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해서 지존까지-604화 (604/741)

603화

"우리가. 이단……이라고?"

노인이 중얼거렸다.

거기에는 기필코 인정할 수 없는 것에 대한 부정이 가득했다.

그리고 이내 그 모든 부정은 분노가 되었다.

"우리가! 이단이라고!"

꽈아앙-!

노인이 내공을 폭발시키며 덤벼들었다.

내뻗은 검과 휘몰아치는 기세는 현실의 경계를 넘어섰으니 설화 속에 나올 법한 거대한 늑대의 마수(魔獸)를 연상케하는 형상이었다.

허나.

도진의 심상이 깃든 검에 도달하기에는 턱없이 모자랐다.

천마검공(天魔劍功).

효아(哮牙).

꽈아아아아앙-!!

늑대의 이빨을 항거할 수 없는 거력(巨力)에 분쇄당한 노인이 두 눈을 부릅떴다.

비등한 경지일진대.

어찌하여 이렇게 압도적으로 밀린단 말인가.

뿌득-!

그러나 노인은 이를 악물며 다시 검을 들었다.

강자를 상대하기 위하여 호렵진을 다시 구성하고 현랑전의 무인들과 함께 무리를 이루어 덤벼들었다.

이단.

그것은 결코 인정할 수 없는 그들에 대한 모독이었기에.

교에 평생을 바쳐 쌓아온 믿음이 있었다.

그 믿음을 부정한 이단을 결코 용서해서는 안 되었다.

설령 지금, 죄를 짓고 있는 입장이라 하여도.

스으-

그렇게 덤벼드는 무리를 향하여 도진 또한 백설을 들었다.

오오오오오오-!!

백설에 도진에게서 기원하여 세상을 뒤덮은 천마기가 깃들어 요동치고 이치에 따라 형(形)을 그린다.

그리고 거기에, 지금까지는 깃들지 않았던 뜻(意)이 겹쳤다.

적대하는 이를 기필코 꿰뚫는 절대적인 의지.

천격(穿擊).

꽈아아아앙-!!

푸하학!

노인을 중심으로 하여 덤벼들었던 현랑전의 무인들이 천격에 꿰뚫려 다시 한 번 눈 위를 나뒹굴고 주위에 붉은 피가 흩날리다 이내 스며들었다.

쿠오오오오!

그리고 뒤에서 또 다른 무리가 도진을 덮쳐드니 전서린과 솜이를 집요하게 노리던 무인들이 노인의 위기에 달려든 것이었다.

도진은 백설을 늘어뜨린 채 진각을 밟았다.

구웅-

낮디 낮은, 끝없는 아래로 사람을 짓누르는 듯한 둔중한 소리와 함께 삼면에서 도진을 노리고 달려들던 무인들의 몸이 떠올랐다.

힘의 방향을 바꾸어 그들을 짓누르는 대신 띄운 것이다.

찰나의 순간 낮은 허공에서 그들은 완벽하게 무력화 되었고.

천격.

다시 한 번 펼쳐진, 도진이 주먹으로 쏘아낸 천격에 꿰뚫려 노인의 근처를 나뒹굴며 피를 토했다.

"크륵. 커허헉!"

노인이 검게 죽은 피를 토하며 몸을 일으켰다.

이미 압도적인 격차를 느꼈음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은 것이다.

수장을 따라 역시나 새하얀 무복을 피로 물들인 무인들 또한 몸을 일으켰다.

"……."

도진은 아무 말 없이 검을 들었다.

그리고 노인과 서른의 무인이 온전히 한 무리가 되어 덤벼드는 날카로운 파도를.

천괴(天壞).

붕괴하는 하늘로 짓이겼다.

꾸우우우우웅-!!

감히 저항할 수 없는 심상에 짓눌린 노인과 무인들이 도진의 사방에 나뒹굴었다.

억지로 버티던 노인은 이번엔 시뻘건 피를 토해내며 도진 앞에 무릎꿇고 있었다.

"무엇이, 이리도 격차를 만드는 것이냐."

영혼이 빠져나간 듯 노인이 중얼거렸다.

도진은 백설을 내린 채 답해 주었다.

"당신의 식에 깃든 뜻이 잘못되었고 또 비어있기 때문이죠."

"비어 있다, 고."

"네."

도진이 위지혁에게 사사받은 천마검공은 이치의 검이다.

그것은 그러니까 말 그대로 이치에 따라 휘둘러지는 검이며 여기에 뜻이 깃듦으로써 검공이 된다.

그렇기에 도진의 천마검공은 정해진 초식이 아닌 바로 그 순간에 맞는 이치에 따라 휘둘러지고 거기에 도진의 의지가 깃듦으로써 식(式)으로써 완성되었다.

이를테면 효아는 도진이 본 위지혁의 '하늘을 부수는 심상'을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으로 받아들이고 궁구하여 구현한 검공이다.

이제는 어느 정도 그 하늘을 부수는 흉내를 낼 수 있게 되었으나 가장 익숙하고 선명해진 심상만큼은 그대로 가지고 여전히 효아로써 쓰고 있다.

대신 한계를 넘어선 지금의 심상은 천격이나 천괴 등으로 새로이 정립하여 구현하니 오군성과의 대결에서 그를 무너뜨린 바 있다.

"당신들을 이단으로 인정하기 전까지 나의 검에는 뜻이 깃들어 있지 않았으니 당신이 대적할 수 있었으나 당신들을 이단으로 인정한 순간부터는, 제압하기 위해 뜻을 담았으니 감당하지 못하는 게 당연하죠."

"제압. 제압이라. 크, 크흐흐흐."

노인이 피섞인 웃음을 흘렸다.

알고 있었다. 손속에 사정을 두었다는 것은.

그러지 않고서야 무복이 갈기갈기 찢어지고 무시무시한 검격에 분명히 꿰뚫렸음에도 사지 멀쩡히 목숨을 부지할 수 있을 리가 없는 것이다.

허나.

아무리 그렇다 해도 뜻을 담는 순간 이렇게까지 격차가 벌어질 수가 있는 것인가.

심지어.

그렇게 뜻을 담고서도 '제압'을 논하다니.

쌓아온 모든 것이 또 한 번 부정당하는 것만 같았다.

도진은 무로써 막아둔 세월이 단번에 몰아친 듯 기세가 바래 버린 노인을 내려다 보았다.

"현랑전은, 자신의 사람들과 함께 세상을 떠돌던 낭마가 중심이 되어 탄생한 전(殿)입니다."

"낭마는 본래 순박했던 화전민으로 인망이 두터워 촌장으로 마을을 돌보았습니다."

"하지만 어느 날. 잔악무도한 산적들이 들이닥침으로써 가족과 이웃을 잃고 노예로 팔림으로써 지옥과 같은 나날을 보내야 했습니다."

"죽고 싶었으나 함께 팔려 온 마을의 아이들을 지키기 위하여 그는 살았고 이내 인연이 닿아 낭인의 무공을 익혀 무림인이 되었습니다."

"악착같이 낭인의 일로 돈을 모아 아이들과 함께 노예의 신분을 벗었고 낭인 집단으로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 삶에서 우연히, 그들의 터전을 짓밟았던 산적들이 사실은 어느 정파의 사주를 받았다는 걸 알게 된 겁니다. 산적들은 이미 참했고 그것으로 끝이라 생각했는데, 진짜 원수는 따로 있었던 거였죠."

"그들은 정파의 탈을 쓰고 재물을 탐하여 몰래 산적들을 부려 뒤탈이 없는 마을들을 골수까지 빨아먹는 자들이었죠. 식량만이 아닌 사람까지도 팔아먹음으로써.

"그는 분노하였으나 바로 복수하지 못했습니다. 그 문파가, 그렇게 모은 돈으로 무림에서도 떵떵거릴 만큼 커져 버렸기 때문에요."

"허나 어찌 포기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는 어엿한 무인이자 낭인이 된 아이들과 함께 인생을 걸고 복수를 위하여 살았고, 이내 복수에 성공했습니다. 그리고 마두로 낙인 찍혀 정파에서 추살령이 내려온 거죠."

"그리고 인연은 천마신교로 이어졌습니다."

"그는 낭마였고 살기와 피냄새가 짙은 혈랑검을 사용했습니다. 허나 천마신교의 교리에 감화되었고 스스로의 그런 성향이 천마신교의 가르침에 위배되지 않을까 항상 경계하였습니다."

"살기가 짙어져, 자신 또한 무고한 희생자를 내지 않을까 저어한 것입니다."

"그런 마음이, 궁구가, 피에 절은 늑대를 현명한 늑대로 바꾸어 주었으니 혈랑검(血狼劍)은 현랑검(賢狼劍)이 되었고 작은 늑대들을 위한 검공이 될 수 있었습니다."

"낭마는 구분없이 뜻을 품은 교도들에게 현랑검을 전수하여 주었고 개중 진체(眞體)를 깨우친 이만이 온전한 현랑검을 구사할 수 있었으니 따로 현랑진검이라 부르게 된 것입니다."

"……."

"낭마의 이야기를, 현랑검의 이야기를 해 준 이유. 알겠습니까?"

노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정도나 되는 경지에 이른 무인이 도진의 의도를 모를 리가 없었다.

도진은 굳이 소리내어 긴 이야기를 해줌으로써 왜 그가 비등한 경지에 있으면서도 처참히 패배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알려 준 것이다.

"당신들의 검은 피와 살기가 짙은, 궁구하여 현명함을 갖춘 늑대에 이르지 못하였으며 그 뜻을 헤아리지조차 못했습니다. 그러하니. 현랑검을 알고 있는 나에게 혈랑검으로 덤벼들었으니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죠."

"하물며. 낭마가 평생을 통하여 이룩한 현랑검을 가지고, 가해자를 옹호하며 덤벼들었으니 나의 뜻이 당신들의 뜻을 아득히 넘어서는 게 당연한 겁니다."

결과론이나 이상론이 아니다.

실제로, 노인이 압도적으로 패배한 이유가 그러했다.

컨디션에 따라 운동 능력이 달라지는 건 누구나 아는 일이다.

일상에서도 그러한데 그것이 육체를 극한의 영역에서 다루어 극한의 기술을 구현해야 하는 무공은 어떻겠는가.

때문에 무공은 그 의지가 육체보다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이다.

그리고 무공은 무술(武術)이 아닌 무도(武道)이기에.

그 식에 담긴 뜻을 온전히 이해하고 다루지 않으면 파탄이 날 수밖에 없다.

노인은 낭마의 현랑검에 담긴 뜻에 반하여 가해자를 두둔하였으니 식이 완전할 수 없었고 육체를 움직이는 의지 또한, 한 켠에서 자신이 잘못하고 있다는 걸 알았기에 결코 완벽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 정도나 되는 경지에 이른 무인의 영성이 트인 사고력은 분노와 별개로 그것을 인정하게 만들었다.

도진이 물었다.

"당신은, 현랑검을 이으며 이 이야기를 들었습니까?"

"……."

노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허나 도진은 대번에 알 수 있었다.

노인은 낭마의 이야기를, 현랑검의 기원을 이 자리에서 처음 들었다.

무공을 온전히 수습했음에도 정작 그에 담긴 뜻을 알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현랑검이 아닌 피냄새와 살기가 짙은 혈랑검에 가까운 검공을 구사할 때부터 어느 정도는 짚이던 부분이었다.

'…….'

도진은 결정을 내렸다.

이들은 천마신교의 교도들이 아니다.

그저 천마신교의 유산 중 하나인 무공을 이었을 뿐이다.

허나. 그럼에도 인연은 인연이었기에.

당장은 그들에 대한 처분을 유예하기로 하였다.

제압할 것이다.

제압하여서, 천마신교로 데려가 조사할 것이다.

용서받을 수 있는 삶을 살았다면 용서해 줄 것이고 용서받을 수 없는 삶을 살았다면, 그때 가서 합당한 벌을 내릴 것이다.

그 결정을 말로 하지는 않았다.

노인은 물론이요 뒤의 무인들 또한 순순히 그 결정에 따를 리가 없으니까.

그러니까 말로 하는 대신 저항조차 못할 찰나에 행동으로 그들을 제압하여야만 했다.

방침을 정한 도진은 망설임없이 움직였다.

허나 그와 동시에, 노인 또한 움직였다.

푸후-!

노인이 뿜은 시뻘건 피를 도진은 당황하지 않고 피해냈다.

그러나 그것을 피해낸 도진의 눈은 깊이 가라앉아 있었으니.

드드드드드드-!

일어선 노인에게서 발산되는 무시무시한 기세가, 다름 아닌 생명을 불태워 얻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당신."

"너는 이 자리에서 죽어야만 한다."

…사람이란 게, 단번에 변할 수가 없다.

심지어 그것이 오랜 세월에 걸쳐 가치관을 완성한 인간인 데다 종교까지 얽혀 있다면 더더욱.

한없이 불가능에 가까워진다.

허나 그렇다 하여도.

결과는 달라질 수 있는 법이었고 도진은 그렇게 다른 결과를 내려 하였는데.

드드드드드-!

노인을 필두로 하여 진원지기(眞元之氣), 생명의 근원인 선천지기(先天之氣)를 태워 기세를 일으킨 무인들을 마주하며 도진은 그럴 수 없게 되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처음부터 이곳을 죽을 장소로 정하고 온 것이었다.

"우오오오오오오-!!"

노인과 서른 명의 무인이 생명을 사르며 도진에게 덤벼들었다.

그리고.

꽈과과과과광-!!

귀를 멀게 하는 굉음과 함께, 절벽이 붕괴하여 무너지기 시작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