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4화
무인은 필체를 통하여 자신의 무(武)를 드러낼 수 있다.
어려울 건 없는 이야기였으니 당장 수십 년 검을 수련한 이가 긋는 한일자(一字)의 궤적과 처음 검을 잡은, 수련을 전혀 하지 않은 이가 긋는 한일자의 궤적은 확연히 다른 것이다.
그 간단한 선조차 그러하니 선의 집합인 문자에는 더욱 깊고 큰 이치를 담을 수 있고 이를 통하여 자신이 도달한 이치를 필체에 담는 게 가능해지는 거다.
당장 현랑전의 무공을 이었던 노인부터가 오군성에게 그런 식으로 자신의 경지를 보여줌으로써 천외천으로 이끌지 않았던가.
하오문주, 황녀의 편지에는 그것을 응용한 암호문이 일견 평범해 보이는 문장에 숨어 있었다.
그럴듯한 지시를 담은 편지의 문장 사이사이에 그들만이 아는 무공을 적용하여야만 볼 수 있는 획을 더하는 식이었다.
그리하여 나오는 문장이 '내용 확인. 곧 그곳으로 가겠다'였다.
여기까지가 전서린이 파악한 내용이었고 그녀가 설명해주기 전에 도진도 읽어냈다.
암호를 풀기 위해 필요했던 무공이 다름 아닌 무용공(舞龍功)이었기에.
익히진 않았으나 그 안에 담긴 이치는 심상세계에서 위지혁을 통하여 깨우쳤다.
문제는, 전서린이 읽지 못한 '더 깊은 곳'에 있었다.
무흔잠영(無痕潛泳).
사신 장호의 무공의 근간이 되는, 사신공의 입문 무공.
이 무공의 진정한 이치는 점과 점을 이은 선(線)이니 필체에도 얼마든지 깃들 수 있었고 도진은 그렇게 필체에 깃든 더 깊은 곳의 메시지까지 읽어냈다.
그 메시지는.
-이것을 읽을 수 있는 이가 있다면 알려 주십시오.
……였다.
-…양파, 같네요.
도진이 말했다. 일부러 조금, 가벼울 수 있도록.
그만큼 전서린을 만난 이후로는 놀람의 연속이었다. 무거울 정도로.
곧 만나게 될 황녀가 위지혁과 주려취의 후손이라는 것만으로도 놀라운 일이었는데.
심지어 그 황녀가 보낸 편지에는 사신 장호의 무공인 무흔잠영의 이치로 숨긴 메시지가 숨어 있었다.
진부한 단어이지만 그만큼 거대한.
'운명'이라는 단어가 떠오를 정도다.
두 스승은 도진에게 아주 많은 것들을 주었으나 별달리 바라는 것이 없었다.
그저. 그저 정말로 희박한 확률이었으나 만약 후손을 만나게 된다면, 그것도 필요할 경우 도움을 손길을 건네달라는 것뿐이었다.
꾸욱-
도진이 주먹에 힘을 주고선 말했다.
"서린 씨."
"네, 교주님."
"황녀님이 오시는 데, 만약 큰 위험이 있을까요?"
"…황녀님이 원하시지 않는 한, 누구도 황녀님을 찾을 수 없을 거라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그 대답에 도진이 옅게 웃었다.
"…그렇네요. 원하시지 않는 한, 누구도 찾을 수 없겠네요."
무흔잠영을 필체에 담을 수 있을 정도로 수련한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겨우 무형독 따위'에 잡히는 건, 도진으로선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믿고, 기다려 보도록 하죠."
* * * *
하오문주에게 보낼 답신에 도진이 무흔잠영의 이치를 담아 메시지를 추가해 보내고 또 얼마의 시간이 지나 8월.
[속보!) 암산서가와 답청문, 특별 사면 확정!]
특별 사면 명단이 확정되었고 그 안에는 공약대로, 그리고 많은 사람들의 예상대로 암산서가와 답청문의 무인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도진은 소담과 나지윤이 포함된, 그러나 소란스럽지 않도록 인원을 구성하여 사면된 이들을 맞이하였다.
"5년도 되지 않았는데, 참으로 많은 것이 바뀌었군요."
"예."
소담의 아버지이자 암산서가의 가주인 서문호의 말에 도진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로, 많은 것이 변하였다.
회귀하여 전생에선 모니터 너머의 존재였던 소담을 보았고, 친해졌고, 이내 그 삶을 바꾸었다.
그 과정에서 모든 죄를 안고 갔던 소담의 아버지 서문호와 암산서가의 어른들.
그리고 가문과 아들을 지키기 위하여 스스로를 희생하였던 나지윤의 아버지 나문기와 그를 지탱하여 주었던 답청문의 사람들.
그들이 죗값을 감당하는 사이 일개 학생이었던 도진은 한 문파의 문주가 되었고 이제는 세계에 군림하는 천마신교의 교주 소천마가 되어 다시 마주하게 됐다.
"함께 하시지 않겠습니까?"
서문호는 씨익 웃었다.
"딸내미가 그렇게나 졸랐는데 어떻게 이기겠습니까."
그러고서는 진지한 얼굴이 되었다.
"암산서가. 오늘부로 천마신교와 함께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렇게 암산서가는 정식으로 천마신교와 함께하게 되었고 특별 사면과 연관된 이슈로 크게 퍼져 나갔다.
허나 마찬가지로 천마신교와 함께하게 된 답청문의 사람들은 회자되지 않았으니 그것이 바로 답청문의 방식이었다.
"정보 단체란 건 그런 거거든. 오히려 나는 너무 유명해져 버렸지."
나지윤은 그것을 안타까워하지 않았고 나문기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괜찮아. 이름조차 알리지 못하는 사람들에 비하면 우리는, 정말로 많은 걸 받았으니까 말이야."
호국 가문으로서의 명예를 되찾았고 사람들의 동경과 커다란 지지를 받으면서 특별 사면되었다.
본래 명성은커녕 얼굴조차 쉽사리 드러내지 못하고 사는 것이 정보 단체의 숙명이라는 걸 생각하면, 과분한 행복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도진은 그런 나지윤에게 웃으며 말했다.
"까짓거 둘 다 가지면 되지."
"뭐?"
"가질 거 다 가지면서 세이전주도 하면 되잖아."
어린애 욕심 같은 말이다.
하지만 나지윤은 크크큭, 웃었다.
"그러네. 안 될 거 없네?"
"그렇지?"
"어."
세계에서 손꼽히는 정보 단체의 수장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는 아들의, 친구와의 대화였다.
허나 그런 대화가 너무나 기꺼워서.
나문기는 겉으로는 드러내지 않았으나 모두가 읽을 수 있을 정도로, 속으로 미소지었다.
* * * *
현재 천마신교의 가장 아쉬운 부분은 인재 부족이었다.
너무 급격하게 커지다 보니 그에 걸맞는 인재풀을 갖추지 못했던 거다.
처음엔 오성아가 혹사하였고 그나마 한유아가 합류하면서 조금 나아졌으며 여기에 바할라의 오일 머니로 급한 불을 끄는 형국이었다.
그러다 화온이 들어오면서 한숨을 돌리긴 했는데 어디까지나 한숨을 돌린 정도였지 완벽히 해결된 건 아니었다.
그런 시기에 또 한 번, 믿을 만한 사람들이 합류하였다.
무림 파트로는 암산서가의 사람들이, 사무 파트로는 답청문의 사람들이 합류함으로써 인재풀이 보강된 것이다.
여전히 인재가 고프긴 하지만 믿을 수 있는 사람들이 늘었으니 확실한 호재다.
바로 이런 때에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 어느 정도는 예상하였던 좋지 않은 소요에 휘말리게 됐다.
[오형숙 의원, "언제까지 무림인에게 특권을 몰아줄 것인가?"]
오형숙. 요즘 말로 하자면 나름 '네임드'인 국회의원이다.
다만 좋은 방향이 아닌 나쁜 방향으로 널리 이름을 알린 사람이라 이미지가 아주 나빴는데 그래서 어그로를 끌기엔 제격인 사람이었다.
그리고 이번 어그로는 정말로 강력했으니 게시물에 일전 저격 사건에서 도진에게 제압당한 이들의 상처를 모자이크조차 없이 올리며 천마신교를 저격한 것이다.
[사람이 사람을 다치게 했다. 그냥 다치게 한 것도 아니고 나뭇조각으로 서슴없이 몸을 꿰뚫은 것이다. 이런 것이 당연한 시대가 돼 버렸다.
언제부터 이런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시대가 된 것인가? 이것을 정말로 당연하게 여겨서 될 일인가?
아니, 결코 그렇지 않다.
아주 잘못된 것이다.
그런 잘못된 시대가 되었으니 사람을 죽이고 당당한 이들을 특별 사면이란 이름으로 죄를 사하는 것이다.
……]
…그런 주장이었다.
굳이 말할 필요도 없이, 활활 타올랐다.
-이거 완전 또라이 아님?ㅋㅋㅋㅋ
-아님 희대의 명장임.
-???????;;;;
-저게?;;;
-모름? 쟤가 저렇게 어그로 존나 끌어서 지금 여당이 투표 이겼자너.
-엌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캬! 고걸 몰랐네!!
대부분은 그런 조롱과 '개소리하네'로 압축되는 반응이었다.
이렇게 보면 문제가 전혀 없을 것 같지만 아니었다.
그 주장의 의도가 여당을 공격하기 위한, 야당의 '반대를 위한 반대' 목적을 가지고 국회의원이 한 주장이었기 때문이다.
간단한 이야기다.
-궤변을 늘어놓으시는 거 아닙니까.
-궤변이라니요! 특별 사면 명단을 보십시오. 일방적인 이 명단에서 의도가 읽히지 않습니까! 천마신교에 대한 지지를 이쪽으로 가져와 혜택을 보겠다 그런.
-허 참. 어이가 없구먼.
-어이? 지금 막말합니까?
정치판 시궁창 싸움의 오물이 천마신교에 묻은 거다.
'예상하긴 했지만…….'
답이 뻔한데 그걸 이 악물고 모른 척하면서 온갖 궤변과 헛소리를 늘어놓으니 자연스레 그걸 보는 이들의 반응은 안 좋아지고 거친 말이 나온다.
그리고 그런 거친 말들 사이에 천마신교도 언급될 수밖에 없다.
여론은 호의적이지만 여기에 정치가 묻어 버리면 '까기 위해 까는' 사람들이 나오니 사실은 애초부터 엮이지 않는 게 가장 좋은 것이었지만…….
특별 사면 이슈로 이미 얽혀 버렸으니 지금은 감수해야만 한다.
뭐, 크게 걱정할 일은 아니었다.
지금 천마신교의 위치와 영향력을 생각하면 가지 많은 나무가 바람 잘 날이 없는 것처럼 이런저런 것에 어느 정도 잔가지가 흔들리는 건 자연스런 이치.
현명하게 넘기면 그것으로 끝날 일이다.
그럴 수 있도록 한유아와 오성아, 나지윤이 수고해 주고 있었고 정재계 양쪽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니 심각한 일로 번질 가능성은 없다고 보아도 될 것이었다.
실제로 일은 그렇게 흘러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특별 사면 관련 논쟁은 정치판의 일상적인 싸움으로 흘러갔고 그렇게 끝날 것처럼 보였다.
바로 거기에, 예상치 못한 변수가 끼어들어 장작이 더해졌다.
"전쟁?"
"어."
전쟁이 일어났다.
현대에 이렇게 말하면 엄청나게 큰일이 일어난 것 같지만 아니었다.
중동의, 뭔가 갈등이 생겼다 하면 총부터 겨누고 보는 지극히 사이 나쁜 두 나라의 전쟁이었기 때문이다.
맞대고 있는 국경선이 너덜너덜해질 정도로 자주 전쟁을 벌이는 두 나라였으나 세계에 미치는 영향이 미미하기에 냉정하게 말해 어디까지나 화면 너머의 일로 취급되었다.
다만 이번엔 그것이 한국에 조금 더 영향을 끼쳤으니 전쟁이 벌어진 이유가 무림인 관련이었기 때문이다.
"라보르의 무림인이 예무르에서 시비가 붙어 살인을 했는데 예무르에선 사형을 선고했고 라보르에선 무림인 사이의 결투였는데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해서 전쟁이 터진 거야."
라보르는 무림의 색채가 짙은 국가였고 예무르는 반대로 어떤 이유에서든 폭력은 정당화 될 수 없다는 입장이라 무림인들이 꺼리는 국가였다.
사이가 나쁠 수밖에 없었는데 심지어 이번에 상대를 죽인 무림인이 라보르 대통령의 친척이라는 게 알려지면서 더욱 불이 붙은 것이었다.
"무림인의 살인이 정당화 될 수 있는가. 공교로운 타이밍이네."
"그러게."
안 그래도 한국의 정치판에서 그걸 가지고 공격을 위한 공격을 하느라 시끄러운데 중동 쪽 국가에선 그걸로 아예 전쟁이 터졌으니 더욱 이슈가 될 수밖에 없었던 거다.
"뭐, 조금 더 조심할 수밖에."
천마신교는 지금까지 이미지를 잘 쌓아왔고 정착시켰다.
정당한 이유가 있다면 그에 걸맞는 심판을 한다.
중요한 건 그 과정에서 결코 죄를 짓지 않도록 심사숙고한다는 걸 만천하에 보여 주었다.
일전 저격 사건에서도 서울 한복판에서 저격으로 테러를 하려 한 이들을 망설임없이 단죄함과 동시에 피해를 입은 카페는 물론이요 주변에 있던 사람들에게도 과하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보상을 함으로써 좋은 방향으로 회자가 되었다.
그러니까 이슈가 조금 더 길어지더라도 천마신교에 문제될 것은 없다.
지극히 당연한 판단이었다.
그랬는데…….
[속보!) 라보르 예무르 전쟁에 러시아 참전!]
상상도 못했던 일이 터지며 상황이 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