지고마는 사람이기에 강하게 타인의 마음을 움직인다.

    나지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그래도 해야지."

    * * * *

    전쟁이 일어나지 않기 위해선 뜻을 같이 하는 이들을 늘려야 한다.

    간단히 말하자면 아군을 늘려 적군이 싸움을 걸 생각을 하지 못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소리다.

    '아시아는 무림특별법에 찬성하는 입장이고 아메리카는 복합적이지. 러시아와 예무르는 무림특별법을 대대적으로 축소하려는 입장. 여기서 중요한 건 유럽이야.'

    나지윤은 그렇게 말하면서 유럽의 여론을 주도해야 한다고 했다.

    곧 정해질 유럽에서의 '다과회'가 지극히 중요해진 것이다.

    그렇게 결론이 난 회의장을 나와 도진은 곧 깨어날 황녀가 잠든 방 안에서 TV를 켰다.

    -그러니까 이게 떼를 쓰는 게 아니고 뭐냔 말이에욧!

    …켜자마자 오형숙 의원의 듣기 싫은 카랑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트러블이 해결되고 설명회가 진행되고 있는 중이었다.

    건수를 잡아 오형숙 의원이 전서린을 대표로 한 하오문을 밀어붙이고 있다.

    -음, 지켜보는 분들을 위하여 자세한 설명을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진행자가 오형숙 의원을 진정시키며 말했고 오형숙 의원이 크흠, 헛기침을 하고선 서류를 넘겼다.

    -지금 실크 로드 일대의 치안을 맡고 있는 건 유지문이란 문파입니다. 별다른 특징이 없는 중견 문파. 그런데 이게 사실은 위장이고 그 구성원이 하오문이란 말입니다.

    -그 말씀은.

    -예, 맞습니다. 인가받지 않은 문파가 자신들의 구역을 실질 지배하기 위해서 정부 상대로 기만을 했다는 말입니다. 기만!

    하오문은 반쯤 흑도에 걸친 문파였고 정식으로 인정받지 못한 문파였다.

    당연히 치안 유지 계약을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하지만 실크 로드는 분명히 하오문의 영역이었고 이 영역 안에 다른 문파를 들일 수는 없으니 위장 문파를 세워 치안 유지 계약을 따내 지금껏 운영해 왔다는 거다.

    오형숙 의원은 그 부분을 지적하며 전서린에게 삿대질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하오문을 정식으로 인가받은 문파로 탈바꿈시키겠다면서 정식 치안 유지 계약까지 하겠다는 주장을 하니 떼를 쓰는 게 아니고 뭐겠습니까! 저번 무림 대회에서의 명성을 믿고 아주!

    -예, 예. 의원님. 조금 진정하시고…….

    핏대를 세우는 오형숙 의원을 진행자가 다시 한 번 말린다.

    보통의 경우, 그리고 지금도 다수는 그런 오형숙 의원을 조롱하고 있었으나 일부는 이번만큼은 긍정적인 시선을 보냈다.

    어찌되었든 하오문이 흑도였고 떳떳하지 않은 일을 했다면 그 부분은 안 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전서린은 그런 비난을 부정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의원님의 말씀대로입니다. 하오문은 스스로의 이름으로 실크 로드를 지킬 수 없었기에 편법을 사용하였습니다.

    -그랬던 하오문이기에, 이제 그러지 않을 수 있도록. 떳떳하게 문파의 이름을 내걸고 활동하고 싶습니다.

    위장 문파를 내세웠으나 치안 유지 계약을 그 어디에도 부족하지 않을 만큼, 아니 오히려 과할 만큼 성실히 수행했다는 변명을 전서린은 하지 않았다.

    -과거 세탁이라도 하겠다는 겁니까?

    -예. 잘못되고 더러운 부분을 씻어내고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활동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이번 실크 로드 치안 유지 계약 요청서 또한 그런 의미로 제출한 것입니다.

    흑도에 완전히 물들어 흑도로 살기를 원하는 하오문(下汚門)과 결별하여 양지로 나온 하오문(下午門).

    그 하오문의 숭무지부는 실크 로드까지도 양지로 가져오려 했으니 하오문의 이름으로 제출한 치안 유지 계약은 계획의 일부였다.

    하오문이 천마신교와 친밀한 관계라는 게 알려졌고 비록 흠결이 있었으나 계약 수행 내역에서 흠결을 덮을 만큼의 공이 있었기에 일사천리로 일이 진행되나 했는데 정보를 입수한 오형숙 의원이 나서면서 이렇게 요란한 설명회까지 열린 것이었다.

    하오문은 물어뜯을 것이 많은 문파다.

    그 하오문을 물어뜯어 성공함으로써 자신의 이미지를 쇄신하고 천마신교에까지도 영향을 미치겠다는 게 오형숙 의원의 계획.

    -먹히는 것 같습니다.

    그것이 잘 되고 있다는 보좌의 섭음술이 오형숙 의원의 머리에 피가 몰리게 만들었다.

    서소담과 김도진에게 당한 것 때문에 자다가도 화가 치밀어 벌떡 일어나곤 했던 오형숙이었기에.

    -뭘 그렇게 번지르르한 말을 하고 있습니까! 아직도 그 버릇을 못 버린 게 보이는데!

    -약도 팔고 여자도 팔아야 하는데! 외부 인원이 감시하면 그게 어려우니 이렇게 자기들이 거길 맡겠다, 이런 소리 하는 거 아닙니까! 늘 하던대로!

    -…….

    싸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열이 몰려 있던 오형숙 또한, 주변의 그 싸함에 자신이 너무 과격한 발언을 했다는 걸 자각했지만 이미 늦었다.

    아차.

    눈동자가 떨리며 계속해서 얻어맞던 전서린에게로 시선을 향했다.

    전서린은 그런 오형숙을 강한 말로 공격하지 않았다. 대신.

    -그런 시선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더 강한 감정을 담담히 풀어냈다.

    -하오문은 아주 낮은 곳까지 떠내려온 이들의 집단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온갖 오물이 주변에 산재하여 있고 그것과 같은 것으로 보는 시선을 감당해야만 합니다.

    -저는. 하오문은 그런 시선에서 그들을 지켜주고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돕고 싶은 것입니다.

    -굳은살이 생긴다면 연필을 쥐어 많은 것을 씀으로써 굳은살이 생기는 환경을 만들어 주고 싶습니다.

    -연필이 아니라 주먹을 쥐었다면, 그것이 타인을 협박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타인을 지키기 위해서이길 바라고 있습니다.

    -저희는. 하오문의 보호를 원하는 선량한 이들이 그럴 수 있도록, 선량함을 지키면서 꿈꾸는 것을 이룰 수 있는 곳을 만들기 위하여 실크 로드를 지키고 싶습니다.

    * * * *

    -전서린도 보기랑은 다르게 생각이 좀 많았네.

    -그러게. 사실 예쁜 사기꾼 그런 모습을 숨기고 있는 게 아닌가 싶었는데.

    하오문은.

    여론을 자신의 편으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전서린의 진심이 담긴 발언이 그렇게 만들었다.

    그저 과거를 세탁하고 양지로 나오기 위한 욕심이 아니었다.

    하오문에 모여드는 이들은 필연적으로 낮은 진창에 굴러떨어진 이들이 다수를 이루었고 사회에서는 그들을 진창과 같은 것으로 보았다.

    전서린의 하오문은 그런 시선에서 진창에 떨어진 이들을 보듬어주고 씻겨 주어, 다시 당당하게 사회로 나아갈 수 있는 요람이 되고자 했던 것이다.

    도진은 그런 마음을 말하고 온 전서린을 맞이해 주었다.

    "고생하셨어요."

    "아뇨. 제가 해야 할 일인걸요."

    사명감에 담담히 말하는 전서린이다.

    그런 전서린에게서 숨길 수 없는 피로가 보였다.

    초절정 고수임에도 다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연일 무리를 하고 있었다.

    황녀의 앞에서 오열했던 그때의 감정이 그녀를 채찍질하고 있는 것이다.

    "…서린 씨는 충분히 잘 하고 있어요."

    "그렇습니까?"

    "네. 누구도 서린 씨에게 부족했다 말하지 않을 거예요. 황녀님까지도요. 그러니까, 스스로를 몰아붙이지 마세요."

    도진이 전서린과 눈을 맞추었다.

    그녀에게서는 황녀로서의 기품이 느껴진다.

    황녀의 대역으로 선택되었기에 후천적으로 위장한 것이 아니다.

    반대로.

    황녀라 하기에 손색이 없는 기품이 그녀에게 이미 갖춰져 있었기에, 그 대역이라는 역할이 주어진 것이다.

    그 기품으로 가장 낮은 곳에 모여든 이들의 울타리가 되어 주고 이내 양지로 이끌기 위하여 매진하는 그녀의 노력을.

    과연 누가 폄하할 수 있겠는가.

    전서린은 도진을 마주하고 마치 기대듯 물었다.

    "정말로, 그럴까요?"

    당연히. 도진은 미소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죠."

    그리고 시선을 전서린이 아닌 좌측으로 향하며 물었다.

    "그렇지 않나요?"

    "소천마의 말씀이 맞습니다."

    "……!!"

    제삼자의, 귓가에 스며드는 목소리에 전서린이 두 눈을 크게 뜨고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서.

    스르르-

    지금껏 잠들어 있던 황녀가,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녀의 깊은 눈동자가 전서린을 가득 담았고 분홍색 입술은 미소를 그렸다.

    "황녀께서는, 정말로 잘 해 주셨습니다."

    "황녀, 님?"

    황녀는 느리게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말했다.

    "아닙니다. 황녀는, 제가 아닌 주서린. 당신입니다."

    쿠웅-!

    전서린. 아니 주서린의 머릿속에서 기억을 틀어막고 있던 주술이 부서지며 진실이 쏟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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