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해서 지존까지-614화 (614/741)

613화

서소담과 나지윤.

두 사람은 제법 공통점이 많았다.

나라를 위하여 명성조차 떨칠 수 없는 그늘에서 희생한, 그렇기에 더욱 고귀했던 호국 가문의 후예였다.

그럼에도 혼란기에 보답받지 못하고 버려져 오랜 세월을 힘들게 보내야만 했다.

그리고 도진을 만나 삶이 바뀌었고 그 삶의 중심에 도진의 존재가 자리잡았다.

숭무고 동기라는 것도 있고 사소하게는 길가던 이들 99%는 돌아보게 만들 선남선녀이기도 한 둘은 그러나 의외로 그리 가깝게 지내지는 않았다.

사이가 나쁘다거나 어색한 건 아니다. 반대로 사이는 상당히 좋은 편이다.

무엇보다 도진이라는 좋은 교집합이 있었으니 갈등 요소도 없다시피 하다.

그저 순수하게 가까이, 함께 다닐 일이 드물었던 게 이유다.

소담은 암산서가의 일과 수련, 도진에 대한 생각으로 바빴고 나지윤은 도진을 위한 세이전의 일로 바빴으니까.

허나 그렇게 가깝지 않았던 두 사람이 일 년에 두 번은 함께 움직이는 일이 있었으니 다름 아닌 면회였다.

두 사람의 또 하나의 공통점.

가족이 교도소에 있다는 것이다.

부끄러워하지는 않았다.

소담의 가족들은 비록 살인을 하였으나 죽어 마땅한 이들을 참하였으며 나라를 배신하지 않았고.

나지윤의 가족들은 가문을 지키기 위하여 스스로를 희생한 것이었으니까.

그러니까 당당히 일 년에 두 번, 행보와 모습을 감추지 않고 면회를 하였고 이번의 면회 또한 민감한 시기와 관련이 없는 정기 면회였다.

그래서 민감한 시기이지만 이번에도 공식적으로 면회 일정을 잡았고.

"같이 가자."

"같이?"

"응."

소담은 물론이요 나지윤 또한 도진과의 동행을 요청하여 이렇게 함께 온 것이었다.

"……."

훈련받은 대로 정확한 자세로 소리없이 안내를 위하여 걷는 젊은, 그러나 숙련된 무인은 저도 모르게 주변이 아닌 도진에게 신경이 쏠리고 있었다.

그를 따라 방문한 세 사람이 소리없이 걷는 건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소리가 잘 나는 바닥재를 깔았음에도 소리가 나지 않게 걷는 것 자체는 훈련으로 얼마든지 낮은 경지의 무인마저 가능한 일이니까.

허나 그렇게 걷는 이들 중 한 명, 소천마에게서 너무나 자연스러운 기척만이 느껴지는 것과 그럼에도 너무나 존재감이 선명한 건 비현실적인 일이었다.

억지로 기척을 감추는 것도 아니었고 존재감을 억누른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지극히 평범하여 일반인 같이 느껴졌고 그래서 아득한 격차를 실감하게 된다.

그리고 그것마저.

소천마가 허락하였기에 느낄 수 있는 것이었다.

그것은 굳이 그에게 소천마가 무언가 압력을 넣기 위한 게 아니었다.

반대로 그를 도와주는 것이었으니 어쩔 수 없이 마주치게 되는 수감자들 중 괜히 소천마라는 위명에 야유를 보내려 들었던 이들에게 경고를 보내기 위한 기세였기 때문이다.

이곳은 일정 이상의 경지에 오른 무인들을 가두고 교정하기 위한 목적으로 지어진 시설이었으나 세상만사가 다 그렇듯 목적대로만 굴러가지 않았다.

'일정 이상의 경지'에 오른 무인은 대개 그런 인간들이었으니까.

교정이 되지 않는다.

당장 지금만 해도 소천마가 기세를 일으키지 않았다면 어떤 더러운 소리를 내뱉을지 모를 오늘만 사는 놈들이 적지 않았다.

'암산서가랑 답청문 분들이 그래서 대단한 거지…….'

어쨌든, 그런 놈들을 몇이나 마주쳤으나 허튼 소리가 한 글자도 나오지 않았으니 과연 소천마의 위명을 실감하게 된다.

말 그대로 오늘만 사는 놈들이 그 오늘을 잃지 않기 위하여 몸을 사린 것이다.

그렇게 범죄자들의 더러운 소리를 사전에 차단한 소천마는, 그러나 자신에게는 의도적으로 간접적으로 그 존재감을 느낄 수 있게 해 주어 성장에 도움을 주었으니 감사하는 마음이다.

"이곳입니다."

그런 이유로 안내를 맡은 무인은 정중하게 면회실로 도진 일행을 안내해 주었고.

"감사합니다."

도진은 소담, 나지윤과 함께 면회 대기실에 들어섰다.

원칙상 면회는 한 번에 한 팀만 가능했다.

"먼저 해."

나지윤은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거창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가볍지도 않은.

그래서 양보받은 이가 전혀 부담스럽지 않도록 만드는 모습이었다.

"고마워."

어차피 말로는 이길 수 없었기에 소담은 고맙게 그 양보를 받아들였고 도진과 함께 문 너머 면회실로 향했다.

내부는 철저하게 차단된 공간이었으나 수많은 최첨단 CCTV가 사각지대 없이 소리와 행동을 녹화하고 있었다.

…이곳은 그런 곳이었다.

하지만 소담은 환하게 미소지으며 강화 유리 너머에 인사했다.

"아버지."

굵은 턱선이 인상적인 중년인은 그러나 그 인상을 중화할 정도로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받았다.

"평소 아빠라고 부르면서 오늘은 체면을 차리는구나."

"아빠!!"

소담은 빽, 소리를 질렀으나 그 시선을 사로잡는 미소는 그대로였다.

"문주님도 오랜만에 뵙습니다."

"네. 잘, 지내셨나요."

"하하. 마음이 편하니 이곳에서 지내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습니다."

두 번.

장소가 좋지 않다 하나 얼굴을 아예 비추지 않는 것도 비례(非禮)이기에 찾아온 적이 있었고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기에 대화가 그리 어색하진 않았다.

그리고 암산서가의 문주이자 소담의 아버지, 서문호는 정말로 마음이 편하여 등선이라도 해 버릴 듯한 얼굴이었다.

"딸이 좋은 곳에 있고 맡길 사람도 있으니 어찌 편하지 않겠습니까."

"아빠!!"

"웬 내숭이냐. 넌 내숭 안 떨어도 내숭 떠는 애들보다 분위기가 살게 엄마가 낳아줬으니 부담 가질 것 없다."

"하하하."

인상과 달리, 그리고 당시의 이미지와는 달리 서문호는 농담에 능숙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소담은 그런 아빠에게 휘둘리는 예쁜 딸이다.

그 예쁜 딸이, 아빠에게 계속 휘둘리다 이내 진지하게 말했다.

"아빠."

"그래, 우리 딸."

"우리 부자 됐어."

"그래, 들었다."

"잃었던 것들, 되찾았고 이자까지 받았어."

담담히, 그러나 가득 담긴 기쁨이 소담의 예쁜 목소리에 묻어난다.

의천검가의 수작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왕실이 호국 가문이었던 암산서가와 답청문에 나누어 주었던 것들을 중간에서 가로채고 호의호식했던 것이 압수 수색에서 탄로 나면서 의천검가는 완전히 몰락하였다.

더 이상 그 이름을 쓸 수 없게 되었고 나라에서 받았던 모든 것들은 몰수당했다.

그 과정에서 본래 받았어야 했던 것들에 이자까지 더한 재물이 암산서가와 답청문에 돌아간 것이다.

그리고 명예까지도.

"봐봐. 호국 훈장도 받았다?"

소담이 자랑스레 보이는 건 금으로 자아낸 훈장이다.

대훈위(大勳位).

가장 높은 등급의 호국 훈장으로 왕실 최후에 비공식적으로 하사된 마지막 대훈위 호국 훈장이었다.

의천검가가 소각한 것을 정부에서 복원하여 암산서가에 돌려 주었다.

서문호는, 암산서가 가주는 장난스런 얼굴을 버리고 진지한 얼굴로 미소지었다.

"그래, 그렇구나. 네가, 잘 가지고 있다가 할아버지께도 보여 드려."

소담의 조부.

끝까지 가문을 위하여 살다 간 의인(義人)이었다.

소담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싫어. 아빠랑 같이 가서 보여 드릴래."

"할아버지를 너무 오래 기다리시게 하는 거 아니야?"

"그래도. 아빠랑 같이 가는 걸 할아버지는 더 좋아하실 거야."

"…아버지가 손녀를 너무 오냐오냐 해 주셨어."

"우리 할아버지거든."

소담과 서문호의 면회는, 그런 느낌이었다.

"그래. 그랬구나."

"예."

다음 차례였던 나지윤과 그 아버지 나문기의 대화는 마치 대조를 이루는 것처럼 건조했다.

나지윤은 많은 정보를 일목요연하게 정리된 서류를 보는 것처럼 말만으로 정확하고 명료하게 전달하였으며 나문기는 그것을 간간이 고개를 끄덕이며 들었다.

이렇게 보면 부자 관계가 아니라 지극히 사무적인 정보 단체의 보고처럼 보이지만.

"훈장도, 되찾았어요."

"그래."

부끄러움을 숨기며 괜시리 무미건조하게 말하는 나지윤과 그런 나지윤의 모습에 지극히 미미하게, 그러나 분명히 웃는 나문기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아버지와 아들이었다.

'그런 거지.'

나이와 함께 철이 좀 들어서야 알게 되는 게 있다.

이를테면, 어느 순간 자신보다 작아진 아버지가 사실은 가늠할 수 없을 만큼 넓은 사람이라는 것.

보이지 않지만 넓은 세상에서 자신을 감싸는 지붕이 되어 주고 있다는 것.

도진은 그걸 참 늦게서야 알게 되었다.

'하지만 너는.'

못난 자신과 달리 천재인 나지윤은 역시 다르구나, 도진은 미소지었다.

나지윤은 용기내어 말한 것이다.

"…솔직히, 아직 잘 모르겠는 게 있거든요. 빨리 나오셔서 좀 알려 주셨으면 좋겠네요."

그리고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결코 귀여울 리 없는, 그러나 아버지에겐 귀여울 수밖에 없는 아들의 모습에 나문기도 조금 더 짙은 미소를 짓게 되는 것이다.

아직 더 가르쳐 줄 게 있는 아들을 보면서.

* * * *

대통령 선거날.

도진은 최악과 차악, 차차악까지 걸러내고 그나마 가장 나은 인물을 뽑았다.

이 시대의 '평범한' 대통령 선거에서 선이나 최선이라는 건 없었고 결국 그나마 나은 선택지를 뽑는 게 '최선'이었다.

알고 있던 인물은 아니었다.

전생에서 이 시기의 도진은 정치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고 둘 여유도 없었으니까.

다만 이번 생에서는 후보에 대해 아주 많은 것들을 알 수 있는 위치에 있었기에 도진의 기준에서 가장 나은 인물에게 표를 던질 수 있었다.

그렇게 대통령 선거라는 이슈가 봄과 함께 지나가고 무더운 여름날이 되었을 때.

도진은 전서린과 진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전서린은 정권 교체의 시기에 맞추어 실크 로드를 양지로 나온 하오문의 주요 거점 중 한 곳으로 변모시키려 하였고 제법 성과를 거두고 있었다.

전서린이 도진의 울타리 내 사람이 되면서 천마신교와 밀접해졌고 교섭이 훨씬 수월해진 덕분이다.

다만 그런 호재에도 불구하고 전서린은 물론이요 도진도 걱정을 안고 있었으니 하오문주에게서 아직까지도 소식이 없었기 때문이다.

"보통은 답이 오는 데 얼마나 걸리나요?"

"…일정치가 않습니다. 다만, 이렇게까지 오래 걸렸던 경우는 없었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혹시 문제가 생긴 건 아닐까.

진지하게 그걸 전제로 하여 움직여야 되는 건 아닐까.

이쪽이 움직임으로써 저쪽의 계획이 어긋날 수 있다는 생각으로 기다리고 또 기다렸으나 이제는 그럴 때가 아닌 것 같다.

이내 도진이 그런 결론을 내리려 하였을 때.

"와, 왔습니다!"

며칠 지나지 않아 전서린이 다급하게 도진을 찾아와 외쳤으니 그 손에는 한 장의 편지가 들려 있었다.

지극히 평범한, 그러나 요즘 시대엔 찾아보기 힘든 손으로 쓴 편지가 든 편지 봉투가.

도진은 전서린과 함께 신중하게 편지를 펼쳐 그 내용을 확인했고.

-……스승님.

지극히 수준 높은 냉정함을 유지하며 장호를 찾았다.

-…….

그리고 도진의 부름에 기척을 드러낸 장호는, 드물게도 감정을 함께 드러내고 있었으니 편지지 위 글자를 이루는 선들에.

-무흔잠영이, 맞다.

무흔잠영이 이치가 묻어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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