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6화
"뭐라, 구요."
드물게도 도진은 되물었다.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웬만한 이는 마주하는 순간 정신이 먼저 압살될 정도의 재해를 마주한 상황에서도 한 치의 흔들림이 없었던 도진이 동요를 보이고 있었다.
심지어 도진의 스승인 위지혁마저도.
그렇게 만들 만큼, 방금 전서린의 발언은 충격적이었다.
"고금제일인이자 고금제일천마였던, 가장 위대했던 천마 위지혁 교주님. 그리고 그런 위지혁 교주님과 함께 함으로써 황실에서 그 존재를 지웠던 주려취 공주님. 두 분의 자손이 지금 황실을 계승할 유일한 황녀로 황실을 지키고 계십니다."
"……."
-…….
도진도 위지혁도 잠시간 입을 열지 못했다.
처음엔 진위를 의심하였다.
지금도 확신의 영역에 다다른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짓말이라 단언할 수 없는 건 그 내용 때문이다.
고금제일천마 위지혁.
그 이름은 이 시대에 전해지지 않았다.
아마도, 도진을 제외하면 노인이 속해 있던 이단 세력만이 알고 있을 확률이 있는 이름이었다.
공주 주려취 또한 마찬가지다.
그 어떤 사료에서도 이름을 찾을 수 없었고 심지어 황실에서 지운 공주다.
어느 시대인지도 모를 과거 황실이 지운 공주의 이름을 알 사람은, 결코 많지 않다.
그러니까.
도진은 전서린의 말대로 하오문주를 만나야만 했다.
* * * *
도진과 솜이, 전서린은 무리없이 안에서 버텼고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도진이 압도적인 존재감으로 솜이와 함께 시선을 모았고 은밀히 움직인 전서린은 누구의 눈에도, 카메라에도 띄지 않을 수 있었다.
그리고 하루만에 몸을 추스른 도진은 총괄부를 포함하여 핵심이 되는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숨김 없이 이야기를 풀어 놓았다.
"아마도 무형독은, 천마신교의 이단 세력이 포함되어 있는 것 같아요. 최대는 몸통이고 최소라 해도 적지 않은 지분을 차지하고 있을 거라 생각해요."
"……."
대적하고 있는 미지의 세력이, 설마 같은 뿌리에서 나온 이단일 거라곤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
허나 그렇게 충격적인 내용에도 소란은 없었다.
나지윤을 필두로 하여 오성아와 한유아까지, 감정적으로 대처하기보단 그 에너지마저 분석에 쏟는 타입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럴 확률이 높겠네."
이번의 습격으로 많은 것을 알게 되었고 추측할 수 있게 되었다.
가장 큰 것은 도진 이외에 천마신교의 맥을 이은 자들이 있으며 안타깝게도 그들 중 일부가, 혹은 다수가 정통이 아닌 이단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이단이, 무형독에서 커다란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노인 정도나 되는 현랑전의 맥을 이은 고수가 있었고 그 고수를 따라 목숨을 버릴 수 있는 수준급의 무인들이 있었다.
심지어 원하는 때에 절벽을 무너뜨릴 미사일을 쏠 수조차 있었으니 이는 무형독이라 해도 쉽사리 동원할 수 없는 인력이요 자원일 것이니 그렇게 추측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의 외모가 동양인이되 국적을 특정할 수 없었던 것도 중요한 단서였다.
앞서 그것에 의미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으나 서른에 달하는 이단이자 무형독의 고수가 같은 특징을 가졌다면 번복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 특징이 있는 외모를 가진 이는 가계 중 누군가가 무형독과 관련이 있을 확률이 높다는 쪽으로.
"세상과 단절되어 살아가면서 그렇게 특징적인 외모를 가지게 됐을 수 있지."
당장 지역 단위만 해도 '지역적 특색'이란 단어를 쓴다.
무형독이 이번에 추측한 대로 세상과 단절되어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하고 살았다면 얼마든지 그런 외모적 특징을 가질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 중 일부가 세상과 섞이면서 외모가 퍼져 나간 것이다.
"또 그렇게 단절되어 살아가던 이들 중 무림 시대의 황실……이 있었다는 거네."
그렇게 말하는 한유아는 다 받아들이지 못하는 기색이었고 모두가 비슷한 심정이었다.
시대를 특정하지도 못하고 있는, 그렇기에 그렇게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지났을지 모를 시대의 황실이 명맥을 이어오고 있었다는 이야기이니 쉽사리 받아들이지 못하는 게 당연했다.
심지어 그 황실을 위협하는, 천마신교의 이단 세력마저 있었다.
전서린의 말로는 그러했다.
-본래의 황실은 무능하고 부패하였습니다. 때문에 그들은 불같이 일어난 천마신교의 이단 세력에 별다른 저항조차 하지 못하고 멸족당하였으니 그대로 이단 세력의 교주가 황제를 참칭할 상황에 이른 것입니다.
하지만 일은 그의 뜻대로 되지 않았으니.
-놀랍게도, 은둔하던 천마신교의 정통 세력 안에 잊혀진 공주가 있었으니 지금의 황녀님의 존재가 천하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황실이 그 존재를 지운, 그러나 공주의 신분만큼은 박탈하지 않았던 주려취와 위지혁의 자손이었다.
존재를 지우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생각했던 황제의 판단이 상황을 바꾸어 놓았다.
-자연스레 교주는 황제를 참칭할 수 없게 되었고 황녀님이 눈엣가시가 된 것입니다.
황녀는 목숨을 위협받게 되었고 임시로 황녀가 머물게 되면서 '황실'이 된 곳에서 충성스런 신하들과 정통의 천마신교 세력은 저항하였으나 역부족이었고.
-…피신을 하여 지금에 이른 것입니다.
"조금, 아이러니하네."
그리 말한 것은 한유아였다.
도진을 포함하여 그 뜻을 이해한 이들이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로,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이단 세력이 포함된 이들은 세계에 스며들어 무형독이 되었다.
그들은 세계의 거부, 고위 정치인은 물론이요 심지어 왕자에마저 마수를 뻗쳐 꼭두각시로 지배하려 들었다.
반면 황녀 세력은 어떠한가.
가까스로 도주에 성공한 그들은 가장 아래로 스며들었다.
그래. 하오문이 된 것이다.
무형독이 이미 세상에 깊이 스며든 뒤였기에 황녀 세력은 그럴 수밖에 없었던 거다.
그리고 어떻게든 힘을 키워 지금에 이르렀다.
"…하오문이 묘하게 무형독에 적대적이다 싶었더니 그런 배경이 있었을 줄이야."
나지윤은 자신이 몰랐던 정보에, 그러나 분한 기색이 담기지 않은 어조로 중얼거렸다.
그래. 어떻게 이런 걸 짐작할 수 있었겠는가.
"그래서. 하오문주, 아니 황녀님을 만나볼 생각이야?"
나지윤의 물음에 도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래야지."
"확실하지 않은데도?"
"응."
다시 한 번, 분명하게 도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지윤의 말대로 이것은 결코 확실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오히려, 이토록 깊은 고민에도 불구하고 지극히 불확실한 이야기였다.
위지혁과 주려취를 언급하였으나 이 부분은 이단 세력, 그러니까 무형독도 알고 있을 만한 정보였다.
무너진 잔해 아래에서의 전서린은 진실되었고 의심할 부분이 보이지 않았으나 이 또한, 예의 술법에 의한 기억의 왜곡으로 자신도 모르게 이용당하고 있을 확률이 있다.
허나 이건 어디까지나 가능성이고 진짜 문제는 따로 있다.
냉정하게 되짚어 보면 그 이유가 나온다.
'황실. 그리고 이단.'
도대체 언제일지도 모를, 그 사료조차 제대로 남아 있지 않은 시대의 황실과 무림 세력이 지금까지 이어졌다는 이야기.
너무나 터무니없지만 억지로, 어떻게든 납득한다고 치자.
하지만.
그렇다면 그런 세력들이 어떻게 지금까지 세상에 알려지지 않을 수 있었던 걸까.
도저히 말이 되지 않고 이해도 되지 않는다.
구구절절, 이렇게 끼워 맞추고 저렇게 가정을 하여 보아도 성립하는 경우가 없는 것이다.
세력이 지극히 작아 세상과 단절되어 살아갈 수 있었다고?
그 정도 규모의 세력이 지금의 무형독의 핵심이 되고 그런 세력과 어찌되었든 대립하였던 '황실'이 될 수는 없다.
애초에 심해 정도를 제외하고서 지금 인류 문명의 눈을 완벽하게 피할 수 있는 곳이 지구상에 있지도 않을 것이고.
심지어 시베리아의 땅끝마저 국가도 아니고 방송국이 다큐멘터리 제작을 위해 촬영할 정도의 시대가 아닌가 말이다.
그러니까 불확실하다는 것이다.
의문가는 부분이 많고 그것이 도저히 해소되지 않는다.
지구공동설이 현실이었던 게 아닌 이상에야 이것들은 논리적으로 성립할 수 없다.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진은 하오문주, 전서린이 황녀라 칭한 사람을 만나야만 했다.
그녀가 정말로 스승의, 위지혁의 후손일 수 있었으니까.
위지혁은 그저 천마의 이름을 이어주길 바라면서 도진에게 큰 은혜를 베풀어 주었다.
그 은혜를 갚기 위하여서라도 도진은 그녀를 도와야만 했다.
그리고 철저하게 가려졌던 세상의 뒷이야기를, 지금 가진 의문은 물론이요 천마신교의 이어진 맥에 관하여서도 알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으니까.
현랑전의 맥을 이은 '이단'을 보았다.
전서린의 말대로라면 그런 이단 외에 정통도 있다고 하였다.
하지만 그들은 천마신교의 부활을 선포하고 소천마의 이름을 이은 도진을 찾아오지 않았다.
그에 관한 것까지도 교주로서 도진은 알고자 하였으니 그녀를 만나야만 하는 것이다.
"전서린이 하오문주에게 우선 편지를 보내기로 했어요."
하오문주를 찾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무려 세이전이, 나지윤이 그 흔적조차 찾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전서린의 말대로라면 그녀는 무형독에 쫓기는 몸이었으니 세이전이 찾지 못할 만큼 신출귀몰한 것이 이해가 되었다.
단시간 내에 세이전에 잡힐 정도였으면 이미, 벌써 무형독에 잡혔을 테니까.
같은 이유로 하오문도조차 원한다고 해서 문주를 만날 수 있는 건 아니었으나 전서린은 그녀에게 이어지는 편지를 보낼 수 있다고 했다.
하루이틀만에 그것이 닿을 수 있는 건 아니고 심지어 닿을 거라는 확신조차 없었지만 일단은 그것부터 시도해 보기로 한 것이다.
"일단은…… 기다려 보기로 했어요."
솔직히, 조금은 조급한 감정이 있었다.
허나 그렇다고 해서 서두를 수는 없으니까.
-나와 취아의 피를 이었다면 걱정할 것 없다.
스승 위지혁이 아직 만나지 못한 후손을 믿고 그리 말한 것처럼.
도진도 침착하게, 지금껏 하오문주로서 하오문을 키워 온 그녀의 능력을 믿고 기다리면서 지금에 최선을 다하기로 했다.
* * * *
도진은 우선 솜이와 함께 시베리아를 더 둘러 보았다.
귀국하기 전 혹시 솜이가 반응하지 않을까 기대하며 여기저기를 다닌 것이다.
솔직히 희박한 확률이었다.
애초에 시베리아가 맞다는 보장조차 없었으니까.
그저 설표라면 그 특성상, 그리고 영물인 이상 인류의 문명이 닿지 않은 이곳에서 서식하다 무형독에 의해 한국으로 옮겨졌을 확률이 높을 거라는 판단이었고.
냐아앙-!
기적처럼 솜이가 반응하는 곳을 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음……."
아무런 특색이 없는 설원이었다.
억지로 찾자면 다른 곳보다 자연지기의 밀도가 아주 조금 높다는 정도였다.
하지만 그것을 제외한 어떤 것도 찾을 수 없었다.
일대를 샅샅이 뒤졌으나 인간이 머물렀던 흔적은 전혀 없었고 설표의 서식지도 아니었다.
솜이 또한 반응을 보이긴 했으나 이곳에서 살았던 게 아니었고.
"어휴. 무공이 아니라 마법도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말야."
결국 아무것도 찾을 수 없었고 도진은 답답한 마음에 그렇게 말했다.
마법이 있었다면.
정확히는 폴리모프 마법이 있었다면, 이다.
종족을 바꾸는 그 변신 마법으로 솜이가 사람으로 변할 수 있었다면 대화가 통할 수도 있었을 텐데 하는.
복잡한 건 모조리 배제한 그저 반쯤 투정이었다.
냐아앙…….
솜이 또한 답답한 마음에 귀를 추욱 늘어뜨리고 작게 울었다.
"뭐, 별 수 없지. 츄르나 먹으러 가자."
냐아앙.
언제까지고 답이 나오지 않는 곳에 매달려 있을 순 없었기에 도진은 쿨하게 그리 말했다.
그렇게 일단은 솜이의 일을 마무리하고 귀국한 도진은 다음으로 처리해야 할 일로 인해 우벽진의 공방에 방문하였으니.
"백설이 부러졌어요."
"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