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9화
뚝. 뚝.
피가 흘렀다.
사람을 꿰뚫은, 찬란한 신비가 맺힌 검은 새빨간 피에 대비되어 더욱 선연하게 보였다.
도진은.
그렇게 선연히 검기가 맺힌 검을, 자신의 손을 꿰뚫은 검을 쥐었다.
콰직-!
연신극기공으로 단련되고 또 짙게 일렁이는 천마기가 깃든 손은 너무나 간단하게 검기가 맺힌 검을 으스러뜨려 버렸다.
-이거, 좋은 걸 알았군.
그리고 부러진 검을 버리며 물러나는, 눈이 뒤집혀 기괴한 몰골의 극단주의자가 이죽였다.
분명히 입으로 소리 내어 말하고 있는데 마치 립싱크를 하는 것처럼, 완전히 다른 곳에서 소리가 나는 것처럼 감각을 어지럽힌다.
도진의 깊이 가라앉은 시선이 눈이 뒤집힌 극단주의자를 응시했다.
-…무시무시하구먼.
마치 심해가 한낱 인간을 들여다보는 듯한 감각에 간접적으로 마주하고 있음에도 '주술사'는 등골이 서늘해졌다.
-과연, 교에 전해져 내려오는 최악의 이단다워. 변질된 천마신공만이 아닌 천하의 역적 살귀의 무공까지 익히고 있을 줄이야…….
살귀(殺鬼).
그것이 사신 장호에 대한 멸칭(蔑稱)이라는 걸 파악하는 건 굳이 깊은 사고가 필요하지 않았다.
스으으…….
도진의 숨이 깊고 또 느리게 가라앉았다.
전에 없이 감정이 차가워졌으나 거기에 침기는, 사신공은 반응하지 않았다.
사라진 건 아니다.
그러나 마치 외부의 이질적인 요소에 상쇄가 되는 것처럼 운용이 되지 않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도진의 머릿속은, 심상세계는 가속하여 장호의 이야기를 들었다.
-술진(術陣)이다.
술진. 술법으로 구성된 진법이란 뜻이었다.
-집중하여 자연에 숨은 술법을 파악해라.
-본래 법안(法眼)을 떠야만 가능한 일이나 너는 그보다 상위의 이치인 신안(神眼)의 이치에 닿았으니 그것을 구성하고 있는 법기(法氣)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장호의 가르침을 듣고 도진이 천마군림의 이치에 따라 자연과 소통하며 신안의 이치에 따라 주변을 읽어나갔다.
'…….'
지극히 날카롭고도 이성적인 감각이 곧 평범한 기와는 다른, 그러나 지극히 은밀히 숨겨져 있었던 인위적인 기운.
법기를 인식하였다.
도진은 장호에게 여러가지를 배웠지만 술법만큼은 배우지 못했다.
'둔재'였던 도진에게 있어서는 천마신공과 무흔잠영의 이치를 깨우치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 경지에 오른 뒤로도 궤가 다른 술법만큼은 미뤄두고 있었는데, 그게 지금 후회가 되었다.
보였다.
섬뜩할 정도로 은밀하지만 그 이상으로 광적인 집착으로 새겨진 술진이.
극단주의자들의 가려진 피부에 법기로 새긴 술진이 장호의 가르침에 따라 그제서야 보였다.
술법을 배웠다면.
그래서 술법마저 경계할 수 있었다면 미리 알 수 있지 않았을까.
'아니.'
그것이 의미없는 후회이자 가정이라는 걸 도진은 바로 인정하였다.
이 술진을 그리고 구사하는 자는 술법사로서 경계를 넘어선 이였다.
어설프게 여럿을 병행하며 술법을 익힌 정도로 알아챌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하물며 이것은.
-…사신공만을 노린 술법이다.
장호의 말대로 사신공만을 노리고 짜여진 술법이었다.
철저하게.
사신공을 구사하는 이를 노렸고 포획하기 위하여 기능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더더욱, 어설프게 술법을 익혀서는 결코 알아챌 수 없을 만큼 은밀하였다.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녀가 어째서 사신공으로 그 정도나 되는 경지에 이르렀음에도 온갖 상처를 입을 수밖에 없었는지.
어째서 어느 정도 여유가 있었음에도 전음조차 하지 않고 움직였는지.
모두 이 술법사와 술법사의 술법 때문이었다.
그가 노리고 있었기에.
매순간 모든 것을 경계하였던 것이다.
허나 그럼에도.
도진이 그러했듯 그녀 또한 도진과의 만남으로 아주 약간의 틈을 보이고 말았고.
-정말로, 예상 외의 소득을 얻었군.
술법사의 함정에 당하고 만 것이다.
스으으…….
힘없이 쓰러진 그녀에게서 피가 배어 나오고 있었다.
지극히 좋지 않은 몸을 지탱하고 있던 침기가 기능하지 않음으로써 상처가 악화되고 있는 것이었다.
도진이 입을 열었다.
"니가, 추적자인 모양이네."
-크크. 왜. 동문의 피를 보고 흥분하였느냐?
꽈앙-!
격공장이 이지를 제압당해 꼭두각시가 된 극단주의자를 두들겼다.
그러나 격공장의 기운은 꼭두각시가 일으킨 '호신강기'에 막혀 흩어졌다.
-내 듣기로 이단의 심기가 제법 깊다고 들었는데. 이것 또한 생각지 못했던 소득이구나.
꽈아앙-!
-네놈에게, 저 여아가 제법 소중했던 게로구나?
꽈아아앙-!!
술법사가 이죽였고 도진은 꼭두각시의 호신강기를 연신 두들겼다.
평범한 이라면 결코 버틸 수 없을 도진의 주먹을 호신강기는 몇 번이고 버텨냈는데, 이는 꼭두각시 본신의 무공이 아니었으니 이 또한 술법이 개입한 결과였다.
격체전공(隔體傳功)이라 하여 자신의 내공을 다른 이에게 전수할 수 있는 수법이 있다.
이 현대에선 아직 이론의 영역이었으나 고대 무림에선 생각보다 많이 쓰였던 수법이었으니 죽기 전 가문이나 문파의 어른이 전도유망한 제자에게 내공을 전수하기 위하여 쓰였던 수법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건 '죽기 전' 쓰였다는 부분으로 격체전공의 효율이 워낙 좋지 않았던 게 그 이유였다.
자신의 내공을 상대에게 전수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손실이 발생하며 그 양이 상당했다.
그렇게 손실된 내공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것도 아니어서 상대가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또 상당한 손실이 난다.
말 그대로 죽기 전에야 물려줄 수 있는 유산인 것이다.
바로 그런 수법을, 꼭두각시가 된 극단주의자들이 시전하며 도진과 대치한 하나의 꼭두각시에 내공을 몰아주고 있었다.
경계를 넘어서지 못했던 꼭두각시가 검기를 사용하고 호신강기를 사용할 수 있었던 이유였다.
그것이 결코 정순할 수 없었고 주체가 술법사였던 탓에 어설프기 짝이 없어 내공의 소모가 지극히 비효율적이었으나 그들은 일절 망설이지 않았다.
술진이 새겨진 극단주의자들은 그저 술진을 구성하는 하나의 부품에 불과했고 술진의 주인은, 그 부품을 한 번 쓰고 버리는 데에 전혀 거리낌이 없었으니까.
꽈아아앙-!
-그래. 이런 식으로 화풀이라도 하겠다는 것이냐? 내가 아닌 텅 빈 꼭두각시를 두드려서라도?
술법사가 이죽였다.
그 말대로였다.
지극히 수준 높은 술법사인 그는 이곳에 없었다.
그저 정신만을 보내어, 꼭두각시를 조종하여 일을 벌였으니 눈앞의 극단주의자를 때려죽인다 하여도 아무런 의미가 없는 일이었다.
어차피 이 꼭두각시는 과분한 내공의 운용에 생명 그 자체인 진원지기마저 술법을 위해 소모하고 있었으니 도진이 손을 쓰든 안 쓰든 몇 시간 내에 죽을, 일회용에 불과한 것이다.
때문에 술법사는 의미없이, 감정에 휩쓸려 연신 주먹을 뻗는 도진을 조롱하였고.
-아, 그래. 한시라도 빨리 이 술진을 해제하고 싶은 게냐?
또 다른 가능성을 지껄였다.
쓰러진 그녀를 구하기 위해서.
이 술진의 기능은 사신공의 '상쇄'다.
구조나 원리, 이치 등은 알지 못하지만 기능만큼은 분명하였으니 술진이 유지되는 동안 사신공이 상쇄되는 것이다.
그것은, 깊은 상처를 사신공의 공능으로 억눌러 버티고 있던 그녀가 위급해진다는 말이 된다.
실제로 그녀는 사신공이 기능하지 못하게 됨으로써 무너졌고 정신을 잃었으며 피마저 잃고 있었다.
그만큼이나 그녀의 상처는 깊었다.
이대로 두었다가는 돌이킬 수 없게 되니 도진이 이렇게나 다급하게, 다른 수를 쓸 여유도 없이 술진을 구성하는 꼭두각시를 두드리는 것이다.
…라고, 주술사는 유추하는 것이었다.
틀린 생각은 아니었다.
오히려 정답이다.
이 자리에 없는 주술사를 대신하여 꼭두각시에 새긴 술진이 꼭두각시의 진원지기마저 빨아들이며 기능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술법에 대한 지식이 없는 한 이 자리에서 술진을 정지시키는 가장 간단하고도 명료한 방법은 술진에 공급되는 기운을 다 소모시키는 거다.
찰나의 순간 소천마는 그런 판단을 내리고서 일견 감정에 휩쓸려 화풀이를 하는 듯한 묵직하면서도 단순한 공격을 반복하고 있다고 주술사는 생각했다.
'그래. 이성을 잃지는 않았다는 게지.'
1년에 걸쳐 쌓아올린 함정의 화룡점정을 찍지 못하였으나 주술사는 손해는 보지 않았다 생각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사신의 맥을 끊지 못했으나 위급한 상태로 몰아 넣었고 전혀 몰랐던, 소천마를 참칭하는 이단이 또 하나의 사신의 맥을 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여기에 사신의 맥을 이었음에도 주술에는 문외한에 가깝다는 것마저 확인하였으니 비할 데 없이 귀중한 정보가 아니겠는가.
이런 소득을 얻었으니 이번의 소모로 다시는 쓰지 못할 공들인 함정을 잃었음에도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것이다.
꽈아아앙-!
술진을 구성하던 꼭두각시들의 생명이 빠르게 사그라들고 있다.
잘 알고 있었지만.
이단의 무시무시한 위력을 바로 앞에서 보며 새삼 되새기게 된다.
그야말로 마귀라는 단어가 걸맞는 모습이었다.
'직접 마주하고 싶진 않군.'
슬슬 물러나도록 할까.
주술사는 이단의 발버둥을 감상하는 건 여기까지 하고 떠나려 했다.
어차피 술진도 곧 깨어질 터이니.
바로 그 순간.
꾸우웅-!
-컥?!
마치 관자놀이를 후려쳐 영혼마저 뒤흔드는 듯한 충격에 그가 피분수를 내뿜었다.
꼭두각시가 아닌, 그의 본체에 때려박힌 타격이었다.
-네, 네놈?
갑작스레 흔들린 영혼에 그의 눈동자마저 흔들렸다.
어떤 일이 일어난 건지 수준 높은 주술사인 그는 대번에 알았고 그래서 믿을 수가 없었다.
도진은 대답하는 대신 찰나의 시간마저 그러모아 한 번 더 주먹을 내뻗었다.
꾸우우웅-!
-쿠에에에엑!!
꼭두각시를 때린 주먹이 또 한 번, 주술사의 영혼에까지 닿아 그가 피를 쏟게 만들었다.
도진의 뒤에 그녀가 흘린 것보다 더 많은 피를.
도진이 입이 서늘한 곡선을 그렸다.
그것이 마치 사신의 낫과 같았다.
-이 정도나 되는 술법을 구사하기 위해선 주술사의 영혼이 이어져 있어야 한다.
-육체는 멀리 떨어져 있다 하여도 거기까지 이어지는 영혼의 끈이 있는 것이다.
-너라면, 그 끈마저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주술사가 더욱 술진에 집중할 수밖에 없도록 하여라.
스승 장호의 가르침에 따라 도진은 술진을 부수기 위하여 온힘을 다해 두들겼다.
가학적인 성격의 주술사는 그런 도진의 모습을 보고 더 오래 술진을 유지하기 위하여 정신을 집중하였고.
-저것이다.
도진의 신안은 이윽고 술진과 주술사를 잇는 영혼의 끈을 찾은 것이다.
다음은 간단했다.
도진이 주먹에 담은 이치가.
의지가.
천심권(穿心拳).
때려박힌 주먹에서 쏘아져 끈을 따라 주술사를 꿰뚫은 것이다.
그렇게 영혼에 타격을 입은 주술사는 허겁지겁 연결을 끊고 등을 보이며 도망쳤다.
죽이지 못했으나 도진은 아쉬워하지 않았다.
그저, 겁쟁이의 등에 대고 선고할 뿐이었다.
담담하게.
"곧, 찾아갈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