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7화
도진을 반갑게 맞이해 주었던 명장 우벽진은 갑작스런 그 말에 입을 슬쩍 벌렸다.
그러나 곧 도진이 건넨, 두동강이 난 백설을 직접 보면서 평소와 같은 얼굴이 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눈이 깊어졌다.
깊어진 눈으로 우벽진은 백설을 살폈다.
도진은 부러진 백설의 모든 부분을 챙겨왔다.
부러진 검날과 손잡이는 물론이요 부러진 부분의 파편까지도 철저하게 챙겨 온 것이다.
우벽진은 그렇게 부러진 백설을 철저하게 살핌으로써 부러진 이유를 직접 본 것처럼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뿌듯함을 가득 담아 웃었다.
"어느새, 기쁘게도 내 예상을 아득히 넘어 자네는 백설이 다 담을 수 없을 정도가 되었군."
오랜 세월이 담긴 자신의 역작이 부러졌으나 우벽진은 오히려 기뻐하였다.
도진 또한 거기에 답하듯 웃으며 말했다.
"조금 무리를 하긴 했지만요."
백설은 도진의 성장을 함께 한 검이었다.
이른 시기에 받은 과분한 검은 도진의 천마검공을 자아내는 데 부족함이 없었고 단 한 번도 아쉬움을 느끼게 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절벽이 무너져 내리던 순간.
도진이 한계를 넘어선 천마기를 폭발적으로 쏟아내는 걸 버티지 못하고 부러지고 만 것이다.
과장이 아닌 실제 집채만 한 돌덩이를 쳐낼 때 검에 가해지는 부담은 과연 얼마나 될까.
심지어 한 번에 그치지 않고 수십, 수백 번 그에 못지 않은 충격이 가해진다면.
제아무리 명검이라 하여도 버티지 못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백설은 과연 세계에서 첫 손에 꼽히는 명장 우벽진이 오랜 세월에 걸쳐 완성한 명검 중의 명검이었다.
흔히 장인은 도구를 탓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그것은 빈틈이 많은 말이었다.
장인일수록 오히려 더 나은 도구를 찾게 되는 경우가 많다.
실력에 걸맞는 도구를 사용함으로써 더 나은 결과를 낼 수 있으니까.
그리고 현대의 무인 입장에서 보자면, '도구'는 목숨과 직결되기에 무엇보다 까다롭게 선택해야만 했다.
그들에게 있어 무기는 전쟁에서 병사가 사용하는 총과 같았으니까.
나아가 경계를 넘어선 무인쯤 되면…… 명장이 만들어내는 걸작 정도가 아닌 이상 만족할 수준이 되지 못한다.
간단한 이야기다.
그들끼리 온 힘을 다해서 검을 부딪칠 경우 발생할 충격은 트럭끼리의 격돌에 못지 않다.
그러면.
그 충격을 '얇은 쇠꼬챙이 따위'가 버틸 수 있을까?
아니. 결코 버틸 수 없다.
검이 그 충격을 다 감당하지 않을 수 있도록 힘을 흘리는 등의 기술을 발휘한다 해도 한계가 있으니 몇 합도 되지 않아 검이 박살이 난다.
때문에 보통은 내공으로 검을 보호한다.
육체를 보호하듯 검에 내공을 담아 보호하면서 힘까지 흘리는 등의 기술을 동원하여 싸워야 검이 부러지지 않는다.
그러니까.
평범한 무기는 오히려 무기가 아니라 '지켜야 할 물건'이 되어 버리고 말기에 일정 경지 이상의 고수는 명장의 무구를 찾는 것이다.
명장의 명품은 공산품과 비교할 수 없는 강도를 지니면서도 탄력이 있고 심지어 내공과의 상성이 좋다.
상대보다 더 무기에 내공과 기술을 쓸 필요가 없으니 이것만으로도 큰 격차를 만들어낼 수 있다.
백설은 그런 공능이 있는 '과학을 넘어선 명검'이었다.
나아가, 천마기마저 감당하고 심지어 거기에 '감화(感化)'하기까지 했다.
천마기는 비할 데 없이 흉폭하고 거대한 기운이었으니 일반적인 검으로는 감당할 수 없었다.
허나 백설은 그 이름처럼 새하얀 설원과 같아 천마기를 저항없이 받아들였으며 이내 거기에 동화된, 도진에게 세상에 다시없을 검이 되어 주었던 것이다.
만약 절벽의 잔해를 쳐낼 때 손에 든 것이 백설이 아니었다면.
조금 더, 아니 더 많이 무리를 해야만 했을 거다.
그래서 물었다.
"고쳐주실 수 있을까요?"
"이 아이가 많이 마음에 들었나 보구먼."
도진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우벽진은 뿌듯한 얼굴로, 그러나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하게 부러진 백설을 살피며 말했다.
"자네가 원한다면 기필코 고쳐야지. 허나 안타깝게도, 제법 오래 걸릴 거야. 자네에게 백설을 주었던 그날부터 한 시도 쉬지 않고 내 예상을 넘어설 자네를 위하여 준비해 왔지만…… 그래도 모자라게 됐거든."
백설을 주면서 우벽진은 약속했다.
그것은 선금이라고.
도진이 하늘에 닿을 것이라면 대장장이답게 계단을 만들어서라도 따라가겠다고 하였다.
우벽진은 그 약속을 단 한시도 잊지 않았고 약속대로 '계단'을 계속 만들어왔다.
백설을 뛰어넘을 수 있는 검이 될 '철'을 계속 두드려 온 것이다.
백설이 부러지고 만 것은 허용량을 넘은 기운을 감당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즉, 고쳐서 더 나은 검을 만들기 위해선 훨씬 더 많이 도진의 기운을 담을 수 있어야 했다.
더 단단하고 더 탄력이 있으면서도 기운과의 상성이 좋고 용량도 커야 한다.
우벽진은 그런 검을 만들고 싶었고 부러진 백설을 통하여 가능성을 보았다.
'…정말로 신비롭구먼.'
철이었다. 무생물인.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설은 마치 생물처럼 천마기에 감화되어 변화하였고 우벽진이 의도한 바를 한참 넘어선 감응력으로 천마기에 특화되어 그에 물들었다.
새하얀 눈(白雪)이 천마기를 오롯이 품었다.
우벽진이 추구하던 생명이 깃든 철이 되었다.
그러니까 이 부러진 검은 이대로 버려지지 않는다.
녹여서, 새로이 정련하여, 새로운 모습으로. 그러나 그 본질을 오롯이 품은 채 재탄생할 것이다.
다만 거기엔 조금 시간이 걸릴 예정이다.
우벽진이 만들어낸 백설은 수없이 두드리고 또 두드려 압축한 결과 탄생한 명검이었다.
그저 단순히 두드리는 것만으로 명검은 탄생하지 않는다.
두드리면서 압축하고 또 압축하고, 거기에 우벽진 특유의 내공을 담음으로써 마치 사람의 몸이 단련에 의해 진화하는 것처럼 특별한 명작으로서 탄생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여기에는 세월이 필요하다.
그때보다 더 나은, 매일 더 발전한 능력으로 철을 두드려 온 우벽진은 그러나 도진에게 어울리는 검을 만들기 위하여 조금 더 철을 두드릴 수 있는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도진의 천마기에 감화된 백설이 중심이 되어, 그 수백 배의 것들이 우벽진의 망치질에 압축되고 또 정련되어 형상을 갖출 때까지.
"그동안 자네가 쓸 검이 필요할 것 같은데……."
도진은 그 말에 고개를 저었다.
"아뇨. 괜찮습니다."
"바람피는 건 내키지 않는다는 겐가?"
조금은 짓궂게 묻는 우벽진이다.
그러나 도진 또한 능글맞게 받아쳤다.
"네. 한 번 마음 준 애인이 있는데 자리 비운 사이 다른 애인을 만들 순 없잖아요?"
"껄껄. 그렇군."
* * * *
-적어도 1년은 넘지 않도록 해 보겠네.
생각보다 긴 시간을 우벽진이 말했으나 도진은 다른 검을 찾지 않았다.
우벽진에게 말했던 것이 마냥 농담은 아니어서, 이미 마음을 준 검이 있는데 굳이 다른 검을 찾을 생각이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도진은 아직, 여전히 검의 유무에 구애받을 만큼 극한의 경지에 이르지 못했기에 굳이 검을 찾을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다.
그러니까 당분간 검 없이 지내기로 한 도진은 제법 중요한 만남을 조용히 가졌으니.
"반갑습니다."
"…반갑네."
"크흠."
웃으며 인사하는 도진과 달리 조금은 불편한 기색의 두 사람은 화산제일검과 무당제일검이었다.
리암 드가모, 그리고 장현모라는 이름의 두 노인은 다름 아닌 천외천 소속의 경계를 넘어선 무인들이다.
그들은 무공의 발전에 대한 욕심으로 소속되었던 천외천이 사실은 무형독이 의도를 가지고 만든 조직이라는 걸 지금 도진에 의해 알게 되었기에 불편한 기색을 보이고 있는 것이었다.
정말로 몰랐다.
심지어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소천마 습격 사건을 일으킨 무형독 소속의 고수가 노인이라는 것까지도 말이다.
사실 그들에게는 그 진실을 알 만한 요소도 없었다.
천외천은 정말로 속세와 한 걸음 떨어져 하늘 밖의 하늘로 향하기 위한 것에만 신경쓰면 되는 조직으로 기능했다.
…그런 것처럼 보이도록 했다.
허나 실제로는 그 안에서 구성원은 두 부류로 나뉘었으니 하나가 흑막이었던 무형독이 의도한 대로 정신적인 영향을 미치려 했던 고수들이었고 또 하나가 무형독이 의도한 대로 '속세의 영향력'을 발휘해 줄 고수들이었다.
리암 드가모와 장현모는 후자에 가까워서 저도 모르는 채 천외천의 비밀을 감춘다는 명목이었으나 사실은 무형독을 돕는 형태로 영향력을 행사해 온, 적나라하게 말해 아무것도 모르고 이용당한 입장이었던 거다.
그 사실을 이제서야, 그것도 도진을 통하여 알게 되었으니 이리도 불편한 얼굴인 것이고.
그들 같이 자존심 높은 고수들에게 이 사실이 얼마나 불편하겠는가 말이다.
"껄껄. 잘못된 것을 알았으니 고치고 더 나아지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 옆에서 오군성은 속 편히, 호탕하게 그리 말하고 있었다.
그래. 이 자리는 무형독에게 아무것도 모른 채 당한 천외천 무인들과의 모임이었다.
충격적이게도 천외천에마저 무형독이 스며들어 있음을 알게 된 이들 중 그에 동조하지 않는 이들이 모여 대책을 논하기 위한 자리인 것이다.
도진은 현랑전의 습격에 대해 말하면서 '천외천'을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무형독을 위해서가 아니라 아무것도 모르고 그들에게 이용당한 이들의 자존심을 지켜주기 위해서였다.
"정말 무시무시한 놈들이야."
"그러게 말입니다."
속세를 벗어나 무에 매진하는 이들에게 느끼지 못할 정도로 은밀하고도 간접적으로, 세뇌를 시도했다.
속세에 가진 것이 많으나 무에 대한 갈망을 버리지 못한 이들을 무로써 꾀어내고 속세의 것들을 동원하여 천외천의 비밀을 지키는 척하고 무형독에 이득이 되도록 의도했다.
의도하지 않았으나 그렇게 무형독의 톱니바퀴로서 기능하도록 천외천을 총괄하던 것이 천외천 내에서도 최고수로 인정받던 노인이었으니 그들이 쥔 주먹을 파르르 떠는 게 결코 과장된 행동이 아니었다.
그들을 보며 오군성이 말했다.
"당한 것이 있으니 배로 돌려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문파끼리도 앞으로 더욱 공고한 협조 체계를 구축해서 무형독을 경계하는 방향으로 의견을 모읍시다."
"바깥으로 나갈 생각은 없지만, 무형독에 한해서라면 힘을 빌려드리도록 하겠소."
"…화산파에서도 더 적극적으로 무형독에 대처하도록 이야기해 보지."
"무당파도 같은 의견이야."
치부를 드러낼 수는 없지만 설욕은 해야 했으니 고수들은 협조를 약속했다.
무당제일검과 화산제일검을 포함한 속세에서 손꼽히는 명성을 떨치는 고수들.
그리고 알려지지 않았을 뿐 그들 못지 않은 경지를 이룩한 고수들까지.
그들은 자존심을 지켜 준 도진의 호의까지 더하여 무형독을 치는 데에 협조를 아끼지 않기로 약속해 주었다.
조커라 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강력한 조력자 집단이 생긴 것이다.
그렇게, 그들의 자존심을 지켜 준 대가가 충분히 만족스러웠기에 도진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 * *
의천검가 본가.
그 대한민국 전체를 울릴 만큼 대단하던 위세는 완전히 사라지고 마치 세월에 닳은 구옥의 집합으로 보인다.
소천마에 의해 현판을 잃은 지금 의천검가의 처지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것 같았다.
그래서, 칩거한 가주를 대신하여 의천검가를 억지로 이끌고 있던 장로 동근출은 악마의 속삭임에 귀를 기울이고 만 것이었다.
"…소천마를, 제거해야 하지 않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