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해서 지존까지-602화 (602/741)

601화

타닥-

휑한, 거실과 방의 구분조차 없는 집의 가운데 모닥불이 타올랐다.

온몸을 싸맨 무인이 가져다 준 것들로 피운 불이다.

사실 도진은 이 현대에선 아직 비현실의 영역에 있는 삼매진화(三昧眞火)의 수법을, 그러니까 내공을 이용하여 불을 피울 수 있었으나 굳이 보여줄 필요가 없었기에 현대 문명의 이기인 라이터로 장작에 불을 붙였다.

타닥-

불을 피워 내부에 온기를 채운 다음엔 제법 커다란 냄비를 걸었다.

그 냄비 안에선 역시나 무인이 가져다 준 여러 재료들을 넣은 수프가 끓고 있다.

양고기, 감자, 채소 등의 재료를 넣은 수프가 완성되자 도진이 먼저 수저를 들었다.

-제가 먼저 먹어보죠.

-예.

외부에는 이것들을 가져다 준 무인이 대기하고 있다.

바로 근처의 빈 집에 머물고 있는 그를 완벽히 신뢰할 수 없었기에 도진과 전서린은 여전히 서로의 입 모양을 읽는 것으로 대화를 했다.

도진 정도 되는 무인과 전서린 정도 되는 정보 분야의 스페셜리스트였기에 아무런 문제나 불편없이 대화할 수 있었다.

도진이 먼저 수저를 든 건 혹시 모를 독(毒)의 위험 때문이다.

무협 소설에서야 간단히 은수저를 찔러보는 등의 장면으로 끝나곤 했으나 실제로, 그리고 이 현대에서는 더더욱 독을 판별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리고 혹시나, 설마 같은 단어는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이었으니 도진이 먼저 음식을 먹어보는 것이다.

도진의 몸 속을 휘도는 천마기는 전설 속의 '만독불침(萬毒不侵)'과 같은 공능을 구현할 수 있으니까.

-괜찮아요. 드세요.

-예.

한 입 떠 먹어보니 맛은 그럭저럭이었으나 우려했던 독은 없었다.

혹여 독이 아니더라도 몸에 해로운 것이었다면 천마기가 대번에 반응하였을 테니 안심해도 좋을 듯 했다.

그렇게 조용히 수프를 덜어 식사를 하며 도진은 천외천 노인과의 만남, 그리고 대화를 되새겼다.

도진이 이 현대에서 만난 이들 중 최고수였다.

믿기 힘들 만큼, 도진과의 생사결(生死決)이 가능할 만큼의 고수.

오군성이 말했던 하늘 밖의 하늘에 더 가까운 무인이라는 걸 바로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아마도, 천외천이라는 집단의 핵심일 것이었다.

한데 그런 고수가.

아까의 만남에서 수많은 거짓으로 일관하였다.

도진이 징치하였던 노인을 '동지'라 불렀는데 그 단어에서부터 진실이 깃들어 있지 않았다.

도진의 노인을 징치한 이유에 대해 고개를 끄덕였으나 전혀 동의하지 않았고 그것은 천외천에 들기를 권유한 이의 가치관을 가늠하기 위한 질문도 아니었다.

천외천이 도진이 함께 하길 바라는 이유에 관해 이야기하였으나 진심이 깃들어 있지 않았고 다른 이들과 논의 후 이야기하자고 하였으나 거기에도 그리 무게가 깃들어 있지 않았다.

이상했다.

이상해도 너무 이상했다.

그는 분명히 천외천의 핵심 인물일 터인데, 정작 그와 관련한 부분을 진행함에 있어 알맹이가 느껴지지 않는다.

오직 하나.

전서린이 천외천에 관해 도진에게 발설한 부분에 있어서만큼은 진실됨이 느껴졌으나 동시에 전서린이 과거를 말한 순간 눈동자를 스쳤던 기묘한 빛이 또 의문을 낳는다.

'정말로 전서린이 천외천과 관련되어 있을지도 모르겠어.'

이를테면 도진이 앞서 떠올렸던 가능성, 세상과 단절된 채 무림의 전통을 이은 마을에서 잃은 아이였을 그런 소설 같은 이야기일 가능성에까지도 생각이 미친다.

흘긋 살피니 전서린 또한 복잡한 얼굴이다.

자신의 과거가 얽혀 있는 데다 하오문의 간부인 만큼 도진 이상으로 머리가 복잡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냐아앙-

그리고 솜이는 한여름에 에어컨이 쌩쌩 돌아가는 방에 들어온 인간에 비유할 수 있는 환경임에도 불편한 기색이다.

조용히, 한껏 주변을 경계하는 맹수의 모습으로 주변을 살피고만 있었다.

녀석이 이곳까지 함께 온 이유인 러시아에서 찾아야 할, 어떤 것일지는 모르지만 단서를 아직 발견하지 못 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여러가지 생각으로 복잡한 가운데 이틀이 지났다.

* * * *

후우우웅-!!

한기가 몰아친다.

연신극기공으로 단련하고 천마기가 휘도는, 천마신공의 6성을 넘어선 도진과 오히려 이곳이 최적의 환경인 솜이에게 있어서는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는 환경이었으나 전서린은 그렇지 못하여 컨디션이 떨어지는 게 보였다.

초절정에 이르렀다 해도 피륙으로 이루어진 인간이다.

'내공에 의한 형질 변화'를 통하여 긍정적인 진화를 이룬 무인의 뼈와 근육은 인간을 초월한다지만 흔히 무협에서 말하는 한서불침, 그러니까 추위와 더위의 완전 면역을 보장하진 않는다.

어느 정도야 괜찮겠지만 지금과 같은 극한의 환경에서 지내기 위해서는 내공을 운용하여야만 했고 그 운용에 의해 조금씩 체력과 내공을 갉아먹힐 수밖에 없다.

심지어 수면을 취할 때는 더더욱 소모가 크다.

근처에서 머무는 무인을 제외하고선 누구 한 명 다른 이가 없는 이곳에서 그렇게 이틀을 보냈을 때.

도진은 슬슬 소식이 올 때가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하였고.

"……."

3일이 되기 전에 온 '소식'에 눈동자가 진중하게 가라앉았다.

냐아앙.

이곳 작은 마을에 들어서는 인기척들이 있었다.

하나둘이 아닌 서른에 이르는 기척.

하나 하나가 절정을 넘어선 무인들의 기척이었고 결코 호의적이지 않았다.

그래서, 정상적이지 않은 소식이었다.

노골적으로 내공을 일으켜 적의 섞인 기파(氣波)를 발산하는 그들을 눈으로 확인하기 위하여 도진이 솜이를 안에 두고 전서린과 함께 바깥으로 나왔다.

서벅.

반쯤 얼은 눈을 밟고 섰다.

그 앞에 펼쳐진 건 마치 상복을 대신하여 입은 듯 새하얀 무복을 걸친 무인들이었다.

검을 쥐고 기세를 일으킨 그들의 모습이 마치 설원 위에 무리지은 새하얀 늑대들 같았다.

그리고 그 이상으로 도진의 시선을 끄는 건, 그들의 얼굴이 모두 동양적이되 국적을 분별하기 힘든 예의 그 특징적인 외모라는 것이었다.

허나 지금은 그에 깊이 고민할 수 없었으니 그들 뒤로, 역시나 적의 가득한 기세의 노인이 새하얀 무복을 입은 채 서 있었기 때문이다.

도진이 웃음기를 완전히 지운 얼굴로 물었다.

"천외천 소속의 무인들은 아닌 것 같네요?"

"……."

노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쳐라', 딱딱한 한 마디를 했고 그 명령에 따라 새하얀 무복을 걸친 무인들이 검을 뽑아들고 일제히 덤벼들었다.

그리고.

"……!"

도진의 눈동자에 드물게도 놀람이 스쳐갔다.

* * * *

카앙-!

시리게 빛나는 검에서 불똥이 튀었다.

전서린은 그 빛이 시야를 훼손하지 않도록 시선에 주의하며 이를 악물었다.

날카로우면서도 묵직한 검격을 훌륭하게 막아냈다.

위에서 아래로 내리치는 검의 힘을 흘리며 빗겨냈고 자연스레 반격으로 무력화시킬 수 있는 틈을 만들었으나 그 틈을 찌를 수는 없었다.

후웅-!

상대의 공격을 흘려내며 생긴, 그녀의 틈이 된 좌측 옆구리를 노리는 또다른 공격 때문이었다.

공방의 과정에서 나의 틈을 감추고 상대의 틈을 노리는 것은 기본이다.

허나 그것이 1:1을 넘어 1:다가 되면 혼자인 쪽은 그 기본을 지키기가 기하급수적으로 어려워진다.

혹한을 가르며 뻗는 검은 마치 늑대의 발톱처럼 거칠면서도 강하고 날카롭다.

한 걸음 움직여 사정거리에서 벗어나면 반대편에서 공격이 날아온다.

방금 피한 공격이 늑대의 발톱이라면 이번의 공격은 늑대가 아가리를 쩌억 벌린 채 목을 물어뜯으려는 듯한 치명적이면서도 큰 공격이다.

일반적으로 1:1에서는 하기 힘든 공격이고 1:다라고 해도 반격 때문에 무인들끼리의 싸움에선 쉽게 쓰지 못할 수법이다.

허나 그들은 그 효과만큼이나 위험을 동반하는 커다란 동작의 공격을 아무런 리스크없이, 쉼없이 사용하며 전서린을 몰아치고 있었다.

공격으로 인해 만들어지는 틈을 서로가 능숙하게 커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수의 무인이 소수의, 혹은 하나의 무인을 공격하기 위한 정교한 수법.

합격진(合擊陣)을 구사하고 있는 것이다.

전서린은 마치 늑대 무리에 사냥당하는 사냥감이 된 것만 같았고 토해내는 한기 섞인 호흡이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순수한 무인으로서의 경지는 전서린이 우위에 있었으나 그들 또한 숙련된 무인이었고 부족한 경지를 메꿀 수 있는 상승의 합격진을 구사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그들의 검에 깃든 맹수와 같은 단단한 살기가 전서린의 목줄을 끊임없이 노리는 상황이 정신력의 소모를 강요했다.

하아아악!

뻐어억!

만약 그녀와 소천마가 머물던 집에서 뛰쳐나온 영물이 아니었다면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아주 자그마한, 귀엽기만 한 고양이 같았던 영물은 그러나 지금 늑대 무리 사이의 호랑이처럼 그 위용을 과시하고 있었다.

지극히 작은 앞발을 휘두르는데 무인들이 종이 인형처럼 나가떨어졌다.

몰아치는 기운과 전서린조차 따라잡기 어려운 움직임, 그리고 힘이었다.

도진과 함께 했던 산책. 그러니까 수련의 성과였다.

전서린은 무너지지 않기 위해 솜이의 곁에서 이를 악물고 버티며 소천마를 찾았다.

카아앙-!

고요하지만 압도적인 존재감의 소천마를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무인들에게 휩쓸려 자리를 지키지 못한 그녀와 달리 소천마는 처음과 같은 자리에 있었다.

새하얗고 거친 늑대들이 설원에 시리게 빛나는 검을 쉴 새 없이 거칠게 휘두르고 또 찔렀으나 소천마에게는 전혀 닿을 수 없었다.

살기 어린 설원의 늑대들을 미물로 만들어 버리는 절대적인 무위였다.

그 모습을, 전서린은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녀는 소천마가 어떤 인물인지 최소한의 이해는 하고 있었다.

그는 거침이 없는 사람이다.

상대가 날뛰는 걸 방관하는 사람이 아니었고 불필요하게 시간을 끌지도 않는다.

한데 그런 소천마가, 마음만 먹는다면 찰나에 제압할 수 있는 무인들의 합격진을 그저 '방치하고' 있었다.

소천마가 그러는 이유를 전서린은 이해할 수 없었고 그저 필사적으로 버텼다.

그렇게 전서린이 짧은, 그러나 길게 늘어난 시간을 버티는 사이.

도진이 결론을 내리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서벅.

한 걸음 내딛었다.

지금 무인들이 구사하는 합격진에서 허용해서는 안 될 한 걸음.

그러나 그들의 날카로운 발톱도 이빨도. 도진의 한 걸음을 막을 수 없었다.

슈아악-!

시리게 빛나는 검이 도진의 목을 노리고 짓쳐든다.

현조(眩爪).

평범한 검 이상으로 시리게 빛나는 그 검은 상대의 시야를 공격하는 또 하나의 수단이다.

카앙-!

하지만 도진에게는 통하지 않았으니 도진의 한 번의 휘두름에 그는 저 멀리 날아가 처박혔다.

그가 감히 감당할 수 없는 거대한 경력이 격돌의 순간 밀어닥친 것이었다.

카아아앙-!

이어지는 상체를 짓이길 의도로 떨어지는 거칠고 묵직한 검 또한 도진의 휘두름에 산산이 그 수법이 부서지고 칼을 놓친 무인이 나가떨어졌다.

탐랑(貪狼).

온몸의 무게에 가속도까지 더하여 상대를 찢어발기는 늑대를 닮은 수법이었으나 감히 도진의 검에 비할 수준은 되지 못했다.

그렇게 둘을 압도적으로 날려 버렸으나 합격진은 무너지지 않는다.

오히려 더욱, 사력을 다하여 도진을 몰아치려 하였고.

쿠우웅-!!

도진은 크게 한 걸음 내딛음으로써 그 기세를 짓이기듯 찍어 눌렀다.

오오오오오오오-!!

천마기가 포효하며 일대에 몰아친다.

숨기지 않고, 아낌없이 풀어낸 흉포한 천마기는 공간을 가득 채우고 감히 늑대를 닮은 무인들이 이를 드러내는 것을 허락지 않았으니 그들은 대가리를 처박아야만 했다.

그렇게, 도진은 군림하는 걸음으로 그들을 찍어 누르고서는 멀리 선 노인을 마주하였다.

그리고 말했다.

"현조에 탐랑. 무리를 이루어 함께 움직이는 호렵진(虎獵陣). 모두 현랑전(賢狼殿)의 기예."

조용한 목소리였으나 거기에 도진의 존재감과 천마기가 넘실거림으로써 모두의 영혼에 때려박힌다.

"당신들은. 천마신교의 맥을 이은 자들이로군요."

노인은, 자신을 짓누르는 그 목소리와 영혼을 꿰뚫을 듯한 눈동자에 힘주어 버텼다.

그리고 입가를 일그러뜨리고, 이를 드러내고선 말했다.

"이단 따위가, 감히 그 이름을 쉽게 입에 담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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