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8화
-당신께서 움직이시면 제가 맞추어 움직이겠습니다.
그녀는 그렇게 전하였다.
도진이 행동에 나서면 거기에 맞추어 움직임으로써 '세 군데'를 동시에 제압하자는 제안이었고 도진은 동의하였다.
그 계획에 따른다면 그녀가 아래쪽의 폭탄 두 개가 터지지 못하게 막고 도진이 위쪽의 포로들이 희생당하지 않도록 해야 했다.
즉시 움직일 수도 있었지만 도진은 조금 더 확률을 높이기 위하여 은밀히, 소여은과 레드슈가 있는 이곳에 온 것이었다.
"지, 진짜 도진이 맞지?"
아이돌임에도 낯을 가리는, 무대에선 괜찮지만 평소에 그 면모가 강하게 드러나는 여은영의 물음에 도진이 씨익 웃었다.
"귀신이면 어떡하려고 그런 걸 물어?"
"힉?"
"…도진이 맞네."
장난스런 말에 또 한 명의 멤버 유혜진이 말했고 박소진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레드슈 멤버들과 이야기를 나누고선 도진이 소여은에게로 시선을 향했다.
그리고 미소지으며 말했다.
"고생하셨어요."
"…아뇨. 제가 해야 할 일을 한 것 뿐이에요."
소여은.
전생에서의 도진과 비슷한 나이가 되었음에도 여전히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동안의 암산서가 소속 무인.
1대 제자 중 막내이지만 반대로 소담을 포함한 다음 세대 암산서가의 어린 무인들에게 있어선 엄마와 같은 역할을 해야 했다.
그리고 천마신교와 엮이면서는 오성아와 함께 하며 수많은 업무를 맡아야 했고 소화해내야 했다.
그 경험들 덕분이라고 해야 할까.
그녀는 극단주의자들의 습격이라는 상정 외의 거대한 사건에서도 침착하게 행동하여 이렇게, 수많은 사람들을 지켜내고 대치 상황까지 만들어 내었다.
갑작스레 테러 단체가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화기를 꺼내들고 혼란이 발생한 와중에 이렇게까지 대처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러니까 그녀는 분명히 대단한 사람이었다.
대단한 사람이 되었다.
"그래서, 소여은 씨에게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부탁, 이요?"
"네.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서요."
* * * *
도진은 소여은과 레드슈가 머물고 있던 객실에서 함께 바깥으로 나왔다.
서브 홀과 이어지는 조금 넓은 복도에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소천마다."
"저, 정말로?"
소여은을 필두로 한 천마신교 사람들의 말대로 정말 소천마가 나타나자 희망이 사람들 사이에 차올랐다.
그로 인해 조금의 웅성거림이 있었지만 그 소리가 바리케이드 넘어로 흘러가지 않도록 조율하였기에 바깥에 들킬 일은 없었다.
웅성거림 자체는 어쩔 수 없었지만 그건 오히려 의도한 바였다.
극단주의자들의 신경이 곤두서도록 한 것이다.
인원수 자체는 수백 명에 이르렀지만 이런 극한 상황에서 싸울 수 있는 사람은 채 1/10이 되지 못했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로, 말로야 경지에 이른 무림인은 총기에 얼마든지 대처할 수 있다고 하지만 그 경지에 이른 무림인 자체가 흔하지 않은 세상이다.
게다가 이 배에 오른 대다수가 위험해진 러시아를 떠나기 위해 모인 평범한 사람들이었으니 무림인의 비율이 높지도 않았다.
그들과 대동한 경호 무림인 소수, 이 배에 고용된 무림인 소수, 여기에 바른 엔터와의 계약으로 함께 한 암산서가의 무인 등을 다 합쳐 서른네 명이 이 자리의 전력이었다.
이에 비해 극단주의자들은 70명이 넘었다.
심지어 작정하고 준비하여 총기는 물론이요 온갖 장비를 가지고 있었으니 싸움이 될 리가 없었던 거다.
농성이나마 할 수 있었던 것도 그들 입장에서는 기적이었고 독 안에 든 쥐 신세였는데.
정말로 소천마가 나타났다.
그 소천마가 모두의 집중 속에서 말했다.
"여러분들의 조력을 구하고 싶습니다."
"조력?"
"어?"
위험을 무릅쓰고 상황에 참여하라.
그런 뜻으로 받아들인 이들 일부가 동요했다.
허나 이어지는 도진의 힘이 담긴 말에 그 동요는 금방 가라앉았다.
"결코 목숨을 걸지는 마세요."
요약하면 도진의 말은 그것이었다.
서브 홀의 좌측으로 이어진 길을 따라가면 식당이 있다.
그리고 식당에는 당연히 식재료가 있다.
이곳에 모인 무인들에게 그 식재료를 노리는 '액션', 어디까지나 액션만 취하라고 했다.
그 과정에서 결코 목숨을 걸거나 무리할 필요는 없으니 할 수 있는 이들만이 시선만 끌어달라는 부탁이었다.
"스스로를 소중히 여기시고, 절대로 다치지 마세요."
귀에 똑똑히 스며드는 도진의 말에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을 구하기 위해 가장 위험한 곳에 갈 거면서.
믿음을 강요하지 않고 스스로의 희생을 말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오히려, 사람들은 도진을 믿을 수 있었다.
소여은은 미소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천마신교의 가장 앞에 서는 사람이 보여주는 그 등이.
더없이 믿음직스럽고 또 자랑스러웠다.
* * * *
텅텅텅-!
힘차게 바닥을 박차며 달리는 극단주의자들과는 반대 방향으로 도진이 움직였다.
3층의 서브홀.
농성 중인 자들이 식량을 확보하기 위해 불온한 움직임을 보인다는 이야기에 대기하고 있던 극단주의자들 일부가 지원을 갔다.
이로써 조타실 앞 포로들을 겨누고 있는 극단주의자들의 수는 열 셋이 되었고 그 주변의 무인들을 합쳐도 서른이 되지 않았다.
변수는 없다.
서브홀 쪽의 지휘를 소여은에게 맡겼으니까.
소여은을 믿고, 도진은 도진이 해야 할 일을 하면 되었다.
스으으…….
침기(沈氣).
사신공을 운용함으로써 발현되는 독문진기가 도진을 감싸기 시작했다.
지금껏 상대의 무력화 용도로만 사용해 온 침기였으나 본래 이것은 사신공의 본격적인 운용을 위해서 사용되는 기운이었다.
사신공의 이치를 더욱 깊게 만들고 더욱 비현실의 영역에 이를 수 있게 해 주는 기운.
알 수 없는 영역(不知域).
침기를 운용하여 그곳에 듦으로써 도진은 누구도 모르게 포로들을 겨눈 이들과 모두 이어지는 선을 그릴 수 있는 점에 섰고.
스으으…….
마치 호응하듯.
도진과 같은 기운을 두른 이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채 3분도 지나지 않아.
치직-
"……!"
극단주의자들이 가진 무전이 노이즈를 흘렸다.
철저하게 훈련받은 그들은 대번에 방아쇠를 겨눈 손가락에 힘을 주었으나.
"……!!"
열 셋 중 일곱의 손가락이 반응하지 않았다.
노이즈를 의식한 순간 모든 것이 끝나 있었으니 알 수 없는 영역에서.
이미 침기가 그들의 손을 잠식한 것이었다.
그리고 침기가 미치지 못한 여섯 명은.
스각-
눈앞에서 번뜩인 빛에 총이 베여 발포할 수 없었다.
"……!"
두 눈을 부릅뜬다.
마치 귀신처럼.
정말로 귀신처럼 갑자기 나타난 시린 빛이 번뜩이며 총이 동강난 것이다.
허나 그런 경악과 달리 세뇌의 영역에 이른 정신과 반복된 훈련이 새겨진 육체는 움직여 행동을 취하려 했으나.
빠각!
퍼엉!
이후 이어진 거대한 충격과 강고한 정신을 대번에 침몰시켜 버리는 기운에 침묵하게 되었다.
손이 닿지 않는 자들에게는 격공장을 통하여, 그리고 가까이 있는 이들은 직접 주먹으로 도진이 침기를 주입한 것이었다.
그렇게 여섯을 찰나에 제압한 도진은 멈추는 일 없이 진각을 밟았다.
꽈아앙-!
배의 바닥을 구성하고 있던 강판이 무시무시한 경력에 우그러지며 떠올랐다.
그것을 도진이 손에 맺힌 기운, 수기(手氣)로 대번에 자르고서는 후려쳤다.
꽈아아아앙-!!
거대한 강판이 조타실의 문은 물론이요 창문마저 뒤덮으며 때려박혔다.
내부에 있던 이들의 개입을 그것으로 막은 도진이 남은 일곱 명의 극단주의자들을 잡기 위해 움직였고.
스으으…….
동질감을 느끼게 하는 기운이 뒤에서 가까워졌다.
죽음을 내리는 사신(死神)의 숨결을 두른 자.
그러나 도진에게 있어 그것은 마치 가족의 기척과도 같은 기운이었다.
곧 그 기운을 두른 이가 곁에 섰다.
눈만을 드러내어 얼굴을 알 수 없지만 그 깊고 투명한 눈동자만으로도 충분했다.
도진의 두 스승 중 한 명.
장호를 그 투명한 눈동자 너머로 연상케하는, 똑 닮은 눈이었으니까.
그래서 기뻤고.
"……."
다 해진 옷 안에 감춘, 수많은 고초가 뚝뚝 묻어나는 상처들이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짐작은 하고 있었다.
편지 하나.
그걸 주고받는 것만으로도 오랜 시간이 걸려야 했고 그나마도 큰 위험을 감수해야만 한다는 걸 전서린을 통해 들었으니까.
그렇다면 직접 도진이 있는 곳에 오기 위해서는 얼마나 큰 위험이 따르겠는가.
하지만.
그렇게 짐작을 하는 것과 이렇게, 그를 위해 감내해야만 했던 것을 직접 보는 건 완전히 다른 영역의 일이었다.
그녀의 상처는 일반인이라면 당장 중환자실에 누워야 할 만큼 엄중했다.
그것을 사신공의 공능으로 억지로 억누르고 있는 상태였다.
그래서, 도진은 조금 화가 났다.
스으…….
남은 일곱의 극단주의자를 제압하는 건 지극히 간단한 일이었다.
그녀와 함께 침기를 주입하여 그들의 육체를 완벽하게, 조용히 침묵시켰다.
남은 건 소여은 쪽과 대치하고 있는 극단주의자들과 조타실 안 극단주의자들을 제압하고 뭍으로 가는 것뿐이다.
"……."
눈을 마주하였다.
오래도록. 느긋이 눈을 마주하고 많은 이야기들을 하고 싶지만.
지금은 그보다 먼저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 잠시 참아야 했다.
그녀가 소여은이 있는 쪽으로 향하고 도진이 조타실 앞에 섰다.
꽈앙-!
도진이 때려박았던 거대한 강판이 바닥에 엎어지고 눈동자가 분노로 물든 극단주의자들이 늘어섰다.
그들은 도진이 누구인지 알아보았으면서도 주눅들지 않았고 오히려 기세를 불태웠다.
과연.
상당한 경지에 이른 자들이었다.
그 심지가 비록 좋지 않은 방향이라고 하나 비할 이가 드물 만큼 굳어 실력 이상의 무공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도진은 그들이 무공을 발휘할 시간을 허락하지 않았다.
두우웅-!
천마가 군림하였고 이곳을 채우고 있던 모든 기운이 그 의지 아래 극단주의자들을 휩쓸었다.
* * * *
1층의 로비.
크루즈선을 점거했던 모든 극단주의자들을 모았다.
제압하는 과정에서 단전을 파괴하지는 않았으나 침기를 주입하여 그 육체를 망가뜨렸으니 더이상 위협이 되지 못할 것이었다.
허나 그렇다고 해서 방치할 수는 없으니 한데 모아 묶고서 천천히 대화를 나눌 생각이었다.
도진이 철저하게 일러둔 덕분에 소여은 쪽에서 다친 사람은 나오지 않았고 그들과 힘을 합쳐 극단주의자들을 모으고 암산서가의 무인들이 화기를 보관하는 쪽으로 움직였다.
그렇게 사건을 정리하면서 도진은 장호의 후손에게 시선을 향했다.
자연스레 풍경에 녹아든, 그러나 그래서 더욱 도진의 눈을 가득 채우는 사람이다.
이 세상에서 볼 거라곤 생각지 못했던.
스승을 연상케하는 완벽한 무흔잠영의 이치가 그녀의 작은 동작 하나하나에 깃들어 있다.
그 시선이 워낙에 짙어서.
그녀의 시선 또한 도진에게로 향하고 말았다.
'……음.'
무얼 말해야 할까.
첫 마디로는 무엇이 좋을까.
도진은 잠시 고민하였고.
쿠웅-!
"……!!"
갑자기.
도진의 안에 깃들었던 사신공의 모든 기운이 일그러졌다.
'뭐, 라?'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해의 영역을 벗어난 일이었다.
침기가 마치 오염된 듯 일그러지며 순간 몸이 휘청였다.
만약 천마기가 지탱하지 않았다면 무너졌을 것이다.
그 말은 곧.
…….
도진과 눈을 맞추었던 이가 소리없이 무너지고 있었다.
깊은 상처로 지친 몸을 지탱하고 있던 침기가 일그러지며 그녀는 무너지고 있었고 그런 그녀를.
눈이 뒤집힌 극단주의자의 '검기(劍氣)가 일렁이는 검'이 꿰뚫으려 하고 있었다.
푸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