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3화
-무림특별법이 옳은가를 따져야 한다니. 세상이 거꾸로 가고 있어.
-아니. 오히려 이제서야 제대로 된 세상이 오려는 거지.
무림특별법에 대한 논쟁이 세계적으로 크게 불붙었다.
단순히 네티즌들 사이의 논쟁에서 그치지 않고 국가 단위의 진지한 논의가 이루어질 만큼 심각한 가운데 한국은 무림특별법이 '옳다'는 결론이 나왔다.
그것이 인터넷에서의 설전만이 아닌 국정감사의 결과였으니 나라의 입장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무림에서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한국 무림을 대표하게 된 소천마 김도진과 천마신교가 그런 입장이었고 그와 우호적인 집단들이 동의하였다.
정부야 이미 여당부터가 친 무림파이자 친 천마신교파였으니 더 말할 것도 없다.
그러니까 한국은 무림특별법에 찬성하는 나라가 되었고 이는 이웃인 일본과 중국도 다르지 않았다.
사실 일본은 지켜볼 것도 없이, 처음부터 무림특별법이 옳다는 입장이었다.
이는 일본이 어떤 나라인지 아는 사람이라면 굳이 찾아볼 것도 없이 확신할 수 있는 일이었으니 일본은 이미 '무림인의 나라'였기 때문이다.
막부 시대의 재림이라는 말까지 나오는 것이 현재 일본의 상황이었다.
정치인은 그저 구색 맞추기로 유력 문파에서 지지하고 추천하는 이가 당선되니 일본에서 정부와 무림은 한몸이요 유력 문파가 그 지역을 다스리는 건 공공연한 비밀이다.
그런 배경으로 일본은 애초에 무림특별법에 관한 논란조차 일어나지 않았다.
중국은…… 일본과는 반대되면서도 비슷한 형국에서 논란이 되지 못했다.
정부가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중국은 바로 그 정부가 동시에 무림맹의 역할까지 했으니까.
무림과 사회가 나뉘지 않았고 두 영역이 정부의 아래 함께 있었으니 분열을 처음부터 막은 것이다.
이렇게 한중일을 중심으로 아시아는 대체로 무림특별법을 지지하는 쪽이었다.
반대로, 미국을 중심으로 한 아메리카는 무림특별법에 격렬히 반대하는 목소리가 높았다.
-인권을 짓밟는 무림특별법을 반대한다!
-더 이상 우리의 목소리가 묵살되게 두어서는 안 된다!
전체가 아닌, 일부 단체가 주도한 시위로 사회가 떠들썩해져 있었다.
-저 인권충 새끼들 또 기어나왔네.
-'MADU'가 나타나서 다 학살해 버리면 좋겠어. 그러고도 인권을 외치는지 궁금하거든.
소위 말하는 '젊은 세대' 대다수는 무림특별법을 지지했다.
허나 자유와 다름을 중시하는 그들 사회에서 '범죄자도 사람이다'부터 시작하여 인권을 말살하고 폭력을 장려하는 무림특별법은 잘못되었다는 목소리를 내는 단체들이 일제히 들고 일어나자 여론이 분열된 것이었다.
어디부터 어디까지를 자유라 정의할 것인가.
자유란 '제로섬'이기에 누군가가 이득을 보면 누군가는 손해를 보아야만 했다.
때문에 방종(放縱)이란 단어가 있는 것이며 함께 살아가는 사회에서는 서로의 자유를 위하여 서로가 양보를 해야만 하는 것이다.
미국은 그런 부분에 있어 양보보다 자유의 영역이 더 넓었기에 소란은 커질 수밖에 없었고 커지는 소란만큼 논쟁도 격렬해졌다.
"어쩌면, 아니 아마도 이 균열은 세계 전체로 퍼져 나갈 겁니다."
세계의 추세를 정리하면서 나지윤은 그렇게 말했다.
총괄부의 회의실에 모인 천마신교의 면면이 굳었다.
"무형독이 이 논쟁에 불을 지피고 키워 나가려는 건 이미 의심의 여지가 없어요. 그리고 여기에 편승해서 무형독은 자신의 덩치를 불려줄 집단을, 드러난 집단을 만들어낼 겁니다."
무형독이 제아무리 거대한 집단이라 해도 세계를 집어삼킬 수는 없다. 하지만.
뒤에서 조종할 수는 있다.
그리고 그렇게 조종하기 위한 단체를 만들어 중심을 차지하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가능하다면 세계의 여론을 모을 수 있으면 좋겠지만…… 어려운 일이에요."
분열을 봉합하여 그 시도를 무산시킬 수 있으면 좋겠지만 나지윤의 말대로 어려운 일이었다.
일단 천마신교가 미국을 포함한 아메리카에 논쟁을 종식시킬 만큼의 영향력을 행사할 수단이 없었다.
"쉽지 않네."
한유아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무형독의 계획은 언뜻 단순해 보인다.
그러나 그건 계획이 워낙 거대하여 쉽게 보이는 것 뿐이니 보는 것과 대항하는 건 완전히 다른 차원의 일이었다.
당장의 상황이 그렇지 않은가.
계획을 뻔히 아는데 그것에 대항하려니 엄청난 스케일에 일단 머리가 하얘지고 마는 것이다.
어쩌면.
이것은 단순한 논쟁과 분열에서 끝나지 않고 정말로, '세계 대전'까지 번질지도 모른다.
"할 수 있는 걸 해야죠."
물론, 그렇다고 해서 손 놓고만 있는 건 도진의 스타일이 아니다.
할 수 있는 일을 하기 위해 움직이는 것이 도진이고 천마신교였다.
옅게 웃으며 그렇게 말한 도진에 이어 나지윤이 입을 열었다.
"아메리카는 어쩔 수 없지만 유럽 쪽은 우리가 주도할 여지가 있어요."
그리 말하는 나지윤의 시선이 향하는 곳에 앉은 건 클로에 덴젤이었다.
클로에 덴젤.
프랑스를 대표하는 명장이자 경계를 넘어선 무림인 안토니오 덴젤의 수양딸이자 덴젤 공방의 공주님이다.
동시에 소천마 김도진에게 사사받은 천마신교의 신도로 프랑스에서 커다란 지지를 받고 있는 인물이기도 했다.
덴젤 공방이라면 충분히 프랑스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커다란 단체였으며 그 단체를 대표하는 클로에가 이곳에 있다.
그뿐인가.
프랑스에는 덴젤 공방만이 아닌 호진이를 통하여 인연을 맺은 다국적 기업 넷비전도 있다.
여기에 영국의 대귀족이자 사업가인 웨일스 후작가까지 생각하면 나지윤의 유럽 쪽을 주도할 수 있다는 말이 결코 허황된 말이 아니었다.
"곧 열릴 다과회의 일정 조율이 이루어지고 있어요."
나지윤의 시선을 받은 클로에가 말했다.
여기서 말하는 '다과회'는 유럽의 의견을 모으기 위한 거대한 회의를 뜻했다.
정식으로는 유럽 연합 회의인데 유럽 연합이라는 단어를 싫어하는 나라가 제법 있어 그 나라 사람들은 일부러 여러 의미를 담아 다과회라 불렀다.
유럽 연합이란 단어를 싫어하는 대표적인 나라가 프랑스였으니 클로에가 다과회란 말을 쓴 것이다.
'아직 결별은 안 해서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사실 이번 난리 이전에 프랑스가 유럽 연합을 탈퇴하니 마니로 시끄러웠었는데 러시아의 전쟁으로 흐지부지 되었다.
프랑스만이 아니라 중립을 선언했던 여러 나라들도 불안감에 협력 조약 기구에 가입하는 등의 행보를 보이고 있다.
정말로, 전생과는 많은 부분에서 달라졌고 그 이유가 무형독이라는 데서 생각할 부분이 많아지는 도진이었다.
'전생에서도 이런 일들을 진행하고 있었던 걸까. 아니면 나로 인해 많은 것이 달라진 걸까.'
사실 고민해도 답을 알 수는 없는 문제였다.
전생의 도진이 가진 정보는 한없이 좁고 또 얕았으니까.
지금의 사태가 도진에 의한 여러가지 파탄으로 무형독이 계획을 앞당긴 것이라는 걸 알 도리가 없다.
허나, 물론.
도진은 거기에 얽매이지 않는다.
지금의 도진은 주어진 상황에 최선을 다하고 이내 그 상황 전체를 뒤바꿀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니까.
도진이 웃으며 클로에에게 말했다.
"에스코트 할 날이 정해지면 알려 줘."
다과회는 딱딱한 회의만이 아닌 사교계의 모임이 더해진 일주일 가량의 행사로 진행될 예정이다.
여기에 도진은 클로에와 함께 참가하기로 돼 있었기에 그리 말한 것이다.
도진의 말에 클로에가 활짝 웃으며 예, 하고 대답했다.
* * * *
하이재킹 사건도 벌써 일주일 전의 일이 되었다.
하지만 아직 이름도 듣지 못한 황녀는 깨어나지 않고 있었다.
-괜찮다.
도진의 스승이자 그녀의 조상이 되는 장호는 여전히 그렇게 말했다.
누구보다 그녀를 걱정하면서도 그녀를 믿고 있었고 그 스승을 본받아 도진 또한 그녀를 믿었다.
"음…… 점점 더 상태가 좋아지고 있는 건 확실해요."
그녀가 맞고 있는 수액의 팩을 새것으로 교체하며 약리지가 말했다.
"다만 한 가지, 이분의 회복이 예상보다 훨씬 더 느리게 진행됐다는 게 변수네요."
도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항상 고마워."
그녀의 몸을 닦아주고 옷을 갈아입히는 등의 일까지 맡아주고 있는 약리지였다.
예상이 조금 빗나갔다고 해서 책망할 리가 없는 도진이다.
그리고 이 부분에 있어서는 도진을 통하여 내부를 훑어 본 장호가 이렇게 말했다.
-…침기를 익힘으로써 우리 핏줄은 천형을 극복하였다. 반대로 말해, 침기가 제 역할을 못하게 되면 치명적일 수 있는 것이다.
장호의 가문은 천형을 앓았으니 원인불명의 불치병으로 몸이 점점 쇠약해지다 이내 마흔 전에 단명하고 마는 병이었다.
장호 또한 그 불치병을 타고났으나 침기를 운용함으로써 극복하였는데 같은 불치병을 황녀도 타고난 것이다.
안 그래도 중상을 입었는데 일순 사신공이 상쇄되며 침기도 기능하지 못하여 더 상태가 나빠졌고 그것을 치유하느라 시간이 더 오래 걸리게 됐다는 이야기다.
다만 한 가지. 그럼에도 남는 의문이 있었으니 짐작도 가지 않는 세월 동안 그 체질이 유지되었다는 거다.
사신공을 익혔고 천형을 극복했다.
이런 상태로 아득한 세월이 지나며 '유전적으로' 체질이 바뀌는 게 자연스럽지 않겠는가.
하지만 그 의문은 강하지 않았으니 마찬가지로 '격세 유전'이란 게 있어 그녀에게 그 체질이 세월을 넘어 발현되었을 가능성도 있었기 때문이다.
뭐 어느 쪽이든.
대부분의 의문은 그녀가 깨어나면 해결될 일이었다.
그녀를 만나야 한다고 했던 전서린의 말대로라면 말이다.
전서린.
황녀의 대역.
일부나마 기억을 되찾고 황녀를 만나야 한다 말했던 전서린은, 상처입고 잠든 황녀를 마주하고서 무너져 소리없이 오열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황녀님…….
-본래 제가 감당하여야만 했을 상처를, 고초를, 제가 아닌 황녀님이 감당하시게 했습니다…….
황녀의 상처가 제 탓인 것처럼.
그것을 황녀에게 미루고 말았다며 감히 소리조차 높이지 못하고 그저 침대 옆에서 소리죽여 오열했던 것이다.
도진은 그런 그녀의 조용한 말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그녀의 잘못이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그녀는 그런 비난을 결코 들어서는 안 될 만큼, 노력했으니까.
그런 노력을 도진은 계속해서 보아 왔다.
심지어 지금도.
-예. 지금 실크 로드의 치안 유지 계약 설명회가 시작되었습니다.
끊임없이 계속해 온 노력의 결실 하나를 맺기 위하여 매진하는 전서린을 도진은 TV 너머로 지켜보고 있었다.
공터에 임시로 마련된 공개 회의장.
그곳에 모여든 수많은 이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전서린이 언제나처럼 한복을 차려입은 모습으로 앉아 있다.
그리고 그 맞은편에, 전서린을 노려보는 국회의원이 한 명 있었으니.
[국회의원 오형숙]
도진에게 말로 흠씬 두들겨 맞고 네티즌들에게 그 이상으로 조롱을 당했으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전서린을 물어뜯으러 나온 오형숙이었다.
저 자리엔 도진이 없다.
도진만이 아니라 천마신교의 누구도 없으니 오로지 하오문뿐이다.
시궁쥐라 불리던 이들이 주제도 모르고 양지로 기어나와 그것을 인정해 주길 바라는 자리였다.
그리 생각하는 오형숙이 하오문을, 하오문을 대표하는 전서린을 철저히 짓밟기 위해 나온 것이었다.
스윽-
하지만 도진은 그저 미소지으며 지켜 보았다.
이루어질 리가 없었으니까.
오로지 물어뜯기 위해 존재하는 고깃덩이를 보듯 전서린을 보는 오형숙이었지만 그것은 너무나 치명적인 착각이다.
이를테면 하룻강아지의.
그리고.
스슷-
"……!"
도진의 곁에 잠들어 있던, 황녀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까딱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