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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해서 지존까지-618화 (618/741)

617화

"…어때요?"

낮은 목소리로 묻는 건 언뜻 편하게 입은 듯 보이지만 외부의 시선을 철저하게 고려하여 꾸몄던 사복 차림 대신 무복을 입은 박소진이었다.

박소진. 레드슈의 리더.

펌과 레이어드컷이 돋보이는 중단발을 몇 년째 꾸준히 유지하고 있는 고양이상의 미녀.

헤어스타일을 유지하면서도 컨셉에 따라 여러가지 모습을 보여 주었던 그녀는 성공한 아이돌이었고 그런 이미지가 강했으나 지금만큼은 믿음직스런 무림인으로서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었다.

허나 그것이 단단하게 마음 먹고 자신을 다독이고 있을 뿐 '전쟁'에 임하기엔 부족하다는 것을 잘 아는 소여은은 그녀가 얼마든지 의지할 수 있도록 더욱 단단한 모습을 보여주며 말했다.

"괜찮아요. 당분간은 소강 상태일 테고 곧 올 구원까지 희생없이 버틸 수 있을 거예요."

혼란을 틈타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 숨어 있던 예무르의 극단주의자들이 총기를 꺼내들었을 때 바른 엔터를 호위하고 있던 소여은을 포함한 암산서가의, 천마신교의 무인들이 주축이 되어 희생자를 최소화할 수 있었다.

그들이 가장 먼저 무기를 들었고 기세를 일으켜 극단주의자들을 밀어냈으니 찰나의, 그러나 무인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순간을 만들어냈고 그 틈에 다른 무인들이 암산서가를 중심으로 뭉치면서 대치 구도를 이룰 수 있었던 것이다.

허나 그 대치를 오래 유지할 수는 없었다.

목숨을 아무런 거리낌없이 버릴 각오로 준비한 극단주의자들의 화기(火器)를 맨몸으로 감당할 수는 없었고 인원에서도 열세였으며 무엇보다 그들의 철저하게 준비된 테러를 임기응변으로 제압하는 건 불가능했다.

때문에 소여은은 냉정하게 상황을 이끌어 이곳에서 농성하는 것으로 가닥을 잡은 것이다.

사실은 스스로 퇴로를 없애는 미봉책이었다.

실제로 그들은 홀과 객실 안에 갇힌 신세였고 다시 나갈 수 없게 되었다.

어떻게 보면 말 그대로 '가라앉는 배'에 올라탄 형국이다.

하지만 소여은과 암산서가는 물론이요 레드슈도, 그녀의 판단에 따른 이들도 절망하지 않았으니 그것은 이런 상황에서도 희망을 가지게 하는 절대적인 이름이 있었기 때문이다.

소여은이 사람들에게 말했다.

"교주님이 오실 거예요."

교주님.

그 이름이 극한 상황에서도 그들을 지탱하는 이름이다.

소천마.

"도진이가 곧 올 거예요."

박소진 또한 사람들에게 화려한 미소로 말했고.

"나 불렀어?"

"꺅?!"

그 곁에서 불쑥, 도진이 나타났다.

* * * *

믿을 수 없는 일에 도진이 한순간 동요를 보이며 멈칫하고 말았다.

물론, 도진의 기준에서 그런 것이었고 무흔잠영의 이치는 일절 흔들리지 않았기에 소란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리고 도진의 동요는 금새 가라앉았으니.

'아니.'

눈앞에 보인 것이 '홀로그램'이 아니라는 걸 바로 인지하였기 때문이다.

그래. 그것은 홀로그램이 아니었다.

도진의 망막에 비친 건 점과 선, 그리고 면으로 구성된 차라리 암호문에 가까운 것이었지 홀로그램이라 말할 수준이 되지 못했다.

허나. 그럼에도 도진이 그것을 홀로그램이라 느낀 것은.

-무흔잠영이다.

-예.

그것이 세상 누구보다 무흔잠영을 깊이 깨우치고 있다 자부하는 도진에게 무흔잠영의 이치로, 선으로 전해진 정보였기 때문이었다.

문자란 선을 조합하여 구성할 수 있는 것이었고 거기에는 뜻이 담겨 의사 전달의 수단으로써 기능한다.

한데 여기에 그보다 깊은 '이치'가 담길 수 있다면 어떨까.

깊고 깊은 이치가 담길 수 있고 그것을 읽을 수 있다면.

설령 그것이 단순한 점과 선, 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해도 홀로그램 이상으로 선명하고도 깊은 뜻을 전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순간 도진은 눈앞에 비친 것을 보고 홀로그램이란 단어를 떠올린 것이었다.

-특정 위치에 도달한 이가 있고 그 자가 조건을 만족한다면 주술로 이것을 보여 주도록 설치한 것이다.

장호는 그렇게 설명했다.

마법과 같은 이야기라 믿기 힘든 내용이었으나 도진은 바로 믿었다.

그것이 스승 장호의 이야기였고 이미 마법이라 부를 수 있는 수준의 주술을 체험한 경험이 있었으니까.

그리고 장호와 함께 분명히 확신했다.

-스승님의 후손이, 이곳에 있는 거네요.

-…그렇구나.

장호답지 않게, 사신답지 않게 감정이 묻어나 아주 조금 늦은 대답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전혀 이상한 게 아니었다.

도진의 말대로.

이것을 남긴 자는 틀림없이 장호의 후손이었으니까.

비인부전(非人不傳). 직역하면 사람이 아닌 자에게 전하지 말라는 뜻으로 엄격한 잣대를 통하여 전수자를 가린다는 말이다.

장호에겐 그렇게 비인부전으로 엄격히 가려 전수하여야 할 것이 두 가지 있었으니 하나는 무공인 사신공이었고 또 하나가 경지에 이른 주술이었다.

사신 장호는 무려 고금제일인인 천마에 비견되는 무인이었으면서 동시에 술법으로도 경지에 이른 술법사였고 그 두 가지를 오직 혈육에게만 전하였다.

그러니까.

무흔잠영의 이치에 따라 발을 딛게 될 가장 확률이 높은 곳에 자신이 알고 있는 정보를 무흔잠영의 이치에 따라 점과 선, 면에 그리고 그것을 장호를 연상케 하는 방식의 술법에 담을 수 있는 사람은.

틀림없이 장호의 후손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도진이 심상세계의 장호에게 고하였다.

-만나러, 가보겠습니다.

-그래.

'그녀'가 남긴 정보에 따라 도진이 움직였다.

요소요소마다 신경질적이라 해야 할 만큼 날카로운 기세를 풍기는 이들이 총기를 들고 경계하였으나 조용히 걷는 도진을 발견할 수는 없었다.

부지역에 이른 무흔잠영은.

사신 장호가 도진에게 사사한 움직임은 그것을 가능케 하는 사신의 걸음이었다.

그리고 그런 도진의 사신의 걸음과 정확히 일치하는 선을 미리 그어둔 이가 남긴 두 번째 정보를 도진은 곧 3층에서 마주할 수 있었다.

첫 번째 정보가 배의 구조도와 함께 두 번째 정보를 남긴 장소를 표시했다면 두 번째 정보는 현재 배의 상황과 세 번째 정보가 있는 장소였다.

'3층 서브 홀과 객실.'

포로가 되지 않고 극단주의자들과 대치하고 있는 이들은, 그러니까 레드슈가 포함된 이들은 3층에 있는 서브 홀과 서브 홀에서 이어진 객실에 모여 있었다.

각종 집기로 바리케이드를 쌓고 그 뒤에서 대치하는 상황이었고 그 외 모든 장소를 극단주의자들이 점거했다.

붙잡힌 이들은 조타실과 가장 가까운 또 다른 서브 홀 중앙에 모여 있었으며 주위를 극단주의자들이 단단히 경계하는 중이다.

그들을 분산하지 않고 한데 모아둔 건 극단주의자들의 수가 모자랐기 때문이었다.

정보를 확인한 도진은 세 번째 정보가 있는 곳을 향해 걸으며 정보와 함께 남겨져 있던 그녀의 '이야기'를 들었다.

-놀랐습니다. 설마 사신공의 진전을 이은 분을 만날 줄은 몰랐습니다.

'나도 그렇습니다.'

처음엔 황녀가 사신공을 익히고 있었던가 생각했다.

하지만 곧 아닐 거라 판단했다.

황녀는 위지혁과 주려취의 후손이었으니까.

그렇다면 천마신공과 황룡무상신공을 익혀야 했지 사신공과 술법을 익히진 않았을 것이다.

천마신공과 사신공을 함께 익힌 도진이 특이한 경우였다.

마치 그녀가 손을 잡고 이끄는 것처럼 선명한 흔적을 따라 아래로 내려갔다.

그리고 '지하'임에도 훤히 밝고 넓은 공간을 두 곳으로 나뉘어 지키는 극단주의자들을 볼 수 있었다.

그들이 지키는 건 공간이 아닌 폭탄이었다.

그래. 이 크루즈선을 단번에 날려 버릴 폭탄.

혹여 섣불리 군대를 동원하는 등의 행동을 취하면 폭탄을 터뜨려 버리겠다는 그들의 협박은 거짓이 아니었다.

도진은 그들의 배치, 그리고 폭탄의 위치 등을 완벽하게 기억하고서 그녀가 이끄는 대로 다음 장소로 향했다.

걸으면서, 또 짧은 이야기를 들었다.

-가능하다면, 당신을 가르치신 분의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저도, 당신의 이야기를 듣고 싶네요.'

한 번도 본 적이 없고 목소리도 들은 적이 없는데.

그녀의 이미지가 선명하게 그려졌다.

그럴 수 있었던 건, 그녀가 남긴 무흔잠영의 흔적이 그리도 선명했던 덕분이다.

그녀의 경지는 놀랍게도.

아니, 장호의 후손이었으니 당연하게도.

부지역에 이르러 있었다.

그렇게나 높은 경지에 이른 그녀가 무흔잠영에 남긴 이치 또한 그렇게나 선명하여 도진이 그녀를 구체적으로 상상할 수 있게 해 주었던 것이다.

그녀는 제법 장난기 있고 활달한 표정을 지을 것이다.

하지만 속내는 깊고 단단하니 외유내강이란 단어가 참 잘 어울리는 사람일 것이다.

어째서 이곳에 있는 것일까.

그녀는 황녀의 호위인 것일까.

그런 궁금증들이 생겼다.

그녀가 다음으로 이끈 곳은 유리 너머로 바깥이 훤히 보이는 조타실로 이어지는 홀이었다.

본래 출입이 제한되는 공간인 그곳에 포로로 잡힌 이들이 자유를 빼앗긴 채 모여 있었다.

극단주의자들이 그들을 빙 둘러싸고 물샐틈없이 감시하며 총을 겨누고 있었고 조타실에서는 특히나 수준 높은 무인들이 대기 중이었다.

그녀의 안내는 여기서 끝이었고 도진은 내부의 상황을 완전히 파악할 수 있었다.

'…혼자서는 안 될 곳이었네.'

제압해야 할 포인트는 셋이다.

나뉘어 설치된 폭탄 두 개와 이곳에 억류당한 포로들.

중요한 건 이 세 곳을 동시에 제압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들의 경계는 유기적이었고 어느 쪽이든 한 곳이라도 제압당하면 즉시 두 곳이 움직이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니까.

포로를 구하면 폭탄이 터져 단순히 배가 가라앉는 걸 넘어 그 여파에 휩쓸린 이들 중 일부가 목숨을 잃을 것이었고 그 뒤의 혼란 속에 또 희생이 생길 것이었다.

그렇다고 폭탄부터 제거하려 든다면.

도진이라면 두 개의 폭탄을 동시에 해결할 수 있지만 한참 떨어진 포로들까지 구할 수는 없었다.

'전지전능'하지는 않은 도진으로서는 양자택일을 해야만 했고 그것은 결국 최선을 택할 수 없어 차선을 택해야만 하는 상황에 놓이는 것이다.

하지만.

전혀 생각지 못했던 변수가 도진에게 최선을 선택할 수 있게 해 주었다.

그녀가 남긴 '주술적 기운'이 분명하게 느껴진다.

-너에겐 신안(神眼)이 있고 자연과 이어질 수도 있으니 내가 알려주는 방식으로 나의 법기(法氣)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자연스레 동화된 자연을 신안에 따라 더듬는다.

그로써 장호 독문의 주술적 운용 방식을 느낄 수 있었다.

보편적으로 내부에 기운을 쌓아 다루는 무공과 달리 술법은 외부의 기운을 운용하여 원하는 바를 실현한다.

그리고 외부의 기운을 운용하는 방식은 술자마다 달랐으며 그 운용법의 수준에 따라 운용하는 술법의 수준이 정해진다.

때문에 주술의 운용 방식은 비인부전이었고 이곳에 남은, 그녀가 남긴 가장 진한 법기는 장호의 운용 방식을 정확하게 따르고 있었다.

-곧 당신을 만나게 될 순간이 기대되네요.

그녀가 남긴 이야기에 도진이 진하게 미소지었다.

'나도 그렇습니다.'

스승 장호의 후손.

어떻게 이곳에 있는지, 어떻게 사신공을 익힌 이가 올 것을 알고 이런 것을 조사하여 준비하고 남겼는지.

그런 여러가지 의문보다 그저 순수하게.

그녀를 마주할 순간이 기대되었다.

그러니까.

스으-

이곳을 즉시 정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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