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0화
좁은 절벽 아래 움푹 패여 외부에선 보이지 않는, 분지와 비슷한 그곳에 인간이 살기 위한 건축물이 있었다.
오롯이 시간이 쌓이고 또 쌓여 형성된 새하얀 자연 속에 목재와 석재만을 이용하여 지어진 건축물들.
그러나 그것이 문명보다 자연에 더 가까워 현실과는 동떨어진 풍경을 자아낸다.
마치 세상과 유리되어 있는, 말 그대로 다른 세상에 온 것만 같다.
처음 본 순간 반사적으로 마을이란 단어를 떠올렸지만 전체를 다시 눈에 담으니 그 단어가 과분해졌다.
목재와 석재로 엮은 지극히 기본적인 기능밖에 할 수 없는 집이 채 열이 되지 못했고 그 외 '인프라'라곤 무언가를 보관하기 위한 창고 둘이 전부인 곳이었기 때문이다.
"이곳은."
-…대화는 어르신과 하시오.
처음으로 이곳까지 안내한 무인과 나눈 대화는 그걸로 끝이었다.
그는 섭음술로, 그마저도 내공을 이용하여 목소리를 변조하여 한 마디하고선 입을 다물어 버렸다.
도진은 굳이 미련을 두지 않고 시선을 곁에 있는 전서린에게로 향했다.
전서린은, 하오문의 문주에마저 도전할 수 있는 간부임에도 미미하게 겉으로 동요를 드러내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입장에서는.
두 사람은 집들 중 가장 넓은 곳으로 안내되었다.
한기를 제대로 막지 못하는 휑한 내부에는 돌로 만든 의자와 테이블말고는 보이는 게 없었다.
-잠시만 기다리면 어르신께서 오실 것이오.
무인은 다시 섭음술로 그 말만을 남기고선 떠나 버렸다.
"손님을 앉혀 놓고선 차 한 잔 안 주네요."
"…예."
한기에 섞이는 침묵을 쫓아내듯 도진이 말했고 전서린은 어렵사리 소리 내어 대답했다.
그리고 금방 안색을 차분하게 정돈하였다.
도진이 말을 건넨 의도가 그녀의 침착에 있음을 바로 읽은 것이다.
"많이 닮았네요. 숭무지부주가 그린 그림 속과."
"예."
그녀는 스물이 되던 해부터 사진과 같이 떠오른 장면들을 그림으로 그려 보여 주었었다.
그 그림에는 자연의 색채가 강하던 시대의 자연 속에 녹아들었던 건물들이 있었는데, 그것이 지금 있는 이곳과 겹쳐졌다.
물론 일치하는 건 아니었다.
전서린의 기억 속에 있는 장면은 여름이었고 이곳은 혹독한 겨울이다.
건물의 훌륭함 또한 비교가 되지 않았으며 스마트폰마저 있던 그곳과 달리 이곳에선 문명의 흔적을 찾을 수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설명하기 어려운 본능의 영역에서 '겹치는' 것들이 있었다.
자신의 내면을 자연스럽게 숨기는 데 능통한 전서린이 동요를 보이고 말았던 이유였다.
정말로.
이 천외천에 내가 모르는 내가 있을지 모른다.
전서린은 높아진 가능성에 심장이 필요 이상으로 뛰지 않도록 가슴을 꾸욱 억눌렀다.
'진정해.'
스스로의 심장에 되뇌인다.
이곳은 안전하지 않다.
곁에 있는 소천마는 규격 외의 강자이지만 그녀의 온전한 아군이 아니며 천외천 또한 그녀에게 우호적일 확률은 낮으니까.
믿을 건 오롯이 자신뿐이었고 최대한 능력을 발휘하기 위해선 냉정해야만 했다.
그녀가 그렇게 심신을 가다듬는 사이 도진 또한 생각을 정리하고 있었다.
-묘하구나.
비록 그 수준이 현대의 문명에 비하면 건축이라 하기도 민망하지만 어찌되었든 집과 창고라 이름 붙일 만한 그것들의 '양식'이 심상세계에서 장호가 그리 말하도록 만들었다.
도진이 물었다.
-어떤 부분이 말씀이십니까?
-이것은 너의 세상보다는 나의 세상에 가깝다.
-음…….
그것은 간결하지만 크나큰 의미가 있는 말이었다.
얼기설기 엮었다고 해야 할 이 건축물들의 양식이, 현대보다는 무림에 가깝다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제아무리 그 수준이 조잡하여도 세부적인 부분에서, 본능적인 부분에서 인간은 '자신이 포함된 세계'를 드러내기 마련이다.
그러니까.
지금 이 현실과 동떨어진 듯한 곳의 건물들은 현대보다는 무림에 가깝다는 말이었다.
가끔씩, 다큐멘터리에서는 현대 문명을 거부하고 자연 속에서 전통을 지키며 살아가는 부족을 조명하곤 했다.
어쩌면.
천외천을 통하여 그런 식으로 세상에 전혀 알려지지 않은 채 '무림의 전통'을 유지해 온 이들과 닿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도진이 원하던 과거의 무림에 대한 정보와 이어질 확률이었으며 동시에.
"……."
같은 생각에 이르러 어깨와 눈동자가 파르르 떨리는 전서린의 과거와 이어질 확률이기도 했다.
'혹은.'
달갑지 않은 가능성이지만 천외천 또한, 무형독과 이어져 있을 가능성도 있었다.
도진은 도진대로 전서린은 전서린대로 그렇게 여러가지 생각과 가능성을 머릿속에서 정리하는 사이 짧지 않은 시간이 흘렀고.
'음.'
몰아치는 시린 눈보라보다 날카롭고 거대한 존재감이 가까워졌다.
-호오. 제법이구나.
심상세계에서 드물게도 위지혁이 감탄했다.
그만큼, 믿기 힘든 경지가 그 존재감에 묻어나고 있었다.
"기다리게 했군."
안에 들어서는 건 노인이었다.
새하얗게 머리가 바랬고 이 혹한에도 얇은 무복만을 입어 드러난 피부 또한 탄력을 잃었다.
허나. 그럼에도 노인에게서는 세월마저 결코 범접할 수 없는 벼려지고 또 벼려진 무(武)가 더 크게 느껴졌다.
도진이 신안(神眼)으로도 다 꿰뚫어 볼 수 없을 만큼 단단하고 날카로우며 거대한 무가.
과연 천외천이라고 해야 할까.
천마신공의 6성에 도달하며 도진은 이 시대의 무인들이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영역을 걷고 있었다.
허공답보, 호신강기, 탄지공.
그런 단순한 기술의 영역만이 아니라 순수한 무의 이치를 논하는 영역에서의 격차가 그만큼이나 컸다.
한데 오늘.
처음으로 그 격차가 지극히 얇은 무인을 대면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
노인 또한 도진을 가늠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서로가 서로를 알아 보았고 도진은 감탄하였으며 노인은 놀라워 했다.
그 거대한 무로도 감출 수 없는 놀람이 노인에게서 묻어나고 있었다.
"…대단한 경지로군."
"어르신도요."
서로가 서로를 인정하고 노인이 자리에 앉았다.
"놀랍네요. 이런 곳에 이런 곳이 있었다니."
도진이 먼저 말했고 노인은 담담한 목소리로 답했다.
"속세를 등지고 무를 좇는 이들을 위한 곳이지."
액면 그대로 속세를 버리고 무를 추구하는 이들을 위해 만들어진 곳이란 뜻이었다.
전기도 수도도 가스도 없고 그들을 질투하는 이들도 없다.
오롯이 무에 집중할 수 있는 장소로써 이곳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곳에 오기 전 동지 중 한 명을 참했다지."
이번엔 노인이 먼저 말했다.
참(斬)했다. 그러니까 베었다는 말이었고 도진 또한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무를 거두었습니다."
단전을 파괴함으로써 그가 이룩했던 무를 거두어들였다.
"꼭, 그리하여야만 했나?"
도진은 그 물음에 일말의 유예도 두지 않고 긍정했다.
"네. 제 눈앞에서 옳지 않은 일을 하였고 자식의 해서는 안 될 수많은 해악을 방관한 자였으니 망설일 이유가 없었습니다."
"…자네에게, 그럴 자격이 있는가?"
"천마신교의 교리를 관통하는 핵심입니다. 무심한 하늘을 대신하여 인간을 돌보기 위하여 힘을 행사한다. 저는 누구보다 그 교리를 분명하게 이행해야 할 천마신교의 교주로서, 해야 한다 생각한 일을 했을 뿐입니다."
개인이 개인을 징치할 자격이 있는가.
답이 나오지 않을 문제였다.
때문에 노인은 그에 관하여 더 말하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끄덕이고서 오늘 만남의 목적으로 화제를 옮겼다.
"자네도 알겠지. 하늘 밖에 오른 건, 그제서야 그 밖을 목적할 수 있는 자격을 얻은 것이라는 걸."
"네."
"천외천이 자네가 함께 하길 바라는 건 그 하늘 밖의 하늘을 목적함에 있어 서로에게 도움이 될 수 있기 때문이야."
아득한 그 길을 홀로 나아가는 건 어렵다.
그러니까 동행자를 원하는 것이었고 그렇게 모인 이들의 집단이 천외천이라고 그는 말하는 것이었다.
"그 길을 함께 가지 않겠나?"
도진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허나 부정적인 것은 아니었다.
반대로 도진은 천외천의 제안을 제법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경계를 넘어선 무인끼리의 대련은 특히나 그들에게 있어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좋은 양분이 되어 주지만 이 현대에서는 성립하기가 어려웠다.
그들 대부분이, 가벼운 대련조차 쉽게 할 수 없을 만큼 많은 것들을 사회에서 쥐고 있기 때문이다.
허나 천외천은 다르다.
속세를 벗어나 무를, 하늘 밖의 하늘을 추구하는 그들은 대련을 꺼리지 않고 오히려 반기는 것이다.
각자의 이치를 품고 경계를 넘어선 그들을 경험할 수 있는 귀중한 기회였다.
그럼에도 즉답하지 않은 건, 걸리는 것들이 몇 가지 있었기 때문이다.
"대답하기에 앞서, 원하는 것이 있는데 말씀드려도 될까요?"
"무엇이지?"
"천외천이라면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고대 무림에 관한 지식과 자료들이 있을 것 같습니다. 맞습니까?"
"…맞아."
"그 지식과 정보를 얻고 싶습니다. 무공에 대한 부분이 아니라 역사 등의 부분을요."
"그것은, 자네 곁에 있는 하오문의 문도를 위해서인가?"
노인의 시선이 도진의 옆으로 옮겨갔고 전서린은 기세를 담지 않았음에도 마주하기 힘든 시선에 움찔했다.
"그런 의도가 아예 없지는 않네요. 다만 그것보다 더, 천마신교와 관련한 정보를 원하는 것이 큽니다. 이쪽이 진짜 목적이죠."
"거래를 하자는 것처럼 들리는군. 자료를 주면 천외천에 이름을 올리겠다."
도진은 옅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천외천의 무인들과의 대련은 저에게 있어서도 아주 귀중한 경험이자 발판이 될 겁니다. 다만 그것과 별개로, 천외천에서 저에게 줄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을 바란다는 거죠."
"무얼 말하고자 하는지 알겠네."
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짚고 넘어가고 싶군. 자네의 목적은 알겠으나 하오문의 문도는 어째서 고대 무림의 지식을 원하는 거지?"
전서린이 답했다.
"저의, 과거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
노인의 눈에 일순 빛이 스쳐감을, 도진은 놓치지 않았다.
그리고 전서린을 흘끔 보았다.
이것은 계획에 없던 대답이기 때문이다.
그녀에 관한 민감한 정보를 사실대로 말할 거라곤 예상치도 못했다.
"그랬군. 그래서 우리 천외천의 뒤를 캐려고 했다는 거군."
이해했다는 듯 노인은 고개를 주억였다.
허나 다음 순간.
전서린을 보는 시선에 서늘함이 담겼다.
"……!"
전서린의 호흡이 터억, 막혔다.
"자네를 함께 보자고 한 이유를, 똑똑한 자네라면 잘 알고 있겠지."
"……예."
억지로, 피가 날 정도로 주먹을 꽉 쥐고서 전서린이 목소리를 짜내어 답했다.
"우리가 자네를 방치한 건 작은 소리를 없애자고 더 큰 소리를 내는 우를 범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야."
전서린은 천외천을 조사함에 있어 그 아래 문도들이 결코 천외천을 인식할 수 없는 형태로 일을 조각내어 진행했다.
조사 과정에서 천외천의 이름이 퍼져 나갈 일이 없도록 한 것이다.
"하지만 자네는 우리가 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어리석은 행동을 하고 말았지. 설령 그것이 천외천이 초대장을 보낼 이라 해도 해서는 안 될 행동이었어."
"인간으로서 한 번은 범할 수 있는 우(愚)라 생각하겠네. 천운으로 감당할 수 있는 범위 내의 우. 하지만 두 번은 없을 거야."
"명심, 하겠습니다."
전서린이 필사적으로 대답하고서야 노인의 눈에 실렸던 서늘한 기세가 흩어졌다.
"이 뒤는, 다른 이들과의 논의 후 다시 만나 하도록 하지. 사흘을 넘지는 않을 게야."
"그러도록 하죠."
노인은 휑하니 떠나 버렸다.
그리고 예의 온몸을 꽁꽁 싸맨 무인이 나타나 둘을 안내했다.
-마음에 드는 곳 아무 곳에나 머물도록 하시오. 식사를 포함해 필요한 것들은 곧 제공될 것이오.
온통 텅 빈 건물이었고 정해진 주인이 없었기에 원하는 곳 어디든 머물 수 있었다.
도진은 전서린과 함께 적당한 건물 안에 들어섰다.
그리고 소리를 내지 않은 채, 내공조차 쓰지 않고 입모양만으로 말했다.
-느꼈나요?
-네.
도진이 옅게, 그러나 날카롭게 웃었다.
노인은.
온통 거짓투성이였다.