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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해서 지존까지-625화 (625/741)

624화

지극히 미세한, 살이 천에 스치는 작은 소리였으나 결코 도진이 놓칠 수 없는 소리였다.

그 소리와 움직임에 도진이 황녀의 곁에 앉아 손목 맥을 짚었다.

"……."

맥이 뛴다.

살아 숨쉬는 이상 당연한 일이었으나 그 박동의 세기가 강해져 있었기에 크나큰 의미가 있었다.

스으으…….

도진의 안에서 사신공의 침기가 일어났다.

도진에게서 비롯된 침기가 맞닿은 살을 통하여 황녀의 맥에 스며들었고 그 안을 흐르던 그녀의 침기와 얽혔다. 마치 처음부터 하나였던 것처럼.

제아무리 같은 무공에서 비롯되었다 해도 타인의 기운이기에 아주 조금은 다른 형태로 인한 마찰이 일어날 법도 한데.

두 사람의 침기는 마치 서로 맞닿아 결이 통한 연리지처럼 하나로 얽히며 그녀의 안에서 흘렀다.

-…….

그것을 도진의 안에서 느끼며 위지혁은 물론이요 사신 장호의 눈동자도 깊어졌다.

소천마 김도진은 동시에 사신 장호의 가장 정통한 후계자였다.

그 말은 곧 도진의 사신공이 장호의 사신공에 가장 가깝다는 것이다.

그런 도진의 사신공과 전혀 마찰없이 하나로 합쳐지는 사신공이라니.

이성적으로 의문을 제기하게 된다.

간단한 이야기다.

시대조차 정확히 짐작하지 못할 정도로 오랜 세월이, 그것도 단절된 채 지났거늘 어찌 무공이 일절 변화없이 고스란히 전수되었느냐는 거다.

그녀에게까지 이어진 천형은 억지로 납득할 수 있다지만 이건 결코 납득할 수 없는 일이다.

퇴보를 하였든 진화를 하였든, 하다못해 최소한의 '변화'라도 있는 것이 정상이니까.

하지만 위지혁도 장호도 지금 그 이야기를 꺼내지는 않았다.

대신 장호는 자신의 후손과 제자를 위한 말을 하였다.

-너도 이제 깨달은 대로 침기란 본디 부수는 것이 아닌 고치는 데에 뜻을 두었던 기운이다.

-예, 스승님.

침기는 상대를 제압하고 부수기 위한 무공이 아니라 생명을 치유하기 위한 궁구의 결과물이었다.

도진은 이것을 부지역에 이른 지금에야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이치'를 추구하는 스승들의 지금까지의 방침을 생각하면 언뜻 고개를 갸웃거리게 된다.

왜 그것을 먼저 알려주지 않았을까 하고.

하지만 도진은 그런 의문을 가지지 않았으니 바로 그 뜻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침기의 본질이 무엇인지.

피상적인 지식으로 먼저 아는 대신 스스로 겪고 깨달을 수 있도록 한 것이다.

'평범한 수련의 단계'를 따르지 않고 스스로 이치에 닿을 수 있도록 했다는 부분에서 스승들의 방침이 지켜졌음을 알 수 있다.

그리하여 얻게 된 피상적인 지식이 아닌 본질의 영역에서의 깨달음.

도진은 침기가 본래 고치기 위한 기운이라는 걸 깨달았고 그 깨달음에서 한 발 더 나아가 '고칠 수 있으니 부술 수 있다'는 것까지도 깨우쳤다.

그것은 경계를 넘어선 세계에서도 크나큰 한 걸음이 되어 도진의 사신공은 한 단계 더 높은 곳으로 나아갔다.

그곳에서의 이치, 그리고 현대인으로서의 지식까지 더해짐으로써 황녀의 내부를 확실하게 이해하게 되었다.

그녀가 앓고 있는 천형은 현대의 무시무시한 병인 암(癌)과 닮았다.

비정상 세포에 의한 신체 균형의 붕괴가 일어나 사람을 단명하게 만드는 것이다.

과연 그 시대에서는 원인 불명이라고밖엔 설명할 수 없는 병이었다.

침기는 그런 비정상 세포를 죽이고 억제하면서 그로 인해 무너진 신체의 균형을 지탱한다.

황녀가 경계를 넘어선 고수로서 살아갈 수 있는, '건강한 사람'이기 위한 가장 기초적이면서 필수적인 요소로서 침기가 기능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 침기가 잠시 기능을 멈추었고 상처 또한 깊었으니 평범하게는 치유하기 힘들어 이 아이는 의사적으로 가사 상태에 들었던 것이다.

그저 한순간 침기가 기능하지 못함으로써 세포가 변이하는 등의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허나 경계를 넘어선 고수였던 그녀이기에, 침기가 상쇄된 사이 어긋난 내부의 균형이 오히려 중상보다 치명적인 내상으로 작용하고 말았던 것이다.

정밀한 기계일수록 지극히 사소한 것으로 인해 고장날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다.

때문에 그녀는 깊은 잠을 넘어 생(生) 자체를 느리게 하였다.

그럼으로써 생과 함께하는 병 또한 느리게 하였으니 그 상태에서 서서히 몸을 치유하는 것이 잠이 든 황녀의 내부였다.

이를테면 '귀식대법(龜息大法)'이다.

무협지에서 등장하는, 호흡을 지극히 길게 하고 심장 박동도 늦추고 혈류도 느리게 하는.

황녀는 지금껏 유지해 온 그 상태에서 서서히 벗어나고 있었다.

그러니까.

"곧, 깨어나겠군요."

-그래. 오늘을 넘기지 않을 것이다.

그녀의 혈류가 조금씩 빨라지고 있는 건 더 이상 그런 상태를 유지할 필요가 없을 만큼 회복했기 때문이다.

다만 바로 눈뜨지 않는 건 오래 굶은 이가 즉시 자극적인 음식을 입에 대어서는 안 되듯 그녀 또한 서서히 '잠'에서 깨어나기 위해 준비하였으니 신체 말단에서의 움직임이 그 신호였다.

방금의 움직임은 말단에서의 반사적인 행동이었으나 곧 자신의 의사로 그녀는 움직일 것이었으니 몸을 일으키고.

스승 장호를 연상케하는 깊은 눈동자를 떠 도진을 그 안에 담을 것이다.

기쁜 상황에 도진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아, 장비에 문제가 있어 진행이 늦춰지고 있다고 합니다. 으음…….

그리고 그제서야 TV에서 흘러나오는 진행자의 곤란한 목소리가 의미를 가지고 전달되었다.

도진이 황녀와 얽혔던 침기를 회수하고 TV로 시선을 향했다.

황녀에게 집중하였던 시간이 짧지는 않았는데 그 사이 전서린의 하오문과 오형숙 의원이 중심이 된 실크 로드 치안 유지 계약 설명회가 전혀 진행되지 않았다.

중계를 맡은 진행자의 말과 비치는 장면을 통해 상황을 쉽게 유추할 수 있었다.

비록 지상파에 편성된 건 아니라지만 상당한 관심 덕에 케이블과 인터넷을 통하여 생중계되는 설명회였다.

그러니까 제법 공을 들여 설명회 송출을 준비하였는데 거기에 필요한 장비에 트러블이 발생했다.

영상과 소리의 전달이 원활하지 않았고 결국 정상적인 진행이 어려워져 웅성이는 가운데 스튜디오의 진행을 맡은 진행자가 돌발상황에 진땀을 흘리고 있는 상황이다.

동시에 SNS를 통하여 혼란스러운 현장 상황이 퍼지고 있다.

-뭐임?

-방송에 나온 그대로임. 송출 장비 트러블이라던데.

-아니 뭐냐 ㅋㅋㅋ 준비 똑바로 안함? 예비 장비도 없나?

-왤케 어설프냐.

-이거 적련화가 준비한 거 아니냐? 이해가 안 되네.

'유치한 짓을 하네.'

도진은 옅게 숨을 흘렸다.

지금의 상황이 사고가 아니라 오형숙 의원의 의도를 담은 수작이라는 걸 바로 꿰뚫어 보았다.

장비의 트러블부터 SNS를 이용한 험담까지 말이다.

애초에 '방송 송출'을 전서린이, 하오문이 준비할 리가 없지 않은가.

그건 방송국의 영역이다.

당연하게도 장비 또한 방송국의 영역이니 SNS에 떠도는 말들은 얼토당토 않은 비난의 화살이 전서린에게로 향하게 만들려는 물타기인 것이다.

그렇게 시작도 하기 전부터 오형숙이 하오문의 이미지 훼손을 시도하여 설명회의 시작이 늦춰진 가운데.

우우웅-

도진의 휴대폰이 진동했다.

꺼내어 확인하니 나지윤의 제법 급한 연락이었고 방을 나와 회의장으로 향했다.

도진에게만 연락을 넣은 게 아니어서 회의장에는 천마신교의 핵심이 대부분 모였고 그 자리에서 나지윤이 말했다.

"러시아와 예무르가 휴전 협정을 맺을 것 같아요."

"음."

"그리고 그걸 넘어서, 아예 동맹 관계를 맺으려는 움직임까지 보이고 있어요."

"……."

과연.

급한 연락을 할 만한 소식이었다.

러시아와 예무르의 전쟁은 이미 세계를 휘말려 들게 했다.

무림특별법에 관한 논란이 그러했고 예무르 극단주의자들에 의한 테러가 본격적으로 불을 붙였다.

미국, 프랑스, 인도.

극단주의자들에 의해 목숨을 잃은 사람들의 국적이었고 세 나라는 결코 이번 사태를 좌시할 수 없는 입장이 되었다.

그래서였다.

거침없이 전쟁을 수행하던 러시아마저 주춤하였고 그렇게 전황이 고착화된 가운데 갑자기 나지윤이 두 나라의 휴전과 동맹이라는 믿기 힘든 정보를 입수한 것이다.

나지윤은 누가 채근할 것도 없이 바로 정보를 풀어놓았다.

"두 나라가 은밀한 만남을 가졌고 아무래도 합의를 하게 된 것 같아요."

"합의를?"

"네."

예무르는 살인을 저지른 무림인을 사형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러시아는 그것이 정당한 행위였으니 결코 용납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그렇게 대립한 두 나라가 합의를 했다.

"이야기는 간단해요. 어찌되었든 살인이 일어났으니 정당하게 재판을 하여 결론을 내리자, 그 내용으로 합의를 한 거죠."

세계를 말려들게 한 전쟁의 불씨를 꺼트리기 위한 내용으로는 허무할 지경이다.

처음부터 그러면 될 일을 그러기 싫다고 전쟁을 한 게 아니었던가.

"중요한 건 그 재판을 러시아와 예무르가 함께 진행한다는 건데 합동 재판 기구를 설립할 것이고 앞으로 두 나라 사이의 무림에 관한 일에 대한 판단은 전적으로 이 기구에 맡긴다, 같은 이야기가 오가고 있는 듯 보여요."

"그건……."

오성아가 말을 흐렸다.

그렇게 흐린 말에는 아주 많은 것들이 담겨 있었고 같은 내용을 이곳에 모인 이들이 되짚고 있었다.

결코 간단한 내용이 아니었다.

두 나라 사이에 일어나는 무림의 일을 전적으로 판단하는 기구를 세운다는 건 단순한 동맹 관계를 넘어서는 의미를 가진다.

그 기구 자체도 간단히 넘어갈 수 없다.

정보에 따르면 예무르의 '신과 그 신의 가르침을 대신 전하는 이들만이 사람을 심판할 수 있다'는 주장과 러시아를 포함한 대부분의 국가가 이미 시행하고 있는 재판 제도가 합쳐진 형태가 바로 그 합동 재판 기구였으니까.

이는, 무림특별법을 부정하는 영역에까지 이른다.

상황이 걷잡을 수 없이, 감당할 수 없이 커지고 심각해져 버렸으니 끝장을 볼 게 아니라면 러시아는 지금이라도 발을 빼야 했다.

러시아가 발을 빼면 자연스럽게 예무르도 물러날 것이고 전쟁이 끝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렇게 예상을 했는데 이건 그 예상에서 크게 빗나간 형태의 종전이었다.

"아직 정식으로 공표된 내용은 아니지만 웬만한 정보 단체는 다 입수한 정보예요. 러시아와 예무르가 일부러 흘린 거죠. 그리고 이 정보 때문에, 크게 술렁이고 있어요."

사태는 이미 러시아와 예무르 두 나라가 전쟁을 끝내는 것으로 봉합될 영역을 한참 넘어섰다.

자국민이 극단주의자에 의해 살해당한 미국과 프랑스, 인도가 있었고 무림특별법의 타당성 논쟁으로 불붙은 사회와 무림의 문제도 있었다.

그런 상황임에도.

"러시아와 예무르에 동조하는 나라가 적지 않아요."

나지윤이 무겁게 말했다.

"무림에 소위 말하는 일반 사회가 잠식당해 있다 생각하는 정치인이 적지 않았죠."

무공을 익히고 있다 해서 모두가 무림인이 되는 건 아니다.

개중에서도 여러가지 이유로 삼류를 벗어나지 못한 이들이 무림에 적대적인 경우가 제법 있었다.

"그런 사람들을 대놓고 노려서 러시아와 예무르는 무림특별법을 개정해서 무림인이 지극히 타당한 사유가 있지 않는 한 판단을 합동 재판 기구에 맡긴다, 같은 조항을 넣으려고 하거든요."

한 마디로 무림인을, 무림 그 자체를 제한하겠다는 거다.

…무림이 환영할 리가 없다.

혼란도 적지 않을 것이며 평소라면 결코 엄두도 못낼 일이다.

허나 지금은 양측의 목소리가 다 높은 상황.

무림에 적대적인 정치인들이 키를 쥐고 있는 나라라면, 이에 동조하여 합세할 가능성이 상당히 높아진다.

이런 상황에 무림도 기민하게 움직였다.

"무림맹을 창구로 해서 무림인들이 크게 반발할 준비를 하고 있어. 그리고 이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나지윤이 이렇게 말할 정도라면 정말로 심상치 않은 것이었다.

실제로 나지윤은 이대로 사태가 커져 무림 문파와 공권력이 대규모 충돌을 일으킬 것이라 확신하고 있었다.

그것은.

걷잡을 수 없는 분열과 혼란의 폭발로 이어지는 도화선을 태울 불씨였다.

예고도 없이. 사태는 급박하게 흐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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