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8화
세계 무형독 대책 본부의 회의장에 각국의 높은 사람들이 모였다.
다름 아닌 일전에 있었던 소천마 습격 사건을 통하여 제시된 안건인 오지 탐사에 관한 논의를 하기 위해서였다.
인류의 문명이 미치지 못할 정도의 오지를 샅샅이 수색하고 탐사해야 하는 일이었으니 깊은 논의가 필요했고 예산 등 여러가지 문제 때문에라도 일견 지지부진할 것 같았으나…….
"무형독의 위협을 고려하였을 때 긴밀한 협조와 아낌없는 투자로 신속하게 진행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영향력이 큰 슈미트라 왕세자가 그리 말하였고.
"동감합니다."
화산파를 품은 프랑스에.
"같은 생각입니다."
"동의합니다."
소림사, 무당파를 품은 나라들은 물론이요 반절 이상의 나라들이 동의함으로써.
"그럼, 해당 안건을 의결하고 세부 사항에 대해 논의하겠습니다."
첫날 즉시 안건이 의결되어 버렸다.
일부 나라들은 심히 당황하였으나 반대 의견을 내지 못했다.
-당신 무형독이야?
-아, 아닙니다.
-그래, 잘합시다.
-예.
대세가 기운 상황에서 괜히 반대 의견을 냈다가 그런 식으로 추궁당하여 체면을 구기고 싶은 사람은 없었던 거다.
그것은 아주 현명한 판단이었으니, 경계를 넘어선 고수로서 무림에서는 물론이요 소속된 국가에도 크게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이들이 무형독에 이를 박박 갈면서 강력하게 탐사를 주장하고 있었으니까.
경계를 넘어선 이들 절반 이상이 탈속한 도인이 아니라 속세의 명예를 기꺼워하는 '평범한 사람'이었다.
당연히 자존심도 대단했는데 그런 사람들이 완전히 속아 무형독에 이용당했다는 걸 알고 만 거다.
얼마나 이를 갈고 있는데 거기에 '우린 돈 아까워서 하기 싫은데요?'라고 말하면 가만히 있겠는가.
대번에 체면에서 좀 자유로운 이들부터 공식적으로 욕을 박아 버릴 것이다.
그리고 그런 이들의 도움을 받아 천외천에 대해서도 정보를 수집한 도진은…….
"뭐, 어느 정도 예상은 했는데……."
"철저한 놈들이니까."
나지윤과의 자리에서 솔직히 실망의 감정을 말했다.
예상했던 대로 그들에게선 중요한 정보를 얻을 수 없었다.
어느 정도는 내걸었던 기치대로의 행보를 보였던 천외천이다.
그러니까 현대에 알려지지 않은 무공에 관한 여러가지를 공유하고 대련을 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으나 그에 관한 지식은 도진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필요한 건 그들이 가지고 있을 '알려지지 않은 고대 무림에 관한 정보'였는데, 이에 관해서는 무엇 하나 유의미한 정보를 건지지 못했다.
그들 또한 그렇게 조사를 하면서 깨달았다.
정작 그런 부분에 관해서는 철저하게, 한 마디조차 무형독이었던 이들이 말하지 않았음을.
그래서 제법 화가 나는 부분이었는데 이것은 오지 탐사에서 어느 정도 갚아줄 수 있었다.
아마조니아. 지구 최대의 정글 깊은 곳에서 무형독의 흔적을 찾는 데 성공했다.
문명이 닿지 않은 시베리아의 혹한 속에서도 무너진 절벽과 상당히 떨어진 곳에서 흔적을 찾을 수 있었고 오아시스와 아득히 떨어진, 사람이 살 수 없다 여겨지는 사막에서도 흔적을 찾았다.
여기서의 흔적은 단순한 흔적이 아니라 그들이 머물렀던, 이를 테면 '베이스 캠프'라 할 수 있는 곳이었으니 크나큰 발견이 아닐 수 없었다.
오지 탐사가 시행된 이후 최대한 흔적을 지우긴 했으나 깔끔하게 지우지 못했기에 그 규모와 물자의 이동 경로까지도 어느 정도 추측하는 데 성공했고 이는 무형독에게 있어 크나큰 타격이었다.
드디어, 어느 정도 몸통에 가까운 꼬리를 잡은 것이다.
"문명의 끄트머리는 자연적으로 눈과 귀가 둔할 수밖에 없으니까. 거기서부터 아예 문명이 전혀 미치지 않은 곳으로 물자과 사람이 오간 거지."
그를 위하여 구축한 시스템을 파악할 수 있었고 그것은 앞으로 무형독이 같은 방법은 쓸 수 없게 되었다는 뜻이다.
그것이 얼마나 큰 손해가 될 것이며 이를 은밀히 바꾸기 위한 과정에서 입을 손해 또한 상상도 못할 정도일 것이다.
다만. 그럼에도 여전히 의문이 남았다.
나지윤이 고민이 많은 얼굴로 말했다.
"사람 수와 소모된 자원의 양이 맞지가 않아."
"정확히는?"
"인원수와 직결되는 식량에 관해서 예를 들어볼게."
"평범한 사람 한 명이 살아가기 위해 1의 식량이 필요하다고 할 때 무인이 보안을 위해서 최소한의 컨디션만 유지할 수 있는 그 절반의 식량만 쓴다고 가정해서 0.5의 식량만을 소모한다고 하자."
"그런데 이곳에서는 백 명의 사람이 지내는데 20도 안 되는 양의 식량만이 공급되고 있었어. 그렇다고 여기서 식량을 채취하거나 농사를 지은 것도 아니었지."
보안을 위해 그들이 극한까지 소모되는 자원의 양을 줄인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더 이상한 건, 자원만이 아닌 사람조차 들어온 수보다 나간 수가 많다는 거야."
마치 자원과 함께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처럼, 말이다.
도저히 납득할 수가 없는 수치였다.
무언가를 찾음으로써 오히려 더 큰 의문이 생긴 형국이다.
"뭐, 그렇게 보이도록 조작했을 가능성을 생각하고는 있지만 말야."
나지윤은 고민을 지우지 못한 얼굴이었으나 씨익 웃었다.
인정할 건 인정하기로 했다.
당장 현랑전 때의 사건부터 그랬다.
-그 사람은 아마 독단적으로 일을 벌였고 큰 손해를 조직에 입혔을 거야.
정보를 다루는 사람으로서 의식하여 피하던 '아마'라는 단어를 썼다.
그가 독단적으로 일을 벌였고 그럼으로써 천외천의 일이 드러나고 무기를 꾸준히 공급하던 퇴역 군인 일당이 체포되는 등 조직에 큰 손해를 입힌 게 분명함에도 말이다.
이유는 하나다.
앞서의 조사에서 특징적인 외모에 관한 일 등 확신했던 부분들이 뒤집히곤 했기 때문이다.
나지윤은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기도 했으나 나름의 마음가짐을 분명히 하면서 극복했다.
그래, 내가 모르는 게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동시에 분명히, 조금씩 알아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도진의 말대로 나는 그들보다 더 큰 보폭으로 분명히 더 빠르게 나아가고 있다.
'그래봤자 너희는 좀 커다란 양파일 뿐이거든. 더 이상 못 깔 때까지 까주겠어.'
그렇게 생각하며, 나지윤은 그 잘생긴 얼굴로 씨익 웃었다.
* * * *
오지 탐사가 진행되는 사이 시간은 흐르고 흘러 이내 봄이 찾아오고 있었다.
여전히 차가운 바람이 불지만 곳곳에서 온기가 피어 올라 한기를 상쇄해 준다.
그렇게 봄이 다가오는 계절에 도진은 소담과 함께 카페에서 달달한 디저트를 즐기고 있었다.
"맛있다."
"그러게."
우유 아이스크림에 초코 케이크, 초코 과자, 꿀, 초코 시리얼까지 토핑한 그야말로 초코 마니아 빙수였다.
단 것을 싫어하는 사람은 보는 것만으로도 혀를 내밀 디저트였으나 마주 앉은 도진과 소담은 거침없이 숟가락으로 토핑까지 한껏 떠 입 안에 넣었다.
젊은이들이 자주 찾는 가게였기에 두 사람의 목격담은 비록 사진이 없다 해도 대번에 SNS를 통하여 퍼져 나갔고.
-달겠다..
-단 거 끝판왕이라는데 당연히 달겠지..
-아니 시바 그거 말고.. 다른 게 달겠다고..
-그것도 그렇겠지.. 보기만 해도 달겠지... 씨..바..
-입안이 텁텁한데 나도 주문해 먹어야겠다. 집에서 혼자 다 먹는 내가 교주님보다 행복할 거야.
-..힘내라.
-넌 한 번은 님자 안 붙여도 봐줄게.
-뭘 봐주냐고 이 시!!!바!!!것!!!들!!아!!!!!!!!!!
-근데 둘이 사귀는 거 아니라던데 왜 부러워함?
-닥쳐!!!!!
그런 이야기들이 돌고 있었다.
허나 그들의 예상과 달리, 달달한 디저트를 함께 먹는 도진과 소담의 속내는 제법 복잡했다.
구정을 보내며 시작된 새로운 해와 함께 한국에 4년 만에 돌아오는 '이벤트'가 있었으니 다름 아닌 대선, 대통령 선거였다.
본래 도진은 정치와 지극히 먼 곳에 있는 사람이었다.
허나 이번 생은 크게 다를 수밖에 없었으니 서 있는 곳도 보이는 것들도, 그리고 가진 영향력까지도 대선마저 뒤흔들 정도의 인물이 되었기 때문이다.
도진은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그 판을 뒤흔들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의도와 달리 이미 도진은 그 판을 거하게 뒤흔들어 버렸으니 안민선과 안지오 때의 일이 그것이었다.
정계를 주름잡던 거물을 그 주변 인물들과 함께 완전히 나락으로 보내 버렸고 그로 인해 한 번 대한민국 정계가 완전히 뒤집어졌던 것이다.
간접적으로는 오군성의 꺼져 가던 불씨를 되살리면서 오성과 관계되어 있던 정계의 인물들이 힘을 얻게 만들기도 했다.
그로 인해.
우우웅-
휴대폰에 날아오는 스펨 메일이나 다름없는 문자는 물론이요 통행 방해에 소음 공해까지 유발하는 유세 차량에서도.
-……뽑아 주십시오!!
전생과는 완전히 다른 이들을, 광고하고 있었다.
이 또한 도진으로 인한 변화다.
정치에 신경쓸 수 없는 삶이었고 관심도 없었기에 대선 주자를 다 기억하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대부분 기억하지 못했다.
허나 특히 세간에서 떠들어댔던 안민선은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고 그와 연관된 이들도 어렴풋이나마 기억할 수 있었다.
안민선은 여자 대통령으로 나쁘지 않은 평가를 받았던 거 같다.
하지만 이번 생에선 후보는커녕 의원조차 아니게 되었고 그 외 출마한 인물들도 기억에 없던 사람들이다.
도진은 이것을 긍정적인 변화라고 확신했다.
당연하지 않은가.
안민선 같은 인간이 대통령이 돼서는 안 되는 것이니까.
지금 생각해 보면 안민선은 분명히 무형독과 어떤 형태로든 연결되어 있었을 테니 더더욱 그렇다.
당시의 평가에도 개입이 있었을 것이고 무형독은 대통령이 된 안민선을 통하여 의도했던 것을 몇 개나 성공시켰을 거다.
그것은 결코 좋은 방향이 아니었을 테고.
그러니까 도진은 이런 변화에 만족하였고 무형독이 얽힌 게 아닌 이상에야 굳이 정치판에 기웃거릴 생각이 전혀 없었다.
하지만, 정치인들의 생각과 전략은 달랐던 거다.
[대선 주자들, 토론 프로그램에서 공통적으로 암산서가와 답청문을 언급해…….]
[특별 사면까지도 언급한 대선 주자들]
현재 한국에서 가장 유명하고 특히 젊은이들에게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건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이 소천마 김도진이었다.
그리고 그런 김도진을 지지하는 이들의 표를 얻기 위하여 그들은 말한 것이다.
소담의 가문인 암산서가, 그리고 나지윤의 가문인 답청문.
그 두 가문의 어른들을 사면할 수 있는 법을 제정하겠다고.
대통령이 되면 아예 특별 사면까지도 생각하고 있다고.
덕분에 지금 인터넷에서는 또 한 번 당시의 사건과 사정들, 그리고 각자의 의견들이 부딪치고 있다.
-암산서가랑 답청문이면 애초에 죄 지은 것도 아닌데 억울하게 옥살이하는 거지.
-ㄹㅇㅋㅋ
-?.. 아무리 그래도 그건 너무 위험한 생각 아님?
-뭐가 위험한데?
-아니 좀..
소담도 나지윤도.
생각이 많아질 수밖에 없었다.
도진은 쓰게 웃었다.
'뭐 그 자체는 나쁜 일이 아니지만…….'
암산서가와 답청문의 어른들이 사면을 받을 수 있는 건 분명히 좋은 일이지만 그에 깔린 의도가 표를 얻기 위한 것이니 마냥 좋게 받아들일 수는 없다.
괜히 입방아에 오르내리며 시끄러워지기도 할 터.
허나 그런 이유로 괜히 우릴 끌어들이는 짓거리는 하지 말라, 고 전달하는 것도 미묘하고.
어차피 천마신교는 물론이고 도진 또한 정치판과는 분명하게 선을 긋는 스탠스를 취하고 있긴 한데…….
복잡한 건 오성아와 한유아, 그리고 나지윤이 머리를 맞댈 테지만 도진도 고민을 끊을 수 있는 입장은 아니었다.
때문에 이렇게 소담과 단 것을 먹으며 기분 전환을 하고 있는 것.
'…….'
생각을 이어가던 도진의 눈동자가 돌연 깊이 가라앉았다.
이곳에서 맡아선 안 될 냄새가.
도진을 위협하는 억눌린 살기에 섞인 '화약 냄새'가 감각에 잡혔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