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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해서 지존까지-617화 (617/741)
  • 616화

    선박 탈취.

    그러니까 흔히 쓰이는 말로는 하이재킹이 일어났다는 말에 도진의 표정이 굳었다.

    하이재킹은 그 자체로 세계 단위의 뉴스가 될 만큼 심각한 일이었는데 그게 다른 배도 아니고 러시아에서 한국으로 들어오는 호화 여객선 위에서 일어난 것이다.

    "상황 파악은 얼마나 됐어?"

    우선 도진이 침착하게 물었고 나지윤도 마찬가지로 전혀 동요하지 않은 분위기를 유지하며 답했다.

    "모든 사람이 인질로 잡힌 건 아니야. 1/3 정도가 포로가 됐고 나머지 사람들은 대치하고 농성중이라고 해. 하지만 조타실을 극단주의 무장 단체가 점거하고 있는 상황이고 그 무장 단체가 러시아의 전쟁 중단을 촉구하면서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시 12시간마다 한 명씩 포로를 사살하겠다고 선언했어."

    "……."

    일이란 것은 상황을 명확히 파악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도진은 명경지수를 유지하며 나지윤의 설명을 들었다.

    일단 조타실을 탈취당한 호화 여객선은 정확히는 크루즈선이다.

    숭무고 입학 시험 때 보았던, 흔히 인터넷에서 크루즈선하면 볼 수 있는 거대한 그런 크기는 아니어서 크루즈선치고는 상당히 작은 편이라고 했다.

    다만 작아도 크루즈선은 크루즈선이어서 1500명을 실을 수 있었는데 러시아를 떠나기 위해 동원된 게 뜬금없이 이런 크루즈선이 된 건 그리 대단한 이유가 아니었다.

    항구에 모인 수많은 사람들을 실어날라야 했고 그 조건에 부합하는 배들을 수배한 결과 마침, 당장 일정이 비었던 크루즈선이 그곳에 있었던 거다.

    그리하여 레드슈 일행을 포함한 천여 명의 사람들이 우르르, 급히 배에 올랐는데 하필 그 안에.

    "예무르의 극단주의자들이 섞여 있었던 거야."

    예무르의 극단주의자.

    그들은 무림인과 가장 상성이 좋지 않은 사상을 가진 테러 단체였다.

    무림인과 마찬가지로 무공을 배움에도 그들은 무림인으로 분류되지 않았으니 철저하게 그들의 교리를 따르기 때문이다.

    신과 그 신의 가르침을 대신 전하는 이들만이 사람을 심판할 수 있다는 사상을 가지고 있고 그에 따라 개인의 판단으로 타인을 '심판'하는 건 신을 모독하는 중죄로 여긴다.

    …그리고 그 중죄의 대가는 사형이다.

    이런 인간들이 제법 돌아다니는 곳이니 무림만이 아닌 세계 대부분의 사람들이 예무르를 꺼리는 것이다.

    사족을 달자면 이런 부분을 알고 있던 무림인들은 대부분이 라보르가 피해자라 생각했다.

    그런 배경의 극단주의자들이 러시아를 떠나는 이들 사이에 섞여 배에 탔고 문제를 일으킨 것이었다.

    "러시아는?"

    "들은 척도 안 하고 있지."

    "예무르는?"

    "자기들이랑 관련이 없는 극단주의 테러 집단이래."

    후우.

    도진은 길게 숨을 내뱉었다.

    상황이 아주 좋지 않았다.

    전쟁은 예상과 달리 지지부진하였다.

    러시아가 선전 포고 후 진군하여 예무르의 수도를 이틀만에 함락시켰을 때만 해도 전쟁이 일주일 안에 끝날 거라 생각한 사람이 많았다.

    허나 거짓말처럼 그 뒤로 러시아는 고전하였고 오히려 피해를 입으며 거센 저항에 부딪쳤다.

    예무르의 수도는 라보르와의 관계와 러시아와의 무역 등 여러가지 이유로 나라의 중심이 아닌 러시아 쪽 국경에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었고 어떻게 준비를 하기도 전에 함락당한 것이었다.

    그러나 예무르의 영토는 두 손에는 못 꼽아도 네 손에는 꼽을 만큼 컸고 이후 거세게 저항하며 러시아의 진군을 막았다.

    반대로 러시아는 수도를 점령할 때까지만 해도 기세가 등등하였으나 이후 진창에 탱크가 빠지거나 경계를 허술하게 하다 예무르의 무인들로 구성된 별동대에 보급이 불타고 또 빼앗기는 등 어이없는 모습을 보여주며 망신을 샀다.

    그러니까 예무르는 생각보다 더 잘 싸웠고 러시아는 상상 이상으로 허술했던 탓에 전황이 지지부진해진 것이다.

    그래서 상황이 더 복잡해졌다.

    꺼내기 조심스러운 말이지만 차라리 전쟁이 예상대로 일주일 안에 끝났다면 상황 자체는 단순해졌을 거다.

    하지만 전황이 늘어지면서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세계는 러시아를 계속 제재하기는 해야 했고 여러가지 방안을 내놓았으니 그중 하나가 딴에는 강력한 제재였던 다국적 기업의 철수였다.

    허나 러시아는 아랑곳않고 전쟁을 계속하겠다 선언하였으며 제재에 동참한 유럽 등 나라에 천연가스 공급을 끊는 등 역공을 해 버렸다.

    러시아도 힘들지만 제재에 동참한 나라들도 같이 힘들어져 버린 것이다.

    그리고 예무르의 강경주의자들이 목소리를 냈다.

    -말로만 러시아를 규탄하면서 실질적인 행동에는 나서지 않는 겁쟁이들이 너무 많다.

    -법에 따라 살인자에 대한 형을 집행하는 것이 그리도 잘못된 일인 것인가?

    -정파(正派)를 표방하던 위선자들만이 세계에 가득하다.

    일단 세상의 보편적 여론은 예무르의 편이었다.

    발단이 된 라보르와 예무르 사이의 일을 떠나 일방적으로, 제대로 된 명분없이 한 나라를 유린하려는 러시아의 태도에는 누구도 동의해주지 않았던 것이다.

    여기서.

    무림이 분열될 조짐을 보였다.

    -무공은 무도(武道). 도(道)를 구하는 마음가짐을 빼놓을 수 없다. 더 이상 불의를 지켜보진 않겠다.

    그와 같은 기치 아래 예무르에 힘을 보태겠다는 무림인이 늘었고 실제로 예무르로 향했다.

    허나 그들을 비판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았다.

    -예무르는 극단주의자들이다. 개인의 사상을 억압하고 극단적인 교리를 강요하는 나라다. 러시아의 무도한 행위는 규탄하겠으나 예무르의 사상에는 동의할 수 없다.

    러시아를 비판하는 부분에서는 뜻을 같이 한다.

    하지만 상황이 이렇다고 해서 그에 묻어 가듯 예무르의 사상을 옹호하려 드는 건 용납하지 않겠다는 목소리가 많았던 것이다.

    이런 상황임에도 그런 목소리를 내는 건, 그러지 않으면 이 사태 이후 무림인의 '주권'이 흔들릴 거라는 위기감을 느낀 이들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발단이 된 사건 때문에 사실상 살인 면허나 다름없는 무림특별법을 손봐야 한다는 목소리가 사회에서 높아진 것이다.

    그리고 그런 현상이, 도진에게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타아앙-!

    선박 탈취 36시간 경과.

    나라가 버린, 그러나 진실은 모를 극단주의자들은 러시아의 태도에 변함이 없자 선언한 대로 포로를 공개 총살하였으니 세 명째였다.

    그 방송을 각국은 속수무책으로 보고만 있어야 했다.

    군대가 출동하는 등의 움직임이 있으면 설치한 폭탄으로 아예 배를 폭파해 버리겠다는 협박 때문이었다.

    대책을 수립하고 움직이기 어려운 사태였고 36시간은 너무 짧았다.

    여기서 도진은 생각해야 했다.

    "잠입하는 것 자체가 웬만한 수준의 무인으론 어림도 없는 일이야."

    현재 크루즈선은 러시아와 일본 사이쯤에 위치해 있다.

    그들 말로는 상당한 성능의 레이더를 상시 운용하고 있다는데 만에 하나의 가능성 때문에라도 배로 가까이 접근할 수는 없었다.

    그러니까 적지 않은 거리를, 그것도 바다를 헤엄쳐 가야 했는데 그렇게 헤엄쳐 크루즈선에 도착한다 해도 잠입하기 전에 그들의 촘촘한 경계에 걸린다.

    조타실을 포함하여 외곽을 그들이 완전히 장악했기 때문이다.

    헤엄쳐 접근할 가능성을 원천차단하기 위해 그들은 철저하게 경계를 서고 있었고 망망대해 밑에서는 몰라도 그 위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경유하여 배 안에 숨어드는 건 사실상 불가능의 영역이었다.

    심지어 크루즈선을 중심으로 강력한 전파 방해 공작이 이루어지고 있어 통신마저 불가능해진다.

    "너라면, 아무 문제가 되지 않겠지만."

    …허나 그런 것들은 도진에게 있어 문제가 되지 않았다.

    연신극기공으로 수련한 육체와 그 육체에 깃든 천마신공과 사신공이 그것을 가능케 했다.

    그리고 분명히, 모두를 구할 것이었다.

    그러니까 문제는.

    "이후의 여론, 이란 거겠지?"

    "맞아."

    러시아의 침공이라는 충격적인 사건은 발단이 되었던 무림인들 간의 싸움과 살인에 대한 논의까지도 세계 단위로 키워 버렸다.

    그리고 그런 주장이 강해진 것이다.

    더 이상 무림인의 살인 면허를 묵인해서는 안 된다, 고.

    심지어 국회의원들을 중심으로 하여 그와 관련한 어그로를 이미 끌고 있었던 한국에서는 더더욱 연일 논란이 되고 있는 중이다.

    이런 시기에 도진이 나서서, 그들을 제압한다면.

    필요에 의해 몇을 죽여야만 한다면.

    도진은 필요에 의한 일을 망설이지 않을 것이고 이후 문제가 될 것이었다.

    왜 그들을 죽였냐고.

    대의(大義)를 위해서도 아닌 알량한 자기 만족을 위해 목소리를 내는 이들이 모여 여론을 형성할 것이고 왜 함부로 그들을 상처 입혔냐고, 죽여야만 했냐고 비난할 가능성이 높아졌다.

    그리고 그렇게 비난하는 목소리는 세계의 여론에 섞여들여 단순한 목소리로 끝나지 않게 될 것이다.

    때문에 도진은 행동하기 전 고민을 해야 했고.

    "나에겐 풀 수 있는 문제니까 넌 너무 고민하지 않아도 돼."

    나지윤이 그 멋진 얼굴로 씨익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도진의 시선이 향했다.

    "네가 풀기 어려운 문제를 풀어 주려고 내가 있는 거야. 그것 때문에 잠을 줄이고 또 공부해 온 거니까. 내 일을 대신 걱정하지 말고 넌 네가 해야 할 일에 집중하면 돼."

    "하. 그런가?"

    "그래. 잊었어? 이론 1등은 나였어."

    "그러고 보니 그랬네?"

    "그러니까 걱정할 거 없어. 게다가 나만 있는 것도 아니잖아?"

    그런 나지윤의 곁에는 오성아도 있고 한유아도 있다.

    도진을 믿어주는 소담도 있고 상미도 있고 유지은도 있다.

    우서진과 클로에의 신뢰가 깃든 시선도 빼놓을 수 없다.

    그들의, 천마신교의 가장 앞에서 궁구하고 또 궁구하여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함에 있어서.

    소천마 김도진은 망설일 필요가 없는 것이었다.

    도진이 씨익 웃었다.

    "오케이. 그러면, 계획을 부탁해."

    * * * *

    이미 세 명의 사람이 죽었고 6시간 뒤에 또 한 명의 사람이 총살당할 상황이었음에도 러시아는 멈추지 않았다.

    -그 새끼 머리에 피 몰렸을걸.

    -절대 안 멈추겠지.

    러시아의 대통령을 욕하는 댓글들로 인터넷이 넘치는 중에도 변화는 없었고 미국을 포함한 나라들도 섣불리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미사일을 쏠 수도 없고 저격을 할 수도 없다.

    그렇다고 특수 훈련을 받은 무림인을 투입하자니 그 루트도 여의치 않았다.

    무공(武功)이란 정신적인 부분에 영향을 많이 받으니 골치 아프게도 극단주의자들은 그 믿음을 바탕으로 한 무공 또한 범상치 않았던 것이다.

    희생없이 그들을 제압할 만큼의 병력을 몰래 운용하는 건 너무 어려운 일이었다.

    하다못해 그들과 대치하고 있다는 내부의 무인들과 연계라도 할 수 있으면 좋겠는데 전파 차단이 워낙 강해 그것도 힘들었다.

    -어느쪽이든 진짜 파국이지.

    -농담 아니라 지금 너무 불안함..

    러시아가 물러설 것 같지 않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예무르의 극단주의자들이 언제까지고 배를 탈취한 채 버틸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감정을 배제하고 말하자면, 협박에 사용할 수 있는 인질들의 수에는 한계가 있었으니까.

    그것을 잘 알고 있던 극단주의자들은 인질들이 다 죽으면 배를 폭파하겠다고 이미 예고했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어쩌면, 정말로 전쟁이 벌어질지도 모른다.

    러시아와 다른 나라들의 전쟁이.

    사람들은 그런 불길한 상상을 하고 있었다.

    그런 때에.

    "……."

    도진은 조용히 밤바다를 가르며 나아가 저 멀리 보이는 크루즈선을 응시하고 있었다.

    조명을 최대로 밝힌 크루즈선은 마치 어두운 바다 위에 인공 태양이 뜬 듯 밝았고 진입할 수 있는 모든 루트를 극단주의자들이 철저하게 막거나 감시하는 것이 감각에 선명히 잡혔다.

    '우선은 상황 파악.'

    무흔잠영의 이치에 따라 감각이 잡아낸 것들을 토대로 하여 은밀히 잠입할 수 있는 루트가 점과 점을 이어 선이 되고 면을 이룬다.

    여기에 시간이 더해짐으로써 철저한 경계와 환한 공간마저 속이고 도진의 잠입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

    누구도 인지하지 못하는 가운데 소리없이 갑판에 내려선 도진이 내부의 그늘에 스며들었다.

    인간을 감지할 수 있는 온갖 수단의 최첨단 기기는 없었다는 걸 확인했고 일이 조금 더 수월해졌다.

    계획은 명확했고 도진은 지체하지 않고 움직였다.

    아니, 움직이려 했다.

    눈앞에.

    '뭐, 야?'

    허공에 홀로그램을 연상케하는 화면이 떠오르지 않았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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